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
―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송정자의 「하심주」(Ⅰ)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 객좌교수
"삶은 익숙함과의 일치 속에서가 아니라, 그 일치가 흔들리는 순간 다시 시작된다."
— 프랑수아 줄리앙
Ⅰ. 로그인
풍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다. 문학은 오래된 것을 보존하는 예술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현재로 되살리는 예술이다. 역사는 과거를 기록하지만 문학은 과거를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수필은 단순한 체험의 기록이나 교양의 전달을 넘어, 지나간 시간과 현재의 삶을 연결하는 가장 인간적인 문학 장르라 할 수 있다. 좋은 수필은 독자로 하여금 "그때 그랬다."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다."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든다.
송정자는 기존의 수필에 대한 인식을 극복하고 본격수필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작가다. 문학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진신을 재구성하는 작가, 신춘문예 출신, 제3회 권대근문학상 수상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바로 이러한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겉으로 보면 이 작품은 절기와 다산 정약용의 풍류, 연잎의 효능, 복날 삼계탕, 친구와의 추억을 엮은 생활수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생활정보나 역사적 교양을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풍류를 오늘의 삶 속으로 불러내는 '감각의 문학'임을 알 수 있다.
이 수필은 정독수필반에서 합평을 하면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 수필의 중심에는 '하심주(荷心酒)'가 있다. 연잎을 타고 줄기 속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받아 마시는 선비들의 풍류는 단순한 음주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의 태도이며, 절기를 따라 살아가는 시간의 철학이고, 벗과 더불어 세계를 음미하는 공동체의 미학이다. 작가는 이러한 풍류를 역사 속 이야기로 남겨두지 않는다. 친구가 건네준 연잎 한 장과 삼계탕을 끓이는 자신의 부엌으로 가져와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과거의 풍류가 현재의 식탁으로 이어지는 순간, 문학은 시간의 간극을 넘어선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하는 철학이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Dé-coïncidence)'이다. 줄리앙은 인간이 세계와 완전히 일치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익숙한 생활방식, 반복되는 사고, 굳어진 감각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합치(coïncidence)'는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삶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탈합치는 바로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늘 보던 풍경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고, 평범한 일상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 삶은 다시 생성된다.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인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송정자의 「하심주」는 이러한 탈합치의 구조를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한다. 현대인의 복날은 대개 삼계탕을 먹고 더위를 견디는 날이다. 그러나 작가는 복날을 이야기하면서 곧장 다산의 죽란시사와 하심주를 불러낸다. 독자는 익숙한 복날의 풍경에서 벗어나 조선 선비들의 연못가로 옮겨 간다. 절기는 더 이상 달력 속 날짜가 아니라 풍류를 실천하는 시간이 되고, 복달임은 단순한 보양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문화적 의식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감각의 이동이야말로 줄리앙이 말하는 탈합치의 문학적 구현이다.
그러나 「하심주」의 성취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독자의 감각을 머물게 하는 공간들이 있다. 죽란, 서련지, 연밭, 친구의 집, 부엌 등은 단순한 사건의 배경이 아니다. 각각의 공간은 기억을 품고, 상상력을 길러내며, 존재를 성찰하게 만드는 시적 장소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떠올리게 된다. 바슐라르는 집, 다락방, 서랍, 물, 숲과 같은 공간을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상상력이 거주하는 장소로 이해하였다. 공간은 삶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삶을 생성하는 존재의 터전이다. 인간은 공간 안에서 꿈꾸고, 기억하며, 자기 존재를 형성한다.
나름의 고유한 미적 향기를 담고 있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에서 연못은 단순히 연꽃이 피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풍류가 탄생하는 장소이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귀를 기울이는 공간이다. 부엌 역시 단순한 조리 공간이 아니라 친구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기억의 장소가 된다. 연잎은 삼계탕의 향을 더하는 식재료가 아니라 우정을 품은 상징으로 변한다. 이처럼 공간과 사물이 현실적 기능을 넘어 시적 존재로 변모하는 과정은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이 설명하는 상상력의 본질과 깊이 맞닿아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역사와 체험을 절묘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수필이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데 머물거나, 반대로 개인적 체험만을 나열하는 한계를 보인다. 그러나 「하심주」는 다산의 풍류를 자신의 경험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역사적 사실은 교양이 아니라 체험의 배경이 되고, 체험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문화적 기억으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조선 선비들의 연못과 현대인의 식탁을 하나의 시간으로 경험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는 병렬되지 않고 서로 스며든다. 이 작품이 좋은 수필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좋은 수필은 사실을 많이 알려주는 글이 아니라,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글이다. 독자가 작품을 덮은 뒤에도 연잎 하나를 보며 친구를 떠올리고, 절기가 바뀔 때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어진다면, 그 문학은 이미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획득한 것이다.
