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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봉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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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대한민국, 그 잃어버린 65년
무한의주인공 추천 0 조회 52 13.12.24 03: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요즘 나라꼴이 비단 30년 뒷걸음질이 아니다. 안팎을 살피면 건국 시절인 제헌국회 때로, 거슬러 올라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불러들였던 우물 속 개구리다. 미국에게, 중국에게 빌붙다 뒤통수나 얻어맞는 보신주의(補身主義)만 설쳐댄다. 박근혜(朴槿惠)를 비롯해 덜떨어진 속물들의 이중성이 나라를 수렁으로 떨구고 있다. 우릴 대로 우려먹어온 사골국역사이기에 사기꾼 이명박(李明博)이 서울시장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오늘이 내다보였고, 4대강 삽질에 널을 뛰었던 이기심이 지금의 허튼소리들을 미리 들려줬다. 인간이 아니라 영락없이 쳇바퀴만 돌리는 다람쥐 신세다. 원칙이란 뼈를 깎는 자기싸움에서 얻어지는데, 이승만(李承晩)을 띄워서 박정희(朴正熙)를 떠받들며 반대하는 국민은 죄다 종북주의(從北主義) 내모니, 반민특위(反民特委)에게 빨갱이를 들씌워 친일경찰들로 짓밟자마자 소장파(少壯派) 의원들을 옭아맨 프락치사건이 반민법(反民法)을 갈아치웠던 1948년 제헌국회의 판박이가 2013년이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防空識別區域)은 군사대국화의 힘겨루기다. 공해(公海) 하늘에 일방적으로 내세워 주권(主權)은 해를 입지 않는다 한들 조어도(釣魚島) 분쟁으로 날이 곤두선 일본도 발 빠르게 군사력을 키우고 있으니, 그들이 국제사회에서 기득권을 얻기 위해 한반도 평화를 팔아댈 저울질이야말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단언컨대 외세에 기댈수록 통일은 더디고, 남의 집 잔치다. 그들이 입김을 불어넣을수록 잠재가치만 7천조에 이르는 북한의 지하자원을 노린 이권다툼이 따라온다. 자국의 경제를 지필 서구열강의 침입 때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안으로 움츠리다 나라를 고스란히 내어줬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시대만큼 남과 북만이 아니라 여야(與野)가 배배 꼬여 주변 강대국에게 놀아난다.

제발이지 이젠 어떻게 살 것인가로 물갈이를 해야 한다. 대통령이랍시고 국민이 잘 살게 하는 생각 외에는 다 번뇌라고 조잘댔던 박근혜부터 여전히 제 아비 시절에 부르짖었던 잘 살아보세하는 전체주의만 부추기는 공주놀음에 바쁘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어떻게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상대성을 모른다그 시절 새마을운동부터 농가부채를 짓졸랐듯 경제민주화라고 입방아만 찧은 채 오히려 재벌들만 밀어주며, 서민들에겐 빚을 내서 집을 사라니, 줄줄이 금융사를 거느린 그들에게 돈놀이를 시켜주려는 짓이다. 서민들에게 시중은행의 문턱은 지나치게 높다. 농협을 낀 농가부채가 비리와 부정부패로 찌들어 정작 농가경제는 엉뚱한 배만 불려주는 수탈만 당하고 있다. 국가경제가 헐벗는 탓에 국민이 쪼들리는 나라살림은 아니다. 밑바닥 경제인 하루벌이 건설 노동자의 일당을 보면 뚜렷하게 가닥이 잡힌다. 구제금융에 내몰렸던 1998년 이전까지 일반잡부 일당이 지금과 같은 9만원이었으니, 6만원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데 걸린 세월이 무려 16년이다. 그동안 치솟은 물가와 공공요금조차 따라잡지 못한다. 11년째 쉬지 않고 연봉을 올려댄 국회의원들을 비롯해 공기업과 고위공직자며 재벌들의 주머니만 미어터질 지경이고, 그들의 가족수당과 자녀에 대한 학자금 지원은 온 국민을 종부(從富)의 머슴살이로 채찍질해댄다. 최저임금은 온갖 구실로 발목을 잡는 그들이다. 세법개정(稅法改正)도 고르고 너른 소득분배를 위한 경제민주화와 거리가 까마득히 멀다. 국군사이버사령부의 장기간에 걸친 꼼꼼한 여론몰이에도 정치개입일 뿐 대선개입은 아니라니, 그만큼 정당성(正當性)이 없다보니 말장난이나 벌인다. 3년 동안, 그 중에 대선을 앞둔 1년 동안 바짝 몰린 정치개입 자체가 당연히 대선개입이다. 영구집권(永久執權)을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로 둘러댔던 유신헌법(維新憲法)만큼이나 국민을 우롱하는 데 지나지 않다.

