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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전 경 린
웃음소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웃음소리는 비눗방울처럼 나의 혈액 속을 둥둥 떠다닌다. 젊었던 어른들과 꽃향기와 햇빛과 비와 눈물, 한숨과 저주와 사람들의 눈빛. 그때의 모든 것을 감싸안고……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안마당 장독대 앞에는 우리 형제와 사촌 형제들이 거꾸로 매달려 웃던 매화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미끈하고 검붉은 가지에 연분홍 꽃이 피던 매화나무에 꽃이 지고 나면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어 봄을 이어주었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에 내가 모를 일 중의 하나로 잎도 없이 늦겨울부터 피어나는 검은 나뭇가지의 꽃들도 들어있었다. 나는 열한 살이었고 세상은 실마리를 감추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 조각들처럼 암호로 가득 찬 추상이었다.
안마당 장독대 앞, 매화나무와 복숭아나무 곁에 짧은 지팡이 모양으로 꽂힌 수도가 있었다. 그리고 낮은 바라크* 장독담 위엔 칫솔들이 통들과 플라스틱 컵들, 바가지와 포개진 세숫대야들이 줄줄 올려져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칫솔들을 바라크에 나 있는 세 개의 구멍 속에 따로따로 넣어두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삼촌은 아침마다 입 안에 희디흰 치약 거품을 물고 축담에 긴 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우리에게 춤을 추게 했다.
“예예예, 좋아! 팔을 더 올려서 양옆으로 흔들어, 허리는 앞으로 숙이고……좋아― 잘한다.”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트위스트 춤을 춤을 춥시다―
사촌 동생들과 나와 동생들이 안마당에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러면 안마당가에 세 들어 살던 홀아비 장 씨와 월림 아지매 부부와 인천덱인 어긋지기 숙모가 나와 창고 양철문 앞에 쪼그리고 앉거나 칫솔을 들고 치약을 묻힌다. 그리고 웃는다, 모두모두 짜르르 웃는다. 복숭아꽃이 피었고 봄이 긴 안마당에서 어른들이 세수할 동안 우리는 꽃나무에 매달려서 꽃을 따서 던진다.
삼촌은 자루 하나를 메고 월남에서 돌아왔다. 새까맣고 키가 무척 컸다. 자루 속에는 메주콩이나 보리쌀이 들어 있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검은 단추 같은 초콜릿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마귀할멈에게 쫓기는 꿈을 꿀 때처럼 허황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초콜릿을 큰 독에 부어놓고 바가지로 퍼 먹었다. 삼촌은 크고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도시에 있는 고모 집에 얹혀 공부하고 토요일에 한 번씩 기차를 타고 오는 오빠는 삼촌이 보여주는 사진에 현혹되어 악악, 감탄사를 연발했다. 도망가는 베트콩을 끝까지 추격해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한 맹호부대 용사들의 사진이었다. 용사들은 베트콩의 시체를 쌓아놓은 들판을 배경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비스듬하게 서서 웃고 있었다. 삼촌은 특히 혁혁한 공을 세워 용사들 중에서도 한가운데에 잔뜩 폼을 잡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영웅적인 순간의 포착임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서 볼 수 있었던 사진은 납 같은 침묵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보려고 해도 들판에 수북이 쌓인 그것이 사람 같지는 않았다. 수많은 자물통들이 서로를 물고 잠겨서 흰 햇볕에 금속성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사진 속의 정적에 갇힌 채 베트콩을 볶은 콩이나 자물통쯤으로 혼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건 자물통 같애…… 오빠는 얼빠진 나를 경멸하며 사진을 채어 갔다.
나로 말하면 실은 대통령이 바뀔 수 있는 자리라는 사실도 이해를 못하는 얼빠진 아이이기는 했다. 하늘에 달이 있고 해가 있듯, 그리고 해와 달을 선거로 뽑지 않듯 우리나라에는 언제나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대통령이었고 내가 열한 살이던 그때도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후에도 내가 스무 살이 다 될 때까지 그러니까 거의 내 인생이 여물었던 삼분의 일의 기간에 걸쳐 계속 대통령이었다.
삼촌은 또 큰집 큰언니에게는 아오자이*를 입은 월남 아가씨 인형을 선물했다. 고무로 만들어진 월남 아가씨는 얼굴색이 노르스름하고 촉촉해 보였으며 등에는 조그만 삿갓모자를 메고 있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천의 월남 아오자이는 옆선이 깊게 갈라져 노란 허벅지가 엿보였다. 언니는 읍내 유리집에서 긴 곽을 맞추어 월남 아가씨 인형을 넣어두고 보았다.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나는 월남과 월림이 얼마나 다른지 알지도 못하면서 발바닥을 비비며 트위스트 춤을 추었다.
월림댁은 밀가루를 묻힌 듯 보얗게 분 바른 얼굴에, 분홍 색깔 양단* 한복을 입고, 눈처럼 흰 고무신 속에는 눈처럼 흰 꽃버선을 신고, 양발을 어긋어긋 놓으며 나는 듯이 대문간을 들어왔으나, 사흘이 멀다 하고 바짝 마른 신랑한테 매를 맞았다. 이년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고! 월림 아재는 언제나 그렇게 소리 지르며 발로 배를 걷어차 올리거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후려치곤 했다.
어느 땐 변소 앞 감나무에 꽁꽁 묶여 있기도 했으나 식구들은 입술이 터진 채 히죽 웃는 월림댁과 인사말을 나누며 지날 뿐 아무도 풀어주지를 않았다. 죽는소리가 나야 어쩌다 한 번 방 안을 들여다봐 줄까 할머니조차 남의 남정네 하는 일이라며 끼어들지를 않았다. 곧 날 듯이 삽짝*을 들어섰던 여자가 그렇게 맞고 사는 것도 내가 모를 일 중의 하나였다.
가게를 보는 엄마는 다섯 번째 아이를 가져 배가 불러 있었고, 우리에게 늘 양재기* 밟는 소리를 냈다. 우리 집은 국민학교 바로 앞에 있었는데 과자와 학용품을 대강 갖추어낸 가게를 하고 있었다. 시골 학교 앞이면 으레 하나쯤 있는 그런 가게였다. 파란 칠을 한 격자 창틀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가게 안은 어두웠다. 벽에 붙은 선반의 윗줄과 아랫줄엔 먼지에 덮인 물건들과 종이 상자들이 빈약하게 올려져 있고, 가운뎃쥴엔 도화지와 마분지, 크레파스와 물감, 연필과 지우개, 풀과 가위, 삼각자 따위의 학용품이 쌓여 있었으며 널따란 나무 진열대에는, 읍내 도매점에서 떼 온 조잡한 과자들이 얇게 펴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엔 건빵이 든 가마니가 놓여 있었는데 우리는 건빵을 훔쳐내
부엌의 물통에 빠뜨려 잔뜩 부풀려서 먹곤 했다.
