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평신도, 벨라도의 판문점 산책
1.
한국천주교회 창립은 1784년 이승훈 베드로의 세례로 시작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 파견을 간절히 원했다. 그로부터 8년 후, 로마 교황청 포교성은 한국 선교지를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북경 주교(포르투칼의 선교 보호권)에게 위임(1792년)하였다. 이에 응답하기 위하여 북경 교구는 주문모 야곱 신부를 파견(1794년)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천주교회를 정적으로 삼아 거부하였고 마침내 주문모 신부는 입국한지 5∼6년만에 순교하고 만다. 이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서막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는 또다시 성직자 파견을 북경교구와 로마교황청에 요청(1811년)하였다. 한국 평신도의 서한이 로마에 도착하는 시기는 1827년 9월9일이었다. 무려 16년이란 긴 세월속에 한통의 편지가 한국에서 로마로 달려 간 셈이었다. 로마보다 훨씬 가까운 북경교구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동지사 행사가 매년 열렸다면 적어도 15회 이상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2.
로마 교황청은 북경교구, 즉 포르투칼의 선교 보호권의 직무 유기를 강하게 질타하였다. 이러한 일은 극동 아시아의 일시적인 일만은 아니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같은 문제가 발생되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포르투칼 선교 보호권을 철회하고 지목구 설정(1831년 9월9일)를 서둘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B. Bruguire) 주교를 조선의 초대 지목구장(1831∼1835)으로 임명한 것이다. 북경교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북경교구는 포르투칼 선교 보호권을 강화하여 조선 지목구의 물적 인적 지원을 금하였다. 어쩌다 가까운 이웃이 먼 나라 이방인이 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황청은 한국천주교 지원을 한층 더 강화해 갔다.
3.
1838년 12월 12일, 한국 지역에서 뿐만아니라 주변지역, 즉 만주지역에서 포르투칼의 선교 보호권을 철회하여 요동 대목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요동과 몽고 포함한 초대 요동 대목구장으로 쓰촨(四川)의 선교사이던 베롤(E. Verrolles) 주교를 임명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와 포르투칼의 선교회와의 교류 단절을 의미한다. 단절은 절교와 다르다. 문제가 되었던 환경이 개선된다면 또다시 교류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포르투칼 선교회(북경교구)와의 인연으로 한국 교회가 태동(胎動)되었음을 깊이 감사드리고 있는 것이다.
4.
포르투칼선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는 확실히 달랐다. 한국천주교회가 교황청에게 선교사를 요청했을 때, 북경(포르투칼선교회)은 평사제, 즉 주문모 신부를 보냈다. 그런데 파리외방전교회는 브뤼기에르(B. Bruguire) 주교를 파견하였다. 무엇이 다른가? 북경교구의 주문모 신부 파견은 한국천주교회가 북경교구의 한 부분, 즉 새로 신설된 본당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보좌 신부를 더 보내던가, 아니면 새로운 본당을 늘려 가면 될 것으로 보았다. 선교 환경이 악화되면 본당을 폐쇄하고 공소로 전락될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파리외방전교회는 교구 창설로 본 것이다. 그래서 교구 사목자인 주교를 파견한 것이다. 주교 파견은 교황청의 몫이였고, 교황청은 서둘러 이 일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한 것이다.
5.
한국의 지목구(1831년 9월9일)에 이어 요동 대목구를 설정(1838년12월12일)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의 위임은 극동 아시아의 천주교 지도를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한국 최초 신학생들의 유학길(1837년) 모습부터 변화가 왔다. 마카오로 유학 가던 길은 한국과 중국 정부뿐만 아니라 중국교회(포루투칼 선교회)의 감시망을 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생들의 귀환길은 달랐다. 철학과를 마치고(1842년 10월) 신학(神學) 과정에 들어갈 때쯤 한국 선교 환경 중심은 중국 아랫역 마카오에서 요동 대목구내 차구(백가점)로 점진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요동 대목구가 설정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유학생들은 요동대목구내 차구(백가점)을 중심으로 귀국길을 서둘고 있었다.
6.
