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 속하는데, 면적이 채 15㎢가 안 되고
주민 수도 2000명에 못 미치는 작은 섬이다.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38㎞, 항로로 58㎞ 정도 떨어져 있으며 딸린 섬 50여 개를 합쳐도
하의면 전체 면적은 35㎢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면사무소와 농협 등 기관 5곳, 전교생이 스무 명쯤 되는 1개의 고등학교를 비롯한
4개 학교, 보건소와 약방 등 후생시설 10여 곳,
예배당을 비롯한 종교시설 10여 곳 등이 있어 ‘갖출 것은 다 갖춘’ 섬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돌도끼와 고인돌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가 결코 만만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작은 섬이라 하여 그 세월마저 평화롭기만 했겠는가.
고려 말엽 왜구가 창궐할 때는 주민 모두가 뭍으로 소개(疏開) 되었고,
임진왜란 후 본격적으로 사람이 유입되면서는 권력자의 수탈에 시달렸다.
그리고 최근에는 지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천일염이 외국산 소금 앞에 위기를 맞고 있다.
소금이 지역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간척지가 많은 신안군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다(↓).
대한염업조합 등의 국내 천일염 생산 현황에 따르면 전국에서 해마다
약 30만 톤의 천일염이 생산되는데 이 가운데 무려 20만 톤이 신안군에서 생산된다.
그리고 하의농협 등을 통해 판매되는 하의도 천일염
(정확하게는 인근 섬인 신의면에서 생산된 것을 포함)은 7만~8만 톤가량으로
전국 생산량의 4분의 1,
신안군 생산량의 35~40% 가량을 차지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소금은 하의도 사람들에게 쌀 못지않은 수입원이 되고 있고,
지역 경제도 소금값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늘어나는 수입 소금으로 인한 국내산 천일염 가격 하락은
하의도 사람들에게 직격탄이 되고 있다.
때문에 본격적인 소금 생산이 시작되면 하의농협 직원들은 조합원들이 애써 생산한
소금을 팔기 위해 뭍으로 나가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농협이 농산물보다 소금 파는 데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는
하의농협 직원들의 말이 결코 허사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염전이라 하의도에 논이 많을까 염전이 많을까
가늠하며(실제로는 논이 더 많다) 후광리라는 마을에 이르니
염전지대 한쪽에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호가 후광(後廣)인데 바로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을 아호로 삼은 것이니
그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권력의 수탈에 맞서 지킨 하의도의 토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겐 농토야말로 삶의 원천이요 자부심이다.
그것은 하의도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아니, 이들은 토지를 두고 300년 넘게 권력과 맞섰던 통한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그 자부심과 애착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다.
1623년 조선 인조 임금은 선조 임금의 딸인 정명공주에게 공주의 4대손까지
하의3도(하의도, 신의면의 상태도와 하태도)의 농지 20결(약 8만 평)에 대한 세금을
조정을 대신하여 받아먹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4대손까지의 기한이 지난 1720년 경 공주의 후손들은
‘하의3도 전체를 하사받았다’고 주장하며 사유 농지 140결을 포함한
모든 농지에 대해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다.
호조에 세금을 납부해오던 농민들은 졸지에 이중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돼
1723년 소송을 제기했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조정이 바뀔 때마다 민원을 내며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던 하의도의 농민들은
드디어 1870년 소유권을 인정받아 이중 납세의 질곡에서
해방되는 감격을 맛본다.
그러나 이 세월도 불과 29년에 그치고 1899년 모든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된 데 이어
1908년에는 소유권이 권력과 결탁한 정명공주의 8대손 일가에게 다시 넘어가고 만다.
하의도의 민초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소송을 제기해
1912년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공주의 후손들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겨버린 뒤였다.
땅은 돌고 돌아 일본인 소유가 되었고, 하의도 농민들은 온갖 협박과 폭력 속에서도
소작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줄기차게 펼쳤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맞았다.
