창암 이삼만(1770~1847) 씀, 조선 후기, 종이에 먹,
전북 고창(高敞) 군립미술관 무초관(無初館), 2016년 추사(秋史) 주련(柱聯)과 진기풍콜렉션
서예(書藝) 대가전(大家展).
진기풍 컬렉션이란 전북지역에서 존경받는 언론인이자 서예 애호가로 꼽히는 무초(無初)
진기풍(陳錤豊 1926~2017) 선생이 평생 수집한 것으로 2011년까지 고창군에 기증한 작품들을
가리킨다. 이번 전시 장르는 서양화, 한국화, 서예, 도자기, 현판 등 70여점에 달하며 소치
허련(小癡 許鍊),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남농 허건(南農 許楗), 해강 김규진(海剛 金圭鎭), 취운(翠雲) 진학종(陳學鐘) 특히 서양화가 진환(陳瓛) 등 서예ㆍ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명품들로 구성돼 있다.
진기풍선생은 1926년 전북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1945년 전북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
주필· 사장, 서해방송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반세기동안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해온 그는 가람 이병기 선생 시비건립,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추념탑 건립을 비롯해 평생을 모으고 아껴온 서화작품을 고향인 고창 판소리박물관에 기증해
무초 회향미술관을 만들어내는 등 문화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백양전주공장 사장을 지냈으며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장, KBS전주방송총국 시청자위원회
위원장 등 사회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해왔던 그는 1997년 전북생명 상임고문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암서예학술진흥재단 이사장과 전북애향운동본부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남북한 당국간 대화추진 1천만 서명운동 전개·조선왕조실록 보전 기념비 추진·전북애향장학숙 건립 추진·용담댐 건설촉구운동을 비롯해 앞장서온 지역 현안 사업 추진의 궤적도 화려
하다.
KBS전주방송총국과 현대자동차가 공동으로 제정한 ‘전북의 어른상’ 네 번째 수상자이기도
하다.
창암 이삼만은 전북 정읍시 부전면 부무골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 시중공파(문정공석가장파 승길의 17대손)으로 자는 윤원(允遠) 또는 장원(長遠),
호는 창암 또는 완산(完山), 강재(强齋·剛齋)이다.
어느 날 중국 하북성 석가장(石家莊) 근처에 있는 창암산이 떠올랐다한다.
창암산은 뾰죽뾰죽한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유명하며 그 곳에는 석천(石泉)이
있는데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한다. 창암산의 넘치는 기세와 석천의 마르지 않는
필흥(筆興)이라 하여 창암이라 호를 지었다한다.
첫 이름은 규환(奎煥)이었으나 학문, 교육, 저술의 3가지가 모두 늦으니 스스로 삼만(三晩)
이라 개명하였다.
창암은 호남 제일의 대서예가로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눌인(訥人) 조광진
(曺匡振 1772~1840)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꼽힌다.
곤궁한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글씨에만 몰두한 창암은 하루 1000자의 글씨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병중에 있을 때도 실천하여 여러 개의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났다고 전한다.
창암은 옛 선비들의 글을 임서(臨書)하였고 그 결과 독특한 ‘창암체’를 이룰 수 있었다.
창암은 원교 이광사에게서 글씨를 배운 적은 없으나 원교의 필첩(筆帖)을 보고 글씨를 탐구
하면서 본받고 흠모(欽慕)하게 되었고, 그의 서풍은 옥동(玉洞) 이서(1662~1723),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계승하고 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창암의 서예관은 한마디로 ‘일운무적 득필천연(逸韻無跡 得筆天然)=빼어난
소리는 그 흔적이 없고 뛰어난 글씨는 천연 그대로이다‘라고 할 수 있다한다.
다시 말해 서법이란 살아 움직임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일정하게
정해진 형태가 없는 뜻으로 파악하여 ‘천연의 묘(妙)’를 구함에 있다.
그래서 그는 글씨가 기울어지고 거칠고 왕성한 것이 가장 자연스러우며 살아있는 글씨의
조형이라고 인식하였다.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라고도 일컬어지는 그의 행·초서는 독창적인 서풍으로 한국의
자연과 어울리는 고유색을 내함(內含)하고 있다. ‘유수체’라는 이름으로 일가를 이룬
‘창암체(蒼巖體)’는 가슴 속 깊이 들어 있는 한(恨)을 뿜어내는 남도창(南道唱)과도 같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창암은 50세 전후 전주 교동으로 옮겨 후학양성과 학문, 서예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만년에는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 이거(移居)하여 평생 청빈하게 살다 78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여 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하척마을 선산 유택에 그의 무덤이 있다.
掛花陰下坐談空(괘화음하좌담공) 怳在淸虛玉付中(황재청허옥부중)
=꽃이 늘어진 그늘 아래 좌담(座談)은 공허하고 어슴푸레 맑고 허허로운 옥부(玉付)중에
海月滿庭秋一色(해월만정추일색) 天香和露滴西風(천향화로적서풍)
=바다에 뜬 달빛이 뜰 가득 가을 색을 채우고 하늘 향기 머금은 맑은 이슬 서풍에 떨어진다.
勞歌一曲解行舟(로가일곡해행주) 紅葉靑山水自流(홍엽청산수자류)
=배 젓는 소리 한 곡조에 배는 떠나가고 단풍든 청산에 물은 절로 흐르네.
日暮酒醒人已遠(일모주성인이원) 滿天風雨下西樓(만천풍우하서루)
=해 저물어 술 깨니 인적(人跡)은 이미 멀어지고 하늘가득 풍우가 일어 서쪽 누각에 드네.
晩醉扶筇過前村(만취부공과전촌) 數家殘雪擁籬根(수가잔설옹리근)
=늦도록 취해 대지팡이 의지해 마을 앞을 지나니 몇몇 집 울타리에 잔설이 남아 있네.
風前有胎梅千點(풍전유태매천점) 溪上無人月一痕(계상무인월일흔)
=봄바람에 매화꽃 천개의 꽃망울 올라오고 시냇가엔 인적 없이 달빛 자취뿐,
忍把浮名賣却閑(인파부명매각한) 門前流水對靑山(문전유수대청산)
=뜬 구름 같은 명성을 다리품의 한가로움으로 맞바꾸니 문 앞에 흐르는 물 청산을 대하였구나.
靑山不語人無事(청산불어인무사) 一任風花自往還(일임풍화자왕환)
=청산은 말이 없고 사람들은 근심 없으니 바람과 꽃만이 스스로 가고 올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