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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체(眉叟體)로 쓴 ‘완귀정(玩龜亭)’ 현판
마당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정자는 부드럽되 묵직하게 금을 긋고 기와를 쌓아 올린 듯 너무나 단아하다.
주인의 행장이 그러하였을까.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동정 깃을 여미고 꼿꼿이 앉아있는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 처마 아래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운필의 현판,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완귀정(玩龜亭)’에 눈이 머문다.
한 마리의 올챙이가 넓지 않은 개울 속으로 재바르게 헤엄쳐 나아가는 형상이다.
17세기 실학의 기운이 서서히 잉태하기 시작할 무렵 성장기를 영남에서 보낸 미수는 퇴계와 남명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한강 정구에게 직접 수학했다.
한강 역시 남명으로부터 학적 영향을 크게 받지만 두 학풍을 폭넓게 아우른 대학자다.
남명은 일찍이 완귀정에 들려 그의 아름다운 시 한 수를 현액에 남기고 간다.
미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선배이자 학맥의 조종이라 할 남명이 다녀간 완귀정을 편하게 찾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풍광이 탁 트인 호계천 맑은 물속에서 까불 듯이 자유롭게 노니는 자라를 보고 거북이를 연상하면서 문득 정자의 현판 글을 남기고 싶었으리라.
그는 남명이 먼저 남긴 운시에 매료되어 은근슬쩍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우아하고도 생동감이 넘치는 자신의 필적으로 마치 대구를 달듯이 현판을 남긴 것은 아닐는지….
현판 글을 제자하는 미수는 매우 파격적이다.
먼저 완귀정(玩龜亭)첫 글자인 완(玩)을 거부했다.
음과 훈이 같다하지만 '貦자로 구슬옥(王)을 버리고 조개패(貝)를 대입했다.
쉽지 않은 발상과 접근이다.
앞의 것이 구경하고 논다는 뜻을 지녔다면 후자는 좋아한다(好)는 뜻으로 오히려 의미의 차원을 높여준다.
구경함이 시각에 직접 보여 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좋아함은 그 뒤를 따르는 2차적인 의미가 아닌가. 말하자면 눈으로 보니 좋고 즐겁다는 것이니 완귀의 아호를 딴 정자의 현판을 한 차원 높여 해석하고 그에 따라 제자한 것이라 여겨진다.
‘패(貝)’와 ‘원(元)’을 매우 안정감 있게 병립시켜서 글자의 조형미를 더하고 균형감까지 배려하고 있다.
그에 비해 ‘귀(龜)’자는 마치 물결을 헤엄치고 조잘거리며 노니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는 형상으로 처리하여 전서의 멋을 시각적으로 한껏 끌어당긴다.
빠르게 지나가는 붓끝의 소리가 싸락눈 내리는 소리처럼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다.
해학적인 점을 백분 발휘한 운필이다.
이어서 ‘정(亭)’자는 아주 단순하고 안정감 있게 마무리한다.
마치 큰 나뭇잎 우산을 쓰고 서서 무엇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그려 내고 있다.
앞의 두 글자에 비하여 미동을 더하지 않고 기둥처럼 딱 버텨주는 느낌을 준다.
전서체 운필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세 글자 모두가 일정한 굵기와 수직선을 잘 유지하고 있어 작가의 감정선이 차분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거장의 심장 속에는 개구진(장난스럽게 남을 괴롭고 귀찮게 하는) 구석이 있었던지 가운데의 ‘귀(龜)’자를 골계적으로 처리하여 생동감과 더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글씨를 어떻게 회화적으로 표현할 것인가는 조심스럽고 고된 작업일텐데 미수의 완귀정 현판글씨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미수는 완귀정의 의미와 자연친화적인 여유로움을 현판에 충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미수의 글은 선(書線)이 선명하되 부드럽고 율동적이다.