김대건, 최양업 부제서품(1844년 12월 10일)으로 한국으로의 귀국 시기는 더욱 현실화 되어갔다. 먼저 서품된 김대건 안드레아(1845년8월17일) 신부가 귀국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방인사제 사목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순교를 당하였다. 먼저 귀국한 동료 사제 순교 소식에도 불구하고 최양업은 수차례 입국을 시도한다. 훈춘과 경원, 의주를 통한 입국 시도(1846년1월), 이어서 함대를 통한 입국 시도(1847년7월28일), 고군산도를 통한 입국 시도(1847년8월12일)등이다. 한국의 국경 수비 강화는 이와 같이 엄중하였다. 교회는 한국교회 상황이 전보다 더욱 악화되었지만 최양업 부제의 서품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교회는 1849년 4월15일 최양업 사제서품 후 백가점(차구) 성당 보좌 신부로 발령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틈틈이 국경 수비 상황을 점검하던 중 서품 받았던 그해 12월에 한국 입국에 성공하게 된다. 그 시점부터 방인 사제 사목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방인 사제로서의 사목은 만만치 않았다. 과로 또 과로였다.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과로로 순교당하고 말았다.
7.
한국천주교 초기부터 방인 사제 양성의 꿈을 키워왔던 요동지목구, 또 다시 그 길을 반복하여야 하는가....? 교회는 방인 사제 양성에 고민이 깊어 갔다. 이어서 불어 닥친 병인년 대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많은 희생을 요구하였다. 대박해를 간신히 피해간 선교사 리델 신부(1866년7월1일)는 고향같은 요동지목구 차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대목구 성직자회의(1868년 11월28일-12월8일)가 열렸다. 그 당시 어떤 결정이 내려 졌는지는 알 수 없다. 리델 신부가 지목구장직을 승계하고 한국 입국을 강행(1870년 6월5일)한 것으로 보아 별다른 변화는 감지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 정부에서 먼저 획기적인 변화가 엿보였다. 대원군의 정계 은퇴설(1873년 12월 24일)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박해가 종식되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었다. 리델주교가 체포(1878년 1월28일) 된후 4개월 옥중 생활 끝에 순교가 아닌 만주(차구)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8.
리델주교는 나가사키 주교관에서 뇌졸중(1881년10월5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교회 사목은 한시라도 멈출 수 없었다. 리델주교에 이어 블랑주교 서품(1883년 7월8일)이 일본의 나가사키 연락사무소에서 거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뤄 왔던 방인 사제 양성도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처 필리핀 페낭으로 방향이 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100년에 걸친 요동 지목구와의 인연은 끝난 것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주변국의 환경이 다소 변화된 것 뿐 이었다. 교회는 신학생들의 유학길 안전이 우려되어 중국 횡단 도보길을 포기하고 바닷길을 일시적으로 선택하였을 뿐이다. 국내 환경의 변화로 국내에서 방인사제 양성이 가능하게 되자 해외 유학생들은 모두 귀국길에 올랐다.
9.
극동 아시아의 선교 환경이 많이 변하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던 요동지목구의 선교 환경은 정치 구조의 변화와 함께 점진적으로 쇠퇴해 갔다. 그러나 조선 지목구는 사회 혼란의 가중속 에서도 성장을 거듭해 갔다. 때가 되었다. 100년 동안 요동 지목구 품속에서 성장한 조선지목구가 모교구(母敎區)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간도의 작은 부분 재치권으로 시작 되었다. 1904년, 조양하(=팔도구) 공소가 설립, 되고, 이어서 간도 지역 10여 곳에 공소가 설립되자,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만주교구장 라루이예(P. Lalouyer, 藍祿葉) 주교로부터 북간도 지역의 재치권을 이양 받았던 것이다. 이때에 신자수는 400명 선에 머물렀다. 이어서 한국 방인 사제, 최문식 베드로의 간도 파견(1910년)은 간도 천주교회의 급성장(5,400명)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10.
길림 대목구, 옌지(延吉)와 이란(依蘭)이 원산 대목구로 위임(1920년10월)된 일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극동 아시아의 천주교회 모습을 예견함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을 통해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는 처움으로 중국이 어려울 때 힘껏 도와준 것이다, 이 일은 평사제 파견으로 본당 지원이 아니라 파리외방전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 주교 파견을 통하여 이루어진 선교였다. 어려운 시기에 중국교회는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1946년 중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큰 변화가 왔다. 만주에서는 봉천이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무순, 열하, 길림, 사평가, 연길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봉천 관구의 소속 교구가 됨으로써 그때까지 조선 교회에 속하였던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물론 한국교회도 많은 변화를 갖어 왔다. 1962년 3월 10일-13개 대목구가 정식교구로 승격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광주·대구는 대교구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전체가 3개 대주교 관구가 됨으로써 교계제도가 정식으로 확립된 것이다.