아버지는 군청에 다니셨고 박 계장님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언제나 양복을 입고 물이끼처럼 검푸른 선글라스를 끼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항상 밤늦은 시간에 멀리에서부터 신작로를 타타타타 울리며 돌아오셨다.
굿베, 삿베. 굿베, 삿베.
나는 학교에서도 춤을 추었다. 군 학예대회에 나갈 단체 발레였다. 우리는 주문한 오색 파라솔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파라솔을 손에 쥐었다고 가상하고, 모아 쥔 양손을 위로 올렸다가 어깨에 메었다가 앞으로 내밀어 빙글빙글 돌리며 무용 연습을 했다.
굿베, 삿베. 굿베, 삿베.
무용 선생님은 준비 연습을 할 동안 나무 막대 두 개를 딱딱 부딪쳐 높고 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본연습 때엔 상자를 펴고 테이프를 걸면 아름답고 경쾌한 뻐꾸기 왈츠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바닥에 마루가 깔린 일 학년 교실에서 책걸상을 뒤로 밀어붙이고 연습을 했다. 교정이 텅 비고 연못가의 풍향계도 방향을 잃은 듯 돌다 말다 하는 늦은 오후쯤이면 오 학년이던 교장 선생님 아들이 창문 밑에서 우리를 훔쳐보곤 했다.
그는 이란성 쌍둥이로 누이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는 언제나 턱밑으로 침을 질질 흘리거나 얼굴에 침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그 여자애가 기다란 고구마처럼 붉고 못생긴 데 비해, 그는 몹시 희고 꽃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창문 밑에서 머리를 들어올릴 때면 나는 잔뜩 긴장하여 더 잘 추려고 발끝을 곧추세우며 고통스러운 노력을 했다.
어느 날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교사 복도 테라스의 기둥 뒤에서 교장 선생님 아들이 불쑥 나와 나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만 저쪽으로 가자, 꼭 할 이야기가 있어.”
그는 교장 선생님 사택*으로 가는 작은 길로 나를 데리고 갔다. 가시나무 울타리에 빼곡빼곡 흰 꽃이 피어 있고 벌들이 꽃 속에서 붕붕거렸다.
“니가 제일로 예쁘고 춤도 잘 추더라.”
벌들은 붕붕거리고 나는 어지러워 꼭 넘어져 가시나무의 가시에 찔릴 것만 같았다.
“우리 집에 놀러 안 갈래?”
교장 선생님 하얀 사택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연습이 끝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가 긴장한 듯 눈을 두 번 깜박이며 바싹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눈처럼 희고 입술은 복승아 꽃잎처럼 분홍색이다. 나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가 나의 압술에 입술을 댔다가 뗐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돌려 달렸다.
“무용 끝나고 놀러 와―-”
울타리를 빠져나왔을 때 손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어보았다. 여전히 그의 입술이 거기 붙어 있는 듯했다. 나는 몸을 한껏 뒤로 젖히고 우아하게 테라스의 기둥들을 스치며 걸어가 참하게 교실 문을 열었고 예상했던 대로 늦었다고 무용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나는 순식간에 쥐도 색도 모를 숨 막히는 비밀을 가졌던 것이다. 나는 그 비밀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불과 사흘 만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 삭아버렸다. 쉬는 시간에 ‘비밀 털어놓기’를 하다가 보니, 그 자식은 함께 무용하는 여자애들 모두를 그렇게 꼬인 것이었다. 손만 잡혔거나, 껴안겼거나, 고백만 들었거나, 나처럼 뽀뽀까지 했거나. 나는 침을 세 번 뱉고 잊어버리려고도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 무용 연습을 훔쳐보았고 그럴 때면 언제나 내 가슴이 펌프질하듯 푸각푸각 뛰었다. 뻔뻔스럽게도 그는 여전히 테라스 뒤에 숨어 있다가 내게 말을 붙였다.
“잠깐만 저쪽으로 가자, 할 이야기가…….”
나는 그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로 결심 했다.
‘교장 선생님 아들, 김영주는 월남 씹쟁이.’
학교 교문 바로 앞에 있는 게시판 시멘트 테두리에다가 붉은 크레용으로 그린 그 화려한 벽서*는 나의 짓이었다. 그땐 월남 방망이과자, 월남치마, 월남 고깔모자, 하는 식으로 ‘월남’ 자가 붙는 것이 유행이어서 나도 월남을 붙였던 것 같다. ‘월남’ 이라는 글자에는 뭔가 신랄하고 모욕적인 느낌이 났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지만 결국은 말썽쟁이 남자아이들 몇 명만 교무실로 불려가 자백을 강요당했을 뿐, 나는 눈곱만큼의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유유자적 했다.
군 학예대회 날 우리는 오색 파라솔을 들고 망사를 넣어 엉덩이를 부채처럼 편 발레복을 입었다. 어깨에는 단지 금색의 가는 끈으로만 되어 있고 깊게 파인 앞가슴에는 분홍색 깃털이 달려 있었다. 너희들은 뻑꾸기야, 뻐꾸기처럼 폴짝폴짝 가볍고 귀엽게 튀어 올라야 해! 무용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다섯 뻐꾸기들은 너무 짧아 가랑이가 다 드러난 발레복을 입고, 이웃 학교 강당의 무대 입구에 숨을 멈추고 섰다. 빼곡히 들어찬 강당의 맨 앞줄에 손가락에 펜을 끼우고 앉아 있는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뼈꾸기 왈츠의 첫 선율이 우리의 팔을 당겼다. 우리는 선율에 실려 발끝을 내딛고 오색 파라솔을 빙빙 돌리며 재재재재 옆걸음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우리는 단체 발레 부문 일등을 먹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도청이 있는 도시에서 열린 도 대회에서 2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우리는 군수님의 금일봉*과 지역 유지들의 성원에 힘입어, 강가의 고급 여관으로 옮겨 하룻밤을 더 자고 관광을 하며 불고기를 먹었고 사이다와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나는 강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난간에 기대 오래 내려다보았다. 택시들이 빠르게 곁을 스쳐 갔고 강물은 아까운 실타래처럼 한없이 흘러가고 있어서 어지러웠다.
