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40
5월29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청소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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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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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ZuUdCLf9Wg (조정래 시몬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5008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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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하늘 높이 향했던 우리의 머리를 일상의 낮은 곳을 향해 내려야겠습니다!>
선친 장례미사 때의 기억이 언제나 생생합니다. 시신을 기증하셨기에 장례절차가 참으로 간단했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의과대학병원에서 보내온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울고불고 대성통곡을 터트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담당 직원의 숙련된 동작에 따라 고인의 관이 앰뷸런스의 뒷공간에 실리고 문이 탁 닫히고 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다. 장지에 따라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화장장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니 정말로 허망했습니다. 뭔가 진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제야 살아생전 고인의 멋진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 하나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이렇게 멋지게 장식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분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언제까지 앰뷸런스 뒷꽁무니만 바라볼 생각이냐? 이제 빨리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거라. 내가 채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더 기쁘게 더 충만히 살아가길 바란다.’
오늘 제자들이 보는 눈앞에서 영광스럽게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도 유사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장 11절)
승천하신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난 제자들의 심정, 고인을 떠나보낸 우리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굉장히 허망하고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나머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분께서 떠나신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따뜻한 한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복음 24장 49절)
오늘 우리에게도 천사들은 똑같은 말을 건넬 것입니다 “너희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제 하늘 높이 향했던 우리의 머리를 일상의 낮은 곳을 향해 내려야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낮추어 꼬질꼬질해 보이고 남루해 보이는 인간 세상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흔적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인간 세상 안으로, 죄투성이의 비참한 인간들 안으로 완전히 육화하신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봐야겠습니다.
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느냐는 질책은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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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l8p0r-Ta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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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 떠나시는 것이 사랑인가?>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실 때 내가 가장 크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여야 일치할 수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엄마가 지켜볼 때 공부하는 것과 지켜보지 않아도 공부하는 거 중에 어느 것을 더 원하십니까? 지켜보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아이가 성숙한 아이입니다. 부모들도 처음엔 지켜보다가 이젠 자녀를 믿고 볼일을 봅니다. 이때 자녀가 부모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 자기 자신과 싸울 때 가장 큰 발전을 이룹니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에서 저자 앤절린 밀러는 완벽한 아내,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심리 상담 학위가 있던 준비된 엄마였습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술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남편과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를 닮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고쳐보겠다고 완벽한 아내가 되려던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술은 안 마시지만 심한 불안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밀러는 그런 남편에게 엄마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도 우울증과 분열증과 같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엄마는 이 모든 문제가 가장 완벽하다고 여겼던 자신 때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상담사가 어느 날 밀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자녀 행복의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이번엔 딸에게 묻습니다.
“네 행복에 대한 의무가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엄마는 왜 자녀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을까요? 자신이 불행한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입니다. 부모 탓을 하고 있기에 자녀들에겐 그런 부모가 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자신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코디네이터’였습니다. 완벽히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가족들을 도구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행복의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데서 해결됩니다.어느 날 하루는 정원에 큰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나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남편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싸우는 가정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화를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자신의 탓으로 여기면 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막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때 아내의 말에 깜짝 놀라 자기 행동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책의 첫머리에 이 말은 그녀의 후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억제하지 못할 때면 나는 네 신발을 집어주고, 네 배낭을 져 나르고, 네 교통 법규 위반 벌금을 납부하고, 네 상사에게 거짓말로 핑계 대고, 네 숙제를 해 주고, 네 앞길에서 돌멩이를 치워주고, ‘내가 직접 했어!’라고 말하는 기쁨을 네게서 뺏겠지.”
