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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1871~195)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 번역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 존 로스 목사(John Ross, 1842~1915)다.
한글 신약성경은 존 로스 목사에 의해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요한복음이 출판됐으며,
1887년 신약전서 예수셩교전서가 번역, 출판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한글 구약성경은 이보다 11년 후인 1898년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가
시편 일부를 번역한 '시편촬요'가 최초였다.
피터스 목사는 1900년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 구약성경 번역위원회 위원으로서
1910년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최근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한
박준서 연세대학교 구약학 명예교수는 올해 초 미국 LA 패서디나의 풀러신학대에서
연구교수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중 피터스 목사가 여생을 보낸 패서디나에서
그의 무덤을 찾아 추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무덤은커녕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패서디나 지역의 공용묘지 '마운틴 뷰 묘지'에서 어렵게 찾아낸 피터스 목사의 묘지는
묘석 하나 없이 잔디와 잡초가 무성한 외진 곳에 있었다.
박준서 명예교수가 직접 손으로 잡초를 헤쳐가며 발견한 평지의 석판 위에는
목사 직함도, 구약성경의 최초 한글 번역자임을 알리는 공적도 없이 이름과 출생,
사망년도만 있었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를 묘소에 세우고 양화진에 안장된 피터스 목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 여사,
에바 필드 여사 묘역에도 피터스 목사의 공적비 설립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한,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피터스 목사 기념강좌'를 개최하고
'피터스 성경연구원' 개설을 준비 중이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는 △회장=박준서 박사(연세대 구약학 명예교수)
△총무=이사야 박사(남서울대학교) △서기=김종윤 박사(순복음대학원대학교)
△회계=박인희 박사(이화여자대학교) △감사=정영호 박사(공인회계사)
△자문위원=김중은 박사(전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노세영 박사(서울신학대학교 총장), 김세윤 박사(풀러신학대학교), 박신배 박사(전 KC대학교 총장),
김은규 박사(성공회대학교), 조확기 박사(한세대학교) 등이 섬긴다.
크리스천투데이는 피터스 목사의 업적과 기념사업에 관한 박준서 회장의 기고를
두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있는 마운틴 뷰 묘지 정문 앞에 선 박준서 교수.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해준 분들은
우리들이 영원히 감사해야 할 '민족의 은인'들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1880년대 중국 심양에서 최초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로스 기념관'을 건립해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구약성경의 경우는 어떤가? 누가 언제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는가?
이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의 업적을 감사하는 기념사업은 고사하고,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구약성경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해 준 '은인'은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목사이다.
한국명으로는 '피득'이라고 부른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시편촬요'를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가 자라났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해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알렉산더 피터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단했다.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난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우여곡절 끝에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를 붙잡으셨다.
양을 치던 아모스를 붙잡아 예언자가 되게 하시고,
다메섹을 향해 가던 바울을 붙잡아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터스 청년을 붙잡으신 것이다.
그곳에서 그를 세례받고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의 발길을 당시 미지의 땅 한국으로 인도하셨다.
▲피터스 목사가 한국어를 배운 뒤 3년만에 번역한 시편촬요(1898)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다(맨 왼쪽). 시편촬요에 수록된 시편 23편(가운데). 찬송가 383장과 75장 가사도 피터스 목사가 작사했다(맨 오른쪽).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
그때나 지금이나 정통파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 경우 그의 가족은 개종한 사람을 집안에서 추방하고,
일체의 혈연관계를 단절시켰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 청년은 유대인 본명을 버리고,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Pieters)라고 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피터스'로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미국성서공회가 파송한 권서(勸書, Colporteur)의 자격으로 한국으로 와서,
최초로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피터스는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타고 났다.
히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라틴어 헬라어와 같은 고전어도 학습했다.
뿐만 아니라, 독어, 불어, 영어, 이디쉬어(Yiddish,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합성어)까지
구사하는 어학의 귀재였다.
여기에는 한국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피터스 청년이 189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피터스는 그 일을 감당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서울에 온 후 3년만에 구약성경 중에서 번역하기가 가장 어려운 책으로 알려진
'시편'을 번역했다. 그가 한국어 운율에 맞는 유려한 우리말로 시편을 번역했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잘 말해준다.