아버지도 무척 기뻐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무슨 일로인지 숙모와 한바탕 싸웠고, 나의 일에 대해 기뻐하기는커녕 질투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백 점짜리 시험지를 받아 와도 그거 잘해서 뭐 하느냐, 는 태도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느닷없이 오후에 집에 들른 아버지께서 내게 하얗게 포장된 상자 두 개와 역시 흰 포장지에 싸인 좀 작은 사각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큰 상자는 천안 명물 호두과자란 걸 알구 있었다. 아버지는 일 년에 한두 번 서울 출장 갔다 오실 때면 그 상자를 들고 오셨다.
“문 계장님이 출장 갔다 오셨는데 네 소식을 듣고 축하한다고 이걸 주셨다.”
아버지는 문 계장에 대해서는 꼭꼭 경어를 썼다. 엄마가 붉은 얼굴로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문 계장은 아버지의 동료였다. 군청에서 유일한 여자 계장이었는데 머리끝에는 고데*를 넣고 횐 원피스를 입고 검은 뾰족구두를 즐겨 신는 지성적인 노처녀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생일이나 할머니 생신 같은 때에 다른 동료들에 묻혀서 이따금 집에 들렀다.
나는 그녀로부터 온 전동차 모양의 은색 연필깎이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오빠조차 샘이 난 나머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토요일에 왔던 오빠는 광에 있는 자신의 보물 주머니에서 빨간색만 모은 구슬과,일곱 가지 색칠을 한 팽이와, 줄넘기와 공과 딱지와 연필과, 심지어 튜브까지 걸며 바꾸자고 꼬드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갖은 협박을 하다가 나중엔 뻥 하고 나의 허벅지를 걷어차고는 달아나 버렸다. 엄마는 그런데도 오빠 역성을 들며 울고 있는 내 등을 빗자루로 후려쳤다.
읍내에서 유일하게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멋쟁이 아버지는 왜 문 계장과 결혼하지 않고 엄마와 결혼을 했을까? 언제나 배가 부르고 깨어지는 소리를 내고 숙모와 싸우거나 할머니와 싸우는 작은 눈에 얼굴이 붉은 여자. 엄마는 아침이면 우리의 사열을 받고 위엄있게 나가셔서, 한밤중에 우렁찬 오토바이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멋진 아버지와는 요만큼의 공통점도 없어 보였다.
문 계장이 우리 엄마였더라면, 동생들도 이렇게 많이 낳아 나를 궁지에 몰아넣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녀라면 결코 이렇게 많은 실패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 정녕 분명했다.
쯧쯧쯔, 니가 고마 머스마로 태어나지, 아이고 너거 엄마가 고생이다.
엄마의 계원들이나, 아버지의 동료나, 어중간한 친척들이 우리 집을 생각해준답시고 셋째나 넷째쯤에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수치심과 엄마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었다. 우리들은 모두 잘못 뽑힌 제비들처럼 꽝. 이었던 것이다.
씰데없는 지집년들이 줄줄이 나와 애비 등골을 빼먹는다, 집 밖으로 돌게도 되어 있제, 아들 하나 있는 건 공분지 뭔지 시킨다꼬 백 리 밖으로 보내놓고, 집이라고 들어서 보모 지집만 모두 여섯 년이 드러누워 있으니, 집구석이라고 들어오고 싶겄나? 오데서 아들 하나 더 안 낳아 들어오는 것만 해도 용하지!
할머니는 공공연히 우리의 등짝을 후려치며 분수를 알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좀 달랐다. 나는 결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모두 다 실패라 해도 최소한 나는 내 자리가 있었다. 나는 첫딸이었고 아버지의 눈길에서 나는 나 자신이 모두와는 다르게 아버지가 원했던 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한패였던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도 그것이 여자애든 남자애든 간에 동생들이 지긋지긋했고, 동생이라는 존재 따윈 내 인생에 하나도 없었으면 했다. 어쩌다 차례가 되어 손에 쥐어보는 급식 빵마저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 할 때는 정말 동생들이 끔찍했다. 네 개의 분단 여덟 줄, 하루 한 줄에게 배당이 되니 거의 열흘에 한 번 꼴로 급식 차례가 왔다.
하루는 집이 먼 다른 아이들처럼 가는 도중에 다 먹어버리기 위해서 책가방을 멘 채로 다른 아이들 속에 끼여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우리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다른 길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길은 한구덩이에서 풀려 나온 실뱀 떼처럼 꿈틀거리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다른 곳으로, 다른 뱀의 머리 위로 실어 갔다.
어스름이 내린 뒤 순경 아저씨가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집에 오자, 엄마는 누군가 손가락을 넣어 입을 찢는 듯이 억지로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순경 아저씨의 자전거가 아직 마당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설거지통의 구정물을 내게 확 뿌렸다. 곧이어 설거지통도 내 발등에 내던졌다.
“집이 싫으면 나가거라, 이년아! 하느님 맙소사! 저런 년을 맏이로 떨어뜨리다니, 아이고 복도 복도, 조선 천지에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의 팔자!”
내가 급식 빵을 뜯어 먹으며 다른 동네 아이들 틈에 우쭐우쭐 끼여 가더라고 누군가 일러바친 듯했다.
나는 학교 개나리 울타리 속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아버지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아버지 등 뒤에만 묻어 들어가면 엄마는 스스로 언제 패악*을 쳤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니 캄캄한 교정 저 안쪽 연못가쯤에서 도닥도닥 말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틀림없는 아버지 음성이었다. 그 말소리는 얼마 후 교문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뚝 끊겼다. 교문 앞 플라타너스나무 앞에 이르자 학교 본관에서 비춰온 희미한 불빛 속에 아버지와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드러났다. 나란히 걷고 있던 여자는 문득 발을 멈추고 아버지 품으로 와락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휘청 하더니 오른 손으로 오토바이를 꽉 쥐고 한 손으로 엉거주춤하게 여자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아버지 품에서 떨어져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쌀쌀하게 또박또박 걷기 시작했다. 여자가 마구 걸어 교문을 빠져나가자 아버지는 여자를 부르며 뒤따라갔다. 민희ㅡ, 민희―. 마치 휘파람 소리 같았다. 숨을 턱 밑에 가둔 채 성난 듯 간절하게 부르는 소리가 어둠 속에 낮게 파동쳤다. 민희―, 민희ㅡ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문 계장이었다. 문 계장의 이름이 문민희인 모양이었다. 예쁜 이름이었다. 할머니 이름인 박봉애나 엄마 이름인 조덕자 따위와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두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집을 뒤로하고 신작로를 따라 읍내 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한참을 더 개나리 울타리에 몸을 끼운 채 숨어 있다가 나를 부르러 나온 할머니 뒤에 숨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에 세 명의 동생들 곁에 누워 아버지가 오시나 귀를 세우고 있다가 나는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춤을 춤을 춤을 춥시다.”