따라서 「하심주」는 연잎의 효능을 말하는 글도, 다산의 풍류를 소개하는 글도 아니다. 그것은 잊혀가는 풍류를 오늘의 삶으로 다시 불러오는 감각의 문학이며, 과거를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다시 피워내는 존재론적 수필이다. 이 평론은 이러한 관점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을 방법론으로 삼아 독자를 깊은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스스로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를 분석하고, 왜 이 작품이 현대수필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는지를 현미경을 들고 살펴보고자 한다.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
-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송정자의 「하심주」(Ⅱ)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 객좌교수
Ⅱ. 탈합치와 풍류의 존재론
- 절기는 어떻게 존재의 감각을 깨우는가
프랑수아 줄리앙은 『탈합치』에서 인간은 익숙한 세계와 지나치게 일치할 때 더 이상 새로운 삶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합치(coïncidence)'라고 부른다. 합치는 안정과 효율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는 능력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삶은 기존의 질서에서 조금 비켜서는 순간, 즉 '탈합치(Dé-coïncidence)'의 계기를 통해 다시 생성된다. 문학은 바로 이러한 탈합치의 예술이다. 독자가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를 낯설게 보게 만들고,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일깨우기 때문이다.
수필 속에 참다운 자기 생활의 모습이 드러나는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처음부터 이러한 탈합치의 구조를 치밀하게 준비한다. "입하가 되면 감자의 환갑날이라 하는 하지에 이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감자알이 더 이상 굵어지지 않고 줄기가 시들어 얼른 캐주어야 한다는 소리다." 첫 문장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감자의 생장과 절기의 관계를 말하는 생활의 지혜이다. 그러나 바로 이 평범함이 중요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기는 달력 속의 이름일 뿐이다. 하지와 대서는 기상예보에서나 스쳐 지나가는 말이 되었다. 작가는 잊혀진 절기를 다시 몸의 시간으로 불러온다. 절기는 자연의 시간이자 인간의 생활 리듬이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줄리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이미 탈합치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독자는 절기를 정보로 알고 있었지만, 작품은 그것을 살아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익숙한 달력이 갑자기 생명의 시간으로 변하는 순간, 세계는 새롭게 열린다. 이어지는 문장도 같은 효과를 낳는다. "삼복지간 땡볕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단순한 민속적 표현이 아니다. 더위를 하나의 신체 감각으로 환원한다. 독자는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무더위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줄리앙이 말한 '감각의 회복'이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현대인은 에어컨과 냉방기기 속에서 여름을 소비하지만, 이 작품은 몸이 계절을 받아들이던 시대로 독자를 이끈다. 절기는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하심주」는 자연을 설명하지 않는다. 자연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이 점이 교양수필과 문학수필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이다.
하심주는 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하심주이다. 그러나 작가는 술의 맛이나 제조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잎을 통과시켜 연 줄기 속으로 흘러들게 해서 구멍이 뚫린 연대를 돌려가며 받아 마시는 술이다." 겉으로 보면 하나의 풍속 설명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연잎은 자연이다. 줄기는 생명의 통로이다. 인간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거쳐 온 시간을 마신다. 이 장면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역시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다. 술은 연잎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된다. 줄리앙이 말하는 탈합치는 바로 이러한 관계의 회복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 다시 만나는 순간이다.
풍류는 소비가 아니라 기다림이다. 오늘날 여가문화의 특징은 빠른 소비이다. 관광은 인증사진으로 끝나고, 맛집은 후기 작성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하심주」 속 풍류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다산의 벗들이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새벽부터 연못으로 향했다고 적는다. "연꽃이 필 때 그 개화성을 듣고자 새벽부터 길을 나서던 풍류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대표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핵심은 '듣고자'이다. 꽃은 피우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존재이다. 인간 역시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다리는 존재가 된다. 기다림은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 그리고 느려진 시간 속에서 감각은 다시 살아난다. 줄리앙은 새로운 가능성은 효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백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새벽의 침묵, 꽃망울, 기다리는 사람, 이 세 요소가 만나면서 풍류는 하나의 철학이 된다.
'청개화성'은 탈합치의 절정이다. 이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단연 청개화성이다. "꽃망울이 어른 주먹보다 컸으니 꽃잎 터지는 소리가 선명하고도 청량했을까."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사실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독자는 이 문장을 읽으며 마치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왜일까. 문학은 사실을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은 감각을 창조한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뛰어나다. "한 방울의 아침이슬이 또르르 구르는 소리." 꽃은 소리가 없다. 그러나 이슬에는 소리가 있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는 이미지로 바꾸고, 보이는 이미지를 다시 청각으로 전환한다. 이처럼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공감각이라 한다. 공감각은 독자의 상상력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줄리앙이 말하는 탈합치는 바로 이러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를 듣는 방식이 달라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이 탄생한다.
과거는 회상이 아니라 현재가 된다. 많은 역사수필은 과거를 설명하는 데 그친다.그러나 「하심주」는 과거를 현재 속에서 다시 살게 한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친구에게 연잎을 받아오는 대목이다. 다산의 연잎은 곧 친구의 연잎이 된다. 죽란시사의 풍류는 곧 삼계탕을 끓이는 부엌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이 점에서 「하심주」는 역사수필도 아니고 생활수필도 아니다.