 

 

결국 박근혜의 번뇌 운운은 입방아에 그친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일본의 엔저를 밀어주는 대신 우리 기업들은 따라잡기 벅차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신흥국에서 올해 5월과 같은 거대 자본이탈이 일어나면 자칫 65퍼센트에 달하는 외국자본을 떠안은 국가경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어그러진 금융시장에 몸살을 앓는 구조야말로 번뇌 덩어리다. 저축은커녕 가계부채가 역대최고치인데 반해, 비딱한 소득분배 속에서 전체 유통구조를 틀어쥔 기업은 쌈짓돈을 전혀 풀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라고 앉아서 이 기초부실을 다잡을 번뇌를 모른다는 소리나 해대니 국민은 머슴살이인 자본봉건제에서 절대 헤어나지 못한다. 자리에 앉혀둔 허깨비들도 몸뚱이만 2013년에 있지 정신머리는 하나같이 과거를 살아간다. 박근혜는 영락없이 제 욕심에 눈이 먼 욕심쟁이가 망신만 당하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The Emperor's New Clothes)이다. 바람직한 리더(leader)는 항상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연출가와 지휘자가 그렇듯 자신의 밑그림 이전에 먼저 전체를 살피고 다스릴 때 보다 알차게 채워서 드러낼 수 있다. 배우가, 그 연주자가 전체 안에 녹아들어야 작품을 망치지 않는다. 어린 고종(高宗)을 내세워 수렴통치에 나섰던 흥선대원군이 그렇듯 서로 어르고 달래는 그 아비의 가신(家臣)들과 놀아나는 헛늙은 철부지가 따로 없다. 앞섰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도 그 짝이다. 제 아비라 한들 정치는 나랏일인데, 상대성이라곤 없이 받들기만 하니, ()과 사()조차 솎아내지 못하는 마당에 올곧은 국가관은 한낱 그림의 떡이다.

당사자인 남북한이 한반도의 역사조차 맞추지 못한 처지다. 중국에게 동북아 공동역사서를 들먹이는 짓부터 사대주의요, 장장 30년씩은 공들일 국제관계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굳혀서 후대(後代)가 빼도 박도 못하게 떠넘기려는 섬뜩한 효도만 속속들이 드러날 뿐이다. 당사자끼리 반세기는 내다볼 역사관 속에서 차차 나라를 맞춰갈 바탕도 들어설 수 있다. 일부러 남북대화를 가로막을 구실만 꾀어내며 천만 이산가족의 무너진 가슴조차 짓밟으니,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일본만큼이나 우리 역사를 짜깁기하는 중국만 거들어주기 십상이다. 그만큼 저희들 뿌리며 줄기를 싸고도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다. 4대문명을 뛰어넘어 인류 문명사를 송두리째 갈아버린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지로 세계 석학들을 불러들여 으스대도 모자랄 판에 철창을 둘러친 속셈이 아주 빤한 중국이다. 공동 역사서는 그들과 외교정책을 잇는다. 자연히 겉으론 동북아의 갈등을 다잡을 해법(解法) 같지만, 이는 새누리당이 그 관점의 댓글을 외교에서 떠벌이며 미래를 들먹여 장기집권을 노린 꽁수 중 하나다. 반대하면 시대가 달라졌다며 과거로 몰거나 종북이다. 당장 안에서 뭉텅뭉텅 새는 바가지라 중국이나 일본에겐 이미 깨진 쪽박신세다. 중국조차 항일운동의 영웅으로 고고히 섬기는 김구(金九) 선생과 안중근(安重根)을 비롯해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를 허투루 굽어보니,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조차 잇지 못하는 헌법 유린(蹂躪)이다. 목 놓아 울기도 나는 죄스럽다. 헌정질서 파괴로 국가기강 문란(紊亂)을 들쑤시는 집단이 이석기(李石基)와 통합진보당에게 종북 운운하는 아수라장만 서글픈 코미디다. 이 죗값이 후손들에게 힘겨운 짐으로 넘겨질 터라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350여 년에 걸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가 평화로운 통합으로 이끈 힘은 저서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하고 자신을 넘어서야 함을 거듭 짚어준다. 백인들이 과거를 부정하며 맞섰다면 흐름은 전혀 달라졌다. 백인과 토착민들의 대립에 휩싸이고, 그 실망감이 지도력조차 갉아먹기 마련이었다. 누려온 삶을 뺐길까 두려워했던 기득권층을 그대로 끌어안자 백인들도 맞물려서 여느 아프리카 독립국들과 달리 지난날의 잘못을 피가 아닌 올곧은 역사로 다듬었다. 즉 상생(相生)은 세대와 여야를 떠나 자신의 허물을 이겨낼 상대성이다. 살아온 일방주의를 스스로 돌보기는커녕 후대에 짓조르는 우리나라는 가문과 부모며 지역을 가르는 보신주의가 님비증후군(nimby syndrome)을 일으키도록 도덕불감증의 이기심을, 그 기회주의만 치댄다. ()의 대물림이기도 하다. 요즘 세대는 한국전쟁을 겪지 않아서, 배고픔을 몰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잣대로 그 상실의 아픔에 치여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신세타령과 하소연을 늘어놓기 일쑤다. 즉 과거에 매어 세대를 가른다. 자식들만큼은 굶주리지 않도록 나라를 일으켜 놓고, 그 당연한 차이를 신세대가 떠받들어 주기만 바라니, 마땅한 도리라 한들 일방주의 자체가 불통(不通)을 부른다. 건국 이후 1990년 이전은 전체주의로 돌아가서 생활문화가 전혀 달랐던 시절이다. 어른이라고 눈조차 맞추지 못했던 70년대도,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국가원수모독죄를 옭아매 서울대를 수석졸업한 아들까지 연좌제(緣坐制)로 취업조차 못하게 막았던 살인자 전두환(全斗煥)80년대도 아니다. 우리 대중문화가 세계를 누비는 만큼 당당한 제 생각이 나눠지길 바라는 표현의 세대다. 그 표현이 자유의지다. 과거에 묶인 관점만으로 오늘을 살피니, 세계사의 흐름에서 등을 돌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데하는 자기애만 긁어댄다. 긁을수록 상처는 덧나고 그 아픔을 자기연민으로 몰아가는 우민화(愚民化).