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마인 줄 알고 나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아주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떠맡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 말이다.” 각자의 행복은 각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이의 행복까지 책임지려 하는 것은 나의 행복도 다른 이가 책임져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를 방치해야 할까요? 방치란 사랑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귀찮을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야 합니다. 맡기려면 힘을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오는 일을 맡기셨을 때 지팡이를 주신 것처럼, 주시고 맡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를 하루 동안 길에 버려놓고 몰래 아이를 지켜봅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아이에게 언젠가는 이렇게 부모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예수님도 그냥 하늘로 오르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성령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들도 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밤새 정글 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라집니다. 아이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겁을 먹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필요할 때 활을 쏠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이 활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두려움 없이 믿고 살며 성장하도록 하늘에서 우리 주위에 활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쏘셔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분이 보이시지 않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처럼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는 어미 새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분의 믿음을 실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려주실 성령을 기다리며 그 순간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떨어지는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는 날갯짓만 하면 됩니다. 물론 계속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을 주지 않고 떨어뜨리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떨어져야만 그 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미 새가 새끼 새를 떨어뜨린다는 말은 새끼 새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른이 되게 하려면 일단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해주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제 어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처럼 하기 위해 끊임없는 날갯짓을 하면 힘이 붙어 날게 될 것입니다. 이 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날갯짓하는 노력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대하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날갯짓은 언젠가 성령을 불러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시킬 것입니다. 저에게 이 날갯짓이란 이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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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지형학적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영광에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가까이 가 있음(에페 3,12; 2,18)을 믿는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늘이 더 가까워지게 한 역사(役事)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신앙인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어 교회라는 새 이스라엘 왕국(6절 참조)을 세워주실 성령의 때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모든 제자를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 앞에 구원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서서히 공중으로 사라져 가는 것같이 느끼고 슬픔과 향수에 젖어 그리스도의 모습을 쫓아 하늘을 응시한다. 그때 두 천사가 마치 빈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 현실을 일깨워주듯이(루카 24,4)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심판관으로서 영광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다(마태 24,30; 1테살 4,16; 묵시 1,7; 14,14-16). 이렇게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요한 17,20)은 세상에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매일 매일 건설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새로운 세상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승천은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정의가 깃들일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의 빛이 이미 비치고 있는 구원의 장소로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복음: 루카 24,46-53: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복음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승천이 당신의 영광과 권세를 취하시게 한다. 그러면서 또한 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사건에 포함함으로써 더 깊이 일치하게 하신다. 둘째로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의 전례적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 모습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히브리 대사제의 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듯하다.(루카 24,50-51; 히브 4,14; 6,19-20; 9,1-14)
이제 사도들은 성전에서 전례를 거행하며 계속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린다. 전례 거행 특히 성체성사의 거행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없이해 준다. 이 성사를 거행할 때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게 되며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을 때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
이러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신앙의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여주시기를(에페 1,17) 간청한다. 이 깊은 인식은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때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능력을 초월해 계시는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심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3)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구원의 능력과 축복으로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영광에 들어가심을 의미하며, 또한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다. 항상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고양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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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46-53)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어디인가? 하느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승천’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이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음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이별이라고 생각했다면 슬퍼하고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기는커녕 크게 기뻐했습니다.(루카 24,52) 제자들이 크게 기뻐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말씀은, “가장 작은 이가 바로 나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대하듯이 작은 이들을 대하여라.”도 아니고,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도 아니고, “가장 작은 이가 바로 나다.”입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라자로’는 부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입니다. 부자가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는 라자로를 그렇게 방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자로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라자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잃은 양’입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사제와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외면하고 지나가버렸지만(루카 10,31-32), 착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면서 ‘강도당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었습니다.(루카 10,33-35)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존재일까? 수호천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 도움이 필요한 작은 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낯선 작은 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하느님(예수님)을 접대하는 일입니다.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1요한 4,16) 이 말을 반대로 해서,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옥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안 계신 곳, 즉 사랑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하느님 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 즉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천국이(하느님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은 지옥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또 구원받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말씀은, “증인이 되어라.”, 즉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은 ‘성령’입니다.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선교활동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힘’을 제대로 받으려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성실한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활동에서 성과를 얻지 못할 때, 가장 먼저 반성해야 하는 것은 활동하는 쪽의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반성 없이, 선교활동이 안 되는 이유를 외부에서만 찾는다면, 그것은 ‘남 탓’을 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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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미주 사제모임을 다녀왔습니다. 모임의 취지는 미주지역 한인 신자들을 위한 사목적인 협력과 파견사제들을 위한 다양한 정보제공입니다. 