문화의 기억을 현재의 삶으로 다시 생성하는 존재론적 수필이다. 줄리앙은 과거를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다시 활성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송정자의 수필은 바로 그 철학을 문학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현대인의 비정한 일면을 비판하면서 우정과 사랑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의 가장 큰 성취는 설명을 체험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독자는 하심주를 배운 것이 아니라 함께 마신다. 연꽃을 본 것이 아니라 피는 소리를 기다린다. 절기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낀다. 좋은 문학은 독자에게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다. 감각을 회복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하심주」는 줄리앙이 말한 탈합치의 문학이라 부를 만하다. 이 작품은 잊혀진 풍류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풍류를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실천 가능한 삶의 태도로 전환한다. 그것이 이 수필의 가장 깊은 문학적 성취이다.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
-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송정자의 「하심주」(Ⅲ)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 객좌교수
Ⅲ. 공간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하심주」
프랑수아 줄리앙이 시간과 감각의 철학자라면,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과 상상력의 철학자이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인간은 공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집, 다락방, 서랍, 물, 숲, 둥지와 같은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력이 머무는 장소이다. 그는 "거주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며, 기억한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것이다."라는 관점에서 공간을 존재의 근원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바슐라르의 공간론으로 보면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존재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이 수필에는 단 한 곳의 공간도 단순한 배경으로 머물지 않는다. 죽란(竹欄), 서련지, 연밭, 법천사지, 친구의 집, 그리고 부엌은 각각 기억을 불러내고 시간을 품으며 삶을 성찰하게 하는 시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 공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작품은 단순한 체험담을 넘어 하나의 존재론적 풍경을 완성한다.
1. 죽란은 울타리가 아니라 마음의 경계이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공간은 다산의 죽란이다. "다산의 집 마당 돌담에 대나무로 만든 담장, 죽란이 있었다." 이 문장은 공간을 설명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산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작가는 이어서 죽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행여 오가는 그들에 의해 꽃이 다칠까 대나무 울타리를 쳤다."이 대목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죽란은 꽃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가 아니라 꽃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의 공간이다. 꽃을 지키는 일은 자연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바슐라르는 공간은 인간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죽란은 단순한 담장이 아니라 다산의 마음이 외형화된 공간이다. 꽃을 보호하려는 그의 마음이 울타리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 죽란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윤리적 공간이다. 이러한 해석은 작품 후반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친구를 떠올리는 화자의 마음 역시 상대를 소유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배려의 감정이다. 죽란의 배려는 결국 우정의 윤리로 이어진다.
2. 서련지는 자연이 아니라 상상력의 무대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은 단연 서련지이다. "여름이면 동틀 무렵 서련지에 조각배를 띄우고 잘 여문 연꽃잎이 마침내 '북' 하고 터지는 소리를 듣는 청개화성의 풍류를 즐겼다."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꽃이 피는 소리를 어떻게 듣는단 말인가. 그러나 바슐라르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의 여부가 아니라 상상력이 공간을 어떻게 변형하는가이다. 서련지는 연꽃이 피는 연못이 아니다. 그곳은 기다림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꽃은 피기 위해 존재하고, 사람은 기다리기 위해 그곳에 간다. 연못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응시하는 공간이 된다. 이처럼 공간은 기능을 잃는 대신 시성을 획득한다.
특히 다음 대목은 공간을 시적으로 전환하는 뛰어난 문장이다. "군무를 하듯 일렁거리는 연잎들 사이로 살그머니 노를 저어 길을 내고, 죽란시사 벗들은 연꽃 틈 사이에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숨을 죽였으리라." 이 문장은 서술이라기보다 한 폭의 동양화에 가깝다. '노를 저어 길을 낸다'는 표현은 물리적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의 길을 연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숨을 죽인다'는 동작은 독자의 감각을 하나씩 열어 간다. 시각보다 청각이, 행동보다 침묵이 강조된다. 공간은 점차 외부의 풍경에서 내면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공간을 '꿈꾸는 공간'이라 불렀다. 인간은 그 공간 안에서 현실을 잊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깊이 경험한다.
3. 친구의 연밭은 기억이 자라는 공간이다
작품의 시선은 다산의 연못에서 친구의 연밭으로 옮겨간다. "원주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을 때다. 함께 법천사지에 다녀오는 길에 친구가 연 밭에서 연잎을 몇 장 따주었다." 이 대목은 작품의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역사가 현재로 이동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산이 연꽃을 감상하던 공간은 친구가 연잎을 따주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풍류는 현재의 우정으로 변한다. 특히 작가는 연잎을 가져오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차곡차곡 한 장씩 신문지에 켜켜이 끼워 냉동실에 보관했다." '차곡차곡', '켜켜이'라는 부사는 단순한 동작을 넘어 마음의 결을 보여준다. 연잎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마음을 보관하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사물은 기억을 저장한다고 말하였다. 연잎은 시간이 지나도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우정을 간직한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냉동실은 음식 보관 장소가 아니라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로 변모한다.
4. 부엌은 가장 일상적인 시적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 가운데 하나는 부엌이다. 보통 부엌은 노동의 공간이다. 그러나 송정자는 부엌을 가장 따뜻한 시적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마늘을 넉넉히 집어 밀양 대추와 은행, 황기, 인삼을 차례대로 넣고 마지막에 연잎 한 장을 솥에 가득 덮어 푹 고았다." 문장을 자세히 보면 서두름이 없다. 재료 하나하나를 천천히 넣는다. 이 문장의 리듬은 요리의 리듬인 동시에 마음의 리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갈변한 연잎을 걷어낸 뽀얀 국물은 거짓말처럼 말간데다 닭 비린내까지 말끔하게 잡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요리의 효능을 말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정화(淨化)의 이미지가 강하게 작동한다. 연잎은 닭의 잡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탁함을 씻어내는 상징이 된다. 여기서 부엌은 단순한 조리 공간이 아니다. 과거의 풍류가 현재의 삶으로 변환되는 연금술의 공간이다. 다산의 하심주는 이제 삼계탕의 향기로 다시 태어난다. 공간은 역사를 생활로 번역하는 장소가 된다.