내 또래나 그 윗선인 민주화세대도 똑같다. 시대의 당연한 사명에 우쭐거리며 보상을 바라는 자기연민으로 또 세대를 가른다. 그 세대가, 개개인이 스스로 끊고 맺어야지 한()은 드레진 유산이 아니다. 지나친 자기절제(自己節制)로 길들어 시키는 대로,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힘드니까 하며 후진국마다 찌든 수동적이고 종속적(從屬的) 사고요, 40년 넘게 해외로 나간 새마을운동이 우리 그림자도 쫓지 못하는 뼈대다. 되짚어 근대화운동일 뿐, 지금 우리는 거듭 올라설 새로운 정신문화를 지펴야 한다. 한의 잣대라면 지도층만이 아니라 북한주민은 모조리 시뻘건 물을 뒤집어쓴 빨갱이이고, 일본은 대화는커녕 물건조차 결코 쓰지 말아야 할 원수의 나라인데도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함께 살아간다. 어떤 이유이든 그 맥은 상대성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도 상대성을 갖추지 않은 일방주의요, 그에 대한 우리의 분노 역시 상대성이긴 마찬가지다. 올곧은 역사를 추리지 못하는 우리부터 상대성이 시들하다. 과거에 넋을 빼앗겨 동해와 독도 표기가 그렇듯 감정만 들끓다 힘에서 밀리니, 신세대들을 속 좁은 울에 가둔 채 소통을 바라는 이중성이 갑갑증만 부른다. 세상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살아갈 흥()과 정()을 대물려야 한다. 한류의 전체 성격부터 흥과 정이고, 문화예술이 과거로부터 소재(素材)를 개발해 갖가지 작품을 내어놓으며 한도 자연스레 묻어가서 세대와 세대를 잇는 정신문화가 알알이 채워진다. 곧 사회정의를 곧추세운 국민의식이 스스로 피어난다. 그 개발과 표현은 문화예술만이 아니라 나라의 머리인 기초학문을 기르는 기틀이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시쳇말대로 흥을 지피는 세대에게 한을 덮어씌우면 정작 과거가 묻어가지 못한다. 한도 일종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다. 가정폭력이 골 깊은 정신질환을 낳아 93퍼센트가 대물려지듯 울분은 의식과 무의식에 강박적인 피멍을 남긴다. 그 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졸라대는 마음가짐부터 자기연민에 치우친다. 이중성에 찌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로 나대는 재벌과 정치인들이 자기애에 겹겹이 둘러싸여 악악거리다 돌아서면 쉽게 잊어버리는 한의 정서를 우민화로 써먹기도 한다. 국민이 스스로 허술한 나라살림을 부추긴다.