정자에 올라 풍광과 함께 서체의 향을 듬뿍 뿜어내어 주는 명필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내방객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
(김정식 대구일보 2012.12.26)
완귀정에는 남명이 남긴 시 한 수가 걸려있다. 학맥으로 보면 미수의 스승인 한강의 스승이 남명이니 미수 또한 여기에 편액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완귀정(玩龜亭)은 첫 글자인 ‘玩’字를 사용하지 않고, 희롱할 ‘貦’字를 쓰고 있다. 즉 구슬 옥(王) 대신에 조개 패(貝)를 넣었다. 전자가 구경하거나 놀이의 의미가 있다면, 후자는 좋아하거나 즐긴다는 의미로 뜻이 확장된다. 이곳의 풍광을 본 미수가 재기를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수필(收筆) 부분을 둥글게 마무리하였고, 첫 글자는 좌우를 기대게 하였고, 가운데 글자인 ‘龜’는 대칭을 유지하면서 중심 획을 곡선으로 처리하여 변화를 보인다. 마지막 글자 ‘亭’은 대칭을 이루며 마무리를 하였다. 가운데 글자는 상당히 회화성이 있어 보인다. 정자 위에 자리 잡고 주변을 감상 한 뒤 가슴에 남는 여운을 고스란히 글씨에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조로운 문자는 변화를 주고 복잡한 문자는 단조롭게 함으로써 전체 장법(章法)상 짜임새가 어색하지 않도록 구성한 점과, 원래 문자가 지닌 의미를 살려가면서 문자의 의미망을 확장해 표현한 점 등에서 미전(眉篆)의 새로운 예술성을 살펴볼 수 있다.
(정태수, '미수 허목의 경북지역 전서 현판 연구', 2015)
완귀정 대청 위에는 명현달사(名賢達士)들의 현액(懸額)이 걸려 있어 그 중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유림(儒林)의 별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이곳 완귀정(玩龜亭)을 찾아 정자를 제영(題詠)하여 사운(四韻)으로 읊은 시(詩)가 걸려 있고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의 절구시(絶句詩), 제주목사(濟州牧使)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선생의 시, 가선대부 중추부사(嘉善大夫 中樞副使)를 지낸 대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생의 시와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과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형제를 비롯 도향(道鄕)의 고명한 10여 선비들의 시의 현액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완귀정(玩龜亭)
경상북도민속자료 제20호
기록(記錄)에 따르면 중종 시(中宗時) 대청원 사서(待請院司書), 설서(設書) 등을 역임(歷任)한 안증(安贈)이 밀양(密陽)에서 옮겨오면서 창건(創建)한 집을 효종 4년(孝宗四年, 1563)에 중수(重修)하였다 한다.
완귀정(玩龜亭)은 금호강(琴湖江)의 지류(支流)인 호계천(虎溪川) 기슭에 남향(南向)한 자리를 골라 고정(古定)하였다. 지금도 그 개울에는 물이 있고 붕어가 노닌다고 하나 활기찬 개울로는 보이지 않는다.
완귀정(玩龜亭)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며 정면 3간(正面三間)에 측면 3간(側面三間)의 팔작기와지붕 반륙(半陸)의 누사(樓榭)이며 그 서(西)쪽에 있는 부속가(副屬家) 식호와(式好窩)는 정면 5간(正面五間) 측면 2간(側面二間) 맞배지붕의 집이나 북단 일간(北端一間)은 누(樓)처럼 꾸며졌다.
완귀정(玩龜亭) 일곽(一郭)은 토병(土塀)으로 둘러 싸여 있고 협문(挾門)을 통하여 정침(正寢)에 드나들게 되었고 정침(正寢)에도 방형(方形)의 일곽(一郭)이 구성되어 역시 토병(土병)으로 쌓았다. 각구(各區)는 대문(大門)이 각각 있어서 출입(出入)하게 되었다. 안채에는 행랑채가 대문 좌우로 설비되어 있다.
완귀정(玩龜亭)으로 들어가는 대문(大門) 안에 이르면 반듯한 내정(內庭)에 당도한다. 약간(若干)의 왜색(倭色)이 가미(加味)된 조원(造園)이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한 내정 북변(內庭北邊)에 남향(南向)한 건물(建物)이 있어 완귀정(玩龜亭)이 된다.
정면 좌우(正面左右)로 보이는 어간(御間)의 문비(門扉)가 조화(調和)를 이룬 아름다움에 취(醉)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며 대청(大廳)이 전개(展開)된다.
대청(大廳)은 완귀청 좌우(玩龜廳左右) 협문(挾門)의 각(各) 일간방(一間房)을 제외(除外)한 전역(全域)을 차지하고 있어 매우 넓직한 맛이 짙다.
