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 한 편 올립니다-
내 고향 의성에는 효행을 몸소 실천한 선현들이 수없이 많다. 이 작품은 의성읍 상리리 충효사에 모셔져 있는 정만록(보물 808호)을 쓴 이탁영선생의 효행을 소재로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스토리화 한 작품이다. 1985년 경상북도교육청에서 발간한 ‘경로효친교육’에 수록한 작품으로 ‘의성승감(義城勝鑑)’, ‘의성(義城)의 전통(傳統)’, ‘문소(文韶)의 얼’, ‘義얼의 메아리’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를 참고하였다. |
[동화] 엄동 설한에 돋아난 죽순
-‘정만록’을 쓴 이탁영의 효행 - / 권영호
들판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생각하다
이탁영.
그는 1541년(중종 36년) 의성 고을 상리동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이 된 탁영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늦가을 황금 들판 구경을 나섰다, 고운 단풍으로 몸치장한 서산에 불그스름한 저녁 노을이 장관이었다.
“탁영아! 앞에 바라보이는 들판이 모두 우리 논이다.”
자랑하듯 아버지가 탁영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올해는 풍년입니다 .아버지.”
“누런 들판을 보노라니 저절로 배가 불러오는 것 같구나. 너도 그럴테지?”
한참동안 말없이 들판을 바라보고 있던 탁영이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저는 아버님의 마음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 너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아버지는 궁금하신 듯 다그쳐 물었다.
“들판을 보는 순간 왠지 저의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허허 그래? 그렇담 그 이유를 한번 들어 보자구나?”
탁영이는 또록또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영근 벼이삭들은 하나없이 지난여름 삼복더위를 무릎 쓰고 흘리신 아버님의 땀방울이라고 생각하니 저의 작은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철부지인 줄만 알았던 아들의 대견스러움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처럼 끔찍히 아버지를 생각했던 탁영은 항상 밝고 명랑했으며 겸손하고 예의 또한 발랐다.
그뿐 아니었다. 남달리 명석하고 총명해서 학문이 뛰어나 어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도 마음도 커가는 탁영이를 두고 이웃들의 칭찬은 끊이질 않았다.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다
탁영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 겨울이었다. 관향이 경주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던 아버지께서 객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성통곡을 하며 비통해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혼자서 수백 리 길을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인 의성으로 모셔와 정성껏 장례를 치뤘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달래 드리느라 탁영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난 탁영은 슬픔과 괴로움에 지친 자기 육신은 돌 볼 겨를도 없이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또 큰일이 일어났다. 1591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의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한양으로 북상해 왔던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탁영은 왜놈의 침입에 격분하며 불타는 애국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물론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자자손손 이어 온 이 나라 이 강토를 한 뼘이라도 왜놈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용감하게 진중으로 달려갔다. 비록 초로가 된 51세였지만 젊은이 못지 않는 용기와 지혜를 지닌 탁영은 서둘러 의병을 모집, 군량 조달 등 어려운 일에 직접 가담하여 큰 몫을 거뜬히 해냈다. 평소, 옳은 일에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성품이 전쟁터에서도 확연했다.
탁영은 임진왜란이 평정되었던 1599년까지 7년간 목숨을 걸고 종군하면서 틈틈이 전란일기를 기록하였다. 이것이 현재 정만록보물 제880호인 정만록이다.
바람 앞에 등잔불 같던 나라를 지키기위하여 전공을 세운 탁영에게 조정에서는 큰 벼슬자리를 내리려던 바로 그 때였다.
영예보다는 효행의 길을 택했다.
여든 살 노모는 난을 피해 현재 의성군 옥산면 금학동 선골 산 중에 피난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생사를 알 길 없는 아들 걱정에 어머니께서 점점 노쇠하여 자리에 눕더니, 그만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소식을 인편으로 들은 탁영의 마음 속 갈등은 산보다 더 컸다.
“여보게 어머님의 노환은 어쩔 수 없네. 아무 생각 말고 벼슬을 맡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탁영에게 벼슬길로 나가도록 적극 권유하였다.
