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읽어주실까 걱정도 되고.. 괜히 눈고생만 시키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냥 읽어봐주세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고요..ㅋㅋ
< 달을 품은 여자 >
1.
「 나물은 이렇게 오물조물 무쳐야 돼요. 왜 반찬 맛은 손맛이라고들 하죠.
이렇게 손으로 무쳐야 제맛을 내거든요. 손 씻기 귀찮다고 일회용 위생장갑을 끼고하곤
하는데 그러면 제 맛이 안난다고요. 알았죠? 앞으론 연우씨도 이렇게 하도록 해요 」
수민이 연우의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 연우를 바라보았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도 연우의 눈은 뚫어져라 그의 손모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오물조물이란 말이 나왔을때 그 오물조물이란 단어가 무엇일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직접 그 의미를 물어볼 순 없었지만, 그의 손모양을 보면서 연우는 대충
짐작 할 수가 있었다.
아, 오물조물이란게 저런걸 의미하는거구나. 손을 모아서 저렇게 조물조물 거리는 것이…
그의 손은 마치 창조자의 손과도 같아서 남자 손에 비해 조그맣다라고도 할 수있는
그 손에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나물 무침이 창조되고 있었다.
거의 다 됐는지 나물의 때깔은 보기에도 군침이 나올 정도여서 순간, 연우는 강렬한 식욕을 느꼈다.
그가 조그만 접시에 다 된 나물을 담으면서 연우를 향해 한번 맛봐볼래 하듯이 그 중 한웅큼을 연우에게
내밀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녀의 집에선 먹어볼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가끔 그녀의 어머니가 봄나물이라고
시장에서 사와 무쳐서 식탁위에 올려도 별로 손이 가지는 않던 반찬이었다.
맛이 어때 하듯이 그가 그녀를 쳐다봤고 그녀는 굿하듯이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서로간에 오가는 무언의 공감. 순간, 따스한 감정의 흐름이 방 안 가득 넘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인 것처럼 맛있었던 점심 후에 쇼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는 별 말이 없었다.
오디오에서는 영화 접속의 주제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도 본 기억이 있는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보면서 연우는 참 많이도 울었었다.
두 남녀가 다시 상봉을 하면서 A lover's of concerto 라는 음악이 나올때는 영화 속의 전도연이
그녀라기도 한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둑터진 강물처럼 스며 나왔었다.
사랑은 그렇게 우연히, 전혀 예상치 않게 복병처럼도 튀어나오는데 그녀의
사랑은 어디에 숨어있길래 이리도 가슴을 에이게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다음날 아침 깨보니 베겟잎이 축축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만의 상념에서 번뜩 정신이 들어 그를 보았을때는 음악도 이미 꺼져 있었고 사위는 조용했다.
연우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창문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연우의 시선이 문득, 그의 손가로 향했다.
저 손. 아까 먹은 봄나물의 향취가 그 손 가득 배어 있을 것만 같았다.
「 아까 점심에 먹은 봄나물 정말 맛있었어요. 근데, 수민씨는 그 나물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어요?
나물을 보면 이건 이름이 뭐고 하고 다 알 수 있냐고요. 」
나물을 집어 먹으면서 연우는 정말 궁금했었다. 이 나물의 이름이 뭘까하고.
그는 이 나물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을까. 그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연우는 어떤 간식이 나올까 조바심 태우며 엄마의 일거수를 지켜보는 아이의 심정처럼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질까 하고 그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글쎄, 몇가지는 알고 있지만, 나도 그 나물들 이름 다를 알고 있진 않아요. 연우씨가 먹은 나물은 엊그제 어머니가
산에서 해오신 것들이거든요. 그냥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말해볼께요.
쇠고비, 달래, 씀바귀, 취나물, 응아리, 산미나리, 참나물, 삿갓나물, 고추나물, 홑잎, 멱취, 드릅,
고들빼기, 산깨나물... 」 그는 손가락을 꼽아보며 나물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손가락을 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연우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몇가지를 빼곤 연우가 첨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다.
그 나물들이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나같이 정겹고 포근한 이웃집 아저씨 갇은 느낌의
이름들이었다. 그녀가 먹었을 나물들의 이름을 알게되자
이미 연우의 위 속으로 들어간 나물들이 그냥 나물이 아닌 쇠고비, 취나물 등등의 자기 본래의
이름으로 바뀌어 다시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하나 하나 수민의 체취로 연우의 마음속에 되새겨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방 안 가득, 어딘가에서 들꽃 향기가, 들풀내음이 풍겨나오고 있는 것만 같아서 연우는
주변을 큼, 큼하고 맡아보기까지 하였다.
집으로 가는 거리는 너무 고즈넉해서 연우는 오늘 일이 다 꿈만 같이 느껴졌다.
2.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20여년 만에 처음 오는 무더위라고 했다.
기상예보에 의하면 오늘 서울의 한낮 최고기온이 38도라고 하였다.
거리를 오가는 모든 사물들에게서 복사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아스팔트를 달리는
모든 자동차들이 지열에 의해 녹은 아스팔트에 파묻혀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 못하는 현상이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연우옆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짧았고, 특히 여자들의 옷차림은 더했다.
