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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제국』(닐 퍼거슨,2006)을 보고 친것 입니다.
대영 제국(Great Britain)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이 스스로를 대일본 제국이라고 높여 부르던 잘못된 사례를 반성 없이 그대로 바아들여 사용한 용어로, 여기서는 영제국으로 바로잡는다.
1850년 이전에 노예가 되어 대서양을 건너갔던 1000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 인 가운데 300만명 이상이 영국 선박을 타고 갔다.
제국을 방어하는 데 드는 비용은 납세자의 부담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납세자들은 근대 소비재 부분의 생산물에 돈을 썼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대서양 동북부의 바람은 연중 대부분 남서풍(바람이 남서쪽에서 불어오는)이어서 북아메리카 향하는 잉글랜드 선박에는 맞바람이 된다. 대서양 남부에서 항상 부는 북동풍(북동쪽에서 불어오는)을 쫓아 카리브 해로 향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다. 전통적으로 해안을 끼고 항해하는 잉글랜드 선원들은 대양 항해 기술을 배우는 데에 시간이 꽤나 걸렸는데, 대양 항해술을 고급화시키는데에는 포르투갈 인들이 많은 기여를 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카벨(작은 범선) 개발에 선구자들이었는데, 이는 비용이 저렴할뿐만 아니라 물이 새지 않게 포문을 정착할 수 있었다. 어려운 점이라면, 기동성을 살리면 화력이 떨어지고 화력을 살리면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베리아 인들의 카벨은 사격 대회에서는 베네치아 갤리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후자가 훨씬 더 중화기를 많이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30년대에 이르면 베네치아 겔리선들은 27kg 달하는 무게의 포탄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1540년대 이르러서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해군들은 그 정도의 화력을 실을 수 있는 갑판을 갖춘 카벨식 선박을 진수할 수 있었다.
헨리 8세는 대륙에서 청동 대포를 수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만드는 철제 대포는 주조하기는 어렵지만 훨씬 값이 쌌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이르면 전방에 포 네 개를 탑재할 수 있는 '갤리 범선' 같은 혼합선이나 갤리온이 주요한 영국 선박으로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갤리선의 타격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속도와 기동성에서는 충분히 따라잡았다.
1668~1670년 사이에 헨리 모건은 쿠바의 엘푸에르토델 프린시페, 오늘날의 파나마의 포르토벨로, 지금은 베네수엘라가 된 곳인 쿠라카오(카라카스)와 마르카이보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 작전에 수반된 대부분의 선박들은 노 젓는 배들에 지나지 않았다.
1670년대에 잉글랜드의 군주는 잠이카의 포르토열에 항구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를 건설하는 데에 수천 파운드를 소비했다.
네덜란드의 회사는 그 관리자들에게 순이익보다는 총수입에 근거해서 보수를 주면서 사업 규모를 최대화하도록 장려했다.1680년대까지 네덜란드로 들여오는 선적량의 대부분은 벵골산 직물이었다.
네덜란드 인들의 것과는 달리 잉글랜드 인들의 동인도 회사는 1650년까지 상설 회사가 아니었다.
1652년에서 1674년 사이에 잉글랜드 인들은 네덜란드 인들과 세 차례 전쟁을 했는데, 전쟁의 주요한 목적은 서유럽에서 나가는 주요한 해상로(동인도 뿐만 아니라 발트 해, 지중해, 북아메리카, 서아프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아 오기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오라녜 빌렘이 잉글랜드의 새로운 행정 수반이 되면서, 네덜란드의 실업가들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주요 주주들이 된다.
잉글랜드인들에게는 새로운 인도 직물 무역을 자유럽게 개척하게 하고 네덜란드 인들에게는 인도네시아 향로 무역을 하게 하는 거래가 이루어 졌다.
1720년대에 이르면 잉글랜드 회사가 판매 면에서 네덜란드의 경쟁 상대를 추월하게 된다.
서인도 제도로 가는 선박들은 11월에서 1월 사이에 출항했고, 북아메리카는 한여름에서 9월 말사이에 출항했다.