우리가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의 가사는 그가 시편 67편과 121편을 번역한 것이다.
1900년 피터스는 미국으로 가서 신학수업을 받은 후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구성된 구약성경 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뛰어난 히브리어 실력을 발휘해서 구약성경 번역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1910년 마침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글성경 번역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출간된 한글성경을 가다듬어 손질하고 오류가 있는 곳은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개역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성경전서'가 출판되었다.
개역된 구약성경으로 시편 23편을 읽어보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업스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식히시고 자기 일홈을 위하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938년에 완성된 개역성경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을 비교하면,
맞춤법이나 고어체(古語體)만 조금 다를 뿐, 그 내용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1910년에 번역되고,
1938년에 개정된 구약성경은 대단히 잘된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을 말한다.
특히 소리내어 읽으면 우리말의 운율에 잘 들어맞아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
1956년에는 한글 맞춤법에 맞추고, 문장구조를 손질해서
수정한 '개역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잡초와 잔디로 뒤덮힌 피터스 목사의 초라한 묘소.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공로자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만큼, 피터스 목사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피터스는 미국의 신학교에 유학해서 신학교육을 받은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 신학교에서 같이 신학수업을 받던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신혼의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피터스는 구약성경 번역사역에 전념했다.
그런데 서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폐결핵에 걸렸고,
결혼생활을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별세했다.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이나 가족들 중에는 폐결핵이나 풍토병으로 사망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그들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병사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한국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캠벨 여사는 서울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그는 먼저 떠난 아내 엘리자베스를 추모해서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 운동도 전개했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에 의료선교사로 와있던
여의사 에바 필드(Eva Field)와 재혼했다. 필드 여사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불치의 암으로 그가 환자를 돌보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1932년).
그도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봉사했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캘리포니아주 LA근교 패서디나(Pasadena)시에 있는
은퇴선교사 주거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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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한국명 피득) 선교사
신약성경을 최초 한글로 번역한 이가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을 우리 말로 최초 번역한 이는 누굴까?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한국명 피득1871~1958) 선교사다. 그러나 ‘피터스’는 ‘존 로스’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선교사의 이름이 잊혀진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신학자인 박준서 박사(전 경인여대 총장)가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그를 알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열매 중 하나로 최근 피터스 선교사의 전기(傳記)와 그가 생전 최초로 번역했던 ‘시편촬요’(영인본)를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펴냈다. 박 박사는 이 두 책이 우리나라에 피터스 선교사를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란다. 아래는 이 책들과 피터스 선교사에 대한 박 박사의 설명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요약·정리한 것이다. Q. 피터스 선교사(목사)는 누구입니까? A. “피터스 선교사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1898년 ‘시편촬요’)했고, 그 후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선임돼 1937년 ‘개역구약성경’을 완성한 분입니다. 즉 구약성경 한글 번역을 시작했고 마무리 지은 인물인 것이죠. 한 마디로 한국 사람들이 한글로 구약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공로자이십니다.” Q.