안마당에서 동생들의 노랫소리와 어른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늦잠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일요일이라 아버지도 삼촌과 나란히 치약 거품을 물고 웃고 있었다. 삼촌은 입가에 치약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입가에 거품 하나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셨을까, 장독에서 김치를 꺼내는 엄마도 주홍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든 채 맑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매화나무와 복숭아나무에 푸른 잎이 무성했다.
읍내 극장에 쇼가 들어와 트럭을 탄 흥행단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한차례 신작로를 휩쓸고 갔다. 아버지는 언제나 극장에 들어가는 표를 갖고 계셨다. 어린 동생들과 할머니를 뺀 우리 식구는 전부 극장엘 갔다. 극장은 읍내에서 하나뿐인 2층 건물이었고 벽에는 반짝이는 정사각형 타일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큰 간판에는 늘상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겹쳐놓은 그림이 민망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 아래를 지날 때면 금세라도 머리 위에 무엇이 떨어질 것처럼 조마조마해졌다.
근처에 채 닿기도 전에 풍짝― 푸짝― 신나는 음악이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극장 안은 침침했는데 바닥은 축축한 흙인 듯했다. 벽과 통로와 의자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여 있던 장소에서 나는 서늘하고 습기 찬 기운과 지린내와 담배 냄새 따위와 곰팡이 먹은 이불에서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냄새가 뒤섞여 났다.
삐걱 삐걱 거리는 얇은 베니어 의자에는 극성스러운 시골 관객들이 이미 두 시간 전부터 자리를 다 차지해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곧 극장 관계자를 만나 자리를 두 개 얻어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삼촌과 숙모, 장씨 아저씨와 월림 아재 내외와 오빠와 나와 동생은 무대 바로 아래의 흙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야 했다.
대형 화면 옆에는 금연, 정숙, 금일 상영 프로, 개봉박두 등 알 수 없는 말들이 붉은 글씨로 박력 있고 의미심장하게 씌어 있었다. 아이스케키를 파는 소년들이 아이스케키! 입 안이 얼어붙는 아이스케키! 라고 외치며 지나가고 매점의 여자애가 오징어나 땅콩, 심심풀이 땅콩, 껌도 있습니다! 외치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잠깐도 가만있지 않았다. 의자를 삐걱거리며 뒤로 돌아보거나 크악, 하고 가래침을 바닥에 뱉거나 싸우거나 우는 아이를 쥐어박거나 담뱃불을 붙이거나 무언가를 씹거나…… 월림 아지매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들이 극장을 이고 나가게 떠든다고 했지만 그런 소요 속에서도 내게는 모든 것이 너무도 고요하게 비쳤다. 특히 나는 쇼가 시작되려고 불이 꺼지는 순간 의자의 첫 줄에 앉아 있던 어떤 남자의 무릎 위에 맡겨졌는데 순간적으로 내가 고구마를 깔고 앉은 것이 아닌가, 하는 당혹감에 빠졌다.
그 고구마는 점점 커지고 단단해지고 뜨거워졌다. 극장 무대에는 젖꼭지 부분과 사타구니 부분만을 구슬로 가린 무희가 허리를 많이 흔들며 뭔가 고통스러운 듯도 하고 지저분한 냄새를 맡는 듯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일어서서 나갈 때 그 남자의 무릎 속에 있는 고구마가 엉덩이에 붙어 오지나 않을까, 하는 곤혹감에 사로잡혀 동그란 조명이 훔쳐보는 눈동자처럼 빨갛고 파랗게 변하는 무대를 적막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아저씨의 고구마에 대해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하늘이 있듯 구름이 있듯 예쁜 꽃들이 있듯, 내가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어디엔가 미국까지 닿는 큰 바다가 있듯 아침이면 아버지가 돌아와 계시듯 그런 것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래왔던 것이었고 누구 탓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미국에서 고모가 왔다. 고모가 귀국하는 것은 지난겨울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고모가 어떻게 미국까지 갔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장죽*에 담뱃가루를 꼭꼭 늘러 넣고 불을 피워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뿜고 난 후 대답하셨다. 삼촌 머리를 깨고 혼날 것이 무서워서 계속계속 도망가다 보니 미국까지 간 것이라고…… 나는 스물두 살이었넌 한 처녀가 달겨드는 남동생의 머리를 깨고 울면서 철로 굴다리를 지나, 넓은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한없이 걸어가는 것을 그려보았다. 나도 길을 잃어보아서 알 수 있었다. 길은 얼마나 다른 곳으로 우리를 실어 갈 수 있는지, 길에 나서기만 하면 얼마나 먼 곳까지 얼마나 다른 곳까지 다다를 수가 있는지.
고모는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금발도 아니고 푸른 눈도 아니었다. 옻물이라도 들인 듯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검었고 피부를 일부러 태워서 우리보다 더 검었다. 그리고 키가 무척 컸다. 곁에서 걸으니 마른 장대같이 긴긴 다리만 보였다. 그렇게 키 큰 사람과 나란히 걷기는 처음이었다.
고모는 엄마 아버지의 방을 혼자서 사용했다. 고모는 트렁크에서 꺼낸 옷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놓았다. 고모의 옷들은 한 번 본 적도 없는 바다를 생각하게 했다. 거의가 아주 작은 물결 색깔의 옷들이었다. 소매가 없는 윗옷과 엉덩이만 가리는 미니스커트, 얼기설기 엮은 끈으로만 등을 가린 실로 보기에 난처한 옷들이어서 전부 해수욕복 같이 여겨진 까닭이었을 것이다. 고모는 비눗물을 대강 뺀 끈끈한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풀어 내리고 송충이 같은 인조 속눈썹을 붙이고, 엄마 표현에 따르면, 가랑이만 용케 가린 비단 원피스를 입고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친척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고모는 아버지께는 미제 카메라를 선물했고 삼촌에게는 선글라스를, 엄마와 숙모에게는 속이 흰히 비치는 소라색과 분홍색 잠옷을 선물했다. 할머니에겐 아무것도 안 주는 것 같았고 우리에게도 주지 않았다. 고모는 우리가 마루를 닦는다면 3원을 주겠다고 했는데 1원짜리라면 우리 집 가겟방에 굴러다니는 형편이라 아무도 고모에게 고용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나는 갑자기 고모에 대한 호기심이 시들해졌다. 엄마 말대로 고모는 주책스러운 미국 거지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모는 남편 토미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이목구비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지독한 흑인이었다. 할머니는 말없이 사진을 제쳐놓았다. 베드룸, 키친, 배스룸, 발코니 등등에서 연두색과 분홍색의 반짝이는 월남 아오자이를 바꾸어 입어가면서 영화배우처럼 찍은 사진도 있고 빨간 집의 넓고 짙푸른 잔디 정원에서 찍은 귀여운 검은 아이들의 사진도 있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가짜같이만 느껴졌다.