인도양의 탁월풍(특정한 기간에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가장 불기 쉬운 바람)은 4월에서 9월까지는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남서풍이지만, 10월에서 3월까지는 북동풍이다. 그래서 인도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봄에 출발해야 했고, 가을에나 돌아올 수 있었다.
동인도 회사의 피고용인이 받는 봉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서기나 사무원은 1년에 5파운드의 기본급을 받았는데, 잉글랜드의 가내 하인이 받는 것보다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때문에 대부분은 부업 삼아 자기 명의로 사업하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1700년 세계 총 생산고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몫은 어리잡아 24%(거의 4분의 1)로 추정된다.
페르시아 인 나디르 샤 아프샤가 1739년에 아프간-터키 군대의 선두에 서서 델리를 약탈했다. 암드 샤 아브달리가 이끄는 아프간 인들은 1747년 이후 되풀이 하여 인도 북부를 침략했다.
1700년에 프랑스는 경제 규모에서 영국의 두 배 였다.
영국이 프랑스보다 결정적으로 우위에 있는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바로 돈을 빌리는 능력이다. 영국의 모든 전쟁 경비의 3분의 1 이상은 대부금으로 조달되어다. 정부로 하여금 투자하는 대중에게 낮은 이율의 채권을 판매하여 전쟁 비용을 늘릴 수 있게 하였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구걸을 하거나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 해군의 승리 이면에는 국채도 있었다. 국채의 증가(7년 전쟁동안 7400만 파운드에서 1억 3300만 파운드)는 영국 재정 능력의 척도였다.
헤이스팅스가 총독으로 있었던 시기(1772~1785)에는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원주민과 같은 생활을 한' 동인도 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영국에서 민족적으로 소수 집단 가운데 하나의 출신인 스코틀랜드 인들이었다.
1750년대에는 영국 인구의 10% 정도만이 스코틀 랜드에 살았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적어도 절반이 스코틀랜드인 이었다. 헤이스팅스의 재임 기간 중 마지막 10년에 벵골에서 근무하도록 이사회가 임명한 249먕의 서기 중에서 119명이 스코틀랜드인 이었다. 1782년에 모집된 회사의 벵골 군대 장교단에 지원한 116명의 후보 가운데 56명이 스코틀랜드인 이었다. 이사회가 '자유 상인들'로 활동하는 것을 인정한 371명 가운데 221명이 스코틀랜드인 이었고 회사가 모집한 254명의 보조 의사 가운데 132명이 스코틀랜드인 이었다.
헤이스팅스가 총독으로 재임한 기간 동안에 중요한 임무를 맡겼던 35명의 개인 중에 적어도 22명이 스코틀랜드인 이었다.
반면 아일랜드인들은 하위 계층에서 많이 보였다. 19세기 초에 벵골 군대는 잉글랜드 인이 34%, 스코틀랜드 인이 11%, 그리고 아일랜드 인이 48% 였다.
1788년 영국의 국채는 2억 4400만 파운드가 되었다.
1773~1774년 벵골에서는 기근 때문에 인구의 3분의 1 정도(약 500만 명)이 사망한다.
1783~1784년 다시 기근이 발생하여 인도 평원의 인구 중 2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1791년, 1801년, 1805년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유럽 이주민들과는 달리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인들은 매우 빠르게 자신들은 재생산 하기 시작하여 1650에서 1700년 사이에 인구가 네 배로 는다.
영국에서는 75%만이 정도 만이 결혼을 했다. 반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열 명중 아홉 명이 결혼을 했고 식민지 여성들의 결혼 연령도 훨씬 더 낮았다.
독립 이전에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총 150만 명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인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고 여성은 약 25%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베리아 남성 이주민들 대다수는 그들의 성적 대상을 줄어들고 있던 토착민들이나 급속히 증가하고 있던 노예들 중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1800년에 라틴 아메리카에 살던 1350만 명 중 350만 명만이 백인이었다.(이들중 본국인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사람은 3만명 정도였고 나머지 347만 명정도는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크리올들이었다. 1820년에 이르면 라틴 아메리카 주민의 약 25%가 혼혈인이 되었다.