 

 

구세대들이 여전히 미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봉우리로 아는 관점부터 한국전쟁에 틀어박힌 한 내림이고, 사대주의로 어긋난 역사관이다. 분단으로 전쟁에 이르도록 일본에게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라고 떠다밀었던 나라가 미국이다.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필리핀 지배를 확인 받으며 일본의 남하를 막고, 1882년에 맺은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는 외교범죄로 한반도 지배를 승인해줬던 가쓰라 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꼬집으면 대개 구세대들은 나라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에두른다. 우리가 힘이 없었다고 외교조약을 거스를 범죄에 정당성은 결코 들어서지 않는다. 힘의 논리를 따르면 친일파의 목청만 커진다. 한국전쟁도 북한에게 억지 정당성을 세워줘 우리 역사만 갈기갈기 찢기도록 상대성이 없는 일방주의가 힘의 논리이자 구세대의 종속적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중용의 이치를 따라야 할 상대성을 거듭 새겨준다. 자유민주주의가 바로선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단체를 통한 국민의 정치참여로 나라의 투명성을 열린사회로 이끌고, 1퍼센트에게 전체 자본의 90퍼센트가 쏠린 미국의 일방주의도 아니다. 상부와 하부의 간극(間隙)이 클수록 천부인권과 평등은 짓밟히기 마련이다. 사회구조에 통일성이 시뜻하니, 그 자체로 기회의 박탈과 구조적 불통만 커진다. 국민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당선을 위한 공공연한 거짓말로 어르는 정치가 그 간극이자 자기애에 애닮은 한의 대물림이기도 하지만, 역사는 상대성에 대한 가르침인 만큼 단절(斷絶)이 아니라 끊어서 다시 맺어야 한다. 나라살림부터 후대(後代)가 선대(先代)를 섬길 본보기도 아니다. 높은 교육열에 겉도는 도덕불감증이 키운 이중성만 두드러져 그 불신불만이 자연스레 갈등을 부른다.

올곧은 배움일 리 없는 박근혜의 공주생활은 그 수첩에서도 나타난다. 철학과 논리에 밝으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갖으라는 가르침이 있다. 메모는 그 뒷받침으로 기억력은 평소 관찰하고 공부하며 두루 생각해온 사고(思考)의 논리를 다듬어준다. 글재주와 말솜씨가 자연스레 길러진다. 말실수를 막고자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도 즉흥연설은 절대 금했지만, 질의문답(質疑問答)조차 수첩대로 읊는 대화방식은 결국 하고 싶은 말만 해대는 권위의식이다. 방송토론에서 문재인(文在寅) 후보에게 느물느물 코웃음을 치며 과거에 매어 사시네요하고 내뱉었던 말은 역겨운 자기합리화다. 틀에 갇혀 창조경제를 지껄인다. 정말이지 나이를 헛먹은 철부지에게 나라를 내맡긴 국민들 신세만 안쓰럽고, “제가 그깟 댓글 몇 개 달아서 당선 된단 말입니까하는 뻔뻔함에 어떤 원칙을 담은들 줄줄이 겉핥기에 그치는 정책들만큼 중심을 잡아줄 철학이라곤 없다. 창조란 성공의 어머니인 실패를 다독일 개인과 사회의 자유의지 위에 피어난다. 기초학문과 순수예술이 알차게 맞물린 나라일수록 문화선진국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념만 내두르지 정치로부터 경제며 사회 어디에도 알맞은 철학이라곤 없다.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상대성을 갖춘 인생관이 그 밑거름이다. 대화방식조차 자신을 돌아보고 낮추기는커녕 딱 공주놀음이니, 아비만 어른거리는 그 거울에 세계사의 흐름이 보일 리 없다.

 

 

지난날 중국은 난징대학살만 꼽아도 무려 342000여명이 살해당했다. 13세 어린 소녀에 이르기까지 강간과 도둑질은 이루 헤아리질 못하는데, 전투 중 민간인 사망으로 학살을 어물쩍 흘리는 일본에게 조어도를 놓고 맞선 중국이 공해 하늘에서 우리나라만 비껴가리라 내다봤던 머리로 밥그릇 다툼만 벌일 뿐이다. 한 번 꼬투리를 잡히면 원칙은 정당성(正當性)을 몽땅 잃어버린다. 결국 박근혜가 내세우는 원칙이란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이중 잣대다. 누군들 김대중(金大中)과 노무현(盧武鉉) 정부에 실망하지 않았겠는가. 당장 사기꾼 이명박(李明博)에게 쥐어준 국가기관이 선거개입으로 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을 뿌리째 흔들었다. 4대강도 7,80년대에나 벌였던 땅 투기로 돈을 돌리는 전근대적인 사업이자 환경파괴였다.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이 콘크리트를 둘렀던 한강을 되살리느라 진을 빼고도 되풀이하는 허수아비들이다. 온 국민이 금모으기에 나서도록 김대중 정부가 집권 내내 나랏빚에 쫓긴 구제금융을 불러들였던 민자당(民主自由黨)은 지금의 새누리당이다. 세계화사업이라며 42조의 농가부채만 풀어서 무수한 죽음을 불러왔던 살인자들이기도 하다. 세대에 갇힌 정치를 벗고자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고, 온갖 트집과 꼬투리로 개혁에 발목을 잡은 떼쟁이 집단이 그 떠돌이 새떼들이다. 퍼준 돈이 폭탄으로 돌아왔을 뿐이라는데, 금강산관광과 꾸준한 이산가족상봉은 우리 민족이 아닌 남의 잔칫상이었던 모양이다. 얻은 건 그저 당연하고, 잃은 건 아깝다는 푸념 자체가 제 눈에 안경이다. 이산가족이야말로 나라가 보듬을 현대사의 상처다.