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A. “몇 년 전, 미국 LA 근교 패서디나(Pasadena)에 있는 풀러신학교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패서디나는 피터스 선교사가 70세에 은퇴한 후 미국으로 가서 말년을 보내신 곳입니다. 평생 구약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피터스 선교사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지역의 목사님들께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게 이렇게 질문을 하더군요. ‘피터스 목사가 누구입니까?’ 몇 달 동안 수소문하고 컴퓨터 작업을 한 결과, 어렵사리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를 찾아냈다. 작은 묘비도 없이 잡초로 뒤덮혀 방치되어 있는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를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묘소를 찾은 후, 한인 목사님 모임에서 피터스 선교사 묘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 한 목사님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에 관해서 왜 교수님이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한국 교계와 사회에 피터스 선교사의 공적을 알리는 것이 교수로서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이것이 2018년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Q. 피터스 선교사의 출생 배경과 그가 한국까지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피터스 선교사는 1871년 제정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삭 프룸킨(Isaac Frumkin)이었다. 어려서부터 유대교 회당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시편과 기도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며 자라났다. 어학에 특출한 재주가 있었던 그는 히브리어에 통달했습니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차별과 박해가 심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피터스 선교사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이삭 프룸킨이 23살이 되었을 때, 그도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이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시작되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향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발길을 동쪽으로 돌렸다. 일거리를 찾아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를 전전하다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그는 교회를 찾아갔다. 정통파 유대인이 교회를 찾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당시 그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독일어는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다. 그가 찾아간 교회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목회하는 교회였다. 그 선교사는 미국인이었지만 마침 독일어에 유창한 목사였고, 그를 찾아온 유대인 청년에게 독일어로 크리스토교에 대해서 2주 동안 가르쳐 주었다. 선교사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이삭 프룸킨은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선교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 그는 새 사람이 된 징표로서 그에게 크리스토교를 가르쳐 주고 세례를 준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라고 개명했다. 그래서 이름이 피터스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 청년이 크리스토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다는 소식을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가 되는 헨리 루미스 목사가 듣고, 동경으로부터 나가사키로 먼길을 달려갔다. 그는 피터스 청년의 세례식에 참석하고, 그에게 한국에 나가 권서로 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피터스 청년은 한국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루미스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895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피터스 청년이 한국까지 오게 된 일련의 사건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히브리어에 능통한 피터스 청년을 택하고, 섭리의 손길로 그를 한국까지 이끄신 것이라고 믿는다.” Q. 이번에 피터스 선교사 전기와 함께 영인본으로 나온 ’시편촬요’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권서로 한국에 온 피터스 청년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신약성경 쪽복음을 파는 일을 했다. 언어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그는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자 한국어에 완전히 능통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구약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권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가 히브리어로 애송하던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예순 두 편의 시편을 번역했을 때 한시라도 빨리 한국 사람에게 구약성경을 읽히겠다는 일념으로 (시편 62편을 골라 뽑아서) ‘시편촬요’를 출판했다. 이때가 1898년이었습니다. ‘시편촬요’는 한국 역사상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구약성경이다. 이로서 우리 민족은 처음으로 구약의 말씀을 우리말로 읽게 된 것이다. ‘시편촬요’가 출간되었을 때 곧 매진됐고, 2천부를 추가 인쇄했지만, 그것도 곧 매진됐습니다. 