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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동
10월 11일(금) 맑음
인천박물관 후반기 강좌 “근대 이국과의 조우”라는 주제의 인문강좌 중간에 실시하는 문화유적 답사에 참여하였다. 인천시립 박물관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10시 30분에 '정동극장' 앞에서 내려서 안내자를 따라 답사를 시작되었다. 오늘의 답사코스는 서울 정동 일대였다.근세 초기 우리나라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나라가 나아갈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무방비의 상태에 처해 있을 때에 서구 세력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제멋대로 조선을 유린하려 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바로 이곳 정동 일대에 다투어 공사관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나라에 대한 자국의 이권을 확보하려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오늘 이 정동 일대를 돌아보면서 우리나라의 굴곡졌던 역사의 일면을 되새겨보고 외세와 더불어 밀려들어온 산물로서 근대화의 편린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근대유산 1번지 > 정동(貞洞)
(❋ 아래 글들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팜플랫에서 전재한 것입니다.)
정동(貞洞)은 1396년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도성 안에 조성되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정작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성 밖으로 옮겨지고 정동은 정릉의 기억을 새긴 이름만 간직하고 있다.
정동에 1883년 미국공사관이 처음 들어선 이후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각국의 공관(公館)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정릉은 서양의 외교가(外交街)로 변모해갔다. 서양식 교육기관과 종교, 의료 시설 등도 잇달아 들어서자 정동은 자연스럽게 근대 서양문물이 유입되고 수용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정동은 근대 시기 제국주의의 세력 다툼 속에 자주적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뜻있는 역사의 공간이다.
지금도 근대 역사를 전하는 유산이 많이 남아 잇는 정동은 서울 도심 속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린다. ‘근대유산 1번지’ 정동의 또 다른 특색으로 꼽을 만한 것은 유서 깊은 근대유산들이 각자의 내력을 소개하고 전해주는 박물관 전시관 또는 미술관 등으로 단장되어 생활 속에 친근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19세기 말 정동은 서양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이었다. 각국의 외교 공관이 들어서고 서양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 ‘서양인촌’이 형성되었다. 또 서양인 선교사에 의해 서양식 교육과 의술, 문화 등이 도입되는 ‘다문화 공간’이었던 까닭에 貞洞에는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기록이 적지 않다.
신아일보사 별관
오늘 우리의 답사는 시간에 제한을 받아 정동 일대를 모두 섭렵하지 못하고 일부분에 한정한다고 하였다. 10시 30분에 정동극장 앞에 도착한 우리는 안내원의 답사코스에 대한 소개를 받고 구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곳으로 갔다. 가는 길목에 ‘신아일보사 별관“과 예원학교를 지났다.
‘신아일보사 별관’은 ‘신아기념관’으로 문화제 제402호에 등재된 건물이다. 1930년대 당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신축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외벽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았다고 한다.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총사[현재의 관세청]사옥으로 쓰였고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1963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된 뒤, 1975에 지금과 같은 4층 건물로 증축되었다. 1980년 10월 언론통폐합으로 경향신문에 흡수되기 전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1층에는 신아일보를 기념하는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신아일보사 별관'
예원학교
구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世子(純宗)와 1년간 피신해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이다. 건물은 르네상스식으로 3층의 벽돌 구조이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I.Scredin Sabatine)이 설계하여 1885년에 착공하고 1890년에 완공하였다. 러일전쟁(1904)관 을사늑약(1905)을 거치면서 공사관으로서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으나, 1949년까지 공사관으로 쓰였다. 한국전쟁 중 건물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망루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1층에는 아치형 출입구가 있다.
