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와의 대화] 김진성 교무- “제중의 실적 이루려면 공부가 밑받침 돼야”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원기109년(2024), 원불교 중앙총부 건설 100주년을 맞아 영모전 잔디광장에 들어선 ‘새미르 1924’ 역사전시관. 이곳에서 익산성지 100년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사진이 전시됐다. 이 중,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을 훌쩍 넘긴 35년여 교단사에 중요 행사 때마다 그의 손길과 흔적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며 회상에 젖는 김진성 교무(장유교당).
김 교무는 원기73년(1988) 원불교창립 제2대 말 성업 기념대회 무대디자인을 시작으로, 3년 뒤 개최된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 무대디자인을 설계하고 시공·감독했다. 이어 정산종사와 대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대법회까지, 소태산 대종사와 두 분 스승의 100주년 무대디자인도 총괄했다. 스승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의 시간이었고, 보은의 기쁨이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때의 사진을 바라보는 김 교무의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가득하다.
원기79년(1994) 교단 초유의 대사식(대산종사) 무대디자인과 감독도 교무님이 하셨지요?
“그때 제작된 종법사 휘장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어요. 종법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심볼마크로 자리 잡았다고 할까요. 이후 2번의 대사식(좌산상사·경산상사)과 대산종사 발인식 무대디자인도 제가 맡았습니다.”
그가 교단 시각디자인에 발을 딛게 된 계기는 원기69년(1984) 예비교무 시절이다. 원청 20주년 기념대회 포스터를 디자인해 준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교단의 굵직한 행사 포스터와 각종 북(책)디자인을 하게 됐고, 당시 좌산종법사는 중앙총부 법회 때 김 교무를 무대에 세워놓고 “교단의 신용리 시골문화를 서울 수준의 세련된 문화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라는 칭찬을 했다고 한다.
시각디자인과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교무님이 어떻게 출가를 하셨나요?
“미대에 진학할 계획이었는데 또래 친구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생사문제에 의심이 걸렸어요.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죽어야 하는 나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때 미술학원에 다니는 여학생을 통해 김해에 원불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교당을 찾았습니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에 쪽진 머리의 여성 교무님을 처음으로 뵙고 대화하다가 축소판 <원불교교전>을 선물 받게 되었어요. <대종경> 천도품을 읽으면서 생사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죠. 그때 교전을 선물해 준 故 안정진 교무님이 추천교무님이십니다. 그래서 미술의 꿈을 접고 교무의 길을 선택했어요.”
원기61년(1976)에 영산선학대학교(당시 영산선원) 수학을 시작으로 원광대 동양대학원 원불교학과, 시각디자인 학부과정을 거쳐 원광대 대학원 박사과정(서양화전공)을 수료하기까지 끊임없는 배움이 오늘의 김 교무를 있게 했다.
김진성 교무의 작품인 원청 20주년 기념대회 포스터.
교립학교 법당교무로 10년을 근무하고 교화훈련부로 발령을 받으셨네요.
“당시 교무과장 업무분장에 ‘남자교무제복 추진’이 있었어요. 남성 교무의 제복 추진이 확정되지 못하고 7년째 추진 중이었습니다. 부임 첫해 여론조사를 하고 자문을 구하는 등 집중적으로 업무를 추진했어요. 최현천 교무님의 아이디어를 응용해 지금의 남성교무 제복이 확정됐습니다. 당시 좌산종법사님의 숙제를 풀어드린 보람이었지요.”
이후 공익복지부에 근무하면서 15층 건물의 ‘원광메디컬센터’ 신축공사 업무를 맡게 된 김 교무. 당시 박혜철 공익복지부장의 지원 속에 원광한의원 지분을 가진 기획실 오도철 교무, 삼동원 김혜봉 교무의 협력과 원광한의원 터전을 지켜준 김성은 교무의 공력에 힘입어 준공 후 임대까지 모두 완료, 교단의 큰 수입원이 된 일도 큰 보람이다.
이후 교화현장 19년의 보람도 크시지요?
“첫 부임지 남중교당에서 2년간 살면서 교당 신축에 조력했고 수많은 교당 업무를 보면서 바쁘게 살았어요. 이후 교화현장은 ‘고된 시집살이 살고 온 며느리가 이후 살림은 수월하듯’ 넉넉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웃음)”
김진성 교무의 작품인 소태산 대종사 탄생100주년 기념대회 무대.
설교할 때 영상을 활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프레젠테이션을 활용해 <정전>을 55개 강좌로 설교하면서, 관련된 사진 자료들이 교리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에 기반해 <대종경> 속 인물, 선진이야기, 소태산 대종사님과의 대화 등을 전달하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교도님 종재식 때 고인의 생애를 영상으로 편집해 유족에게 감동을 전하는 일도 영상 활용의 일환입니다.”
김 교무는 <경남도민일보> ‘종교인단상’ 칼럼 필진으로 5년째 50회 이상 원고를 게재하고 있다. ‘원불교’를 지역에 알리는 노력도 ‘교화’를 위한 김 교무의 정성심이다.
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교역에 임하고 있는데 향후 계획을 전하신다면?
“제중의 실적이 없는 공부는 빈 껍질입니다. 제중의 실적을 이루려면 공부가 밑받침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습니다. 오직 소태산 대종사님의 회상에서 교법을 만났으니, 일생의 꿈이었던 그림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림도 그리면서 선진님의 인물화 작업을 하고 있으니 퇴임 이후에도 이어갈 사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단 제4대의 시작점에서 산적한 교단적인 현안들은 ‘잠깐 가린 안개’일 뿐, 햇살 한 줄기에 모두 사라진다고 말하는 김 교무. 후진들을 향한 마음일까. 도도한 후천개벽의 역사를 맥맥히 이어 갈 후진들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 회상에서 전무출신으로 살아온 김 교무의 곧고 또 깊은 자부심이기도 하다.
[2024년 7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