고국에서 다섯 벌의 비단 원피스와 두 벌의 한복을 맞춘 고모는 주름살 수술을 해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는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떠났다. 너무 울어 나중엔 인조 속눈썹을 뜯어내야 했다. 할머니도 치맛자락을 걷어들고 우셨다. 몇 날 며칠 계속해서 할머니 눈에 눈물이 흘러 눈가가 짓물러 상처가 났다.
고모가 떠나자마자 엄마와 아버지는 크게 싸우셨다.
“내 말이 뭐가 틀리서? 다른 집 일가붙이들은 외국서 오니께 집도 사주고 논도 사주고 갑디다. 한밑천 떨어뜨리주고 가도 뭐할 낀데 언감생심 뜯어 갈라고 하다니, 그기 미국 거지지, 내 말이 뭐가 틀리다꼬!”
엄마가 나일론을 가르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춤을 춤을 춤을 춥시다.”
아침이면 여전히 우리는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웃었다. 장마가 닥쳐 비가 계속 왔다. 담장 아래 좁다란 꽃밭의 장미나무에는 분홍색 장미꽃들이 급식 빵만큼이나 커다랗게 피었다. 장미의 향기는 마치 홈통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안마당가로 흘러가듯 안마당으로 굽이쳐 흘러가며 퀴퀴한 냄새들과 뒤섞였다.
홀아비 장 씨는 다리 공사가 쉬어서 아들을 데리고 매일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녔다. 그 작은 남자아이는 소쿠리를 머리에 눌러 쓰고 긴 양은바께쓰를 따끄르르 끌며 따라나섰다. 미꾸라지는 많이도 잡혀 장에 갖다 내고도 지천이라 매일 우리 집 대야에 부어주었다. 엄마는 내게 젖은 텃밭에서 방아* 잎을 뜯어 오라 하고 미꾸라지를 기름에 데글데글 덖어* 매일 추어탕을 끓였다. 그해 여름 우리 식구는 추어탕에 질려 그 후 몇 해 동안 아무도 추어탕올 다시 먹지 못하였다.
월림 아지매는 비가 내리 퍼붓는데도 이따금 안마당에 내던져졌다. 두 사람은 온몸에 뻘*을 묻히고 레술링 선수처럼 뒤엉켜 싸웠다. 만약 월림 아재가 창고에서 갈구리*만 내어오지 않았더라면 아지매가 이겼을 것이다.
“맞아본 놈은 팰 줄도 안다고 까딱하모 월림댁이 이기겄다!”
엄마가 중얼거렸다.
“여펜네가 뻑세게 굴면 얻어맞게 되는 법이다. 저리 머리를 뱀 대가리처럼 곧추세우니, 사흘들이 매타작일밖에. 지집은 그저 연해야 되는 게야. 죽을죄를 지어도 다소곳하게만 굴면 빠져갈 구멍이 생기는 것을 쯧…… 지집이 뭐를 믿고 저리 뻑센지, 저년이 사나 열 잡아먹을 지집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산 너머 고향 마을에 다니러 나가자 엄마가 대문간으로 고개를 내밀며 톡 쏘았다.
“뻣뻣한 년들 매타작감이면 저 할마시는 벌써 맞아 죽고 남지도 않았겄네.”
장대비가 몹시 쏟아지던 토요일 오후, 일찍 퇴근한 아버지는 문 계장 집에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우산을 받고 앞서 걸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유일한 한패였다. 내가 더 어렸을 때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방에도 자주 가셨다. 나를 푸른 이끼가 잔뜩 낀 수족관 옆에 앉히고 친구와 툭툭 치며 이야기하고 담배를 피우고 하하 웃었다. 다방 아가씨들이 모여들어 내게 말을 시키고 아버지 이름을 묻기도 하고 유과를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다방에 올라갈 때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갔던 것과 달리 내려올 땐 언제나 나를 번쩍 안고 우르르 뛰어내려 오셨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때 작은 연애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발도 다 빠지고 치마도 다 젖었지만 아버지와 걷는 기분에 우쭐해져서 팔랑팔랑 따라갔다. 아버지는 내가 길을 잃었던 그 골목과 같은 비슷비슷한 대문들과 골목들을 지나 한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골목의 집들은 더구나 똑같아 보였는데 아버지가 대문을 민 곳은 세 번째 집이었다. 둥그런 큰 정원을 지나 봉숭아꽃과 채송화가 무리져 피어 있는 담장가를 돌아가니 예쁜 별채가 나타났다. 수돗가에 붉은 달리아 떼가 허리가 휘어질 듯 피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허리가 휘어져서 끈으로 묶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의 방 안에서 발을 젖히며 문 계장이 나타났다. 끝이 소라처럼 오므려진 검은 머리카락을 눈부시게 흰 리본으로 묶고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안경을 쓴 얼굴도 박속처럼 희었다. 그리고 들어올린 두 손 위에는 그 모든 것보다 더 흰 수건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문 계장을 보고 있었다.
발이 쳐진 방 안은 이제 막 물을 간 어항 속처럼 맑고 고요했다. 문 계장은 아버지껜 커피를 드리고, 나에겐 사이다를 주었다. 그리고 잘 닦인 안경 너머로 나를 빤히 보았다.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가득 고여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그녀를 향해 짧게 웃어주고는 수포들이 달라붙은 유리잔을 보다가 방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방을 가리고 있는 레이스 커튼을 보다가 했다. 꽃 모양의 같은 모티브를 여러 개 이어 짠 노란색 커튼이었다. 커튼 너머의 방은 어둡고 서늘해 보였다. 실례되게도 나는 사이다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카악, 트림을 하고 한차례 후두둑 떨기까지 했다. 전에 받은 선물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어쩔지 고민에 빠져 있는데 문 계장이 내 손을 이끌고 서서 방 가운데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놓여 있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피아노를 둘러싼 레이스와 까마귀처럼 검고 새 이빨처럼 흰 건반들에 대해 감탄할 사이도 없이 띵!― 하고 눌렀다.
“여자는 피아노도 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교양 있는 규수지……”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일주일에 세 번 문 계장 집에 가서 피아노를 배웠다.
