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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68ㅡ1
김자점 (金自點)
조선시대 3대 간신(奸臣)을 꼽아 보라고 하면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어떤 학자는 유자광, 임사홍(임숭재), 김자점을 이야기 한다. 또 어떤 학자는 한명회, 이완용, 김자점을 꼽는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김자점은 조선시대 3대 간신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김자점은 간신으로 오르 내리는 인물들에 비해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2013년 JTBC에서 사극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탤런트 정성모가 김자점 역할을 하면서 일반인들에게는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간신이란 비열하고 배신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진짜, 간신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간신은 머리가 좋아 눈치가 아주 빨라야 하고, 임기응변에도 아주 능해 처세술의 달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윗 사람들 눈에 들어 벼슬 길이 탄탄대로를 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한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권력의 정점에 서서 실권을 가져야만 역사 속의 간신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조선시대 3대 간신의 면면을 보면 다 그러했다.
현대에 들어 와서도 간혹 간신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다 그러했다. 이기붕, 이후락, 김기춘, 우병우, 최순실 등등
그러나 위. 간신들의 특징은 백성이나 국민들은 아예 안중에도 없고 위만 바라보며 아첨하다 결국에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만다.
특히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 간신(奸臣)이 나타나고, 간신은 국정을 농단하고 혼란으로 몰고 간다.
그 중에 오늘 날 까지 조선시대 3대 간신에 빠지지 않고 최악의 역신으로 손꼽히는 김자점이 있다.
오늘은 이런 김자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 보고자 한다.
김자점에게는 특이하게 여러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있다. 여러 전설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이든 김자점에 대해 당시 백성들의 관심이 상당했다는 증거이다.
그 중 김자점 (金自點)이름과도 관련이 있는 탄생설화가 재미있다.
'김자점이 태어난 전라도 땅 낙안 고을에는 해마다 15살 가량의 숫처녀를 마을에 자리잡은 당집에 제물로 바쳐야만 하는 제를 지내고 있었다.
어느 해 낙안 고을에 새로 부임한 사또는 이런 악습을 없애기 위해 당집을 허물었는데 그때 커다란 지네가 매달려 당집 허무는 것을 방해했다. 이 모습을 본 사또는 장검을 빼어 지네를 마디마디 토막 내어 버렸다. 이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의 붉은 피가 튀어 빨간 얼룩이 졌다.
그리고 나서 어느 날 사또의 부인이 수태를 하게 된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 아이였다.
그런데 태어난 아들의 양 미간에는 피처럼 붉은 점이 진하게 박혀 있었다. 그 점은 사또가 당집 대들보에 매달려 있던 지네를 토막내 죽일 때 튄 지네 핏자국의 얼룩 그대로였다. 위치 또한 같았다.
사또는 불길한 징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아들의 붉은점은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점은 자라면서 기상이 출중하고 영특한데다 총명하고 늠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후에 그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결국 역모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의 집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위 김자점 탄생전설에서 보듯이 김자점은 어렸을 때 부터 뭔가 특출 나긴 났었나 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자점 실제 아버지가 사또를 한 적도 없고 김자점이 낙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김자점은 1588년(선조 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인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지만 아버지 김함은 관직에 들지 못했다.
김자점 아버지 김함은 고려 시대 명장으로 이름난 김방경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 때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했다가 동지들을 배신하고 거사를 누설했던 집현전 학사 김질의 5대손이기도 하다.
김자점은 선조 때 문벌을 배경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를 통해 병조 좌랑이 되었다. 병조 좌랑은 정6품관으로 군사에 관한 일과 무관 선발의 직무를 담당하는 요직중 요직이었다. 음서출신이 이런 요직을 맡기 힘든데 김자점이 맡은 거 보니 김자점이 당시 왕이나 조정대신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한 김자점이 '성미가 모질고 사나웠으며 완벽주의자로서 일처리도 엄하고 급했으므로 부하직원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했다' 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아 무능은 했을지 모르지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확실하다.