방(房)의 측벽(側壁)에는 쪽문이 달려 광창(光窓)처럼 쓰이게 되었다. 머름을 받친 것은 정면 문비(正面門扉)와 동일(同一)하다.
측벽(側壁)에서 보면 이 방문과 그것에 이웃하는 마루와는 머름 높이에 낙차(落差)가 있다. 그 낙차(落差)의 꾸밈은 묘미(妙味)를 얻은 득의(得意)한 표현(表現)으로 그 기법(技法)은 주목(注目)할 만하다.
대청(大廳)은 후면 벽(後面壁)과 측면(側面)은 판벽(板壁)이며 바라지창(窓)이 달려있다. 바라지창 밖으로 난간이 둘러졌고 난간 학자각(鶴子脚) 아래 누주(樓柱)가 높직하게 버티고 섰다.
좌우단(左右端)의 누주(樓柱)는 팔각주(八角柱)이나 내진(內陣)의 평주(平柱)는 환주(丸柱)인데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집은 반(半)은 육축(陸築)과 기반(其半)은 누사(樓榭)로 꾸며지는 당정형(塘亭形)을 따르고 있다.
완귀정(玩龜亭) 서편(西便)에 동향(東向)한 건물(建物) 일동(一棟)이 있어 식호와(式好窩)라 편액(扁額)하였다. 정면 5간(正面五間)과 중앙 3간(中央三間)은 방(房)이고 좌우 단(左右端) 각(各) 일간(一間)은 누(樓)가 되어 우물마루를 깔았다. 시영(詩詠) 등의 소연(小宴)을 베풀기에 알맞은 공간(空間)이다. 남북(南北)에 이는 청(廳)은 계절(季節)이나 달의 유무(有無)에 따라 쓰임이 선택(選擇)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풍류(風流)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인(主人)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남북루(南北樓) 중 북루(北樓)는 완귀정(玩龜亭)과 마찬가지로 누사형(樓榭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북벽(北壁)이 완전(完全)히 개방(開放)되었는데 흐르는 개울이 면하(眠下)에 있다.
정침(正寢)이 있는 안채의 일곽(一郭)도 정침(正寢)과 대문행랑(大門行廊)채와 외양간이 부속건물(附屬建物) 1동(棟)이 있는 반듯한 방형(方形)의 대지(垈地)로 이루어졌다.
정침(正寢)과 완귀정(玩龜亭)이 있는 사랑채와의 사이에 낮은 토병(土塀)이 있어 구획(區劃)되었고 여기에 사주간(四柱間)이 있어 출입(出入)하게 되었다.
대문(大門)이 있는 행랑(行廊)채는 지붕이 한가지로 구성되었다. 대문(大門)이 솟을이 아니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집 토호(土豪)의 제택(第宅)의 소박성(素朴性)이 여기에도 보인다.
대문(大門) 행랑(行廊)채는 줄로 판벽(板壁)이 있는 곳간(庫間)으로 구획(區劃)되어 있다. 원래 이것이 중문(中門)이고 그 외곽(外郭)에 대문(大門)채가 또 있어야 격(格)이 맞을 터인데 세거(世居)하는 후손(後孫)들은 별도(別途)의 대문(大門)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고 한다.
이 점은 매우 의심스럽다. 원래의 모습이 지금과 같았었는지 정침(正寢)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門)을 중문(中門)으로 삼는 대문(大門)채의 1동(棟)이 있었던 것인지의 여부는 다시 탐색되어야겠다.
(문화재청 2007.12.19. 13:14)
* 이 현판 글씨는 누가 쓴 것입니까? 아시는 분 댓글 부탁드립니다.
완귀공(玩龜公)의 행적(行蹟)
* 안증(安嶒, 1494∼1553)의 자는 士謙, 호는 완귀(琓龜), 본관은 廣州이다. 성종(成宗)이 승하하던 1494년, 부친 안구의 둘째 아들로 경남 밀양군(密陽郡) 초동면(初同面) 금포리(金浦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시 영남학파의 조조인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은 예조정랑(禮曹正郞)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역임하며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완귀가 태어나던 해 때마침 부친이 별시문과(別時文科)에 급제하여 주위에서는 기뻐하였다.
완귀는 일찍 글을 깨우칠 정도로 명민하였고, 당시의 대선비인 박한주(朴漢柱)의 총애를 받았다. 박한주는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고 탐오와 파당으로 횡포를 자행하는 임사홍 등을 탄핵하다가 능지처참 당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10여 세의 완귀에게 나라의 재목이 되라는 격려서신을 보낼 정도로 그를 인정하면서 아꼈다.