짧은 미니 스커트에 배꼽티, 그렇게 입고도 더운지 스쳐지나는 그들의 목덜미, 이마마다 땀방울들이 한웅큼
배어 있었다.
8월의 어느 오후였다.
약속시간은 어느덧 30분이 지나 있었다.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홀로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이 싫어 카페 앞 계단에 앉아있던 연우의 엉덩이가 차츰 저려왔다.
툭, 툭하고 엉덩일 털고 일어난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 속에 철진은 보이지 않았다.
철진은 늘 그랬다. 연우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번이라도 연우보다 먼저 와서 기다렸던 적이 없었다.
매번 그렇게 그를 기다리면서 이게 뭔가, 나는 지금 왜, 무엇때문에 이리도 참을성있게 철진을 기다
리고 있는가 수없이 반문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저만치서 씨익하며 어, 미안 많이 기다렸지 하며
다가오는 철진의 미소에 연우는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곤 하였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였을 것이다. 그때 연우는 처음으로 농촌봉사활동을 다녀왔었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왠지 농활이란 것을 갔다오고 싶었던 연우가 농활활동을 갔다 와서 알게된 사람중의
하나가 철진이었다.
연우네 학교가 가게 된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의 문성이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마을이 산 중간쯤에 자리잡은 곳이라 조금만 벗어나도 개울이 흐르고 연녹의 수림이 우거져 경치가 그만인 동네였다.
해발 250M라고 했다. 문성에서 조금만 더 가면 덕유산이 있고 근처엔 무주 구천동이 있다고 했다.
오이 파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아저씨가 덕유산의 한 지점을 가르키며 연우에게 말했다.
「 저기, 저기 보이지. 저기가 옥녀봉이라고, 고 아래에 폭포가 있는디 고것이 옥녀탕이랑께.
전해져오는 야그에 의하면 거기서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멱을 감고는 다시 올라가곤 했다는 야기가 있은께
학상도 언제 한번 시간내서 가봐. 좋을껴. 」
「 내도 소시적에 한번 갔다온 적이 있는디 물이 월매나 깨끗하고 찬지 한여름에도 춰서 어른들도 오래 못 앉아 있당께.
건 그렇고 학상! 데근허쟈. 에구, 나이가 드니 요런 일에도 이젠 허리가 다 아파. 」하며 아저씨는 허리를 휘휘 돌려본다.
덩달아 연우도 허리를 주무르며 아저씨가 가르켰던 옥녀봉쪽을 보면서 정말 옛날에 선녀가 저기서 목욕을 하고 다시 올라갔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문성리는 주로 밭농사 위주의 마을이었다. 논도 조금은 있지만 워낙 물대기가 어려워 논농사보다는 해발이 높은 기후적
장점때문에 주 수입원은 고랭지 채소였고 간간히 밭에서 오이, 담뱃잎 등을 재배하였다.
이제는 젊은이들은 다 도시로 떠나고 대부분이 노인들이고 청년이라고 해도 대부분이 40대 중반 이상이었다.
아이들은 여느 농촌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했지만,서울서 온 대학생이라는 선입견때문인지, 아님 농촌 특유의 타지
인에 대한 낯가림때문인지 우리가 다가서면 슬며시 피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연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저쪽 근처 어딘가에 숨어서는 그들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연우가 철진과 친해진 계기는 같은 분반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연우는 유소년반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학생이 바로 철진이었다.
그는 천성이 그런지 늘상 웃는 얼굴이었고 그런 인상때문인지 처음엔 모두들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게을렀고 특히 책임감이 전혀 없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자기에게 할당된 일이 있음에도 어딘가로 사라져서는 해가 저물때쯤에야 면면 가득한 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적거리며
들어오는 그의 표정을 보면 내가 왜 그랬지, 아니 다들 뭔 일 있었어요 하는 표정이라서
마치 그의 그 톡특한 표정과 웃음만으로도 그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한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연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그들은 철진이란 사람을 그때 이미 포기했는지도 몰랐다.
연우와 같은 방을 썼던 한 여학우의 말에 의하면 농활대장이 결국 그를 불러냈고 그를 타이르던 선배가 결국엔
주먹을 날리고 말았지만, 그때도 철진은 예의 그 표정으로 멀뚱하니 선배를 쳐다보고 있더란 것이었다.
그의 그런 태연함은 어디에서 근원되며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연우는 궁금해졌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 사람의 내면 깊은 세계에는 어떤 풍경들이 숨어 있을까.
연우는 철진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그의 삶 깊은 곳에 그녀가 들어가 그의 실체를 파악하고 알아내서 철진을
다시 세상속으로, 그들 앞으로 끌어내줘서 더불어 사는 세상의 즐거움을 철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한여름의 뙤약볕은 뜨거웠고 지열만큼 뜨거운 기운이 목덜미 새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농활 이후 철진과 연우는 소위 말하는 CC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철진보다는 연우쪽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했다고 할 수 있었다.