5. 공간의 연결이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수필에 그의 작가적 재능과 인격과 성품이 한껏 내장되어 있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의 가장 큰 미학적 특징은 공간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죽란은 서련지로 이어지고, 서련지는 친구의 연밭으로 이어지며, 연밭은 부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부엌은 다시 친구를 떠올리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간의 흐름은 단순한 배경의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이다. 각각의 공간은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거대한 시적 세계를 형성한다. 바슐라르는 집의 한 방이 다른 방과 연결되듯이 인간의 기억도 서로 연결된다고 하였다. 「하심주」 역시 하나의 공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공간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우정을 낳으며, 우정은 풍류를 낳는다. 결국 작품 전체는 하나의 '거주하는 세계'를 구축한다.
인본적 태도를 지양하면서 더불어 사는 자세를 가져 누구보다도 가끼이에 많은 지인을 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가 뛰어난 이유는 공간을 설명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는 데 있다. 독자는 죽란을 보며 배려를 생각하고, 서련지에서 기다림을 배우며, 연밭에서 우정을 만나고, 부엌에서 풍류가 일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체험한다. 이처럼 공간이 사건의 배경이 아니라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때 수필은 단순한 생활의 기록을 넘어선다.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작품의 공간들은 모두 '상상력이 거주하는 집'이다. 그 안에서 독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음미하며, 미래의 삶을 꿈꾸게 된다. 이것이 「하심주」가 지닌 공간시학의 핵심이며, 이 작품을 수준 높은 문학으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미학적 성취이다.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
-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송정자의 「하심주」(Ⅳ)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 객좌교수
Ⅳ. 연잎이라는 존재
- 사물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현대수필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문학성이 결정된다. 같은 연잎을 보더라도 그것을 식물학의 대상으로 보는가, 음식의 재료로 보는가, 아니면 인간 존재를 비추는 상징으로 보는가에 따라 작품의 수준은 달라진다. 뛰어난 수필은 사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물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신유물론적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물은 단연 연잎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잎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연잎은 결코 하나의 기능으로 머물지 않는다. 술잔이 되고, 풍류가 되며, 음식이 되고, 친구가 되고, 마침내 삶의 철학이 된다. 이러한 다층적 의미망은 이 작품을 단순한 생활수필이 아니라 상징적 수필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1. 연잎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의미의 중심축이다
작품 속 연잎의 변화를 따라가 보면 흥미로운 구조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하심주의 술잔이다. "연잎을 둥근 쟁반처럼 오목하게 둘러싸서 술을 따른 후…." 여기서 연잎은 자연이 인간을 위해 내어준 그릇이다. 이어 연잎은 술이 지나가는 통로가 된다. "연잎 줄기 속을 송곳으로 찔러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한다." 이번에는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후반부에서는 친구가 건네준 선물이 된다. "친구가 연밭에서 연잎을 몇 장 따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삶의 철학으로 승화된다. "진흙 속에서도 결코 흙을 묻히지 않는 절대적인 시크릿이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계속 의미를 확장하는 구조를 문학에서는 '상징의 성장'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연잎을 설명하지 않는다. 연잎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도록 한다. 이 점이 작품의 가장 큰 미학적 성취이다.
2. 사물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바슐라르는 인간은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하심주」에서도 연잎은 화자의 내면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대표적인 문장이 있다. "연잎은 발수성이 좋아 조금만 흔들어도 빗방울이 미끄럼 타듯 흘러내린다." 이 문장은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그것을 문학으로 바꾼다. "진흙 속에서도 결코 흙을 묻히지 않는 절대적인 시크릿이다." 이 순간 연잎은 식물이 아니다. 삶의 윤리가 된다. 세속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존재의 태도가 된다. 바슐라르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상상력이 머무는 장소이다. 연잎은 현실의 식물이 아니라 인간이 닮고 싶은 이상적 존재가 된다. 좋은 문학은 사물에 의미를 덧씌우지 않는다. 사물 안에 잠들어 있던 의미를 발견한다. 송정자의 시선이 바로 그러하다.
3. 연잎은 우정을 저장하는 기억의 매체이다
이 작품에서 연잎은 친구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이다. 건강과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문학의 임무를 다 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는 이렇게 쓴다. "신문지에 켜켜이 끼워 냉동실에 보관했다." 이 문장은 매우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작품 전체를 바꾸는 문장이다. 왜냐하면 보관되는 것은 연잎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관되는 것은 친구의 마음이다. 냉동실 속 연잎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한 시간도 함께 보존된다. 바슐라르는 서랍 하나에도 기억이 살고 있다고 했다. 송정자의 수필에서는 냉동실이 바로 그런 공간이 된다. 연잎은 기억을 저장하는 사물이 된다. 따라서 독자는 연잎을 볼 때마다 친구를 떠올리게 된다. 사물이 감정을 저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문학이 된다.