우리 입장만 내세우듯 어차피 북한의 핵개발은 지하자원을 팔아서라도 했을, 그들 권력의 생존수단이었음은 소떼가 건너갈 때부터 공공연했던 비밀이다. 비록 마침표를 찍진 못했지만, 내가 박통이 제일 잘했다고 핵개발을 꼽는 이유 역시 식민지였을 당시 영국의 책임으로 이어져 끝나지 않은 국경분쟁에 놓인 인도와 중국에게 핵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비핵화를 북한에게만 들이대는 짓부터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를 거머쥔 강대국의 일방주의다. 제헌국회 시절을 못 벗어난 우리나라 보신주의 보수들의 우민화이기도 하다. 가는 대로 오지 않는 남북관계 자체가 대화를 더더욱 부추기는 당위성(當爲性)이다. 얼추 반세기는 내다볼 분단을 기껏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칼질하는 수많은 골통들 중엔 시인이었던 김지하(金芝河)조차 빠지지 않는다. 그를 여전히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받드는 대중의 관점부터 나는 못내 안쓰럽다. 김지하는 저항시인으로 자신을 알렸던 필명(筆名)이다. 이미 90년대부터 시라곤 쓰지 않은 채 필명에 빌붙어 어쭙잖은 사설이나 내놓는 김영일(金英一)에게 민주화운동은커녕 시대에 대한 사명감은 사라진지 오래다. 대선에서 박근혜를 밀어줬던 까닭을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새 시대에는 어린이와 여자들이 주역이 된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새 시대다하고 주워섬겼다. 새 시대인 구실로 자본주의도 큰 위기에 부딪혔고, 공산주의 가지고도 안 된다하는 가늠자였다.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을 절대 진리로 받든다 한들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로 그 교육을, 자연히 버팀목인 가정(家庭)에서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걷어내려면 여자도 새로운 시대를 맞을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일본에 짓밟힌 19세기 말을 살았던 시대의 사명이다. 그 가르침은 21세기를 넘어 두고두고 써먹을 일반명제다. 무너질 자본주의는 20세기 초부터 슘페터(Schumpeter Joseph)를 중심으로 누누이 다뤄졌던 만큼 북유럽 국가들처럼 슬기롭게 사회민주주의를 짚어오지 못한 채 미국만 빨아댄 우리나라의 뒤만 구리다. 치매가 아니라도 늙으면 어려진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현실순응과 자기연민은 합리화요, 자신을 알아달라는 보상심리이다.

 

 