1500년 이전의 합중국 영토에는 200만 가량의 토착민이 있었다. 1700년경에는 이 숫자가 75만 명이 되고, 1820년에 이르면 32만 5000명에 불과하게 된다.
영국령 북아메리카가 될 곳은 대략 56만명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1700년에 이르면 그 수가 반 이상 줄어든다.
잉글랜드에서만 1601년에서 1701년 백년 사이에 순수 이주민 수가 총 70만 명이 넘었다. 1640년대와 1650년대(잉글랜드 내전 기간)의 절정기에 이주율은 1000명당 두 명 이상이어다.(푸에르토리코가 현재 거의 동일한 비율을 경험했다.)
1650년에서 178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모든 유럽 인들 가운데 50~60%는 연기 노예 계약(항해 비용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몇 년동안(보통 4~5년) 자신들의 노동을 제공한다는 계약) 을 맺고 왔다. 체서피크로 온 잉글랜드 이주민에게서 그 비율은 70%에 가까웠다.
이들 연기 계약한 하인 대다수가 15세에서 21세 사이의 젊은 남성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인과 아일랜드 인은 18세기 전체 영국 정착민 가운데 거의 75%를 차지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 인구의 75% 정도가 잉글랜드에 거주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는 각각 10%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영제국에서는 식민지 개척자들 가운데 잉글랜드 인은 가까스로 절반을 차지했다. 캐나다에서 스코틀랜드 인은 21%, 아일랜드 인들도 비슷한 21%를 이루었고, 오스트레일라에서는 스코틀랜드 인이 15%, 아일랜드 인은 27%를 이루었고, 뉴질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인은 약 23%, 아일랜드 인은 21%를 이루었다.
아일랜드 인은 1701년에서 1780년 사이에 전체 영국 이민자 가운데 40%를 차지했다.
버지니아에서는 도착한 사람 중 40% 정도가 2년 내에 사망했는데, 보통은 말라리아나 장 질환 때문이었다.
17세기 영국 이주민의 약 69%는 서인도 제도로 갔다.
설탕은 1750년대부터 외국산 아마포를 앞질러 원면이 그것을 앞지게 되는 1820년대까지 단일 품목으로는 영국의 가장 큰 수입품 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1일당 설탕 소비량은 프랑스의 10배(1인당 1년에 1kg과 비교하여 10kg)였다.
차(Tea)가 대규모 시장을 창출할 만큼 충분한 양과 충분히 낮은 가격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에 이르러셔 였다. 1703년에 켄트 호가 차 2만 9500kg을 싣고 런던에 도착했다. 이는 과거의 연수입품 전체와 비슷한 분량이었다. 진정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때는 1745년으로, 이때에는 '국내 소비용으로 보유한' 차의 수치는 1740년대 초 평균 3만 600kg을 밑돌던 것이 1746년에서 1750년 사이에 113만 4000kg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1770년대에 이르면 실제로 영국 담배 수입의 85% 그리고 수입된 커피의 약 94%는 주로 북유럽으로 재수촐 되었다. 과중한 수입 관세는 국내 커피 소비를 제한하고 싹트고 있던 차 산업이 활성화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773년에 자메이카로부터 영국이 수입한 물품의 가치는 아메리카 식민지 전체에서 수입한 것보다 5배나 많았다. 1714년에서 1773년 사이에 네비스는 뉴욕보다 영국의 수입품을 3배 더 많이 생산했고, 앤티가도 뉴잉글랜드보다 3배 더 많이 생산했다. 설탕은 18세기 식민지 제구의 가장 큰 사업이었다. 1775년의 총 설탕 수입은 영국 전 수입품의 20%를 차지했고, 담배 수입의 5배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찬송가「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존 뉴턴은 6년 동안 성공적인 노예 상인으로서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카리브 해로 대서야을 건너 수백 명의 아프리카 이들을 실어 날랐다. 그는 일등 항해사가 되고 뒤이어 노예 무역선의 서장이 된 것은 종교적 각성 이후였고, 사람들을 매매하는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였다.