당시 한국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갈급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다.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선교사의 전기(왼쪽)와 ‘찬셩시’가 수록된 ‘시편촬요’ ©대한기독교서회 ‘시편촬요’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라는 것 외에 몇 가지 중요한 점이 더 있습니다. 우선 피터스 청년이 능숙한 히브리어로 원문에서 직접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영어나 중국어에서 중역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번역했고, 띄어쓰기가 보편화 되기 전, 띄어쓰기를 한 것입니다. 피터스 청년이 한국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구약 책 중에 번역하기 가장 난해한 시편을 유려한 한국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Q. 책에는 ‘시편촬요’ 뿐만 아니라 ‘찬셩시’라는 것도 실려 있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A. “피터스 선교사는 시편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찬송가 가사도 작사했습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시편은 읽는 책이 아니라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그가 번역한 시편을 주제로 17편의 찬송가 가사를 작사했고, 이들은 ‘시편촬요’와 같은 해에 출간된 초기 찬송가 ‘찬셩시’에 수록되다(1898년). 오늘날 한국교회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은 피터스 선교사가 작사한 것이다.” Q. 피터스 선교사가 1937년 완성한 ‘개역구약성경’은 무엇인가요? A. “피터스 선교사는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한국으로 와서, 황해도 재령, 평북 선천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 1926년 구약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을 받고, 통달한 히브리어를 활용해 11년간 구약개역 작업에 헌신했다. 병 치료를 위해 1년간 미국에서 지낸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10년간 구약개역 작업에 몰두한 것이다. 1937년 개역 작업이 완료되었고, 한국성서위원회는 피터스 선교사가 완성한 개역구약성경을 한국교회의 공인된 ‘개역구약성경’으로 공식 선언했다. 그 후 개역구약성경은 새 맞춤법에 따라 고치고 ‘가라사대’와 같은 고어체 문장의 수정을 고쳐 오늘날도 한국교회에서 공인된 구약성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역구약성경이 완성되기까지 한국교회에선 하나님의 호칭, 즉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개역구약성경에서 피터스 선교사는 ‘하나님’으로 했고, 그 후 개신교에서는 호칭이 ‘하나님’으로 확정됐다. (왼쪽부터) 구약 개역 작업 중인 이원모 장로, 피터스 선교사, 레이놀즈 목사.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아울러 개역구약성경을 완성함에 있어 피터스 선교사를 도운, 연동교회 장로였던 이원모 장로의 공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Q. 피터스 선교사의 ‘한센병자 마을 봉사활동’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A. “피터스 선교사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애양원의 전신인 ‘비더울프 한센병자 주거 단지’를 위한 봉사활동이다. 피터스 선교사는 한센병 환자 거주 지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시간이 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해서 설교하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로해주었습니다. 또한 선교사의 박봉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한센병 환자와 가족을 위한 40채의 주택을 건설하도록 후원금으로 지원했습니다.” Q. 끝으로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A. “2018년 12월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가 있는 묘원 추모관에 ‘피터스 목사 기념동판’을 설치했습니다. 그 후 매주 아름다운 꽃으로 목사님 묘소에 ‘꽃봉헌’을 해오고 있습니다.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미국장로교 문서보관소로부터 입수했고, 후손들의 소재도 모두 파악했습니다. 이번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최초의 전기를 비롯해, ‘시편촬요’와 ‘찬셩시’ 영인본을 출간했습니다. 앞으로 서울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피터스 목사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피터스 선교사 설교집(219편에 이르는 설교 육필 원고) 출간, 피터스 선교사 관련 자료 수집 및 출판, 피터스 선교사 기념 강좌 개최, 피터스 선교사 영상물 제작, 피터스 선교사 자료 전시실 및 기념관 건립 등도 추진할 계획입니다.” &&&&&&&& 알렉산더 A. 피터스 선교사 연구 성과에 관한 몇 가지 문제 Ⅰ “정보 넘치고 확산 쉬운 환경일수록 사실이 발견되면 후학들이 부담 없이 바로 잡는 학계 풍토로 변화되길“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이전 크리스토교계에서는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피득 彼得) 선교사를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피터스 목사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우리가 몰랐던 잊지 말아야 할 은인 피터스 선교사의 사역을 재조명하였다. 특별히 그의 구약성경 한글 번역 사역과 문서 선교, 교회 개척 헌신에 대해 널리 알려 한국교회 선교와 교육에 모범을 삼기를 원하는 활동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움직임 이전 2017년 발족된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에서는 피터스 목사 기념비 건립, 그의 설교집 출판,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본인 ‘시편촬요’ 및 찬셩시(초기 한국교회 찬송가 책) 영인본 제작, 전기 집필 및 출판, 관련 자료 수집, 피터스 목사 사료실 및 전시실, 기념성서연구원 개원 등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참여를 요청한 바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학계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연구 성과를 조금씩 내놓고 있었다. 