연우 자신이 생각해도 그녀에게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외였지만,
그것은 아마도 연우가 겪어본 적이 없는 그녀와는 너무도 상반된 철진이 가진 모습에의 호기심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진은 현실의 벽 저쪽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는 같은 과 내에서도 특별히 친한 학우도 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 연우처럼 매사에 확실한 걸 좋아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성격이 그에게 이끌릴 만한 점은 전혀 없었다.
연우가 그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그에게 연우가 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연우가 철진에게 보인 관심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연우의 이러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이름 지을수는 있는 것인지.
늦가을의 들판은 저마다의 소산을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산녘은 자신의 신열에 들떠 신음하고 있었지만
연우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 채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는 한 그루 겨울나무였다.
그 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언제 지나갔냐는 듯이.
이듬해 뜨겁던 한 여름날, 연우는 철진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굳이 시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애당초 이별이란 것도 없었을 지도 몰랐다.
다만, 그때도 철진은 모든 인간적인 면이 배제된 웃음만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철진에겐지, 자신에겐지 모를 화가 치밀었고 뜨거운 햇살아래 도심의 분수대는 시원스레 솟아 올랐지만,
연우에겐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만이 보였을 뿐이였다.
연우는 그 해의 여름이 그동안의 어떤 겨울보다도 추웠다고 느꼈다.
3.
봄에 내리는 비치고는 상당히 많은 비가 이틀에 걸쳐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예기치 않았던 비였기에 다소간의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도 있었지만, 지난 겨울부터 계속됐던
가뭄의 해갈에는 큰 도움이 됐을 비였다.
비갠 뒤의 하늘은 참 맑고도 그윽했다. 5월의 어느 하루.
세상은 계절의 여왕이 듯 아름다웠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왠지 붕 뜬듯이 활발하고 상쾌해 보였다.
회사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며 창 밖을 바라보던 수민도 괜히 마음이 설렜다.
이상하게 어려서부터 비가 오거나 비 갠뒤의 시야가 환해진 세상을 바라볼때는 기분이 들뜨곤 했다.
마치 소풍을 하루 앞두고 ,내일 비가 오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잠을 설치던 어릴적처럼
지금 수민의 마음이 그랬다. 이럴때면 마음도 착 가라앉아 그지없이 포근하고 평화로왔다고
하루의 일이 가장 잘 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때가 이런 때이기도 했다.
「 수민씨가 결혼을 하는데 남자가 돈이 없어서 단칸방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정했을때 만약, 수민씨가 여자
라면 어떻게 할거 같아요? 」
「 수민씨와 부인하고 어머니가 함께 물놀이를 갔는데 부인하고 어머니가 물에 빠졌어요. 수민씨라면 누굴
먼저 구할거 같아요? 」
「 있잖아요. 전 최근에 사귀던 사람하고 헤어졌어요. 그 사람은 책임감이란게 전혀 없어 보였어요.
하긴, 제가 좀 까다롭기도 하지만요. 전 그 사람이 술 마시는 것도 담배 피는 것도 싫었구요.
제가 치말 안 입잖아요. 사실은 그 사람이 입지 말라고 해서 안 입었던 거예요. 남자들은 참 이상해요.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죽어라 하지 못하게 하면서 정작 여자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선 하나도 제대로 들어
주는게 없어요. 수민씬 지금 제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해요? 」
내가 뭐라고 대답을 했더라. 참 이상하리만치 당돌한 여자였다. 알게 된지 얼마 됐다고 여자는 수민을 만나기만 하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고 자기 얘길 꺼내며 수민의 생각을 듣고 싶어했다.
연우는 수민의 회사 동료였다. 같은 팀도 아니었고 사무실도 떨어져 있어 모임에서 만나게 되기까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여자였다.
전 직원의 취미활동을 통해 사내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발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내 동아리 활동을 적극 지원하라는 회장의 지침때문에 알게 된
연우는 같은 동아리의 회원이었다.
그가 가입한 동아리는 명칭이 '떠나라, 그대들!'이었다. 동아리 이름으론 좀 우수웠지만
여행이 주 목적인 그들로선 그보다 더 모임의 성격을 알려주는 것도 없을 듯 했다.
그들의 첫 여행지는 지리산이었다.
지리산.
참 유서깊은 산이었다. 그 산세도 산세려니와 해방전후의 분단의 아픔을, 그 상처를 간직한 채
면면히 이어져 온 산. 비록 지리산은 침묵한 채 조용하기만 했지만 지리산 어느 곳에서라도 꼼꼼히
살펴보고 주의깊게만 본다면 그때의 피 맺힌 절규가, 한 품은 영혼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산이었다.
특별히 여행에 관심있는 수민은 아니었지만, 전 직원의 동아리 활동이라는 명목아래 부득이하게 선택한 동아리의
첫 여행지가 지리산으로 결정됐다는 연락을 받곤 내심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했다.
수민으로선 두번째의 산행이었다.
수민이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던 때였다. 입영통지서를 받고 두어달 간을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지고 수민은 친구 1명과 지리산 등반을 갔었다. 그때 이후, 10년만에 다시 가게 된 것이었다.
모두 14명의 인원이 주말에 서울역에서 전라선을 타고 지리산을 향해 출발했다.
