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포크가수 윤연선의 '얼굴'은 그리운 얼굴들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놓는 마력을 지닌 노래다. 윤연선은 우수에 젖은 듯 가슴을 파고드는 맑고 허스키한 독특한 음색으로 사랑받다 짧은 활동 후 사라져 한동안 전설적으로 회자되었던 여가수다.
1974년 어느 날. 윤연선은 우연하게 들은 맑고 순수한 '얼굴'의 멜로디와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소극적 성격인지라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용기를 냈다. 당시 서울 마포에 소재한 동도중학교 음악교사였던 작곡가 신귀복을 찾아가 노래테스트를 받고 악보를 받아냈던 것.
국민가요급 노래인 ‘얼굴’의 탄생 비화는 흥미롭다. 1967년 3월 2일. 신학기를 맞은 동도 중학교의 첫 교무회의는 평소보다 무척이나 길었다. 맨 뒤쪽에 자리했던 음악교사 신귀복은 지루함이 느껴지자 옆자리의 생물교사 심봉석에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제목은 '얼굴'로 정했으니 사귀는 애인을 생각하면서 가사를 지어 보라. 나는 곡을 쓰겠다." 의기투합한 두 젊은 교사는 곡을 만들기 시작했고 5분 후 끝난 교무회의와 동시에 곡이 완성되었다. '얼굴'은 이렇게 단 5분 만에 만들어진 즉흥적인 곡이다.
‘얼굴’은 윤연선의 대표곡이지만 최초로 노래한 가수는 아니다. KBS 라디오의 음악프로 '노래고개 세 고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던 신귀복은 '악보보고 부르기'코너 시간에 출연자들에게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르게 했다. 가수로는 국내 최초의 포크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의 멤버였던 성악가 석우장이 처음으로 노래했다.
당시 '얼굴'은 사회교육방송 전파를 타고 해외에까지 알려져 악보를 요구하는 7천여 통의 편지가 국내외에서 답지했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음반으로 처음 발표된 것은 1970년 신귀복 가곡집을 통해서다. 이때 소프라노 홍수미가 가곡으로 노래했다.
한동안 ‘얼굴’이 대중가요가 아닌 가곡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윤연선은 1974년 10월 방송DJ 박원웅의 주선으로 가수 박승룡과 함께 한 공동앨범에 포크송 '얼굴'의 첫 버전의 발표했다. 첫 발표 트랙을 들어보면 지구레코드 전속악사의 트로트 풍 기타 연주가 약간의 거부감을 준다. 본격 포크송이 아� 가요풍의 노래란 이야기다. 이 음반은 큰 반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얼굴’은 처음부터 대중적 흡인력을 발휘한 노래는 아니다. 1975년 윤연선의 두 번째 독집인 <고아/얼굴>이 발표되었다. 총 11곡이 수록된 이 앨범에 참여한 작곡가들은 이름만 나열해도 쟁쟁하다. 초반엔 한국포크의 거장급인 이정선, 오세은, 김의철과 신귀복, 박광우, 민병진등 무려 6명의 작곡가들이 참여했다.
재반에 참여한 이수만, 이필원까지 더하면 당대 최고의 작곡가 8명이 망라된 앨범이다. 앨범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반응을 얻은 노래는 ‘얼굴’이 아닌 타이틀 곡인 오세은이 번안한 '고아'였다. 하지만 번안한 가사내용이 ‘불신풍조 조장’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자 지구레코드는 속이 탔다. 급히 금지된 '고아'를 빼고 '얼굴'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이수만의 ‘마음’, ‘바닷가 모래 위’와 이필원의 ‘미련’ 등 3곡이 추가해 재발매했다.
전화위복이 되었다. 타이틀곡이 된 '얼굴'이 방송과 다운타운가의 중요 신청곡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흘러나오는 이변을 연출했던 것. 소위 윤연선의 ‘얼굴’ 초반 재반 모두는 70년대 포크송의 낭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트랙들 때문에 포크 팬들에게 공히 사랑받는 음반이다.
하지만 ‘고아’가 수록된 초반은 음반 개체수의 희귀함과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선명한 금지의 흔적으로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자리매김 되어 2005년 CD로도 재발매 되었다.
‘얼굴’의 빅히트로 작곡가 신귀복도 학내외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실 그는 한국 중고등학교 음악교육계의 거목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가 작곡해준 교가 만해도 전국 각지에 84개교에 이른다. 그는 이태리 밀라노 유학시절 행진곡풍으로 편곡한 '얼굴' 덕분에 12명이 지원한 베르디 음악원 교수선발 시험에 최종 선발되기도 했다.
작사가 심봉섭도 ‘얼굴'의 진짜 주인공과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주인공은 덕수 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김말순씨. 윤연선은 " 묘한 노래다. ‘얼굴’노래 덕분에 결혼했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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