눈에 띄는 연구자를 소개하자면, 『19세기말 서양선교사와 한국사회』를 공저한 유영열·윤정란을 필두로 박용규, 김중은, 고영자, 박정환, 강혜정, 이영미 등이다. 글쓴이 리진만은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여행기를 발굴하며 그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기가 실린 『The Korean Repository』 원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899년 발행 『The Korean Repository』를 발굴하게 되어 이 글을 보내왔다. 이에 본지는 3회에 걸쳐 『The Korean Repository』의 1899년 발행 사실과 피터스 선교사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 사실에 관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Ⅰ. 들어가는 말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彼得) 알렉산더 피터스1) 선교사는 미국성서공회의 첫 번째 ‘매서인’으로 한국에 임명되어 1895년 한국에 와서 한글성경 반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한국에 와 한글을 익혀 4년 만에 최초로 구약성경(시편촬요) 한국어 번역을 한 분이다. 1897년부터 그가 매서전도인 사역을 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번역한 『시편촬요』2)로 구약을 한국어로 번역한 선구자가 된 것이다. 피터스는 189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필리핀 사역을 하던 중, 1904년 한국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 서울 남부지역 선교구를 맡아 전도와 교회개척, 사경회 인도 등에 헌신했다. 그러던 차에 구약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 원전을 잘 읽을 수 있던 그는 번역위원회의 관심을 받았고. 드디어 1906년 10월 3일부터 크램(Willard Gliden Cram)3) 선교사와 함께 공인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어 1910년 공인번역위원회가 구약 한글 번역을 마치는 데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고 한국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이렇게 헌신적으로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 피터스 선교사에 대해 크리스토교인 성도들은 물론 교계의 목회자들, 더구나 선교역사 연구자들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필자는 그 큰 요인 중 하나가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한 미국과 영국, 또는 호주인이 아닌 비주류 국적의 러시아 태생 유대계 매서인이었고, 더구나 초기 미국, 영국 선교사들이 유복한 가정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지만 피터스 선교사는 러시아의 빈한한 가정환경과 내세우기에는 초라한 그의 고향의 고전인문고등학교(Classical Gymnasium)를 졸업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로 인해 초기 매서인으로 미국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에서 사역 당시 선교 관련 신문, 잡지뿐만 아니라 선교사 사회에서도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요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 중 최초로 1898년 구약성경을 번역해 출간했지만, 그가 처음 한국에 도착 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1906년에야 성경번역위원으로 임명을 받은 것이다. 지난해 필자는 ‘매서인’ 관련 책을 발간하며 수십 명의 선교사 사역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교회를 위해 위대한 공헌을 한 ‘매서전도인’이며, 성경번역자이고, 교회개척자인 피터스 선교사에 대해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한 죄송함과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순행 기록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가운데 필자 역시 제일 먼저 소개한 선교사들은 주로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미국 선교사들(존스, 왐볼드, 아펜젤러)이었음을 고백한다. 다행히도 필자는 미공개된 아펜젤러의 순행일기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제주도를 첫 번째로 방문한 피터스 선교사의 여행기록 영인본을 유니언신학대학 아카이브에서 발굴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그의 글이 최초로 실렸던 1899년 발행된 『The Korean Repository』를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또한 2013년 제주 우당도서관에서 발간한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을 번역한 고영자 박사를 통해 피터스의 견문록 후반부 번역본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접하게 된 개신교 선교사 피터스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에 관해 앞선 발표 자료들과 그의 글이 처음 실렸던 『The Korean Repository』에 관한 글을 보며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던 차에 선행연구 자료들 몇 군데에서 오류를 발견하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The Korean Repository』, A Visit To Quelpart, Vol.1, No.10,11,12, April, 1899. 『The Korean Repository』는 1898년 11월 호에서 1년간 정간한다고 공지를 올렸으나, 실제로는 1899년 2월 9일부터 6월 1일까지 매주 목요일 8페이지 분량으로 총 17회 발행됐다. 