1946년에는 농민들이 미 군정청의 농지 관리 기관인 신한공사의 징수원들과 충돌했다가
폭동으로 규정되어 진압당한 사건을 겪었고,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농지 무상 환원 청원을 해 1950년 마침내
국회에서 무상 반환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쟁으로 환원 업무가 중단되었는데
정부는 1956년 유상 불하를 결정해 1960년까지 불하 대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그렇다고 이때부터 하의도의 농지가 온전하게 하의도 농민의 것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행정기관의 업무 소홀로 농지 소유권 이전 등기가 되지 않은 것이
1993년에야 발견된 것이다.
소유권 이전 등기가 완료된 때가 1994년이니,
1623년 정명공주의 무토사패(나라에서 받을 토지세를 대신 받음)에서 비롯된
하의도의 농지 탈환 운동은 371년 만에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의도는 이러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2005년 대리에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을 지었다.
이 기념관 옆에는 일제 때 토지 탈환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12년 세웠던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한편 이곳 출신인 김학윤 씨는 최근 ‘하의도 농민운동사’라는 책을 내
전국 도서관에 보급함으로써 하의도 사람들의 농토에 대한 애정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연 많은 하의도의 땅에서는 쌀, 마늘, 양파, 고추, 시금치 등이 나고 있다.
또 최근에는 하의면사무소에서 많은 공을 들여 복분자를 특화 작물로 심게 했는데,
이곳 복분자는 지역에 복분자 술을 생산하는 양조업체가 있어
판로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한다.
해산물은 풍부, 볼거리는 개발 중
하의도는 섬답게 해산물이 풍부하다.
더구나 양질의 개펄이 넓게 펼쳐져 양식업에도 좋은 조건을 지녔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젤로 맛있는’ 낙자(↓이곳 사람들은 낙지를 낙자라고도 한다)나,
‘껍데기가 짱짱한’ 꽃게(↓)를 잡는다. 양식장 면적은 톳(↓↓) 80㏊,
김 333㏊, 미역 40㏊, 전복 46㏊ 등이다.
이 가운데 근래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전복.
전복 양식에는 인공 사료를 쓰지 않고 생다시마나 생미역을 먹이는데,
하의도 인근은 적조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청정해역이어서
좋은 미역과 다시마가 생산된다고 한다.
이 미역과 다시마를 먹고 자란 전복은 육질이 부드럽고 담백하기로 소문나
요즘엔 전자상거래로도 제법 팔려나간다.
하의도를 찾기 전 마침 아는 사람이 있어 연락했더니 그의 첫마디가
“으째야 쓰까, 하의도에는 볼 것이 별로 없는디.
뭣할라고 욕봄시로 먼디까지 올라고 그랑가.”였다.
처음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말은 겸손임이 곧 드러났다.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해 소흑산도로 운둔했던 초암 김연 선생이
1912년 하의도 향림의 요청으로 귀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자
그 위업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건립한 덕봉강당(↑)이 대리에 있고,
앞에 소개한 것처럼 후광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도 있었다.
특히 산림도로를 따라 살펴본 하의도 남서쪽 어은리 일대 해안은 절벽과
여느 해수욕장 못지않은 모래밭이 감탄사를 감추지 못하게 하는 절경이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바닷물도 짙푸르기 그지없는데,
저물녘이면 서해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일몰이 장관이라고 한다.
또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떠있는 대섬도 바위만 보면 그 형상이
사람 얼굴을 닮아 얼굴바위(↓)라 불리지만,
섬 전체를 보면 영락없이 웅크리고 앉은 한 마리 사자 모습이었다.
하의도에는 볼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이제 개발 중이거나 아직 개발을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하의도를 떠나 다시 목포로 가는 배에 올랐다. 하의도 소개 책자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니
연화부수(蓮花浮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모습의 섬이라 하의도라 하였단다.
선착장 부근에는 개펄이 넓어서 바닷물이 썩 맑지 않다.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다고 했던가.
하의도는 탁한 갯물 위에 떠 있는 섬이니 그 이름이 참으로 절묘하다.
(-펌 )
첫댓글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정보 감사 드리며 한번 가보고픈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