4. 하심주는 연잎을 통해 완성된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하심주」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주인공은 술이 아니다. 연잎이다. 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연잎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심주가 될 수 없다. 술은 자연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줄리앙은 인간은 자연과 다시 접속할 때 새로운 삶을 발견한다고 하였다. 하심주는 바로 그러한 철학을 상징한다. 술은 인간의 문화이다. 연잎은 자연이다. 문화는 자연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풍류가 된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는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존재론적 원리이다.
5. 연잎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의 매개체이다
연잎은 다산의 시대에도 있었다. 오늘날 친구의 연밭에도 있다. 과거의 연잎과 현재의 연잎은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것은 인간이다. 이 때문에 연잎은 시간을 잇는 존재가 된다. 다산은 연잎으로 술을 마셨다. 화자는 연잎으로 삼계탕을 끓인다. 행위는 다르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하려는 마음은 같다. 줄리앙은 전통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활성화될 때 살아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 점에서 연잎은 탈합치의 상징이다. 과거의 풍류가 현재의 생활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역사는 재현되지 않는다. 새롭게 생성된다.
6. 물의 상상력과 연잎의 시학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은 생명의 원초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원소라고 하였다. 물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기억과 정화, 생성과 순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하심주」에서 연잎은 언제나 물과 함께 존재한다. 술은 연잎을 타고 흐른다. 빗방울은 연잎 위를 미끄러진다. 연꽃은 물 위에서 피어난다. 삼계탕의 국물 역시 물을 통해 완성된다. 이러한 물의 이미지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모두가 '맑음'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통합된다. 특히 다음 문장은 작품 전체의 상징성을 집약한다. "뽀얀 국물은 거짓말처럼 말간데다 닭 비린내까지 말끔하게 잡아주었다." 표면적으로는 요리의 결과를 묘사한 문장이다. 그러나 '말갛다'는 표현은 단순한 국물의 상태를 넘어 마음의 상태를 암시한다. 연잎은 음식만 맑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바슐라르가 말한 물의 정화 이미지가 생활 속 체험과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순간이다.
「하심주」의 가장 뛰어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사물을 상징으로 성장시키는 능력이다. 많은 생활수필은 사물을 체험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연잎은 체험을 넘어 의미를 생산하는 중심축이 된다. 처음에는 자연의 일부였던 연잎이 풍류의 도구가 되고, 우정의 매개가 되며, 삶의 윤리와 시간의 상징으로 확장된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체계를 형성할 때 수필은 단순한 체험담을 넘어 예술적 완성도를 획득한다. 결국 「하심주」는 연잎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다. 연잎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관계 맺고, 기억을 간직하며, 삶의 품격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상징의 확장과 의미의 심화는 이 수필을 수준 높은 문학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
―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송정자의 「하심주」(Ⅴ)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 객좌교수
Ⅴ. 청개화성과 감각의 생성
- 탈합치와 공간시학이 만나는 지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진실하게 살아나가는 것 외에 위대한 것이 없다고 믿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줄리앙의 탈합치가 말하는 감각의 회복과 바슐라르가 말하는 상상력의 공간을 각각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문학적 성취는 두 철학이 따로 존재하는 데 있지 않다. 시간의 철학과 공간의 철학이 하나의 미적 경험으로 융합되는 데 있다. 그 결정적 장면이 바로 '청개화성(聽開花聲)', 곧 꽃이 피는 소리를 듣는 풍류이다. 청개화성은 현실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감각을 공유하는 상상력의 사건이다. 줄리앙의 관점에서는 익숙한 감각을 깨뜨리는 탈합치이며, 바슐라르의 관점에서는 상상력이 현실을 새롭게 거주하게 만드는 공간적 체험이다. 이 두 철학은 「하심주」에서 청개화성을 통해 하나의 미학으로 결합한다.
1.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순간'을 바라보다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다음 대목이다. "연꽃이 필 때 청량한 미성을 내며 꽃잎을 틔우는 탄생의 소리는 또 어떠했을까." 이 문장은 연꽃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다. '꽃'보다 '피는 순간'을 바라보는 문장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문학적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글은 결과를 본다. 꽃이 피었다. 꽃이 아름답다. 꽃이 향기롭다. 그러나 송정자는 결과보다 생성의 순간을 바라본다. 꽃이 피는 그 찰나, 생명이 세계 속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을 응시한다. 줄리앙은 인간은 완성보다 생성 속에서 존재의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존재는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열려 있는 과정이다. 따라서 작가가 들으려는 것은 꽃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의 탄생이다. 이것이 탈합치의 본질이다.
2.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문학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인상적이다. "마치 한 방울의 아침이슬이 또르르 구르는 소리." 현실적으로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독자는 이상하게도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왜일까. 문학은 귀를 통해 듣게 하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듣게 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바로 그러하다. '또르르' 이 하나의 의성어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물방울을 만들고, 물방울은 다시 꽃잎을 흔들며, 마침내 연꽃이 피는 소리로 확장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소리가 문학 속에서는 가장 생생한 소리가 된다. 이것이 시적 언어의 힘이다.