이 자료는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피터스의 제주 방문기는 1899년 4월 13일 자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에 실렸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물론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자료가 빈곤한 가운데 내놓은 그들의 자료에서 몇몇 오류가 나타나고 있지만, 피터스의 사역과 특별히 그의 제주도 방문기를 연구한 선행연구자들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선행연구자들이 성과를 낸 과정에서 남긴 몇 가지 오류에 대해 공론화하고 바로잡아야 오류에 대한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특별히 필자가 발견한 오류들은 지금까지 피터스 관련 책과 논문을 발표한 한국 크리스토교 역사학계의 저명한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자료에 있는 것이다. 이분들의 유명세와 학계의 권위, 그리고 신진 세대들의 한국적 겸양지심으로 후학들은 선행연구 자료를 무한 신뢰하며, 가끔 원전 확인도 없이 재인용해 2차 자료를 생산했다. 더구나 요즘처럼 정보가 넘치고 확산이 쉬운 환경일수록 사실(fact)이 발견되면 후학들이 이를 부담 없이 바로 잡는 학계의 풍토로 변화되기를 원한다. 기존 자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더 나은 자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람에서 필자는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기술과 그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 기록인 알렉산더 피터스의 ’켈파트(Quelpart)섬 방문‘을 게재한 『The Korean Repository』 소개에 관한 기존 연구 자료에서 발견되는 오류들을 함께 고찰해 보고자 한다. 본 소고에서 필자는 주로 위 연구자들이 기술한 피터스 선교사와 그에 관한 연구의 저본으로 사용한 『The Korean Repository』 영문 잡지, 그리고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방문 기록 연구물에 나타난 오류에 대한 수정 자료를 제시할 것이다. Ⅱ.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彼得)의 켈파트섬(제주도) 방문 “A Visit To Quelpart” 전거 및 1차 자료 2-1. 1899년 피터스에 의해 기록된 제주 방문기 영인본, UTS, Burke Library Archive 2-2. 『The Korean Repository』, A Visit To Quelpart, Vol.1, No.10,11,12, April, 1899. 2-3. 『The Korea Review』, A Visit To Quelpart, Vol.5. No.5~6 / May and June, 1905. 2-4. Kenmure,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July, 1899, p.168. 2-5. 「New Ground」, 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 1900, p.277. 피터스의 켈파트섬 방문 기록의 원전인 위자료 2-1. 유니언신학대학 버크 라이브러리 아카이브(Burke Library Archive)에서 필자가 발굴한 피터스의 켈파트섬 방문 기록(일기)에는 저자 표시도 없이 글의 내용 중 그냥 1인칭 “I”로만 쓰여 있었다. 대학 아카이브의 설명에도 기록 연대는 18XX년으로 표기되어 그들도 이 자료의 저자와 작성 연대가 언제인지 특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제주 방문기 첫날 부분에 제주도를 향해 켄뮤어(Mr. Kenmure)4)와 함께 제물포를 출발한 날짜가 1899년 2월 18일이었고, 첫 기착지 군산에 도착한 날짜가 일요일이라 군산 선교부에 있는 두루(Dr. Drew) 의사와 전킨(Mr. Junkin) 선교사와 함께 현지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는 기술이 있어, 만년력을 통해 피터스가 제주여행을 한 해가 1899년임을 특정할 수 있었다. 위자료 2-2. 『The Korean Repository』 (이하 『리포지터리』)는 미국 북감리교회 한국선교부에서 배재학당 내 미이미활판소에서 발행한 영문 잡지다. 1892년 1월 창간호를 발간했고, 여건이 여의치 않아 2년간 발행을 멈추었다가 1895년에야 아펜젤러와 존스에 의해 1898년까지 월간으로 Volume 5.까지 발행되었으며, 1899년에는 2월 9일부터 주간으로 그해 6월 1일까지 매주 목요일 총 17회 발행되었다. 하지만 『리포지터리』는 1898년 11월 호에서 1년간 정간을 한다고 공지를 올렸다. 이로 인해 1899년 발간된 『리포지터리』를 보지 못한 많은 후대의 연구자들은 1899년 2월부터 6월까지 주간으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의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필자가 소개하는 피터스의 첫 번째 켈파트섬(이하 ‘제주도’) 방문기를 게재한 1899년도 발행 『리포지터리』 소개가 잘못된 정보라고 판단했을 듯하다. 2-4. Kenmure,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July, 1899, p.168. 대영성서공회 총무 켄뮤어의 제주 여행 보고. 켄뮤어는 대영성서공회 부총무 피터스와 1899년 2월 18일부터 3월 25일까지 제주도를 함께 여행했다.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 1차 자료 중 마지막으로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 기록을 재수록한 『The Korea Review』 (이하 『코리아 리뷰』)는 1901년 헐버트(H. B. Hulbert)가 관립한성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창간한 매체이다. 『코리아 리뷰』 Vol.5. No. 5.에서는 글 서두에 왜 『코리아 리뷰』 편집진들은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기를 재수록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아래와 같이 한 후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기를 싣고 있다. “켈파트섬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1899년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소개되었다. 그 기사를 쓴 이는 A. A. 피터즈 목사로 그 섬을 방문했던 몇몇 외국인 중 한 사람이다. 편집 규정으로 우리는 이미 발행된 글을 반복 게재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 그러나 그 소식지의 기사와 주제에 흥미를 느끼고 읽은 독자가 거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번에 과감히 재수록하기로 했다.” 