제 식구까지 내세워 김영일은 우리 아내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총 맞아 죽은 사람의 18년 고독은 특별할 것이라고 했다. 만나서 보니 내공이 있다는 것을 판단했다하고 꺼들댔다. 18년 고독이 고집통으로 굳어진 박근혜의 얼굴이다. 새파란 젊음이이라면 모를까, 이제 마흔 중반인 나부터 살아온 그림자가 얼굴 주름으로 묻어나는데, 61세인 노인네다. 책상물림으로 현실감각이 어린애 같은 글쟁이나 학자들이 종종 있다. 또 글을 읽고 싶은 대로만 꾀어내는 대중도 적지 않은데, 39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은 민청학력 사건에 대해 세월이 많이 지나 무덤덤하다. (보상금)이나 좀 많이 줬으면 좋겠다하는 김영일은 그저 시대에 갇혀 자기애로 골골거리는 늙은이일 따름이다. 90년대부터 지난 세월이나 곱씹는 과거의 유물로 여겼던 나는 아쉬움이라곤 없다. 군사정권 시대가 끝났을 뿐, 군홧발에 짓밟혔던 나라 곳곳을 풀고 맺어갈 개혁이 첩첩산중이었는데, 1990년으로 넘어오자마자 대학가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30년 묵은 욕구불만이 한꺼번에 쏟아진 사회는 저마다 갈등만 층층이 쌓였다. 정치권 스스로 개혁을 일굴 깜냥이라곤 없이 강성 노조에게 휘말릴수록 정경유착만 깊어져 사회정의는 활자매체에서 성인물이 90퍼센트씩 늘어나는 가파른 상업주의를 헤맸을 뿐이다. 때를 놓친 역사는 더 깊은 생채기로 돌아온다. 13년 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부터 방송언론과 재벌까지 사회의 축에 개혁을 빼들었을 때 민주당도, 국민들 역시, 심지어 그의 측근들조차 볼멘소리만 악악대며 비리를 저질렀다. 나도 썩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문재인 의원이 내놓았던 공약(公約)이나 말 속에 김대중과 노무현만 있을 뿐이라는 김영일도 금배지들만큼이나 상식을 모른다. 정책은 디뎌갈 디딤돌이 놓여 있을 때 새로운 약속이 자란다. 지금 우리나라가 다른 뾰족수를 둘 수 없음은 가려운 데를 긁어주기 마련인 공약사항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박근혜를 통해 손쉽게 들춰진다. 도리어 살아온 삶이 약속을 지킬 믿음을 주지 않았다. 경제를 그리 잘 알고 복지를 위할 인물이라면 국회의원 시절 내내 가장 위험부담이 적고 생색내기만 좋은 문화분과를 지키지 않았다. 일부러 온실 속에서 지냈던 것이다. 그 인터뷰에서 안철수(安哲秀) 의원에게 깡통이라더니, 김영일은 숫제 밑 빠진 독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빨갱이로 몰아대니, 박정희와 전두환이 자신에게 감았던 올가미로 합리화만 해댄다. 노인네들에게 흔한 발버둥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마르크스(Marx Karl)와 엥겔(Engel Ernst)의 사상까지 연구해 그 상대성을 드높이는 북유럽 복지국가들도 빨갱이로 내몰 억지소리다.

우리가 민생(民生)정치를 바라듯 나라살림은 국민의 의식을 담아낸다. 곧 우리나라 금배지들의 거울이 국민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면서 정작 나랏일인 정치엔 무관심과 자포자기로 뻗대는 이중성을 정치인들과 방송언론은 누구보다 잘 우려먹는다. 19876·29선언 이후론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개인의 질로 흐름이 달라졌던 만큼 환경인 사회의 체질개선이 시대의 당면과제였는데, 우리는 눈앞의 욕심만 챙기다 10년 뒤에 구제금융만 불러들였다. 지금껏 역사청산과 더불어 치르지 못한 개혁은 부정선거 수사과정에서 검찰이, 촛불은 모르쇠로 종북 몰이에 나선 방송언론이, 의료민영화까지 꼬드기는 재벌이 생생히 보여준다. 아니, 박근혜 정권 자체가 어긋난 역사다. 분단국가인 만큼 국가보안법이 휘두르는 종북 몰이는 우민화의 기본 줄기로 개혁의 당사자인 정부나 재벌과 방송언론만이 아닌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어떤 이유든 스스로 코를 꿰고 있으니, 씌우는 멍에다. 우민화를 벗겨낼 개혁 자체가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열린사회를 따르는 이치이기도 하다. 민주화를 이뤘다는 골통 보수들의 사탕발림부터 국민이 지닌 이기심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헌법에서 내세우듯 평화통일에 이를 상대성을 정치로부터 사회와 교육철학으로 가꿔야 하며, 문화예술의 표현의 자유가 거듭 생각하는 힘을 되비쳐야 한다. 김구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는 남북한이 먼저 공동역사서를 엮어내는 올곧은 민족사관으로 곧 러시아까지 치고 올라올 동북아시아의 긴장구도를 훗날 하나의 한반도가 진정한 독립국가답게 헤쳐 갈 생존과제다. 꺼풀에 그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단물만 빨아대는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저만의 목청을 키운 한반도는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로부터 한반도와 필리핀을 거쳐 베트남까지 이권다툼만 일삼았던 미국의 정체성을 이라크 전쟁처럼 까발릴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송두리째 우물 속 메아리로 가라앉는다. 남북한 긴장관계를 저울질해대며 중화사상에 끼워 맞춘 중국의 짜깁기도 그나마 덜어진다.