11.
조선지목구가 한구교회에게 준 선물은 무엇이었나. 순교자 정신일 것이다. 조선지목구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뮈델 주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드브레 주교(명동 부주교) 및 보니파시오 사우아 아빠스 주교(원산지목구장) 서품식 날(1921년 5월1일), 주변국가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목구장 대부분은 서울에서의 서품 행사에 대부분 참석하였다. 서울의 뮈델주교, 대구의 드망 주교, 오사카의 카스타니어 주교, 나가사끼의 콤바츠 주교, 심양의 슐레 주교 그리고 길림의 랄루이에 주교등이었다. 그 시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기 중 이었다. 순수 천주교회 행사임에도 불구히고 일본 정부의 요직 인사들 역시 모두 참석하였다. 그날은 노골적으로 일본과 한국천주교회가 힘겨루기 하는 날이었다. 일본은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조직과 화력에서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대패(1919년)를 하면서 3,000명에 이르는 정규군을 잃었다. 일본은 청산리 전투 참패이후 마적단 토벌(1920-21년)이란 이름으로 민간인 3,500명 대학살을 끝내가는 시점이 바로 서울의 부주교 및 원산 지목구장 주교 서품식 날 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청산리 전투 마적단에는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이 분명 있었다. 경신년(1920년) 대토벌이후에도 유독 의민단의 중심지로 의심받는 팔도구 성당이 20여 차례 집중적으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초토화 되었다는 점은 청산리 전투에서 천주교회 신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컷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뮈델주교는 방금 만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막 끝내면서 주교 서품식장에 들어서는 일본 관리들의 속셈을 전혀 몰랐을까?
주교 서품식에 참석한 정부 요직 인사를 보면,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마주노 박사, 마츠나까 외무국장, 총사령관 오바장군, 마에타 장군, 서울 주재 각국 영사, 러시아 영사등이었다. 일단 그들의 독설을 들어보자.
주교 서품식 날 사이토 총독의 건배 제의는 아래와 같았다.
......여러분의 한국내 포교 활동에 대한 저의 존경심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사들입니다. 90년전 여러분은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갖은 난관과 고통을 이겨 낸 그 노고가 점차 열매를 맺어, 이제는 명실 공히 한국 내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종교와 그 종교가 주는 지혜로운 교훈은 국민들을 독실하고 경건하며 예의 바르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국민의 도덕적.신체적 안녕을 위해 여러분과 우리사이에 항구적이고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겸손과 용기를 위하여 건배!!!---(친일 외교에 협조 요청)
뮈델 주교 건배 답사는 직설적이었다.
...저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가톨릭 선교사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용감하다는 사실을 총독님처럼 인정해도 저를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마사기 바랍니다. 용감한 분들은 신앙을 위해 피까지 흘리신 우리 선배들이셨습니다. 저는 또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모두 용감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소중한 제2의조국,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예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성교회의 영광과 원만한 선교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 파견국 중에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을 위하여 건배!!!---제2의 조국 한국을 위하여.....
12.
뮈델 주교가 말하는 진짜 순교자 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이루어 내는 순수 가톨릭 정신, 즉 시성시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1925년, 지목구 시절 수 많은 순교자중 자료가 준비된 79위를 복자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한국교회는 시성시복 활동을 계속하여 추가로 24위를 모시게 되었으며, 이후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이분들이 모두 성인으로 선포된다.
13.
역사는 돌고 돈다. 1946년 중국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봉천이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무순, 열하, 길림, 사평가, 연길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봉천 관구의 소속 교구가 됨으로써 그때까지 조선 교회에 속하였던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지목구는 중국 교회보다 늦은 1962년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조선지목구에서 넘겨준 유산 중 아주 귀한 선물은 당연히 103위 성인들일 것이다. 요동지목구에서 중국 교회로 넘겨 줄 보물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 역시 시성시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더구나 선물을 원하거나 거부하거나 상관없이 역사의 수례 바퀴는 반복하여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있다.
14.