가을의 막바지였기 때문에 산행하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날씨였다.
지리산의 등산로는 여러 코스가 있지만, 1박 2일의 여정으로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코스는 장터목 산장을 경유하여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무난했다.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밤을 새워 새벽쯤에야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틀에 박힌 회사 생활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수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떠 있는거 같았고 내려가는 내내 스쳐지나가는 차창 밖을 보면서
수민도 오랜만에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인가.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정말 옳은 것인가.
그 길은 이미 정해졌으므로 수민 자신이 부정하고, 타인이 그 길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해도 수민은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향할 것이다. 안 그러면 수민 자신이 못 견뎌할 것이므로.
「 야, 임마! 너 정말 바보냐. 그건 아냐. 왜 그렇게 지내. 그게 니 일이야. 니 업무에 속한 거냐고.
지금 니 업무조차도 벅차면서… 니 일이 아니면 바로 담당자에게 넘겨야지 . 왜 그일마저 니가 떠맡아서 힘들어하냐고. 」
나도 알아. 하지만, 그게 안되는 걸. 그렇게 하면 내가 더 힘든걸. 내 자신도 이런 내가 한심하지만
나를 믿고 전활 준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걸 거절하고 딴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겠니...
혀 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 말을 수민은 끝내 내뱉지 못했다. 며칠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수민의 최근 생활을 얘기하다 아마도 수민의 요즘 심리상태가 말해졌을거였다.
그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며 그런 수민을 몰아부쳤다. 하지만, 수민은 그런 놈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나보단 상대방의 입장해서 생각해보는, 어쩌면 요즘같은 세상에 적응하기에는 무리인.
가끔은 수민은 자신이 옛날에 태어났었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겠는가. 달리 어쩔 수 있겠는가. 그게 나라면, 내 본연의 모습이라면 내가 감당해 나가야지.
그로 인한 어떠한 부담도 내가 지고 나가고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수 밖에는.
밤바람은 찼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술을 마실수록 또렷해지던 정신처럼 가슴 속 의지만은
더욱 확고해지던 밤이었다.
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천, 수만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 (안도현 '바람이 부는 까닭')
그래, 나를 버리고 머리속에서 생각되어지는 상념들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대로 물 흐르듯이 몸이
따라가면 그것이 바른 길이 아닐까. 어쩌면 최소한 세상 사람들에겐 정도가 아닐지라도 내 자신에겐 떳떳하고 책임감있는
행동이 아닐까. 그걸로 족한데, 내가 만족하는데 왜, 굳이 다른 사람을 의식해야만 하는가.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래, 세상의 중심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그 간단한 이치가 왜 이제서야 확신이 서는가.
산장에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대충 짐을 풀고 정리를 끝낸 그들이 점식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였다.
산 정상여서 그런지 일찍 해가 졌다. 수민은 바위 하날 잡고 앉아서 저 멀리 시선가는대로 생각가는대로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수민의 발 아래 운무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하늘 가운데 천왕봉이 그 운무에 쌓인 채 영겁의 세월을 지내온 위용을
과시하며 무에, 그리 걱정하느냐. 세상 이치 그거 대단한 거 아니란다.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대단하다고들 호들갑을 떨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야. 날 보렴.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높은 곳에 있었겠니.
아니야, 아니란다. 쌓이고 쌓이다보니 지금 여기 이렇게 선거란다. 같은 이치야. 세상사 , 다 그게 그거란다.
조금 더 이익을 보면 어떻고 조금 더 손실을 보면 어떻니. 니가 편하면 그걸로 족한거지. 왜 남을 의식을 해.
그러지 마라. 다 부질없는 행동이란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너 자신을 먼저 흔들고, 버릴 수 있어야지.
너 자신도 못 버리면서 누굴 생각하고 누굴 위한다는 것이냐
고 말없이 수민을 꾸짖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천왕봉을 휩싸고 있던 운무들을 밀어제끼며 붉은 파도가, 온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며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물결더미가 수민을 덮치는 듯해서 수민은 두 팔을 들어 몸을 감쌌다.
휴우, 대자연의 섭리가 이런거구나, 그동안 수민을 괴롭히던 실체의 끝이 조금씩 보이는거 같았다.
4.
천왕봉(1,915m)
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 천왕봉 정상에는 82년 여름에 경남도에서 세웠다는 9.5m 높이의 바위 표지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라고 했던 남명 조식 선생의 말을 한번이라도 정상에 섰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했을 것이다.
지리산은 남한에선 가장 높은 산이었고, 그들이 텐트를 친 장터목 산장은 해발 1,750m에 세워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장이었다.
새벽녘에야 구례에 떨어진 일행은 장터목 산장으로 가는 등산로 아래까지 연결된 도로를 따라 각각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 그곳부터는 장터목까지 등산코스를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거기서 백무동 매표소를 지나 한신계곡에서 좌측으로 하동바위를 거쳐 참샘, 소리봉을 지나는
능선길을 5Km정도를 산행하면 장터목 산장이 보일거라고 매표소 직원은 말했다.
총 9Km정도이며 등정시간은 약 5시간 정도, 하산시간은 3시간 정도가 소요될 거라고 친절한 여직원이 덧붙쳤다.