이후 벼슬 길에서 승승장구하던 김자점은 광해시절 대북파가 주도한 계축옥사 때 동료 서인들과 함께 대북파의 조치에 반발했다가 조정에서 쫓겨났다.
쫒겨난 서인들은 대북파의 탄압이 더 가중되자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친금배명' 정책을 하는 광해를 내 쳐야한다는 명분으로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이때 김자점은 서인의 핵심 요인이었던 최명길, 심기원과 함께 김자점 사돈 이귀까지 포섭했다.
이 와중에 1623년(광해군 15년) 김자점이 공조 정랑으로 복귀했는데 항간에 그와 이귀가 인목대비를 두둔하면서 역모를 꾸민다는 풍문이 돌았다. 다행히 그 무렵 광해군은 역모에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방만한 상태였다. 이 때 김자점은 자기 제수씨(이귀의 며느리)를 통해 광해군이 총애하던 김개시에게 접근하게 하고 김개시에게 뇌물공세를 펼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운명의 3월 13일, 김자점은 수하들을 이끌고 홍제원에 나아가 이괄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세검정에서 평산 부사 이귀, 효성령별장 김류, 최명길 등과 연합하여 궁궐로 진격해 인조반정을 성공시킨다.
인조반정 직후 김자점은 당시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호조 좌랑을 거쳐 그해 9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특별 승진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반정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1등 정사공신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년) 김자점이 승지로 임명되고 나서 얼마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부원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궁지에 몰린 인조가 공주로 도망칠 때 김자점은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다가 장만과 임경업의 활약으로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한양으로 되돌아와 인조가 세자빈으로 윤의립의 딸을 물망에 올리자 이에 반대를 하다가 실각하려는 위기를 당하고 주위의 도움으로 이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강화도로 인조를 호송한 공로로 순검사를 거쳐 임진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자점은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1630년에는 한성부 판윤에 상의원 제조 겸 구관청 당상에 임명되었다.
1633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당시 군부를 책임지고있던 김자점은 도원수로서 여러 번의 전략적 실수를 한다.
정묘호란 이후 계속되는 청의 군사적 위협 속에 도원수에 오른 김자점은 정예병을 큰 길에서 벗어난 산성에 주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병자호란 때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피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로로 진격해 한양을 범했다.
심지어 김자점 본인도 황해도 토산에 정병을 주둔해 놓고 교전을 피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김자점은 이러한 죄로 죽을 위기에 몰린다.
그래도 인조는 김자점을 외면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권위를 잃은 인조에겐 김자점 처럼 ‘까라면 까는’ 저돌적인 충복이 필요했다. 김자점은 아니나 다를까 재빠르게 친청파로 변신해 조정 중신들을 제압했고 그가 후원하는 소용 조씨도 인조의 안방을 차지하게 해 인조의 뒤를 받쳐 주었다.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를 손자며느리로 삼으며 김자점 권력은 더 강화됐지만 백성들의 지탄도 높아갔다.
그래도 김자점은 백성들의 여론에 신경쓰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다가 가까스로 조정에 복귀한 만큼 김자점은 최명길을 비롯한 정적들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암중모색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이후 김자점은 질풍노도처럼 벼슬 길이 열린다. 1642년(인조 20년)에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우의정, 어영청도제조 등을 지내고 청나라에 진사사 겸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청나라를 다녀 온 김자점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것이 현실인 이상 조선도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청을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주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이 점에서 김자점의 안목에 대해서는 다르게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시국관은 그가 훗날 반역자로 징치되고, 김상헌과 임경업 등이 충신으로 추앙되면서 오늘 날 까지 조선최대 간신으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자점이 억울하게 당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으로 김자점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찾아봤지만
이상하다 할 정도로 야사에도 김자점에 대해 좋은 점을 기록한 문서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야사에 김자점이 조선에 온돌을 장려하고 확대 배급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 말도 김자점의 온돌배급정책 때문에 산림이 크게 훼손되었다며 김자점을 비난하는 글이다.
1644년(인조 22년) 김자점과 같은 반정공신으로 좌의정 겸 남한산성 수어사였던 심기원의 모반사건이 터져 조정이 분란에 휩싸였다.