 

 

앞으로 10년 뒤, 세계경제는 시장 자체가 빠르게 바뀔 수밖에 없다. 쌍방향방송을 통한 주문제작으로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를 덜어서 식량위기에 맞서야 할 만큼 기후변화와 사막화 못지않게 인구증가가 골칫거리이다. 식량인 옥수수와 콩으로 바이오에너지를 생산하며 곡물가격이 널을 뛴다. 내가 학창시절만 해도 고향 논두렁마다 콩이며 깨를 심어 자급자족했는데, 지금은 수입에 기댄 채 식량자급률은 45.3퍼센트에 그친다. 쌀도 86퍼센트를 밑돌고, 곡물은 23.6퍼센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밑바닥 꼴찌다. 세계최대의 밀생산국인 중국이 수요를 채우지 못해 최대수입국일 만큼 바닥을 드러내는 화석에너지와 환경파괴 속에서 대체에너지인 식량이 국민 개개인만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쥐어짜기 마련이다. 미국은 이미 다국적 기업들이 토지수탈까지 해댄다. 자체 기상위성을 다섯 대나 거느린 소위 곡물 메이저(majors)인 카길사(Cargill)는 토질이 콩 재배에 맞는 아마존 밀림을 벌써 60퍼센트나 들어냈다. 그밖에 미국의 5대 메이저 곡물회사들이 세계시장을 80퍼센트나 독차지해 주무른다. 2010년에 전 세계를 뒤흔든 곡물파동도 있었지만, 비싼 가격으로 경쟁력이 낮았던 바이오에너지 시장에 대기업들이 뛰어들며 수요가 크게 늘어날 추세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며 아직도 미확인 생물이 수두룩한 아마존을 밭으로 갈아버린 짓이 곧 곡물이 몰고 올 식량위기와 시장변화를 나타낸다. 농가를 빚더미로 내모는 우리나라는 무덤만 깊다.

철도와 의료만이 아니라 공기업과 준정부기관도 엄연히 공공기관이다. 교육재단을 거느린 기업들마다 48퍼센트의 세금감면혜택을 누리듯 국민의 기초생활을 일구는 공익사업이라 특별법이 살피는데, 상법을 들이대는 주식회사인 자회사를 들여앉히면서 민영화가 아니라니, 영락없이 운하가 아니라고 했다가 200년 뒤를 내다본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사업으로 눙쳐서 저희들 죄만 빠져나가는 또 다른 4대강이다. 200년씩이나 내다보는 머리라서 연평도(延坪島)는 포격 당했고, 천안함은 증거조차 허접하다. 인천공항을 민영화하려다 쓴맛만 보더니, 철도는 대놓고 그 억지소리에 맞춰 노조탄압을 벌인다. 밀양 송전탑이 그렇듯 의료민영화는 정부만이 아니라 보험을 낀 금융사와 의료기관을 거느린 기업이 뒤에서 손발을 맞춘 정경유착이다. 발밑에 깔린 국민의 기초생활이 박근혜의 원칙이고 그 미래다. 공공기관을 넘긴 돈으로 경제가 숨통이 트인 양 국민을 우롱할 속셈인데, 우리나라에 24시간 편의점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인건비를 줄인 탓이라며 싼 가격으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1년쯤 뒤부터 더 비싸게 팔아댔듯 정권이 새누리당에 넘어간 이후, 국민의 등을 칠 게 빤하다. 10년 동안 종북 타령으로 새마을노래처럼 귀에 못을 박아대려는 짓이다. 비싼 요금에 화장실조차 쓰지 못하는 미국시민들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내년부터 가스와 전기며 상하수도 등 공공요금을 한껏 조이고, 의료를 거쳐 그조차 민영화의 구실로 몰아갈 법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가치관이 어긋나면 세상을 고르고 너르게 보듬지 못한다. 외골수며 외길 인생이란 먼저 자신과의 싸움이다. 미국이 아프리카계 대통령이 연임(連任)을 하면서 여전히 인종차별국가의 딱지를 떼지 못하는 이유야 논문을 쓸 만큼 수두룩하지만, 자본일방주의에 맞물린 피해의식과 박탈감이 기둥이듯 훤히 보이는 늪을 우리는 빠져나가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50여 년을 뛰어넘었는데, 건국 이후 65년을 뒤살피지 못하는 신세만 처량하다. 역사의 가르침을 거스를수록 안으로 좁은 울은 소용돌이만 커진 채 바깥인 세계사에서 느려져 4대강처럼 썩을 뿐이다.