첨엔 그 정도야, 하고 모두들 대수롭게 여겼지만 막상 등산로 코스에 들어선 일행은 그 가파른 코스에 해발 1,750m에
위치하고 있다는 산장에 과연 그들이 도착할 수나 있을지, 천왕봉 정상에서 그 장엄하다는 일출 광경을 바라볼 수
있을지 반신반의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우리가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가을의 선선한 날씨임에도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흘렀고, 길은 외지고 험해 정상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르다 하산하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얼마나 더 가야되요 란 말이 튀어나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조금만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요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조금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말하는건지, 그 끝은 보이질 않았고 나중에는 다들 포기했는지 하산하는 사람이 그들을 지나쳐도
더 이상 묻는 사람이 없었다. 연우는 간간이 고갤 들었을 때 보이는 등산로 주변을 수놓은 색색의 단풍들과 등산로 옆길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한참을 묵묵히 오르던 그들이 90도 각도의 가파른 코스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는 주저앉듯이 무너져 버렸을 때였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난 더 이제 못 올라간다, 라는 최대리의 탄식 소리가 튀어나오고 모두들 털썩 주저앉아
버렸을때였다.
뒤쪽에서 한 할머니가 지게 위에 맥주 3박스를 지고는 지팡이로 짚으면서 그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 할머니, 지금 저희 따라오고 있었어요? 근데,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
「아, 장터목까지 가는거지. 이게 다 등산객들이 마실꺼여. 근데 다들 뭐하고 있디야. 젊은 사람들이 이게 뭐 힘들다고
그리 맥빠진 얼굴들을 하고 있어. 이 늙은 할미도 오르는 길을 말여. 쯔쯧, 요즘 것들은… 」
그리고선 그 험하디 험한 길을 지팡이 하날 의지해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 였다. 순간, 연우에겐 내리쬐던 태양도 주위의 모든 것이 흑백 무성영화의 정지된 화면처럼
일순 멈춘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자, 다들 다시 올라가 보자고란 말이 들렸고 일행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행중 제일 뒤처져있던 장차장이었다. 인원중 나이나 직급으로도 가장 위였지만, 평소의 그의 성격을 알기에
그의 가입을 알았을때 다들 설마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운동이라곤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가끔 가는 야유회에서도 축구시합을 하는
그들을 보곤 아, 밥 잘 처먹고 배 꺼지게 왠 축구람하며 혀를 차던 사람이었다.
산행중에선 제일 뒤처져서 끊임없이 에고, 다리야 내 다리야. 내가 미쳤지. 여긴 왜 따라와서 이 고생이노 하며 중얼대 그나마 힘든 산행중에
안주거리가 돼줬던 사람이었다. 삶이란 이리도 다양한 거구나. 다시금 산길을 오르며 연우는 생각했다.
그 할머니는 언제부터 이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 가파른 산길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오르내리며 자
식들을 교육시켰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현재의 그들 모습뒤로 점철됐음직한 어머니의 이런 고통과 수고를 알고는 있을까.
연우는 그동안의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았다. 저 할머니에 비해 지금의 내 모습은 얼마나
나태하고 나약한가. 내 스스로 삶을 방기하고 포기하지는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연우는 눈물이 핑 돌며 갑자기 어머니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삶은 이리도 힘들고 치열한 건데, 나는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안이하게 대처해 왔는지.
이젠 감각도 무뎌져 팍팍하기만 한 허벅다리에 무의식적으로 힘주며 올라가고 있을때, 저만치 선두에서 야, 이젠 다 올라왔나봐. 능선이야.
능선!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때서야 모두들 땅에다 처박고 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연우의 이마에서 뚝하고 굵은 땀방울이 대지로 떨어졌다.
가파르게만 보이던 산길이 끝나고 야트막한 능선이 연이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 야, 저 아래를 봐. 이제 거의 다 올라왔나봐. 우리가 올라온 저 까마득한 아래를 봐 보라고. 」
감격한 듯 외치는 같은 팀 화숙의 눈가에선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고, 성급한 누군가는 정상도 아닌데 두 손을 모으고
야호를 불러대고 있었다.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저마다 야호를 외치고들 있었다.
연우도 같이 목놓아 야호를 외쳤지만, 속으로는 한마딜 더 외치고 있었다.
할머니, 고마워요. 저 이제부턴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살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능선길은 아까보단 훨씬 오르기 쉬웠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갈때는 오로지 앞으로만 가야했기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지만,
능선길에선 주변을 둘러보며 갈 수 있는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간사한가
힘들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편해지니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곳곳에 색종이로 모자이크 한 듯한 갖가지 색의 단풍들과 골짝마다 자리잡고 있는 기암괴석들. 능선에서부터의 산행은 여유있었고,
이런거 때문에 산에 오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의 그 속수무책감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사람들이 그냥 산이 있어서 산에 오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곳에 오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뭔가를 향유하고자
사람들은 기를 쓰고 그렇게 오르고자 했던 것이였다.
계속 오르던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고사목들이었다.