“아니야.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모님께 효도한 다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나아가 입신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효경에서 읽은 이 말을 혼자서 되뇌이며 끝내 높은 벼슬자리를 사양한 채 어머님이 계시는 고향인 의성으로 돌아왔다.
노환으로 눈까지 보이지 않는 노모에게 새 광명을 찾아 드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가 치료를 했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노모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탁영은 아니었다. 물고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앞뜰에 손수 양어장을 만들어 사시사철 물고기를 반찬으로 해 드렸다. 그뿐 아니라 늘 즐겨 잡수시던 죽순을 대접하기 위하여 담장 너머 텃밭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탁영의 효심을 하늘이 알았던지 그 추운 엄동 설한에도 파아란 죽순이 돋아났으니 말이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내 어머니를 위해 모든 걸 바치리라’
이것은 밤이면 노모의 침소를 돌봐 드린 후로 입버릇처럼 자신에게 일렀던 말이다. 자식으로서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몸소 행했던 탁영의 효성도 아랑곳없이,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몇 년 후 노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가까이에서 더 오래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침식조차 잊었다. 효성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나날을 보내던 탁영은 1610년 1월 13일 향년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운명을 달리한 그에게는 화려한 꽃상여도 없었다. 그저 조촐한 장례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효행은 구전되어 마른 벌에 불붙듯 고을에서부터 나라 전체에 널리 퍼졌다. 늦게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께서 탁영의 후손에게 곡식과 돈(사곡은전)을 내리시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을 증직하였다.
또한 그의 애국심과 편모 봉양에 지극했던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전사청 충효사가 순조 원년에 탁영의 집터에 세워졌다. 그후 대원군에 와서 ㅇ벗어졌으나 1923년 유림의 발기로 다시 재건되었다.
지금도 의성읍 중리 3리 호현의 선영 하에 고이 잠들고 있는 이탁영은 군민의 가슴에 효심의 불을 당겨주고 있다.
★ 이탁영(李擢英)[1541~1610]
1541년(중종 36) 경상도 의성현 지곡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찰사 김수(金晬)의 진영에서 모병과 군량 조달, 정보 수집과 분석, 작전의 방책을 건의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난이 평정될 때까지 8년간의 전란 일기를 지어 나라에 올렸으며 임금이 직접 『정만록(征蠻錄)』이라 이름을 지어 계하(啓下) 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어머니 봉양에 지극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았으므로 1801년(순조 1) 충효사(忠孝祠)를 세웠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다. 1923년 유림의 발기로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지곡(芝谷)에 충효사를 영건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 정만록(보물 제880호)
임진왜란 때 경상 감사의 참모였던 이탁영이 쓴 일기.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였고, 선조가 책 이름을 정해 주었다. 일반적인 일기 내용뿐 아니라 전황과 교서ㆍ첩보 따위를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한국 국학 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권 영 호 (아동문학가 ․ 수필가)
□ 경북 의성에서 태어남 □ 의성북부초등학교와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 졸업
□ 1980년 기독교아동문학상에 동화 ‘욱이와 피라미’가당선, 2009년 계간에세이문학(.봄호)에 수필 ‘선착순 집합’ 천료
□ 한국문인협회,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새바람아동문학회, 대구에세이문학회원, 의성문협 지부장 역임
(현) 경북문인협회 청소년아동문학분과위원장
□ 지은 책으로 창작동화 ‘날아간 못난이’, ‘봄을 당기는 아이’ 함께 낸 ‘세 그루’‘고향에서 부르는 내 이름’ 등이 있음
□ 의성초, 의성북부초, 군위초, 산성초 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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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동화 한 편 잘 봤습니다. 이 시대 아동들이 꼭 읽어야 할 동화라 생각됩니다.
상리리에 있는 충효사에 충효를 두 가지를 모두 이루었다고 하여 양전문(兩全門)이 있으며
어머니에게 물고기 반찬을 해두리기 위해 만든 조그만 양어장 영모천(永募泉)도 있습니다.
의성 관내 각 학교에서 이 곳을 탐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