이번 모임에서 미국주교회의에서 발표한 문서 '조화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남'에 대한 주제토론이 있었습니다, 문서의 주된 내용은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섬에서 온 이주민들이 미국사회에서 잘 지낸 수 있도록 미국 교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 교회는 특히 한국 이주민 교회는 미국교회에 3가지 측면에서 협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지역 교회에서 실시하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인정받는 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주민 출신 성직자와 수도자는 이주민 교회를 대변할 수 있고, 교회 기관에 역할을 맡으면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재정적인 기여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교회도 아시아 이주민 교회를 존중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토론은 2가지로 요약되었습니다. 언어의 문제가 있지만 적극적인 참여로 목소리를 내자는 것입니다. 미국교회도 아시아 이주민들의 언어문제를 감안해서 이해한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주민 2세들에게도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가면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것을 잘 지키고 알리자는 것입니다. 팬데믹 중에 한국의 문화와 의료체계는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국과 서구사회도 한국의 효과적인 대응에 놀랐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영어로 번역하였고, 전시관을 만들어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지역교회의 주교님과 미국교회 공동체도 한국의 성인에 대해서 높은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주민 2세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참여와 한국인으로서 정체성 확립은 이주민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먼저오신 사제들은 다양한 정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새로 온 사제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오늘은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주님승천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정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은 제자들에게는 추억 만들기입니다. 때로 험난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하지만 희망과 신념으로 질곡의 역사를 관통하며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추억을 이웃에게 알려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서 참된 기쁨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참된 기쁨과 평화를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기쁨을 추억으로 만들어 가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마귀는 집요하게 우리들의 영혼을 찾아옵니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마귀가 자주 사용하는 미끼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게으름으로 유혹하기도 하며, 탐욕과 욕정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합니다. 육신의 병은 고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 분노의 병에 걸린 사람, 시기의 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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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모든 사명을 완수하시고 다시 하느님 품으로 가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승천’, 곧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리적으로 이 땅을 떠나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 저 먼 곳으로 가셨을까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말씀하셨으니, 떠나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머물며 함께 사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주님께서 오르셨다는 그 ‘하늘’과 그분의 ‘승천’은 우리를 떠나 저 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욱더 하나가 되시고자 이 세상 깊은 곳으로 내려오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승천 사건을 복음서보다 더 자세하게 들려주고 있는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늘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라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그 하늘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이라고 알려 주는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이제 물리적인 모습이 아니라 영적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이 지상에서, 우리 공동체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서 찾고 발견하라는 초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는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에서 보여 주셨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다시 한번 우리의 손과 발로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내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세상 안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으로 깊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찬미하며, 우리도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몸소 보여 주신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승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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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온 누리 잔치라네>
루카 24,46ㄴ-53(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하늘 땅 온 누리 잔치라네>
예수님께서
땅으로 복을 내리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니
제자들은
하늘을 향해 경배하고
땅으로 돌아간다네
예수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오르시니
제자들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네
그리하여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된다네
예수님의 오르심과
제자들의 내려옴은
오롯한 하나의 잔치이니
오늘 우리 맘껏
하늘 땅 온 누리 함께
잔치를 즐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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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24,50.51)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그리고 '홍보주일'이자 '청소년주일'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 되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 봅니다. 그 마음은 한 생을 멋지게 사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부모의 마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남아 있는 자녀들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우리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마음 역시,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녀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그리고 주님 승천의 모습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주님의 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과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믿는 이들에게 필요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첫째도 '회개'요, 둘째도 '회개'이며, 셋째도 '회개'입니다. 항상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내지 못한 죄를 내려놓고, 오늘보다 더를 살아내려고 애쓰는 '회개'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함께 기뻐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날마다 회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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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군대 제대 후에 당시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는 사회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면서 아르바이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택했던 일이 주유소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주유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것은 손님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무시하는 말투, 욕이 섞여 있는 반말, 자그마한 실수에도 큰 죄 지은 것처럼 화를 내고 혼내는 모습에서 세상살이가 쉽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 기간이 빨리 지나서 학교에 복학했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어떤 연세 지긋한 형제님과의 만남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분은 주유원에게 절대 반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휴지 가져와라, 사은품 가져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지금은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사은품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추운데 고생한다면서 꼭 무엇인가를 주셨습니다. 사탕, 귤, 일 끝나고 따뜻한 호빵이라도 사 먹으라면서 돈을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분만 오시면 기분이 좋아졌고, 이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각 휴지를 하나만 드려야 하는데 몰래 두 개를 드리기도 하고, 차가 지저분하면 살짝 세차도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분을 보며 ‘나도 저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하게 되었지요.
사랑의 실천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 변하는 누군가를 만들 수가 있으며, 나 역시도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은 약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가장 강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힘센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깨우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다음으로 구원의 길은 온 세상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담당해야 할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힘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사랑의 힘으로 주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을 닮은 삶,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전달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계속된 사랑의 전달로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됩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사랑받는데 익숙한 약한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데 적극적인 가장 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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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승천昇天의 삶>
-희망, 기쁨, 승리-
아름다운 성모성월 5월,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 부활시기에 맞이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입니다.