심기원은 인조반정의 1등공신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워 요직에 임명되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소환되어 고문으로 악형을 받은 끝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김자점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항간에 그가 역모를 조작했다는 풍문이 자자했다.
소현세자의 죽음(1645), 세자빈 강씨의 사사(1646),임경업의 주살(1646) 등 의혹 짙은 사건이 이어자자 김자점에 대한 여론도 악화됐다.
특히 김자점에게 명장 임경업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민심은 ‘군사력을 키워 청에게 복수하자’던 명장 임경업에게 극히 동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자점은 1645년(인조 23년)에는 청나라에서 오랫동안 인질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인조가 세자빈 강씨에게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자 앞장서서 그녀의 사사를 주장했다.
이 점은 조금 의아하다. 친청파인 김자점이 대표적인 친청파인 강빈의 사사를 앞장서 주장한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추측건데 김자점은 친청파였지만 김자점은 늘 자기가 모시는 인조가 원하는 맞춤요리를 대령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 모습에서는 김자점이 간신의 전형적인 모양새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최명길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김자점은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고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그 후 김자점은 청나라의 역관 정명수, 이형장 등과 결탁하여 친청세력을 형성하고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을 공고히 했다.
더욱이 김자점은 현재의 권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욕심을 부린다. 간신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김자점은 손자 김세룡을 인조와 소용 조씨 소생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왕실의 왕위 쟁탈전 까지 끼어 들었던 것이다.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즉위하면서 김자점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평소 공신들의 행동을 싫어하던 효종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권시, 김상헌, 이유태 등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급기야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반대하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1650년(효종 2년)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강원도 홍천에 유배당한다.
권력의 중추에서 갑작스레 나락으로 떨어진 김자점은 효종에게 앙심을 품는다.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통해 조선 조정의 북벌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한다.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송시열의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이에 분개한 청나라가 국경에 대군을 배치한 다음 사신을 조선에 보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하지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가 사신을 달래 돌려보냄으로써 조선은 또 한 차례의 호란 위기를 넘긴다.
1651년(효종 2년) 12월 진사 신호와 해원부령 이영이 김자점 일가의 역모를 고해바쳤다.
이 조사 결과 김자점 아들 김식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적인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효종을 끌어내린 다음 귀인 조씨의 아들 숭선군을 추대하려다 계획을 바꾸어 김자점 손자 김세룡을 옹립하려 한 음모가 낱낱이 밝혀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자점은 반정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새로 세울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김자점의 역모가 너무 허술했다.
'김자점 난'이라고 까지 불리는 역모는 어쩜 친청파이자 강력한 정적이었던 김자점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한 송시열등 친명사대주의자들의 음모였을지도 모른다.
어쩟든 그 과정에서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자신의 며느리이기도 한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까지 드러났다.
의금부로 압송된 김자점은 국문을 당한 뒤 12월 17일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때 김자점과 공모한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았으며 손부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아들 김련은 형문을 받던 중 옥사한다. 그의 모친과 처, 첩 등은 모두 노비로 끌려갔다.
여기서 김자점과 공모한 것으로 나오는 귀인 조씨는 역사 전문가들에게 조선시대 궁중에서 최고 악녀를 뽑히는 소용 조씨이다.
소용 조씨에 대해서는 이 앞 편에서 자세히 썼다.
2013년 JTBC에서 사극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배우 김현주씨가 소용 조씨 역활을 실감나게 했다.
경기도 이천군 백족산에 있던 그의 아버지 김함의 묘소와 선산 분묘도 모두 파헤쳐져서 부관참시되었다.
그 후 역적의 가문으로 손가락질 받게 된 김자점의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황해도 해주에 정착한 일파의 후손 중 한 명이 독립지사로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이다.
조선을 전복하려던 최악의 역신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대한독립의 선봉에 썼던 인사가 한 가문에서 나왔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이씨 왕조를 대신해 임시정부를 다스렸으니 300년 된 김자점의 한은 풀렸을까?
이어서 69편 효종의 북벌론과 송시열의 북벌론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사진은 임경업 실제 초상화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