“뻐꾹 뻐꾹 봄이 가네, 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 복사꽃이 떨어지네―”
나는 빗소리에 섞이며 노래하고 피아노를 쳤다. 문 계장의 품에서는 비 온 뒤 풀밭을 지나올 때 나는 풋내가 났다. 내 등 뒤에 가만히 설 때나 팔을 뻗을 때나 나를 가만히 쳐다볼 때도…… 나는 문 계장이 자리를 비울 때면 피아노를 치다 말고 잠깐씩 노란 레이스 커튼이 쳐진 또 하나의 속 방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방안에 무엇인가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자주 잃어버린 라이터들이나 손수건, 심지어 엄마가 귀신 곡할 노릇이라며 온 장롱을 다 뒤지다 결국 못 찾고 만 아버지의 봄 점퍼도 그 방 벽에 걸려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몰려와 두 눈을 꼭 감아버리곤 했다.
문 계장은 고깔 양과*도 사두었다가 내어주고 사이다도 늘 한 잔 가득 부어주었다. 이렇게 빨리 배우는 아이는 없을 거라며 기뻐했고 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영리하며 손도 참 예쁘다고 했다.
사실 나는 손이 예쁘다는 말을 늘 들었다. 아버지를 닮아 시골 아이 같지 않게 피부가 희고 긴 손가락을 가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엄마를 닮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아직 인생을 몰랐지만 엄마처럼은 절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결심만은 이미 확고했다. 엄마처럼 산다면 살아볼 필요도 없으며 심지어 자라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었다.
내 결심도 모르는 채 엄마는 내가 맏딸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욕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어떤 핍박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맏딸 노릇을 받아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맏딸이란 내 의지로 된 일이 아니었고 엄마가 줄줄이 동생을 두어서 된 일이니 나루선 거부할 자유가 있었다. 나는 아무도 몰래 일기장에 썼다.
‘나는 공주처럼 살 테야.’
문 계장은 피아노를 친 후에 꼭 손을 씻고 내게도 양은 대야에 물을 담아 주었다. 나는 문 계장이 가랑파* 같은 희고 연한 손을 씻을 때면 밤마다 동전을 세어 묶다가 잠드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으레 동전을 쥔 채로 졸다가 다 못 센 동전들을 장롱 밑에 밀어 넣고 잠들어버리곤 했다. 손도 씻지 않고…… 문 계장이 나의 엄마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리바바와 사십 명의 도적에 나오는 동네 같은 미로를 더듬어 그 세 번째 집을 찾아갈 때 마다, 그 세 번째 대문에서 나올 때마다 길을 잃을 것 같은 어지러운 떨림 속으로 그런 생각들이 흘러갔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갑자기 우리 자매 모두를 읍내 목욕탕에 데리고 가 깨끗하게 씻겼다. 그리고 저녁 설거지 뒤끝에 엄마는 부뚜막의 양념통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닦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발끝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헹군 그릇들을 선반에 포개어 올렸다.
“니 문 계장 좋재?”
“응, 좋아.”
“얼매나 좋노?”
“……”
“맨날 야단만 치는 이 엄마보다 백배 천배 좋재?”
“……”
나는 대답 대신 엄마가 자꾸만 닦고 있는 양념통들을 쳐다보았다. 양념통에는 깨소금과 고춧가루, 잔소금 등이 이제 막 새로 담은 듯 소복소복 담겨 있었다.
“와 말을 안 하노?”
“그건 와 묻노?”
“니는 니 아부지하고 속이 똑같으니께 물어보는 기다, 문 계장 좋재? 교양 있고 멋쟁이고 양순하고…….”
엄마의 기미 지고 붉은 얼굴이 더 붉어진 것 같았다.
“엄마가 없을 때는 니가 동생들 잘 돌봐야 된다, 맏이는 엄마 대신인 거 알재?”
“엄마 어디 가?”
예사스러운 당부 같지 않아서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낮에 목욕탕에 갔을 때도 이상했다. 동생들이 말썽을 부리고 때를 씻지 않겠다고 울거나 찡얼대는데도 엄마는 양재기 밟는 소리를 내지 않고 앞이 흐릿한 열기 속에서 긴 한숨만 내쉬었다. 엄마는 산같이 부른 배를 안은 채 끝까지 입을 꼭 다물고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한 명 한 명 씻기기만 했던 것이다.
“……”
“아버지가……”,
나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가 문 계장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가슴속 어느 부분이 녹슨 칼에 베이는 듯 아팠다. 엄마는 배가 턱에 닿을 듯 부풀어 있었다.
“엄만 왜 자꾸 아일 낳아?”
나는 느닷없이 잔뜩 볼멘소리를 했다.
“니 아부지가 갓난아이를 좋아하니께, 그래도 아기가 걸을 때까지는 집에 좀 붙어 있어주니께…… 사람들은 내가 아들 욕심이 있어서 아이를 낳는다고 여기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니 아부지는 딸도 좋아한다. 정말이다. 온 천지 사방이 자기 집인지 섣달 열흘 삽짝에 안 들어섰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갓난아기가 생기면 꼬박꼬박 들어왔다. 너거 오빠 때도 그랬지만 니 때는 말도 못 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해도 넘어가기 전에 들어오더라…… 강숙이 때도 그랬고 정숙이 때도 그랬고 현미 때도 그랬고…….”
그 말 어딘가에 무엇이 있었을까? 그 말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서 울렸고 어쩐지 엄마에 대한 가시가 휑하니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 자신이 좀 순해지고 기분도 좀 편해졌으며 올망졸망 따라붙는 동생들도 그리 밉지만은 않게 여겨졌다. 최소한 딴 사람들이 생각하듯 무조건 꽝 신세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는 짧은 한때나마 우리를 사이에 두고 행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탄생 역시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짧은 한때나마 소중했던 것이다.
한밤중에 엄마가 대문을 열고 나가버릴까 봐 귀를 기울인 채 몇 날이나 잠을 못 이루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다음 날에도 나는 엄마의 도마질 소리에 놀라 잠이 깨곤 했다. 그리고, 잠산에 뫼를 썼나, 식구대로 안 깨우면 못 일어나니…… 어쩌고저쩌고, 하는 양재기 밟는 소리 같은 엄마의 잔소리에 안도감을 느끼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장마가 길어 거의 사십여 일이나 계속되었다. 어느 때는 사흘이나 계속해서 장대비가 온 적도 있었다. 둑이 터지면 산속에 있는 중학교로 피신을 해야 한다고 잠결에 어른들이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장마 동안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지 않았다. 안마당은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뻘밭이 되어버렸고 아침마다 비가 와서 다들 자기 집 부엌 안에서 세수를 하고 잠시 안마당을 멀거니 보다가 들어갔다. 대신 지렁이와 집달팽이 떼가 마당가 시멘트 담벽을 타고 오르거나 장독간을 거닐었다. 어느 날은 장독 바닥에 뱀만큼이나 긴 지렁이가 허옇게 부풀어 뒤집혀 있기도 했다. 마당가엔 골풀과 비름 따위의 풀들이 솟아났고 매화나무와 복숭아나무에는 가지마다 푸른 열매가 빽빽하게 붙어 불쑥불쑥 자라고 있었다. 어른들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과일이 다 맛이 없을 거라교 쓴 입맛을 다셨다.