홍보주일에 청소년주일이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과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이지만 주일이라 기념미사는 봉헌하지 않습니다만 참 경사가 겹친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음의 귀로 경청하기’를 주제로 제56차 홍보주일을 맞아 “서로에 대한 경청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사람들에게 귀기울이는 데에 우리 시간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 주는 것이 애덕의 첫 번째 행동”이라며 “소통과 대화를 원하면 경청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승천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올림 받으신 이날 참으로 이웃은 물론 하늘의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敬聽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니 새삼 친근하게 느껴지는 하늘입니다. 사실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 몸담고 정주한지 34년, 아마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불암산 배경의 하늘일 것입니다. 이젠 예전의 그냥 그런 하늘이 아니라 구원의 하늘길, 하늘문이 열린 느낌의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죽음을 뜻하는 귀천歸天, 소천召天이란 말마디와 더불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 시도 정답게 떠오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여라.”
누구나 소망하는 주님의 승천처럼 느껴지는 이런 아름다운 귀천의 죽음일 것입니다.
새삼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 향한 고결하고 품위있고 향기로운 승천의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7절까지 계속됐던 찬미가와 미사시 본기도도 아름다웠고,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찬미가 1절과 더불어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1.“세상의 모든이가 갈망하는 주님의 날 밝아 왔으니
세상의 희망이신 구세주예수 이날에 하늘높이 오르셨도다”-찬미가
2.“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본기도
3.“환호소리 높은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화답송 후렴
이 모두가 우리에게 승천의 삶을 부추깁니다.
언젠가의 승천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승천의 삶을 삽니까? 희망과 기쁨, 승리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희망의 삶입니다. 승천의 삶은 희망의 삶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사랑도 믿음도 인내의 기다림도 가능합니다. 참으로 부단히 배우고 훈련해야할 희망의 덕입니다. 교황님은 2025년 희년의 모토를 “희망의 순례자들”이라 명명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길 향한 순례 여정중인 희망의 순례자들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또 가시적 희망의 빛나는 표지가 교회입니다. 이를 입증하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희망의 순례 여정중 궁극의 목적지가 되고, 그분의 지상 교회는 빛나는 희망의 이정표가 됩니다.
교회의 이정표 따라 하루하루 살아갈 때 그대로 성공적 승천의 삶이요 궁극의 희망의 목적지인 하늘에 무사히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희망의 이정표도 없습니다.
둘째, 기쁨의 삶입니다.희망은 기쁨의 샘입니다. 희망의 삶은 기쁨의 삶으로 직결됩니다. 승천의 삶은 그대로 기쁨의 삶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승천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이런 승천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 하는 찬미의 기쁨입니다.
“만백성 너희들은 손뼉을 쳐라.
기쁜소리 드높이 주님 부르라.
주님은 지존하고 지엄하시다.
온누리 크옵신 임금이시다.”
승천의 삶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하며 하루하루 하늘 향한 승천의 삶을 촉진促進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 제자들을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을 때 찬미의 기쁨을 노래한 제자들이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흡사 미사 끝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 각자 삶의 자리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강복을 받고 주님께 경배한 후,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받아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하느님 찬미의 의무입니다.
셋째, 승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빛나는 승리의 표지입니다. 참으로 승천의 삶을 살 때 기쁨의 삶이요 승리의 삶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승리에 참여함으로 이미 승리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天下無敵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찬미가 아름다운 2절을 나눕니다.
“위대한 투쟁으로 개선하시고, 세속의 우두머리 패망한 다음
성부께 당신얼굴 보여드리며, 승리한 육신영광 봉헌하셨네.”
이런 승리의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에는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우리 영적승리의 자리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주님 승천시 넋을 놓고 바라보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 천사의 따끔한 일침입니다. 갈릴래아 역시 우리 삶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우리 마음의 하늘 깊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바로 영적승리의 삶의 원천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에서 바치는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1.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2.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3.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4.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5.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6.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무지의 눈이 열릴 때 이런 엄청난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의 선물들임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 희망의 순례 여정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일치의 희망의 순례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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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i00jYkRY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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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 51)
사랑의 방식은
승천의 방식이다.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주님 승천은
본래의 사명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위대한 진리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준다.
삶의 방향과
시각을
바로잡아
주신다.
주님께서는
승천으로
구원의 참뜻을
실천하신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을
피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삶을
승화시켜 주신다.
승천으로
더 큰 변화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다.
기쁜소식은
이와같이
끝이 없다.
승천은
더 큰 사랑의
성숙이며
봉사의
적극적인
확장성이다.
사랑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안목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삶은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뜨거운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인격이
나가야 할
방향을
주님의 승천은
희망이 되어
우리를 이끈다.
인간 소외를
치유하는
승천이며
승천이
있는 곳에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있다.
주님의 입장은
승천이며
우리의 입장은
인식의 전환이다.
사랑은
승천처럼
뜨겁게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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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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