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의 마지막 날 4】
이 글들은 2015년에 JTBC에서 방송된 사이공의 마지막 며칠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많이 참고해서 쓴 글입니다.
상당히 잘 만든 다큐멘터리였는데 지금은 다시 볼 수가 없군요.
생활화된 전쟁이다보니 군의 긴장도가 떨어진 면도 있지만 남베트남군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지휘체계의 붕괴와 전술,전략적인 문제때문이었다.
이 모든 책임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티우가 져야하지만 패색이 짙던 4월21일 티우대통령은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고 25일 1차망명지 대만으로 출국한다.
티우의 사임 이후 사이공의 상황은 급격히 변한다.
미국의 철수작전은 4월 19일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심리적 요인을 고려하여 야간에 C-130, C-141 등의 대형 수송기들이 운용되어 임시 캠프인 괌으로 수송되었다.
철수시킬 남베트남인들은 공산화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사람, 각종 미국기관에 근무하였던 고용인, 현지 미국인이 추천하는 인원 등이다.
미국의 철수 인원에 포함되지 못하는 남베트남인들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해안으로 나가 거룻배를 이용하여 미군 함정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여 구조를 요청하였고 미군은 이들을 전부 받아주었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4월 29일부터 미 대사관에서 최고 70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CH-53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나, 연료가 다하여 18:30 이후에는 12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UH-1 헬기로 야간철수를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미국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았다.
4월 29일만 해도 남베트남 공군기 4대가 북베트남군 대공화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철수를 방해하여 미 제7함대의 공격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며 자기네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철수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던 것이다.
모두들 이제 북베트남군의 사이공 진입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긴박한 상황에도 웃지못할 일들도 꽤 있었는데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하면 남베트남처녀와 전쟁으로 불구가 된 북베트남군과 강제 결혼시킨다는 소문이 나 때아닌 결혼 선풍이 불고 음식점들은 때아닌 호황을 누린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를 점령하면 맛있는 음식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4월 26일 오후 5시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사이공의 하늘관문인 탄손누트공항은 4월 28일 저녁 8시 포격을 받는다.
이제 유일한 탈출구가 막혀버린 것이다.
남베트남을 포기해야만 할 경우에 대비한 미국과 동맹국국민을 탈출시키기 위한 4단계의 철수방법이 있었는데
1단계 민항기를 이용한 철수
2단계 공군기를 이용한 철수
3단계 해상으로의 철수
4단계는 이 모든 방법들이 불가능 할 경우 헬리콥터를 통한 탈출이었다.
탄손누트공항을 통한 대규모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어쩔 수 없이 가장 비효율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4단계,
헬리콥터를 이용한 탈출 작전명
"Operation Frequent Wind 4"가 4월 29일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
14만의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에서 20분 거리에 와있고 오늘 ,하루 안에 사이공의 모든 미국과 동맹국의 교민,외교관들이 탈출해야한다
아침 10시45분.
열대지방의 더운 날씨인데 베트남의 미국인들 대상 라디오방송인 아메리칸 라디오서비스에선 노래
"White Christmas"가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베트남인은 이 노래의 의미를 모르지만 탈출대상인 사람들은 이 노래들 듣자마자 이미 지정된 장소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붕타우 외항엔 미7함대의 항공모함과 여러 전단의 함정들이 와있고 오전 11시 부터 헬리콥터를 이용한 사이공탈출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약 8~90명 정도를 실을 수 있는 대형치누크헬기는 보이지 않고 소형헬기만 사이공과 붕타우를 왔다갔다 한다.
이 탈출작전이 얼마나 허술하고 무계획적으로 진행됐는 지를 알려주는 여러 정황중 하나,원래 작전 계획은 오전 10시 45분 부터가 작전시작인데 이는 영국 그리니치천문대기준으로 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7함대에서는 이를 사이공 기준 시간으로 계산해서 오후 5시45분을 작전 개시 시간으로 생각한 것이다.
뒤늦게 이 상황을 파악한 워싱턴에서 빨리 대형 헬기 출동 지시를 내려 오후 3시나 돼서야 대형 헬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5시간 가까운 황금같은 시간이 그냥 흘러가버렸다.
보통 헬기 한대가 항공모함과 사이공을 왕복하는 시간이 1시간
치누크헬기에 최대한 태울 수 있는 인원은 90명
끊임없이 헬기는 왕복 운항을 하는데 새벽시간이 되면서 헬기가 안 나타난다.
원인은 미군의 복무규정 때문이었다.
조종사는 하루 최대 12시간 이상 조종을 못하게 되어있어서 조종사들은 항공모함에서 쉬고 있었다.
이것도 역시 워싱턴에서 늦게 파악한 다음 재차 출동지시를 내린 다음에야 다시 작전이 수행된다.
한마디로 이날의 탈출 작전은 미국이란 강대국이 대통령부터 정부의 핵심 요인들이 모두 비상대기한 가운데 이루어진 작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무질서의 연속이었다.
마틴 미 대사는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4월 28일 부인을 먼저 철수시키자는 직원들의 건의에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준다고 거절하고 4월30일 새벽 4시 58분 마지막에서 두 번째 탈출 헬기를 탄 그레이엄 마틴 대사는 그때까지도 사이공의 정확한 상황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미국이 사이공의 함락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 대사관에는 아직도 기다리는 사람이 400여 명도 더 넘었다.
때로는 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하였으나
미 해병대가 강권으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마틴 대사가 떠나면서 6대를 더 요청한다고 하였으나 미국인 철수완료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미 국무부 상황실에서 작전을 종료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와 마지막 헬기가 05:24에 이륙하고 철수작전은 끝났다.
미군들은 4월 29일 23:30부터 장비를 폭파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 남은 미 해병대는 폭약에 지연신관을 장착한 후 4월 30일 07:30에 밖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개스탄을 던지며 문을 폐쇄하고 07:53에 대사관 옥상에서 이륙함으로써 모든 미국인은 이제 사이공을 떠났다.
잠시 후 미 대사관 건물 내부는 폭파되었다.
4월 29일, 30일 양일 18시간 동안 헬기 70대, 630쇼티로 미국인 1,373명, 남베트남인 5,595명, 제3국인 83명을 철수시킴으로서 사상 최대 규모의 헬기 철수 작전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4월 중 미국인 6,763명, 남베트남인과 제3국인을 포함하여 45,125명, 거룻배 어선을 이용하여 미 함정에 탑승한 6,000여 명이 남베트남을 탈출하였다.
기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비밀리에 수송된 인원도 4,000명 가까이 되어 패망 직전까지 남베트남을 탈출한 남베트남 사람들은 6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미 의회는 철수 후에 미군과 군용장비를 운용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킨 것이 못마땅하였다.
대통령이 해외에 주재하는 미국인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나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 데에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함선, 항공기, 해병대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다.
포드 대통령은 끝없는 논쟁에 지쳐 백악관 대변인을 통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데 미군을 운용한 것은 합법성을 따져서 운용했던 것이 아니라 도의적인 측면에서 미군을 운용했고 남베트남인들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공산화 이후 죽을 것이기 때문에 구해주었고 지금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하였다.
첫댓글 남베트남 패전으로 미국으로 간 남베트남 사람들 미국에서 무상교육시켜 줬고 지금은 다들 자리잡고 잘살고 있다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