1817~1838년 영국 군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아프리카 서부 대륙에서의 노예선 출발지)이고 다음은 자메이카 이다.
1662년에서 1802년 사이에 25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인들이 영국 선박으로 수송된 노예들로서 신세계로 왔다. 그것은 같은 기간 백인 이주민 수의 3배가 넘는 수치였다. 이 수치는 또한 노예들로서 이제까지 대서양을 건넜던 모든 아프리카 인의 30%가 넘는다.
노예로 아프리카 인들이 운송중에 사망한 시기가 가장 높았을 때는 1720~29년, 17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였다.
1662년에서 1807년 사이 영국 노예 무역이 행해진 기간의 평규 사망률은 일곱명에 한 명꼴이었다. 초기 몇 십년 동안 그 비율은 거의 네 명에 한 명꼴이었다. 그리고 노예 무역선 선원들의 사망률은 더 높았는데, 18세기 후반에는 약 17% 였다.
1750년까지 약 80만 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배에 실려 영국령 카리브 해로 왔지만, 사망률은 아주 높고 출산율은 아주 낮아 노예 인구는 30만 명 이하에 머물렀다.
1850년 이전에 노예가 되어 대서양을 건너갔던 1000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 인 가운데 300만명 이상이 영국 선박을 타고 갔다.
1770년대에 이르면 뉴잉글랜드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인당 소득은 적어도 연합 왕국(영국)의 소득과 동일했고, 더욱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뉴잉글랜드인들은 올드잉글랜드 인들보다 더 큰 농장과 더 많은 가족이 있었고 더 나은 교육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훨씬 적은 세금을 납부했다. 1763년에 평균적인 브리튼 인은 1년에 세금으로 26실링을 납부했지만 매사추세츠 납세자들은 1실링 밖에 납부하지 않았다.
1700년에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인구는 약 26만 5000명이었는데, 1750년에 이르면 120만 명, 1770년에는 230 만 명(스코틀랜드 인구보다 많다)이 되었다.
보스턴 티(Tea) 사건은 이곳의 부유한 밀수업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큰 손해를 볼 형편이었었다.
독립 선언서에 조인한 사람들가운데 여러 명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종종 혁명의 온상으로여겨지는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교회를 보면 독립 지지자들은 신자들 중 소수 였다.(약 33%) 나머지는 반대하거나 중립을 지켰다. 그리스도 교회는 식민지 아메리카의 무수히 많은 다른 교회들처럼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분열된 것은 신자들 뿐만 아니었다. 가족들조차 독립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전반적으로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백인 인구 중 20%가 전쟁 동안에 계속해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실로 우유부단한 영국 장군들보다 이곳의 왕당파 사람들이 훨씬 더 완강하게 싸운 경우가 자주 있었다.
독립전쟁 결과 약 10만 명의 왕당파들이 합중국을 떠나 가장 많이는 캐나다, 그리고 서인도 제도로 이주했다.
1781년 합중국 총인구 가운데 20%인 40만 명이 흑인 노예 들이었다.
1787년에서 1853년 사이에 모든 약 12만 3000명의 남성과 2만 5000명이 조금 안 되는 여성 그리고 수를 알수 없는 어린아이들까지(이중 상당수는 도중에 임신한 아이들이었다.) 지구 정반대쪽(오스트레일리아)으로 수송되었다. 이들 유형자 중 25%는 아일랜드 인이었는데, 그들 중 20%는 정치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다.
스코틀랜드의 판사들은 잉글랜드 판사들보다 유죄 판결된 중죄인을 유형에 처하기를 꺼렸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인구 비율상 응당 있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스코틀랜드 인들이 있았다. 놀랍게도 많은 수의 퍼거슨이라는 성을 지닌 사람들(북아일랜드지역의 게일 계통 사람들이 470년경에 스코틀랜드 아가일 지역을 식민화하자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조상 또는 그 작은 왕국의 왕의 이름이퍼거스였기 때문에 이들은 퍼거스의 후손들로 불린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졌다. 이들은 10%를 차지했다.