민심은 천심이라고 한다. 극동 아시아가 지금 요동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남북한이다. 그러나 해일처럼 극동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남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요동지목구의 선물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동지목구의 선물은 지극히 가톨릭적인 시성시복이다. 이 일은 당사자인 중국과 로마가 화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대단하다. 왜냐하면 중국 교회는 한국교회처럼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정부 역시 손해 볼일이 없다. 전 세계로부터 진실한 친구들이 한꺼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일은 반드시 성사될 일이다. 늦거나 빠를 뿐이다. 세계적인 평화상 후보자가 거론되고 있다. 만일 중국이 로마와 화해를 실행한다면 그를 추월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15.
중국과 로마는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부분은 예측될 수 있다. 아래 글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들어 있다. 요동지목구가 중국교회에 주는 귀중한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서처럼 로마 교황이 중국 연길에 오실 때 주는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눈 여겨 보자.
1).
2007년. 5월.10일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동료 순교자에 대한 시복 소송 착수하여 교령까지 발표하게 이르렀다.
2).
시복 준비의 첫 단계는 사실성(事實性)의 확인(確認)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이어서 용서(容恕)와 화해(和解)의 시작이 될 것이다. 소설로 시작해 보자
3).
安圖县 本堂 巡禮
유럽까지 뻗어 갈 TR[大陸橫斷鐵道=transcontinental railroad]는 부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한반도를 지나 광활한 중국 대륙을 관통할 TR는 각 플래트 홈의 엇갈린 이해(利害) 관계 속에서 신중론자들에 의해 한동안 억류되었다. 우려(憂慮)가 확신(確信)으로 기우러 가자 대범한 친구들은 TR를 무조건 출발시켰다. TR는 자신을 알리는 기적 소리와 함께 유럽을 향하여 전력 질주(疾走)해 갔다. TR는 출발과 함께 점차 괴물화 되어갔다. 식성(食性)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TR가 머무는 풀랫트 홈이라면 어김없이 TR의 불랙홀로 변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TR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文化) 뿐만아니라 극비밀로 감추어진 군사(軍事) 비밀까지 거침없이 집어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랙홀, 그 곳은 크고 작은 다툼이 없는 고요함과 평화만 흐르고 있었다.
태여 난지 얼마 안되는 TR이지만,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는 식욕으로 인하여 급성장하면서 때 이른 꽃망울을 터 트리고 있었다. 꽃 중에 꽃, 그것은 바로 능금화[能金花]였다. 오고가는 물량 만큼 살찐 과수나무의 열매[黃金]는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뿐이랴. 열매에서 풍기는 향기 역시 유별났다. 그것은 많은 이들의 이성 뿐만아니라 예민한 오관을 마비 시켜갔다. 만일 누가 자신의 몫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폭동(暴動)도 불사할 모양세이다.
TR는 말 그대로 철길이다. 정해진 대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TR를 멋대로 진화 시켜 버렸다. 탈선 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기차를 전복 시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TR를 따라 자동차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서민들에게 오토캠핑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벨라도와 동료 일행은 의민단(義民團) 깃발을 앞세우고 용인(龍仁)의 은이 성지(聖地)로 모여 들었다. 安圖县 聖堂을 목적지로 오토 캠핑를 하기 위해서였다. 1,000Km의 대장정이었다. 쉽지 않은 여행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어갔다.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캠프카는 안도현을 향하여 출발했다. 의민단(義民團) 오토캠프카 일행은 어느듯 서울과 개성을 벗어나자 북간도 특급열차 노선을 따라 온성을 향하여 전력 질주해 갔다. 온성에 도착한 의민단(義民團)은 곧바로 경신 성당을 향하여 두만강을 건너 갔다. 간도에 처음으로 입성(入城)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한중(韓中) 자유 여행 지역으로 선포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유럽에 들어 온 기분이다. 1,000Km의 긴 여정 끝에 의민단(義民團)은 안도현(安圖县)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지나 온 길은 아래와 같다
용인(은이 성지) ➟ 서울 ➟ 개성 ➟ 평양 ➟ 평성 ➟ 순천 ➟ 고원 ➟ 함흥 ➟ 북청 ➟ 단천 ➟ 길주 ➟ 청진 ➟ 라진 ➟ 온성 ➟ 敬信镇 ➟ 板石镇 ➟ 珲春市 ➟ 英安镇 ➟ 密江乡➟ 凉水镇 ➟ 图们市 ➟ 長安镇 ➟ 延吉市 ➟ 朝阳镇 ➟ 銅佛寺镇 ➟ 老头沟 ➟ 石門镇 ➟ 安圖县
安圖县 本堂 주임 박신부가 의민단(義民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박신부는 수 차례 안도현을 방문해 왔던 의민단(義民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올 때이면 단동 - 장하 - 개주 - 심양 - 장춘 - 길림 - 교하 - 돈화 - 안도를 택하였다. 항공기인 경우는 장춘(또는 연길)으로 와서 기차로 오곤 하였다. 그러나 이 번 만은 달랐다. 자가용으로 대륙을 횡단(橫斷)한 것이다. 한탄강을 따라 가다가 임진강을 넘은 곳이다. 그 곳은 수 십 년 금단의 땅이었다. 연길로 가는 길 역시 막힘이 없었다. 그들은 평양을 지나자 원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흥을 지나 청진에 도착했을 때 잠시 머뭇거렸다. 나진, 선봉 지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미개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듯 안도현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도현 본당 주임, 박신부 옆에 정씨가 보인다. 그들은 지금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일 뿐이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였다.