3. 침묵이 가장 큰 소리가 된다
청개화성 장면을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동작이 있다.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숨을 죽였으리라." 이 문장은 매우 뛰어난 리듬을 지닌다.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세 개의 동작은 점차 외부세계를 지워 간다. 보는 행위가 멈춘다. 말하는 행위가 멈춘다. 호흡마저 느려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침묵이다. 바슐라르는 시적 공간은 소음이 사라질 때 열린다고 보았다.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가장 많은 소리를 품고 있는 상태이다. 작가는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꽃이 피는 소리를 듣는다. 따라서 청개화성은 청각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이다. 세상의 소음을 비워야만 생명의 가장 작은 울림이 들린다.
4. 풍류는 소비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먼저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인생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작가, 예술이 생활이고 생활이 예술어어야 한다고 믿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 속 선비들은 꽃을 찍지 않는다. 꽃을 기다린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기다림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을 살아낸다. 줄리앙은 인간이 세계를 대상화할 때 존재는 사라진다고 말한다. 반대로 세계와 함께 머무를 때 비로소 존재가 열린다. 청개화성은 바로 '함께 머무는 시간'이다. 연꽃도 서두르지 않는다. 사람도 재촉하지 않는다. 이 느림의 시간 속에서 풍류는 놀이를 넘어 하나의 삶의 자세가 된다.
5. 과거의 풍류는 현재의 우정으로 이어진다
작품의 후반부는 이러한 철학을 현실로 가져온다. 친구가 연잎을 건네준다. 화자는 그것으로 삼계탕을 끓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연꽃 터지는 소리가 날 때, 연잎에 구멍을 뚫어 하심주 한잔 나누고 싶은 친구를 나는 가졌을까."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하나로 묶는 핵심 문장이다. 겉으로는 친구를 떠올리는 문장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풍류의 본질을 묻는 문장이다. 풍류는 연꽃이 아니다. 술도 아니다. 연잎도 아니다. 함께 나눌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풍류는 완성된다. 줄리앙의 탈합치가 개인의 감각을 회복하는 철학이라면, 송정자의 수필은 그 감각을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한다. 풍류는 혼자 즐기는 취미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다.
좋은 수필은 새로운 지식을 주는 글이 아니다. 잊고 있던 감각을 되돌려주는 글이다. 「하심주」를 읽고 난 독자는 연잎을 다시 보게 된다. 복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친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꽃이 피는 소리가 정말 들릴 것 같은 마음으로 연못 앞에 잠시 서게 된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줄리앙은 이를 '감각의 재개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바슐라르는 '상상력의 거주'라 설명할 것이다. 송정자의 「하심주」는 이 두 철학이 하나의 문학적 경험으로 만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 동안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재를 살아 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가 있다.
「하심주」의 문학적 구조와 미학적 성취
-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으로 읽는 송정자의 「하심주」(Ⅵ)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 객좌교수
Ⅵ. 풍류는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 「하심주」의 문학적 성취와 현대수필의 의의
문학은 정보를 전달하는 글쓰기와 다르다. 정보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문학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독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했던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되었을 때 감동한다. 이 점에서 도피의 문학이 아니라 생활의식의 반영을 노래한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풍속이나 역사, 음식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수필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 작품은 풍류라는 전통문화를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함으로써, 문화적 지식을 존재의 체험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1. 정보는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수필의 문학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에는 적지 않은 역사적 정보가 등장한다.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 하심주의 유래, 청개화성, 절기 문화, 복달임 풍속, 이러한 소재만 놓고 보면 자칫 교양 칼럼이나 역사 에세이에 머물 위험도 있었다. 실제로 현대수필에서 가장 흔한 한계는 자료가 작품을 압도하는 경우이다. 지식은 풍부하지만 정작 독자의 마음속에는 아무 장면도 남지 않는 글이 적지 않다. 그러나 송정자는 이러한 위험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한다. 그 이유는 자료가 작품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송정자는 문학도 생활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한다고 믿는 작가다. 예를 들어 다산의 하심주를 길게 설명한 뒤, 작가는 곧바로 자신의 체험으로 이동한다. 원주에는 그녀 절친의 세컨하우스가 있다. 정독반 다스림서울에서 필드스터디 차눵에서 1박2일로 묶었던 적이 있는 곳이다. 붉은 색 지붕이 이국적인 풍경을 나타내는 전원주택은 시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원주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을 때다." 이 한 문장이 작품 전체의 방향을 바꾼다. 여기서부터 역사는 현재가 된다. 자료는 체험으로 변하고, 체험은 다시 사유로 발전한다. 좋은 수필은 자료를 설명하지 않는다. 자료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이것이 「하심주」가 교양수필을 넘어 문학수필이 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2. 체험은 어떻게 존재의 사유가 되는가
좋은 수필은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다. 사건을 통해 존재를 성찰한다. 「하심주」에서 실제 체험은 매우 단순하다. 친구가 연잎을 준다. 연잎으로 삼계탕을 끓인다. 맛이 좋아진다. 이것만으로는 하나의 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묻는다. "연꽃 터지는 소리가 날 때, 연잎에 구멍을 뚫어 하심주 한잔 나누고 싶은 친구를 나는 가졌을까." 이 질문은 작품 전체를 존재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처음에는 연잎 이야기였다. 다음에는 풍류 이야기였다. 마지막에는 친구 이야기이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이처럼 소재가 존재의 질문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미학이다.