야트막한 평지에 이름모를 나무들이 두 팔을 쫙 벌리고 서 있었고, 그 근처에 표지판 하나가 서 있었다.
이 고사목들은 조선 말 폭정을 피해 지리산 깊은 곳까지 숨어온 화전민들이 일대를 불태워 화전으로 경작하고 살아갈 때 불에
타다 남은 나무들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나무화석인 셈이었다.
일행들은 주변의 고사목들을 둘러보며 저마다 고사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난리였다.
회색의 고사목은 잎 하나없는 벌거벗은 몸으로 그나마 남은 가지들을 편 채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 반갑게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웃으며.
세월은 흘렀지만, 그들은 이렇게 살아남아서라도 후세인들에게 그들의 존재를, 그들이 예전에 존재했었음을
알려주려고 여기 서 있는 것인가.
5.
장터목 산장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2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그들이 백무동 매표소를 출발했을때가 7시 무렵이었으니 5시간 걸린다는 코스를 7시간에 걸려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다. 서둘러 남자들은 텐트를 치고 여자들은 늦은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때 수민을 첨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막 점심을 준비하고자 했을때 텐트를 다 치고 난 남자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아, 이런데선 여자는 쉬고 남자들이 식사를 준비해야 제 맛이지라는 말이 나왔을 때였다.
그러나, 섣불리 나선 사람은 없었고, 그때 조용히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사람이 수민이었다.
「여자들은 밥이나 해요. 반찬이나 찌개는 제가 할테니. 참, 산 정상에선 밥이 3층밥이 되기 쉬우니 뜸을
잘 들여야 할거예요. 」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자들 몇이 쌀을 씻으러 가자 얼씨구나 하고 그만 남겨두고 다른 남자들은 다른 곳으로
쭉 몰려갔다. 마치 사전에 입이라도 맞추었다는 듯이.
그들 일행은 14명이었고, 여자는 연우를 포함해 5명, 나머지는 남자들이었다.
그때서야 회원들 연락처를 꺼내본 연우는 수민이 관리팀이고 나이가 33살이란 걸 알았다.
그는 연우의 기억에 서울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별 말이 없었고, 같은 팀원도 없는지 주위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쌀을 씻어온 여자들이 버너위에 코펠을 올려놓고 수민이 있는 주변에 모여들자 연우도 그 틈에 끼어들었다.
다들 나서서 음식을 만들겠다는 수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고, 사실은 연우도 그랬다.
어쩌면 여자들 특유의 알 수 없는 경쟁심리와 질투도 한 몫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 남자가 지금 그들 앞에 혼자 있고, 그 중 몇 명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하자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심리
, 사실 그는 조용해 보이고 조금은 그늘져 보이는 인상빼곤 준수한 편이었다.
「수민씨, 오늘 찌개 이름이 뭐죠. 오늘의 메뉴는 어떤거죠? 」
여자들의 질문에도 아랑곳 없이 수민은 앞에 놓인 야채나 그들이 가져온 캔들을 다듬거나 따는데 열중해 있었다.
그의 모습은 너무 진지해서 누군가가 말을 걸면 그가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만 같아 연우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모든 재료들이 준비됐는지 수민이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저만치 피해있던 여자들이 수민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그가 해논 것들을 보기 시작하였다.
도마 위에는 가지런히 양파와 감자등이 썰어져 있었고, 김치통, 따논 고등어, 참치캔 하나, 고추장 통, 조미료들,
펼쳐진 돼지고기들이 나란히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여자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수민이 그녀들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 오늘의 메뉴는 찌개로는 고등어 매운탕에 참치 김치찌개, 햄 튀김, 그리고 여러분들이 각각 준비해 온
밑반찬들에 특별 메뉴로 본인이 손수 잴 돼지 불고기가 되겠습니다.
불만 있으신 분들은 앞으로 나서 주시기 바랍니다. 불만 있습니까? 」
「없습니다. 」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럼, 본 교관은 제군들이 다 만족하는거로 알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요리로 들어갈테니
구경하실 분은 조용히 구경만 하시고, 교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결코 용납 못하니 다들 주지 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
갑작스런 그의 능청스런 군대 말투에 엉겁결에 군대식으로 답한 그녀들의, 그의 얼굴에도 하나 가득 장난기가 솔솔
배어나고 있었다.
좀 전까지도 춥다며 텐트에 들어가 있자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교관의 명에 충실한 부하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그녀들은 오래 만나온 친구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연우는 새삼 그의 옆모습을 다시 보았다. 어느덧 그의 표정은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고 연우는
그녀가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자잘한 것들은 여자들에게 맡기고 불고기를 재고 있었다.
먼저 제일 큰 코펠에 적당량의 삽겹살을 넣고는 고추장, 조미료, 설탕, 양파등을 넣고는 직접 손으로 버무리기 시작했다.
「어, 손으로 무쳐요. 그럼 손 씻어야 하잖아요.」
「귀찮아도 손으로 무쳐야 맛있어요. 고향의 맛은 장맛이라죠. 어머니 맛의 비결은 바로 손맛이에요. 」
손 씻고 오겠다며 일어선 그의 손이 고추장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늦은 점심이었고, 밖에 나가 먹는 밥이 더 맛있다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더라도 그날 점심은 유독 맛있었다.