 

 

강이 썩고 물길이 바뀌면 자연에 아우러진 아름다운 풍경만 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한류가 담아낸 우리네 멋도 사회 환경에 시름겨운 또 다른 울분으로 물고기 떼처럼 허옇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고, 문화 역시 사회의 생리에 길든다. 일명 4대중독법으로 전체 한류시장 중 85퍼센트나 차지한 게임을 내치는 정부가 지나친 노출이 판치는 연예계를 건들지 않은 까닭조차 프로스포츠로 국민의 관심사를 돌렸던 전두환의 대물림이다. 지금껏 적자에 허덕이는 기업들이 자기희생을 알아달라는 배경이기도 하다. 1967동베를린 사건으로 세계 5대 작곡가인 윤이상(尹伊桑) 선생을 옭았다가 2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해 해외만방에 망신살이 뻗쳤듯 그들과 함께 즐기는 문화를 건들수록 한국사회로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세대의 반발만 키울 부담감부터 큼직하다. 오히려 한류가 뜰수록 저희가 미래라고 부풀릴 또 다른 꽁수다. 세계최고인 고등교육 이수률과 뛰어난 민족기질이 연꽃들을 피고지고 또 피어낸들 사회 풍토로 깔지 못하면 당장 몸통에 맞출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적자원생산성이 턱없이 낮다. 그에 비해 2010년에 서울대와 직업능력개발원이 공동 조사한 이른바 인재개발경쟁력에서 100점 만점으로 1위인 노르웨이(72.26) 뒤를 스웨덴(71.99)과 스위스(69.38)가 차지했고, 한국은 48.03점을 받아 20위에 올랐다. 공정성이 의심스러울 만큼 뜻밖에 높은 점수였다. 미국(58.03), 일본(52.20)도 우리보다 앞섰다.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Jr) 대통령이 꾸준히 띄워주는 우리 교육은 돈을 돌리고, 인재를 기를 나라살림의 밑천으로 자국국민들이 품길 바라는 높은 교육열이다. 그들의 최대 수출품이 고등교육에서 돌아가는 자체 내수시장에 있다. 유학 중인 학생이 작년에만 764,495명으로 등록금과 수수료며 생활비만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총 307억 달러를 썼다. 정부보조금 89억 달러를 빼도 218억 달러나 순이익이었다. 2007년에 비해 꼭 50퍼센트가 뛸 만큼 미국의 효자상품으로 내수를 굴려준다. 중국과 인도에 이어 우리나라도 72,295명의 유학생이 머문다.

우리의 교육은 후진국과 신흥국에나 먹힐 수동적 종속주의다. 교육열이 높은 나라 중에서 가까이 일본은 시스템조차 우리와 비슷하지만, 상업소비문화의 천국으로 불리며 어느 문화선진국도 그 방법을 옮겨가지 않는다. 수요와 생산의 법칙이다. 1986년부터 일본에 건너갔던 미국의 34개 대학들부터 죄다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발을 뺐다. 사회의 바람과 맞지 않았다. 우리는 정보통신(IT)과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 앞선 기술은 그 자체로 먹히지만, 한때 미국 디즈니사(Disney)의 하청을 86퍼센트나 받아낸 업체들이 1995년 부천시의 만화영화육성 10년 계획으로 내놓은 작품들마다 죽을 쒔던 까닭은 브랜드가치(brand value) 이전에 흥미로운 시나리오와 걸맞은 캐릭터(character)를 내놓을 창의력이, 그 개발철학이 한참 뒤쳐졌기 때문이다. 2년 만에 월급조차 주지 못해 거덜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하청업체로 돌아서곤 했지만, 저임금인 동남아에 밀려서 일거리가 바싹 줄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만의 상품을 내놓아야 했다. 만화 관련 사업은 뽀로로두리둥실 뭉게공항이 그렇듯 창의력을 철저한 시장조사로 걸러내야 한다. 상품가치와 시장의 성격은 서구 생활문화로 바뀌며 선생들이 갈수록 학생들을 상대하기 어렵듯 세대 갈등의 최전방이다. 일본은 기능주의로 뭉뚱그릴 수 있다. 우리는 답습형인 데 반해, 서구는 정치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자유로 토론형을 끌어간다. 흔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한 권의 책을 쓸 만한 인성(人性)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강의를 쫓아가지 못하는 대학새내기들이 절반을 웃돌 만큼 인과적인 연합사고와 거리가 멀다. 우스갯소리로 미국에서 우리나라처럼 가르치면 총에 맞는다.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며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대자보를 막는 교육부와 일선 학교들이 교육관을 넘어 철도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정치관이다. 자기연민에 기운 보신주의가 기회주의로 설쳐온 대한민국의 역사다. 보고 듣는 매체들에 둘러싸여 중학생도 일그러진 세상에 꿈을 비튼 채 입바른 소리만 나불대는 어른들의 두 얼굴을 비웃기 쉽다. 65년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있다. 일제강점기 36년을 풀어서 한반도 독립인 통일을 맺기 위해 너나없이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개혁은 생활 속에서 자기로부터 일으킬 혁명이다. 우리가 나락으로 떨어질지, 홍익인간의 나라로 거듭날지 국민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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