3. 줄리앙과 바슐라르가 만나는 지점
이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프랑수아 줄리앙과 가스통 바슐라르는 서로 다른 철학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심주」에서는 두 철학이 하나의 구조를 형성한다. 줄리앙은 말한다. 익숙한 삶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공간은 인간의 상상력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송정자의 수필에서는 절기가 감각을 깨우고, 연못이 상상력을 키우며, 연잎이 기억을 저장하고, 친구가 존재를 완성한다. 시간과 공간,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사물과 기억이 하나의 유기적 세계를 이룬다. 이것이 「하심주」의 가장 깊은 철학적 성취이다.
4. 문체의 미학
이 작품은 문체에서도 장점을 지닌다. 첫째, 감각적 동사가 풍부하다. '흐른다.' '굴러 떨어진다.' '일렁거린다.' '숨을 죽인다.' '피어난다.' 이러한 동사들은 정적인 설명을 살아 있는 움직임으로 바꾸어 놓는다. 둘째,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꽃을 본다. 꽃 피는 소리를 듣는다. 연향을 맡는다. 삼계탕을 맛본다. 이러한 공감각적 문장은 독자의 몰입을 높인다. 셋째, 사색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철학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삼계탕을 끓이며 철학이 생긴다. 친구를 떠올리며 존재를 생각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미덕이다.
5. 현대수필에서 「하심주」의 의미
오늘날 수필은 두 가지 극단에 빠지기 쉽다. 하나는 일상을 단순히 기록하는 생활수필이다. 다른 하나는 지식을 나열하는 교양수필이다. 생활수필은 사유가 부족하고, 교양수필은 체험이 부족하다. 「하심주」는 이 두 한계를 동시에 넘어선다. 생활은 역사와 만나고, 역사는 체험으로 다시 태어나며, 체험은 존재의 사유로 확장된다. 이러한 구조는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서사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전통문화를 박물관 속 유물로 다루지 않는다. 풍류를 오늘의 삶 속으로 데려온다. 복날의 삼계탕과 다산의 하심주가 하나의 시간 속에서 만나고, 연꽃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전통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문화가 된다. 이 점에서 「하심주」는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Ⅶ. 로그아웃
풍류는 기억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신선하고 맑은 영혼을 채워주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연잎을 소재로 한 생활수필이 아니다. 또한 다산의 풍류를 소개하는 문화수필도 아니다. 이 작품은 사라져 가는 풍류를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존재론적 수필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는 이 작품이 왜 독자의 감각을 새롭게 여는지를 설명한다. 절기는 달력의 이름이 아니라 몸의 시간이 되고, 하심주는 술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완성하는 삶의 방식이 된다. 익숙한 복날은 풍류의 시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독자는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시학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층위를 밝혀준다. 죽란은 배려의 공간이 되고, 서련지는 기다림의 공간이 되며, 친구의 연밭과 부엌은 기억과 우정이 거주하는 시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상상력을 생성하는 존재의 터전이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는 연잎이라는 하나의 사물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성장시킨 데 있다. 연잎은 술잔에서 시작하여 자연과 인간을 잇는 매개가 되고, 친구의 마음을 간직한 기억의 저장소가 되며, 끝내 세속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의 윤리로 승화된다. 하나의 사물이 이처럼 의미를 확장하며 작품 전체를 통합하는 경우는 현대수필에서 흔치 않은 성취이다.
비움의 철학을 통해 한 편의 완벽한 서정을 직조하는 작가 송정자의 「하심주」는 풍류를 회상하는 작품이 아니라 풍류를 현재화하는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을 삶의 감각으로 전환하고, 일상의 체험을 존재의 성찰로 심화하며,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시적 세계 안에서 조화롭게 통합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심주」는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의의를 넘어,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모범적인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풍류는 과거에 머무는 문화가 아니다. 함께 기다리고, 함께 나누며, 함께 기억하는 삶의 방식이다. 송정자는 「하심주」를 통해 그 오래된 풍류를 오늘의 독자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그리고 독자는 그 연잎 한 장 위에서, 잊고 지냈던 삶의 품격과 우정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하심주
송정자
입하가 되면 감자의 환갑날이라 하는 하지에 이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감자알이 더 이상 굵어지지 않고 줄기가 시들어 얼른 캐주어야 한다는 소리다. 매미소리가 대서를 알려주는 장마가 끝나면, 여름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절기가 시작 된다. 삼복지간 땡볕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이 있다.
정조 대의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명례방은 지금의 충무로와 명동일대로 수레바퀴와 말발굽소리가 시끄러웠다고 한다. 다산의 집 마당 돌담에 대나무로 만든 담장, 죽란이 있었다. 다산이 궐에서 퇴청한 후에는 대나무 울타리를 거닐며 하루의 고단함을 이 곳에서 씻기도 했다. 다산은 마음 맞는 선비들과 일 년에 수차례 꽃을 보고 자연을 즐기며 시를 짓는 ‘죽란시사’라는 모임을 가졌다. 다산이 지은 이름이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차려놓고 술을 마시고 달을 보며 시를 지었다. 다산은 정원 곳곳에 사계절 꽃을 보는 재미에 철마다 벗들을 불렀는데. 행여 오가는 그들에 의해 꽃이 다칠까 대나무 울타리를 쳤다고 해서 그 이름이 죽란서사가 되었다.