김치찌개며 매운탕의 간도 딱 맞았지만, 특히 불고기는 어느 음식점에서 먹는거 이상이었다.
모두들 맛있다, 맛있다하며 밥을 달게도 먹었고 저마다 수민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쑥스러운 듯 멋적은 웃음만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 날 수민은 전원의 제청으로 영광스런 주방장이 되어버렸고, 그 외의 일에서는 열외되는거로 결정됐다.
저녁 무렵이었다. 짙은 안개와 구름 안개를 따라 석양이 지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주위배경속에 자연체들의 음영위로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세상 천지에 결코 인간이 모방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에 감탄하고 있던 연우의 눈에 수민의 모습이 보인건
바로 그때였다.
수민은 홀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노을이 지는 서쪽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주위경관과 너무도 잘 어울려 그도 대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그 곳에 있은 지 오래 된 듯 했다.
무슨 생각을 저리 하고 있을까,
그 무엇이 저 사람을 홀로 저리 깊은 생각에 잠겨있게 했을까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허전하고, 마치 울고있는 것처럼 보여서 연우라도 당장 그의 옆에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감싸주지
않으면 안될거 같은 생각에 연우는 애를 태워야 했다.
6.
지리산을 다녀온 것은 수민의 생활에 있어 커다란 활력소가 될 수 있었다.
어쩜 가장 큰 수확은 연우라는 여자를 알게 된거인지도 몰랐다.
처음 지리산에 갔을때부터 연우에게 관심이 있진 않았다. 그녀는 다만, 수 많은 여자중의 하나.
같은 모임의 한 여자에 불과했었다.
수민의 여자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실은 그에게 여자=사랑이란 공식이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주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시절엔 그에게도 살갑게 다가오고 따르던 여자후배들이 있었지만 그에겐 단지 후배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로
생각해보진 않았었다. 그래선지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고 어느덧 여자 친구 하나 없이 나이는 훌쩍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차츰, 모임을 자주 가지게 되면서 수민은 그녀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명랑하고 활발한 듯 보였다. 수민과는 달리 모든 사람과도 쉽게 친해지는 그녀의 성격은
사실 수민이 가장 부러워하는 그에겐 없는 것이었고, 여러 면에서 수민이 본 바로도 그녀의 취향은 그와는 상반된
면이 많았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모임에서 우연히 수민과 같이라도 있게 되면 끊임없이 자신의 얘기를, 그에 대한 수민의 생각을 묻곤 했다.
한번은 가까운 북한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민과 같이가게 된 그녀가 물었다.
「 수민씬, 사랑을 정의한다면 어떻게 말할거 같아요. 저는 사랑처럼 참 쉽고도 어려우면서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규정할 수 있는 단어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
「 그 말은 맞는거 같네요. 글쎄요… 」
「사랑이란 감정은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 되어야겠죠.
언젠가 저녁 무렵에 집 주변의 공원에 갔다가 나란히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노부부를 보았어요.
예전, 우리 부모님들은 그랬다죠. 데이트 할때 여자는 늘 몇 걸음 떨어져서 따라가고. 우리 어머니도 그려셨다고
하더군요. 요즘 세대들은 너무 쉽게 타올랐다 또 그만큼 쉽게 식는 것 같아요. 이런걸 인스턴트식 사랑이라고
한다죠. 어쩌면 그것은 사랑과 결혼을 별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저는 사랑과 결혼은 하나라고 믿어요.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수반되야 하죠.
그런 점에서 함께 걸어가야하는 길이 아닐까요. 그런점에서 저는 남녀가 나란히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모습은 참 보기좋은거 같아요.
사랑이란 감정은 최소한의 책임감을 전제로 한 결혼의 연장선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요. 그 과정은 빗방울에서 시작된 물이 흘러흘러
결국엔 커다란 대해로 모이는 것과도 비슷하죠. 조그만 물줄기가 냇물로, 강물로 바다로 흐르면서 그 물은 그저 순조롭게
흐르지만은 않을거에요. 흐르다가 바위에도 부딪히고 여기저기서 난관에도 봉착하겠죠.
남녀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이 생기고, 좀 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실망도 하고 그럴거 아녀요. 하지만, 그런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이라는 커다란 대해로 가게 되는거.
왠지 비슷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
「 … 」
이 남잔 결코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못 할거다. 그만큼 단조롭고 남들이 보기에 거창하고 재밋게 사는것 처럼 보이지는
않을거다. 하지만, 삶이란 모험은 아니고 다시 태어나 또 한번의 인생을 살 수도 없는 일.
이 남자의 삶 속에 내가 들어가게 된다면 어떨까.
연우가 수민을 만나게 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연우는 틈만 나면 수민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수민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요리를 맛보고는 했다. 그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또한 그것은 연우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수민에게서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봄에 나는 봄나물들에 식욕을 돋구는 작용이 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미나리 같은 것에는 피를 맑게 하는
정혈 기능이 있으며 양파를 보관할 때 은박지에 싸서 보관을 하면 싹이 나지 않고 물러지지 않게 오래 보관 할 수 있다는
것 등 이런 소소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거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수민을 만나고 그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을 그와 마주하고, 그의 먹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
그녀에게 사랑이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구체적인 수민의 모습, 그녀를 대하는 수민의 행동 하나하나에 사랑이란 감정이 녹아 더 없이 훌륭한 맛을 내는
음식과도 같았다.