한밤중에 마침내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 아침에 마루에 나가니 할머니가 생쌀과 미역과 돈을 올린 삼신상*에 촛불을 켜고 빌고 있었다. 할머니는 빌기를 끝내자 산모 방에 상을 들이밀고 돌아 나왔다. 나는 아기가 궁금하여 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는데 물이 엎질러져 새어 나오듯 낮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흐느낌은 굽이치며 점점 커졌다. 그것은 불어난 피처럼 내 몸속으로 굽이쳐 흘러왔고 여러 마리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변해갔다. 꼼짝 못하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나는 고통이나 기쁨, 또 슬픔이나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들로부터 엄마와 내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한몸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통에 휩싸여 울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엄마 자신의 눈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이 삶은 엄마에게 너무나도 부당했다. 너무나 너무나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엄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곁에 있던 빗자루로 삼신상을 두드려 부수기 시작했다. 온 방 안에 생쌀이 튀어 흩어지고 촛불이 넘어지고 마침내 상다리가 부서졌다. 엄마는 또 딸을 낳은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잠든 뒤 살금살금 방을 치웠다. 망가진 빗자루와 부서진 판, 상다리와 초 따위를 주워내고 걸레로 흩어진 쌀을 쓸어 모았다. 방 안 공기는 물을 끓여 닭을 잡았을 때처럼 후텁지근하고 비릿했다. 아기는 낡은 포대기에 아무렇게나 싸여 숨소리 하나 없이 자고 있었다. 새의 다리보다 더 가늘게 느껴지는 다리와 밀가루로 만든 것 같은 작은 발이 밝은 포대기 사이로 비져나와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배에 귀를 대어보았다. 아이가 빨갛고 작은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하품을 했다. 그러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도 이 모습을 본다면 저절로 웃음이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엄마가 삼신상을 부수었어도 엄마가 했던 말을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엄마가 또 딸을 낳았어요.”
나는 말을 해놓고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왜 다른 어른들이 말한 대로 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 엄마와 내 동생에 관해서. 나는 스스로에게 불만이 차올라 생각지도 않게 왼쪽 끝, 가장 낮은 음의 피아노 건반을 꾹 눌렀다. 나는 너무 큰 울림에 놀라 얼른 손을 뗐다.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은 문 계장도 그 갑작스러운 울림에 놀란 것 같았다.
“예쁘니?”
“예. 굉장히 예뻐요.”
나는 문 계장이 만회할 기회를 준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너보다도 더?”
“예, 우리들 중에서 제일로 예쁜 애가 될 것 같아요.”
물론 그 말을 하기 전에 나도 오래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말해버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엄마의 장담과 달리 아직도 집에 빨리 들어오지 않거니와 걸핏하면 외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와 결혼하실 거예요?”
“뭐?”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고 있던 문 계장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누가 그런 말을?”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문 계장은 화가 난 것인지 괴로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피아노 건반들을 천천히 눌렀다. 마치 자신의 내부에 무언가를 묶어둔 어떤 이음새들을 단속해보는 듯이 그것들을 다시 한 번 힘껏 비끄러매는 듯이…….
“넌 영리한 아이야, 하지만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 니가 느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와 박 계장님은 결혼하지 않아. 아버치는 누구와도 새로 결혼하지 않는다. 왠지 아니? 이 세상에서 사모님보다 더 박 계장님을 사랑하는 여자는 없기 때문이야. 어떤 사랑도, 어떤 여자도 사모님에 비하면 오뉴월에 잠시 흩날리는 눈발에 지나지 않게 되지. 인혜야, 너 이제 여기 오지 말아라. 나 곧 이사하게 될 거 같거든. 좀, 먼 데로.”
문 계장이 내 등에 팔을 두르고 가만히 말했다. 문 계장의 품 안에서 풋내가 났다.
“그리고 인혜야…… 너 자랄수록, 아버지 외롭게 두지 말고 잘해 드려라.”
그 말 끝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레―― 눈물이 떨어진 흰건반에서 소리가 울린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문득 아버지도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늦게 연필깎이를 선물해주어서 고마웠다고 인사하고 레이스 커튼은 끝내 들어보지 못한 채 그 세 번째 대문을 나왔다.
극장 앞 대로에 나왔을 때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알리바바의 미로에서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여름 기우는 해가 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따갑게 빛을 되쏘았다. 뽑아낸 국수를 빨래처럼 주렁주렁 널어 말리는 국숫집 곁 공터 앞에서 교장 선생님 아들과 마주쳤다. 나는 가슴이 푸각거렸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지나쳐 가려했다. 교장 선생님 아들이 친척이 있는 도시로 전학을 간다는 것은 모르는 여자애가 없었다.
“잠깐만 저리로 가자.”
그는 나의 피아노 교본책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말했다. 나는 지은 죄가 있는 만큼 좀 두렵기도 하고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우리는 국수가 조금씩 흔들리며 마르는 공터의 한쪽에 섰다. 옷에 풀을 먹 일 때와 같은 청결한 생밀가루 냄새가 가득했다.
“니가 그랬다는 거 난 알고 있었어, 그 낙서 말이야.”
나는 애써 한결같은 표정을 지켰다. 그 순간 왠지 더러운 냄새를 맡는 듯한 표정으로 춤을 추던 무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랬니?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다고,”
나는 눈을 치켜뜨고 뻔뻔스러운 놈, 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나빠, 난 다 알아!”
“말을 해봐, 뭐가 나쁜지.”
“넌 무용반 여자애 모두를 다……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고, 껴안으려고 했고·…….”
그의 분홍빛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렸다.
“절대로 그건 아니야. 뭐가 잘못된 거야; 난 너에게밖에는 그러지 않았어. 너를 기다렸을 뿐이라구, 정말이야, 정말이야!”
이번엔 내가 질릴 차례였다. 그는 너무나 완강하게 작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노여워하는 눈초리로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절대로 아니야, 나는 곧 떠나. 한 번씩 오겠지만 니가 날 그런 놈으로 보면 난…….”
이제 그의 얼굴은 발갛게 열이 올랐다.
“내 말을 믿어, 차라리 그날 내가 한 짓을 사과하라면 하겠어. 하지만 다른 건 아니야, 잘못된 거야.”