(❋1990년 한∙러 수교조약을 맺으면서 러시아 정부에서 구러시아 공사관 터 7500여 평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구러시아 공사관 터는 사적지 253호로 지정해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반환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구 배재학교 운동장 2500평을 러시아 공관터로 제공하고 모스코바 근교에 한국대사관 터 2500평과 맞바꾸는 형식으로 협의가 성사되었다. 지금 러시아 공관은 구배재학교의 운동장 2500평에 12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구조형식의 건물로 들어섰다.)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등록문화재 제3호 이화박물관)
이하학당은 1886년 메리 슼랜튼 부인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이다. 이화학당에 속한 심슨기념관은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록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5년 3월 준공되었다. 당시 세상을 떠난 홀부록의 동생 사라 심슨을 기리는 뜻에서 건물 명칭을 ‘심슨기념관’이라 붙였다. 1922년과 1961년에 걸쳐 증축되었고 한때 이화여중 교사로 쓰였다가 현재는 이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화박물관
유관순 교실
유관순 의사의 훈장 및 졸업장
이화박물관 소장품
이화 박물관 뒤에 있는 "유관순 우물"
손탁호텔 터
손탁호텔은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 앙트와네트 손탁이 1902년 10월 정동에 개관한 서울을 대표하는 2층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원래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트가 살던 곳이었으나, 1896년에 손탁이 매입한 것이다.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외교 각축을 벌일 정도로 근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던 손탁호텔은 1909년 팔레호텔로 넘어간 뒤, 1917년 다시 이화학당에 넘겨져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22년 프라이홀 신축과 함께 헐리고 말았다. 현재 손탁호텔 터에는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배재학당 동관(서울시 기념물 제16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정동의 한옥 한 채를 사서 학교를 개설하였다가 1887년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양옥으로 배재학당 본관을 준공하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소설가 나도향, 시인 김소월,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지청천 등이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가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배재학당 동관만 남았고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구대법원청사(등록문화재 제237호, 서울시립미술관)
원래 이곳에는 1886년에 조성된 관립육영공원(育英公院)이 있었다. 189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이 들어섰고 1910년 대한제국 말기에는 토지조사국이 들어서기도 했다. 1928년 경성지방법원, 고등법원 등의 청사 확장 및 이전과 함께 법원 단지가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다가, 1995년 12월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단장되었다.
정동교회(사적 제 256호, 정동제일교회)
1885년 4월 아펜젤러 목사가 선교사로 와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를 봄으로서 정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97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로 건립되었으며,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맡았다. 정동교회는 일제강점기 항일 활동의 거점으로서 ,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었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이필주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3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동교회
정동교회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德壽宮) 중명전(重眀殿)
1. 중명전의 탄생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란 뜻의 덕수궁 중명전(重眀殿)은 1897년경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러시아 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전각 중명전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쳐를 옮기게 되면서 증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2.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증언하는 중명전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된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은 침범하고 고종과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3.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민족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각국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어 <乙巳勒約>이 무효임을 알렸다.
전국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로서 항거했다. 종로거리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도 자진 휴교하였다.
또한 전국에 의병이 조직되어 민종식, 최익현 등 각지의 많은 유생들이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皇城新聞⌟과 ⌜大韓每日新報⌟ 등도 <乙巳勒約>의 부당성을 알리며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
영국 <트리뷴>에 보도된 고종의 <을사늑약>의 무효 선언
4. 高宗과 重眀殿
1904년 4월 경운궁(慶運宮 : 현 德壽宮)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고종과 중명전이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함녕전(咸寧殿)에서 발생한 불길이 경운궁(慶運宮)의 주요 전각(殿閣)을 태워버리자 고종은 중명전(重眀殿)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후 192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종은 주로 重眀殿에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정동의 거리 풍물
정동제일 감리교회 앞
서울역사박물관
오후에는 서울 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서울 역사박물관은 신문로변의 경희궁터에 자리한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곳인데 1980년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난 후 발굴 작업을 하여 경희궁을 복원하였다.
<서울 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서울 도시역사박물관이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안내자료)
1층에 는 기획전시관을 열었는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 뒤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한 가족의 독립운동이야기”를 기획하여 전시하였다.
<1910년대 망국으로 기우러진 혼란의 땅 서울에서 갓 열 살이 된 소녀가 혼례를 치른다. 대한제국의 대신을 지내며 근대 여명기 조선의 개화를 이끈 동농 김가진(1846~1922)이 며느리를 맞는 날이다. 성엄 김의한(1900~1964)과 수당 정정화(1900~1991)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9년이 흐른 1919년 10월, 한일병탄조약 이후 엄혹한 시간을 지켜본 김가진은 74세의 나이로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한다. 두달 뒤에는 며느리 정정화가 그들을 찾아 상하이로 떠난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한 가족의 긴긴 여정이 시작된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자료)
1층 다른 전시실에서는 <초상으로 다시금 기억하는 우리의 독립운동가 49인>의 인물사진을 전시하였다.
우리의 조국을 목숨을 걸고 지켜온 선열들의 고귀한 삶이 되살아나 있는 역사의 장으로 자라는 세대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교육 자료가 될 것 같다. 우리 손녀들에게도 한 번 와서 관람할 수 있게 해야겠다.
3층에는 대형 서울전경축약도를 만들어 서울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밀한 모형과 첨단 IT기술이 결합된 멀티미디어 전시공간이 있다.
시간이 모자라 경희궁은 들어가보지 못하여 아쉬웠다.
다음 기회에 정동과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을 샅샅히 섭렵해 보리라 마음 먹어본다.
서울시립박물관
일제시대의 열차내부 모형
김구 선생 유품 전 시물
김구 선생 유품 전 시물
1층 기획전
첫댓글 가만히 앉아서 서울역사박물관을 관람했네요^^ 건강하세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살펴봤네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