7.
연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수민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들이 항상 만나는 카페였다. Tea for two.
수민으로 인해 알게 된 카페였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두사람을 위한 차 정도가 될까
녹차 전문점이고 손님이 오면 직접 향을 맡아보고 차를 선택할 수 있게 샘플 병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처음 이 카페에 왔을때 수민이 말했다.
「 오늘은 안 보이는데 내가 처음 친구랑 여기 왔을때 주인으로 보였던 여자 분위기가 독특했어요.
여기 인테리어가 좀 특이하잖아요. 그 여잔 항상 올때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거든요.
머리에는 리본이 달린 둥근 모자를 쓰고.
대단히 이국적인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여기 분위기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어요.
우리가 그 여자 별명을 뭐라고 지었는지 맞춰 볼래요. 」
「 알프스 소녀. 근사하지 않아요? 」
「 알프스 소녀? 그럼, 하이디? 」
그 여자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긴 여자일까. 그가 말하는 그 분위기란게 어떤 것일까.
그는 그 여잘 어떠한 표정을 하고서, 어떤 행동을 취하며 보고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그 여잘 볼 수있다면 그러한 모습으로 분위길 바꾸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민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 연우씨… 연우씨, 내가 연우씨 사랑해도 될까요.
당신 옆에 내가 항상 있어주고 싶은데 연우씨, 나 그래도 될까요? 」 수민이 느닷없이 조금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누군가가 수민의 말하는 입을 막는 손 틈으로 울려나오는 것만 같았다.
수민이 연우를 지칭해 당신이란 표현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말이 너무도 아늑하게,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아 연우는 수민의 말을 잘 듣고자 몸을 그에게로 더욱 가까이 댔지만 수민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밖에선 비가 오는지 빗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주위가 순간, 고요해졌다.
창 밖에선 비내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차 경적소리도 간혹 들린다.
주위는 너무나도 고요하다.
연우는 방 불을 끄고는 스탠드를 켠다. 가장 약하게 불빛을 조절하고는 오디오를 켰다.
CD 테잎을 넣고는 play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는 방바닥에 쭈그리듯이 앉았다.
조용하게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였다.
연우는 쪼그린 두 다리 사이로 고개를 박고는 움직일 줄을 모른다.
음악은 계속 흐르는데, 연우에게는 열린 창문 사이로 조금씩 조금씩 떠오르는 달이 보이는 듯하다.
달이 조금씩, 조금씩 그 몸을 드러내더니 서서히 연우의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방 안 가득 달빛이 들어찼는지 방 안이 후끈하다.
눈을 뜨면 눈이 부실까봐 아니, 그 달빛이 저만치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연우는 눈을 뜨지 못한다.
연우의 몸이 둥실둥실 달빛을 따라 떠 있는 듯, 너무 가벼워서 마치 마취를 당할때의 기분같다.
연우는 지금 이 느낌이 꿈인지, 현실인지 감이 안 잡힌다. 저 달을 잡아보고 싶다.
저 달을 가슴 가득 꽉 안아보고 싶다. 연우가 두 팔을 벌려 가슴 안에 달이 들어왔다고 느꼈을 때,
어디선가 낯익은 냄새가 맡아졌다.
수민의 냄새, 수민의 향기였다.
* 2002년 어느 여름, 느닷없이 쓰게되다
첫댓글작가 이신가요? 글이 너무 좋은데요. 요사이 다른책을 별로 읽은편이 아니라서.......그내용중에 [A lover's of concerto]는 제가 좋아하는 곡입니다. 5월의 비온후를 생각하면 꼭 맞는 표현이죠. 글 잘읽었습니다. 근데 카페에 올리기엔 너무 깁니다. 나누어서 올려주시면 읽는데 눈이 덜 아플것 같습니다.
첫댓글 작가 이신가요? 글이 너무 좋은데요. 요사이 다른책을 별로 읽은편이 아니라서.......그내용중에 [A lover's of concerto]는 제가 좋아하는 곡입니다. 5월의 비온후를 생각하면 꼭 맞는 표현이죠. 글 잘읽었습니다. 근데 카페에 올리기엔 너무 깁니다. 나누어서 올려주시면 읽는데 눈이 덜 아플것 같습니다.
한번에 읽기엔 좀 그렇죠..^^ 작가는 아니고요... 그냥 좋은 생각들이 떠오를때 그때그때 습작하는 정도... 좋게 읽으셨다니 기분은 좋은 데요..
그렇군요... 저두 재미있게 읽었네요.... 이곳에 꽤 괜찮은 작가님들이 많음이 느껴지네요.. 자연을 사랑하다보면.. 모두들 마음이 예뻐져서 이렇게 근사한 글들이 탄생하는가 봅니다.. 히~~^^근데 정말 눈이 아픈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