복달임을 하는 복날에는 더위를 피해 숲을 찾고 물가를 찾아 그곳에다 자리를 깔고, 선비들은 피서를 핑계로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때 마시는 술이 하심주다. 여름을 즐기는 사치라고 할까. 고급 풍류의 으뜸인 하심주는 연잎을 통과시켜 연 줄기 속으로 흘러들게 해서 구멍이 뚫린 연대를 돌려가며 받아 마시는 술이다. 연잎을 둥근 쟁반처럼 오목하게 둘러싸서 술을 따른 후, 연잎 줄기 속을 송곳으로 찔러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한다. 쪼르르 빗방울처럼 연잎을 따라 똑똑 굴러 떨어지는 술 방울을 마시며 연꽃처럼 세 속에 때 묻지 않는 일심동체를 다졌을까. 그 함지박만한 연잎을 술잔으로 쓸 생각을 어찌했을까. 그 맛은 맑고 서늘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동틀 무렵 서련지에 조각배를 띄우고 잘 여문 연꽃잎이 마침내 ‘북’ 하고 터지는 소리를 듣는 청개화성의 풍류를 즐겼다. 한여름에 연꽃이 필 때 그 개화성을 듣고자 새벽부터 길을 나서던 풍류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꽃망울이 어른 주먹보다 컸으니 꽃잎 터지는 소리가 선명하고도 청량했을까. 마침내 연잎이 다투듯이 터지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개화를 바라보며 연향에 취하는 이른 아침의 풍경은 얼마나 멋졌을까. 군무를 하듯 일렁거리는 연잎들 사이로 살그머니 노를 저어 길을 내고, 죽란시사 벗들은 연꽃 틈 사이에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숨을 죽였으리라. 연꽃이 필 때 청량한 미성을 내며 꽃잎을 틔우는 탄생의 소리는 또 어떠했을까. 마치 한 방울의 아침이슬이 또르르 구르는 소리, 꽃이슬을 마음속에 떨어뜨리는 듯한 청량감, ‘청개화성’을 즐기던 그윽한 멋이 당시 다산과 벗들이 즐기던 풍류였다.
원주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을 때다. 함께 법천사지에 다녀오는 길에 친구가 연 밭에서 연잎을 몇 장 따주었다. 차곡차곡 한 장씩 신문지에 켜켜이 끼워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삼계탕이나 수육 삶을 때 같이 끓이면 고기 잡내를 없애주어 맛이 담백하다고 일러주었다. 사찰음식에 조예가 깊고, 음식솜씨가 뛰어난 친구 덕에 생각지도 않은 연잎을 가져왔다. 부피가 커서 작은 잎을 골라 따왔는데 신문지 한 장을 거뜬하게 둘둘 말고도 남았다.
초복에 식구 수만큼 영계를 사서 삼계탕을 끓이기로 했다. 뱃속을 가득 채운 찹쌀이 빠져나오지 않게 닭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아서 포갰다. 마늘을 넉넉히 집어 밀양 대추와 은행, 황기, 인삼을 차례대로 넣고 마지막에 연잎 한 장을 솥에 가득 덮어 푹 고았다. 연잎을 넣었을 때와 넣지 않았을 때와는 눈으로 봐도 확연한 차이가 났다. 뿌옇게 떠오르는 부유물을 걷어 내기 바빴는데 갈변한 연잎을 걷어낸 뽀얀 국물은 거짓말처럼 말간데다 닭 비린내까지 말끔하게 잡아주어 연잎의 효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과 벗들은 세밑이나, 분속에 심어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릴 때, 살구꽃, 복숭아꽃이 피면 꽃에 앉은 봄을 보기 위해,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나눠먹기 위해 만났다고 한다. 서지에 연꽂이 피기 시작하면 완상하기 위해 또 만났다. ‘국화가 피면 모이고, 눈이 내리면 모인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차려놓고 술 마시며 시를 짓는데 이바지 한다’ 죽란시사첩에 기록된 모임에 관한 규약이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규칙이 있으며 그에 버금가는 풍류가 또 있을까. 연꽃 터지는 소리가 날 때, 연잎에 구멍을 뚫어 하심주 한잔 나누고 싶은 친구를 나는 가졌을까.
계절이 바뀔 때 절기에 따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여행을 같이 가고 싶은 친구, 영화를 함께 보고 싶은 친구, 맛난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친구, 시원한 생맥주 한잔 앞에 두고 싶은 친구가 있다. 연잎은 발수성이 좋아 조금만 흔들어도 빗방울이 미끄럼 타듯 흘러내린다. 진흙 속에서도 결코 흙을 묻히지 않는 절대적인 시크릿이다. ‘언제나 연꽃처럼’이라는 서각 작품을 멋들어지게 새겨준 친구, 연 밭에서 연잎을 따서 건네준 친구, 연꽃을 좋아하고 연꽃을 닮은 그 친구가 생각나는 여름이다.
올여름 서울이 가장 수위가 높았던 극악한 무더위를 기록했다. 한더위에 하심주를 나누는 죽란시사 일원은 아니더라도, 친구가 따 준 연잎을 띠워 복달임이라도 했으니 친구 덕에 삼복더위 복날 땜은 했다고 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