하지만, 1905년 『코리아 리뷰』 편집인들은 피터스의 제주도 여행기를 재게재하며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존 『리포지터리』 Vol.Ⅰ. NO.Ⅹ.(1899년 4월 13일 자)에 첫 페이지부터 무려 4면에 걸쳐 소개된 ‘제주 섬 방문기’를 싣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행 출발 날짜 등이 나와 있고, 또한 제물포 출발 후 첫 기착지 군산에서 만난 군산선교부의 두루 의사와 전킨 선교사와의 만남과 한국인 교회 주일예배 참석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정보가 누락된 제주 섬 방문기 후편만을 『코리아 리뷰』 자료에서 본 사람들은 피터스 선교사가 언제 제주도를 여행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05년 발행된 『코리아 리뷰』에 켈파트섬 방문기에 대한 전거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4월까지 학계와 교계 연구자들의 피터스 자료에 1899년도에 발행된 『리포지터리』 존재에 대해 언급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감리교신학대 역사박물관에서 2009년 발행한 『감리교신학대학교 고서도서목록집』에 “1899.6. 廢刊” 이렇게 간단히 한 줄 소개된 것이 전부였다. 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리포지터리』의 관련 자료를 장서원 박사와 함께 찾던 중, 1899년 발간된 『리포지터리』가 ‘연세대 국학자료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이 자료를 소개하게 된 것이다. [미주] 1) 피터스 선교사는 1871년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Dnipro 지역)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1895년 4월 일본에서 피터스(Albertus Pieters)로부터 세례를 받고 개명했으며, 본명은 이삭 프룸킨(Itzhak Frumkin)이다. 출처: “한인교회는 피터스 목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2) 『시편』이 1906년 언더우드에 의해 번역되기 이전 피터스가 시편 150편 중 62편을 골라 1898년 발간한 개인역 본이다. 3) 크램(Willard Gliden Cram, 奇義男)은 피터스와 함께 1906년 성서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번역위원으로서 잠언, 삼상·하, 말라기, 전도서 등의 번역을 도왔고, 개인적으로 레위기를 번역하였다. 대한성서공회사Ⅱ. 75쪽. 4) 1895년 10월 입국한 켄뮤어는 대영성서공회 총무로서 이듬해 5월 한국지부를 공인받고 성경반포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1898년에는 미국성서공회 매서인 활동을 하던 피터스를 대영성서공회 부총무에 임명해 함께 사역했다. 그는 1905년 4월 20일 밀러가 임시 총무로 선출될 때까지 총무로 근무했다. &&&&&&&&&&&&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자인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승희 목사, 박종철 목사, 김성복 목사) 주최로 지난 8월 22일 서울시 중구 소재 새문안교회 새문안홀에서 열린 이날 심포지엄은 ‘기억해야 할 구약성경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라는 주제로 열렸다. 한교총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위원장 안성삼 목사)와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회장 박준서 박사) 주관으로 열린 이날 포럼은 한글 성경 번역에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긴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의 사역을 재조명하고 그의 한글 성경 번역 사역이 한글의 발전과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포럼에는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 박준서 목사(연세대학교 구약학 명예교수), 주강식 목사(증산로교회)가 발제를 했으며 준비위원장 안성삼 목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가 논찬에 나섰다.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라는 제목으로 발제에 나선 박준서 목사는 “신약 성경의 경우, 최초로 한글로 번역해주신 분은 존 로스 목사이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고, 경기도 용인에 ‘로스 기념관’을 건립해서 그분의 공정을 기리고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면서 “그러나 구약성경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사람을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하고 “그는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로 1898년 시편의 일부를 한글로 번역해서 시편촬요라는 책을 출간했다”고 설명했다. 박준서 목사의 발제에 의하면 피터스 목사(한국이름 ‘피득’)는 1871년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암송하며 자라나서 히브리어에 능통했다. 1895년 5월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당시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였던 헨리 루미스 목사의 권고에 따라 권서(성경을 팔며 전도하는 사람)의 자격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쪽복음’을 팔면서 한국말을 익힌 그는 특출한 어학 능력을 통해 불과 2년 만에 한국어를 완전히 통달하게 되었으며 틈틈이 그가 애송하던 시편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피터스 목사는 예순 두 편의 시편을 한글로 번역하고 이를 모아서 1898년 시편촬요를 출간했다. 또 피터스 목사는 시편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찬송가로 부를 수 있도록 찬송가 가사로 작사해 17편의 찬송가 가사가 1898년 출간된 찬송가집 ‘찬셩시’에 수독되어 있다. 