나는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그의 눈 속이 갓 씻은 유리처럼 빛났다. 그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집애들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먼 곳으로부터 아득히 벌의 붕붕거림이 들려왔다. 넘어져 찔릴 것만 같았던 가시나무의 흰 꽃들도 다시 피어났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고 그도 내 미소를 알아보았다. 화해가 된 우리는 나란히 국수가 마르는 공터를 나와 각자 가던 길로 폴짝폴짝 달려갔다.
나는 햇볕 속에서 날려 가는 비눗방울들을 보았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은 아직 몰랐으나 집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폴짝폴짝 날갯짓을 하듯 달려갔다. 숨이 하나도 차지 않았다. 할머니가 저녁 준비를 할 동안 멸치를 까며 가게를 보았다. 아기와 함께 아직 누워 있는 엄마에게 가서 문 계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줄까 말까 망설이며.
멸치를 까느라 고개를 숙인 채여서 나는 들어오는 손님을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진열판에 놓인 과자를 한 봉지 쥐고 돈을 놓고 나가버렸는데, 나는 지폐를 쥐고도 한참만에야 그들이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리에는 한여름의 지는 햇볕이 더욱 뜨겁게 비치고 있었다. 황금빛을 받으며 먼지가 이는 신작로를 두 사람이 결어가고 있었다. 손을 꼭 잡은 작은 아이와 여자였다. 나는 뭔가 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들을 소리쳐 부르며 따라갔다. 분명히 소리가 들릴 텐데도 그들은 둘 다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가슴에 독침이나 수류탄을 품은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몸이 오싹해졌다. 그들은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늙은 버드나무 앞에 이르자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나는 주춤주춤 다가가 돈을 건네었다.
손님은 살을 찢고 빼내기라도 하듯 힘겹게 손올 내밀었다. 피가 배어난 누런 천에 감긴 손가락은 세 개밖에 없었고, 그나마 잔뜩 오그라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는 더운 여름인데도 때가 낀 긴 블라우스를 입었고 검은 털실 머플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었다. 눈썹이 불에 그을린 듯 듬성듬성했고 눈에는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머리카락 끝이 번개가 치듯 쭈뼛했지만 나는 가속도로 몰려오는 아득한 두려움을 다스리며 태연하게 그 손 위에 잔돈을 올려주었다. 쥐기 쉽도록, 그리고 떨어지지 않도록 세 개의 손가락 안에 단정하게 놓았다. 누런 천에 감긴 손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머리를 함부로 자른 여자아이의 머루 같은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은 어린 내게 세 번이나 깊숙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들판 끝머리에서 기차가 기적을 길게 울리며 굴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순간은 그것 자체가 곧바로 영원이 되는 때가 있다. 마치 유성이 우리 가슴에 떨어지는 순간처럼…… 검은 털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손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아이의 등을 밀며 다시 발을 끌기 시작했다. 서쪽 산에서부터 황금빛이 부채처럼 펴진 신작로 끝에서 완행버스가 금빛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서 감사를 받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 손에 뻗쳤던 그 신비한 고요와 가슴이 확장되는 듯한 어른스러운 느낌이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서 정말로 엄마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았기를 빌었다. 그리고 이제라도 아버지가 기뻐하시며 아기가 걸어다닐 때까지만이라도 집에 빨리 들어오시기를…… 그래서 밤에 엄마 대신 동전을 세어 묶고, 언젠가처럼 우리와 씨름을 하고, 그리고 꿈속에서 본 것처럼, 튼튼한 팔로 아기를 공중에 들어 둥개둥개 흔들어주기를……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장마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더 이상 아침에 춤추고 노래하지 않았다. 삼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월남 가기 전에 가졌던 꿈대로 시골서 돼지를 키울까, 아니면 도시로 나가 직업을 가질까를 궁리해온 삼촌이 마침내 도시로 떠난 것이다. 삼촌은 도시에서 직업소개소룰 열 거라고 했다. 그러면 삼촌은 소장님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막연히 그 일이 보건소장님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어느 날의 밤과 새벽 사이에, 보따리 하나 없이 나가버린 월림댁은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어서, 월림 아재는 도로 자기 본가에 가서 지냈다. 할머니는 가끔 장 씨가 밥을 끓여 먹는 어두운 부엌을 향해 혀를 찼다.
“윗동네에 홀아비는 장날마다 가서 간칼치 엮어 오듯 새 지집을 꿰차고 오는데 장 씨는 우째 그래 능력도 없소, 오데 가서 업어 와도 업어 와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나가…….”
할머니는 또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괜스레 작은집 식구가 나간 빈방의 문을 드르륵 열어보기도 했다. 빈 창문은 눈동자가 패어 나간 생선의 눈처럼 휑하니 열려 있었다. 장롱이 놓였던 곳의 벽은 아끼느라 처음부터 벽지가 발리지 않아 누렇게 바랜 신문지와 찢어낸 아리랑 잡지가 드러나 있었고, 벽 여기저기엔 사촌들의 낙서 자국이 보였다.
방바닥에도 장롱이 놓였던 자국과 뜨거운 것을 놓아 누른 자국과 머큐로크롬* 따위를 엎지른 붉은 얼룩들이 나 있었다.
나는 신을 신고 빈방 안을 거닐며 괜스레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너희들은 저녁에 씻지두 않고 자지? 우린 깨끗하게 씻고 잔―다. 자자 원기소* 세 알씩 먹고…….’
저녁마다 아이들을 뽀독뽀독 희게 씻기고 쌉싸름하고 시큼하고 어느 순간 토할 것같이 고소한 원기소를 보란 듯이 자기 아이들에게만 먹이던 어긋지기 숙모의 목소리가 방 안 어딘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차차차아 기타 소리 땡땡땡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삼촌은 그 뒤 몇 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급속도로 상해갔다. 그는 마흔여섯에 알 수 없는 피부병과 알코올중독과 성병을 간직한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겨우 마흔여섯이었으나, 삼촌은 마치 일흔도 넘은 노인처럼 이가 빠지고 주름이 지고 살결이 검게 시들어 있었다. 우리는 우기의 과일처럼 세월에 떠밀려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그때 이후론 한 번도 더 그 노래를 부르지 않고 나이 들어갔다. 그런 때는 우리 일생에서 꼭 한 번뿐인 강물 위로 마구 풀려나간 아까운 실타래처럼, 한 번뿐인 어느 한때인 것이다.
『문예중앙:』 (1995년 가을호); 『염소를 모는 여자』 (문학동네 1996)
전경린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경남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Γ사막의 달」 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가부장제의 억압적인 규율과 질서에 항거하는 여성들의 일탈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강렬한 이미지와 언어로 담아냈다.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먁 집』,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물의 정거장』 『황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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