그러나 박한주가 참형을 당한 뒤 어린 완귀는 현실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 심취하였다. 학문이 깊어지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남명 조식(曺植) 등과 교류하면서 왕도정치(王道政治)에 의한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초야에 있던 완귀는 현량과(賢良科)의 천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고, 경상북도로 거소를 옮겼다. 아첨하는 사류들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마침 그의 장인인 최숙강(崔叔强)이 경상도 도사(都事)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저에 머물면서 성리학, 도학, 역학과 풍수에도 관심을 두고 공부에 전념했다. 이 시절 연구한 역학과 풍수학으로 훗날 영천시 도남동에 완귀정(琓龜亭)이란 정자를 짓게 된다.
완귀는 40대 후반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고, 형조좌랑(刑曹左郞)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사서, 설서(司書說書)로 승진하여 훗날 인종이 된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경상도에 은거하면서 민본사상은 인종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하기도 전에 중병을 앓게 되어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인종이 즉위한 지 일 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왕실 외척들의 세력 다툼으로 야기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사직하고 영천 도남동에 은거하며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1553년 향년 60세로 타계하였다.
(정태수, '미수 허목의 경북지역 전서 현판 연구', 2015)
* 공의 성(性)은 안씨(安氏) 관(貫)은 광주(廣州)요 고려대장군(高麗大將軍) 휘 방걸(邦傑)의 후손으로 함안(咸安)에서 시거하신 중시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휘 유(綏)의 10대손이시다. 고조(高祖) 휘는 강(岡)이시고 증조(曾祖)는 숙양(叔良)이요 함안(咸安)에서 밀양(密陽)으로 이거하신 조고(祖考) 휘는 보문(普門)이며 벼슬은 통예원인의(通禮院引儀)이다. 고(考)는 점필재(佔畢齋) 문인으로 청도군수(淸道郡守)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 중종조(中宗祖)에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을 특배(特配) 받으신 휘 구(觏) 호는 태만(苔彎)이신 공(公)의 차자(次子)로 1494년(홍치 갑인년)에 밀양(密陽) 금포리(金浦里)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은 1540년(嘉靖 更子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형조원 좌랑(佐郞)직에 머물 당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벼슬을 그만둔 채 영양(永陽, 현 永川) 도동리(道東里)에 물러나 호계(虎溪) 언덕에 정자를 지어 완귀정(玩龜亭)이란 현액을 거시고 은거하심에 화란을 피하셨다.
광계군(廣溪君) 휘 여경(汝敬)께서 젊은 나이로 낭료(郎僚)로 있을 때 좌랑공(佐郞公)을 형조원(刑曹院)에서 만나 수개월 동안 여사(旅舍)에서 친히 모시면서 공의 동정(動靜)을 엿보시고 공(公)의 수양(修養)된 인품(人品)과 대인 처세(處世)는 진실로 군자(君子)라 하겠다고 광계군(廣溪君) 유문(遺文) 기록에 전하고 있다.
화란(禍亂)이 가신 수년 후 1548년(명종 무신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다시 벼슬길에 올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사서(司書)와 설서(說書)를 역임하시다가 1553년(계축년) 3월 21일 서울에서 세거(世去)하셨다. 호상(護喪)으로 사자(嗣子) 휘 종경(宗慶) 처부(공의 사돈)이신 호조판서(戶曹判書) 지중부사(知中府事)를 역임하신 독재(獨齊) 신거관(愼居寬) 선생과 소시절에 학문을 같이 하던 두터운 친교인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지내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 두 분의 주선 아래 영천 청제(靑堤) 안 화전등(花田嶝) 중턱 유좌원(酉坐原)으로 반장(返葬)하셨다. 배위는 영양최씨(永陽崔氏)인데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인 휘 숙강(叔强)의 따님이시다. 묘갈명(墓碣銘)은 愼齋 周世鵬 선생이 찬하셨는데 왜란에 파손되어 다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선생이 개수(改竪) 갈명(碣銘)하셨으나 오랜 세월에 매몰(埋沒)되어 1863년(철종 14년)에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 선생이 다수 비문(碑文)을 음기(陰記)한 비석이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