오늘날 찬송가 75장(통47장) ‘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통43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은 피터스 목사가 번역한 시편67편과 121편을 찬송가 가사로 작사한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메코믹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0,1901,1902년 까지 신학을 공부한뒤, 목사 안수를 받고 필리핀으로 갔다가, 피터스 목사는 1904년 한국으로 돌아와 성경번역위원회 위원으로 구약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했고 1911년 최초로 구약 전체가 한글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출간되었다. 많은 교회도 개척 하였다. 박준서 목사는 발제 가운데 피터스 목사의 공로 하나를 소개했다. 박 목사는 “한가지 특이할 것은 개역구약성역이 출간되기 이전까지 한국교회 안에서는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다”면서 “피터스 목사는 개역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호칭했고 이로서 호칭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전했다. 논찬에 나선 안성삼 목사도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구약성경 번역자 A. A. Pieters 목사’라는 제목으로 피터스 목사의 업적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안 목사는 “신약을 한글로 번역한 ‘로스’는 다소 알려져 있음에 반해 무슨 연유인지 구약을 한글로 번역한 피터스 선교사는 한국 교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가장 큰 공로자”라고 평가했다. &&&&&&&&&&&&&&& 우크라이나는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등 다양한 종파가 한 곳에 어우러진 크리스토교 국가이다. 르비브 만해도 동서남북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각기 다른 종파의 교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나도 한 때는 매주 다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게 정말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우크라이나 생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무얼 할까 고민 중 우크라이나 크리스토교와 한국 크리스토교의 관련성을 찾다가 한국 교회사 속에 우크라이나인 선교사와 맺은 뜻밖의 인연을 알게 되어 주보의 교우단상 지면을 통해 소개할까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신약 성경은 ‘존 로스’ 목사에 의해서 1887년 한국어로 처음 번역된 이래 ‘언더우드’ 목사를 통해 1906년에 이르러 ‘로스’의 신약 성경을 대체할 새 신약 성경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구약 성경은 아직 번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미국이나 캐나다 선교사가 아닌 우크라이나 출신의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건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에 의해서다. ‘피터스’ 목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드니프로에서 태어났고, 고전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시베리아 철도 공사장에 일하러 가다가 잠시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게 되었는데, 머무는 동안 그곳에 있는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고 크리스토교로 개종을 하기에 이른다. 그 후 ‘피터스’는 미국 성서공회의 요청에 따라 조선에서 선교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후 ‘피터스’는 조선으로 넘어와 책을 팔며 전도를 하는 권서인(券書人)이 되었는데,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된 구약성경이 없었던 시점이었고, 게다가 ‘성경공인번역위원회’를 통해 구약성경이 출간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틈틈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시편의 일부분을 선정 번역하여 ‘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 후 ‘시편촬요’는 무려 8년 동안이나 유일한 한글 구약 번역본으로 읽히게 되었다. 1906년에 ‘피터스’는 ‘성경공인번역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구약성경 번역에 매진하게 되었고, 마침내 1910년 우크라이나인 목사 ‘피터스’의 손길에서 구약성경이 한글로 출간되는 역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한글로 된 ‘구약셩경젼서’이다. 그 후 ‘성경공인번역위원회’가 ‘성경개역위원회’로 개편된 뒤에 ‘피터스’ 목사는 평생 회원으로 위촉되어 1930년까지 구약성경개정에 헌신한다. 그러다 서울에서 같이 살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당시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구약성경을 번역할 만큼의 능력이 없는지라, 히브리어에 능했던 ‘피터스’ 목사보다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한 위원회는 다시금 선교부에 요청하여 피터스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여 구약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했고, 마침내 1938년에 이르러 ‘개역 성경전서’를 출판하게 된 것이었다. 구약성경이 완전체로 한국에 소개될 수 있었던 건 우크라이나 사람 ‘피터스’ 목사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가능하긴 했을지라도 그토록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피터스의 노력과 헌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번역될 수 있었던 과정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을 들꽃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다. 마치 요나의 이야기처럼 ‘피터스’ 목사가 일본의 나가사키에 머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상상 너머에 존재한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시작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