사실 유형 간 사람 가운데 절반에서 3분의 2가 '상습범' 이었지만, 그들의 범죄 중 거의 모두가 사소한 절도였다.
시간이 지나 많은 수의 죄수들이 형기를 마치거나 사면을 받음에 따라 식민지의 특성도 변하기 시작했다. 열네 명중에 한 명꼴로만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하면서, 1828년에 이르러선 뉴사우스웨일스(오스트레일리아)에는 죄수들보다 자유민이 더 많아졌다.
1788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착민 또는 원주민들 약3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영제국 역사의 모든 장면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반 디멘스 랜드(오늘날의 태즈메이니아, 1642년 네덜란드의 반 디멘이 파견한 원정대가 발견했다)의 토착민들이 몰이를 당해 감금되고 끝내는 몰살당한 일이었다.
1815년에서 1850년 사이에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떠난 60만 명 정도의 사람들 중에서 80%는 합중국으로 갔다. 1850년 이후 60년 동안 연합 왕국(영국)을 떠난 1300만명에 달하는 경이적인 숫자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 비율은 거의 동일했다. 그러다가 20세기가 되어서는 점점 더 많은 브리튼 인들이 아메리카보다는 오히려 영제국으로 이주하는 쪽으로 택했다. 600만 명 이상의 브리튼 인들이 1900년에서 1963년 사이에 영제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모든 영국 이쥔 가운데 대략 열 명 중 여덞 명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서는 노예 무역이 영국의 폐지법에 따라 결국 억제되었지만, 노예들은 중앙 아프리카와 동 아프리카에서 아랍, 페르시아, 인도로 계속해서 수출되고 있었다. 아마도 19세기 내내 200만 명이나 되는 아프리카 인들이 동쪽 교역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다.
1839년 인도 군대에서 복무한 사람 가운데 80%는 세포이로서, 그 나라의 전통적인 전사 카스트들로부터 모집되었다. 영국 본국출신의 병력(사실은 아일랜드 병력)은 종종 군사적으로 중요하긴 했지만 소수였다.
영국편에 싸운 군사들중 장교 사상자의 약 30%,그외 다른 계급들로서(장교 외의 군인들, 주로 사병들) 의82%는 '원주민'으로 분류 되었음을 보여준다. 델리가 '영국' 군대에 함락되었을 때, 그 군대의 대부분은 인도인들로 구성되었다.
동인도 회사의 총 아편 소득은 1839년 이후로 늘어나...1844년 이후 부터는 회사의 부채에 대한 이자를 추월한다.
처음 영국의 해군성은 증기력이 '영제국의 해군력 우위에 치명타를 날릴 것'으로 믿으며 그것의 출현에 섬뜩해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치세 초기(사실상 인도 폭동 때까지) 유럽 외부의 문제에 비교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 폭동이 일어나자 그녀는 충격을 받아 황제로서 자신의 책임감을 느꼈으며, 치세 기간이 흘러감에 따라 책임감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였다.
전보 또한 영제국 해군성이 무시하려 했던 또 하나의 발명품이었다.
초기 철도 시설로 처음 짐을 실어 나르면서 19세기 정보 고속도로를 발전 시킨 것은 군대가 아니라 민간 부분이었다.
1903년 인도에는 3만 8000킬로미터가 넘는 선로가 있었다.
원주민 병력의 수는 1857년 이후에 감소했고, 영국본국 병력의 수는 약 30% 정도 증가했다. 폭동 이후 인도인 병력에게는 더 이상 포를 맡기지 않았다.
1881년에 이르면 인도 육군은 영국인 병력 6만 9647명과 원주민 병력 12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데 비해, 본토에서는 영국인 군대와 아일랜드 군대가 각각 6만 5809명과 2만 5353명이었다. 따라서 제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영국 주둔군의 총 인원 중 인도 육군은 절반이 훨씬 넘는 비율(62%)을 차지했다.
첫댓글 저도 이책 구입했는데. 좋은 책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