朴神父, 汽车用一下吧(박신부, 차 좀쓰자!)
很忙(몹시 바뻐.)
啊,你刚才说什么?(니, 지금 뭐라고 했나?)
很忙, 我去, 靠那边! (바쁘다고 했다. 갈란다. 비켜라!)
你什么?(뭐라고?)
....,!?(.....,!?)
박신부와 정씨의 인연은 특별했다. 주종(主從) 관계(關係)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묵인(黙認)되어 왔다. 중국 정부는 지난 수 십 년 간......, 법률적으로 완전한 종교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명문(名文)상 일뿐이었다. 실제적으로는 극도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시켜 왔다. 그런 이유로 박신부는 늘 범법자로써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정씨는 집행자로써 막강한 국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씨는 수시로 권력 남용하여 범법자들을 사유화, 또는 노예화 하였으나, 그런 사실을 비난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종교인들이 정씨의 횡포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흔적없이 사라져 갔다. 정씨는 지방 행정부의 일급 전범자가 분명했다. 그는 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만 박신부는 달랐다. 슬기롭게 정씨와 맞섰다. 위의 대화 내용은 자세히 살펴보면 극도로 예민한 양면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따져보자. 정씨가 박신부의 승용차를 쓰자고 하였다. 그때 박신부는 정씨에게 중국어로 정중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어에는 존칭이 없다. 사실은 분명 둘 다 조선 사람이었다. 조선말로 정중히 대화를 하려면 존칭을 사용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박신부는 의도적으로 중국어로 쏘아 붙혔는데 그것은 박신부 심기가 몹시 불편하여 정씨에게 막말을 퍼 붙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알아 차린 정씨는 박신부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덤벼 들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끝까지 중국어로 정씨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박신부와 정씨는 평상시에도 늘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박신부의 경우, 정씨의 권력 남용은 한 점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정씨는 늘 불쾌하였지만 박신부와의 대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패(慘敗)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바뀌었다. 중국 정부가 로마 천주교회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로마 교황 방문을 요청한 일로 정씨가 실직되고 만 것이다. 정씨는 실직과 함께 일급 전범자로 몰려가고 있었다. 정씨는 갑자기 떠 밀려 온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박신부가 정씨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사제관으로 불러 들였다.
“정분도씨, 직장은 잡으셨나요?”
“신부님, 어떻게 제 본명을 아셨나요?”
“분도씨, 어머님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고백성사를 보시겠어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정씨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정씨의 거친 성격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진화된 것이었다. 그는 편하게 살고자 함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날 들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정씨는 박신부 권유에 따라 그동안 부정축재로 모아 온 재산을 포기하고 전액 사회에 기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교회는 정씨를 정중히 받아 드렸다. 그의 진정한 회개(悔改)와 고백(告白), 그리고 보속(補贖)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 정씨는 폭권을 누리던 때보다 주름살이 펴지고 생기가 돌더니,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60대가 넘은 중년이었지만 40대 정도의 장년처럼 힘과 패기가 넘쳐 보였다. -끝--
첫댓글 중국과 북한 교회, 특히 장익 요한 주교님이 발표하신 시성시복 교령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2007년. 5월.10일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동료 순교자에 대한 시복 소송 착수하여 교령까지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