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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873회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촛불집회
- 저항의 힘이 우리 김천시민 유전자 속에 남아있다 -
- 역사는 비틀거리면서 올바른 길을 찾아간다 -
일요일 저녁 8시 김천역 광장에서 김천평화촛불집회가 열렸다.
무더운 여름 중순이라 오늘은 80여명의 촛불시민이 모였다.
외부에서 보면 항상 똑같은 집회처럼 보이겠지만, 873번 집회 모두 조금씩 다른 특색을 가졌었다. 오늘은 문화 공연과 김천 저항 역사 강연이 있었던 집회였다.
0. 집회 안내와 지원 부스
운영팀이 김천역 평화광장 한켠에는 집회를 안내하고 지원하는 부스를 설치한다. 사드대책위원회 공동부위원장 등의 자리이다. 오늘은 무더운 여름집회를 이겨내기 위해 시원한 자두청 음료가 준비되었다. 색깔만 보아도 먹음직스러운 음료였다. 80여명의 참석자 모두에게 한 잔씩 돌아갔다. 음식, 공연, 강연이 함께 어울어진 즐거운 집회였다.
1. 사회자 사무국장 장재호
큰 일이 아니라면 반드시 자리를 지키는 사회자. 제일 어려운 일은 집회의 발언자, 공연자, 강연자를 찾는 것이다. 오늘도 준비성이 철저한 사회자의 노력으로 873회 집회 구성자 집합이 꾸려졌다. 잘 꾸려진 집회의 가장 큰 혜택은 집회 참석자에게 돌아간다. 양질의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제공된다. 김천역 평화광장 집회는 사회 현안, 즐거운 율동, 역사, 시민 정신을 한꺼번에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현장임이 분명하다.
2.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먼저 희생하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리의 힘찬 결의를 다지는 합창과 구호를 하며 집회를 시작한다.
3. 공동위원장 박태정 개회사
오늘 집회에서도 발언의 고통을 여과없이 드러낸 솔직한 공동위원장. 맞다. 집회 2회 중에 한번의 개회사 발언을 해야한다. 공동위원장에게는 한명의 집회 일원으로서 조용히 참석하는 것이 작은 소망일 수 있다. 7년 동안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발언 소임을 지금까지 해 왔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모습이다. 오늘도 그 한계를 극복하며 발언을 마쳤다.
“매우 더운 날씨다. 이겨내야 한다. 코로나 확진자가 많아져서 걱정이다. 개인위생 철저히 해서 코로나를 극복하자. 요즈음 코로나 재발확률이 높다. 방송상 5개월 주기로 코로나 재발이 가능하니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7년동안 사드반대 투쟁을 해왔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필요없는 사드는 결국 철거된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사드는 미국 것이다. 우리에게 청소, 경비, 비용부담 등 오만 잡일을 다 시킨다. 프랑스 드골대통령은 제2차대전 독일 부역자를 완전하게 청산시켰다. 드골은 혹시 프랑스가 외세지배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절대로 민족을 배신하는 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잘 되지 않았다. 아주 가슴아픈 역사이다. 민족을 배신하는 자는 확실하게 청산했어야 했다. 천추의 한이다. 우리의 사드투쟁의 의지만큼은 드높다. 사드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투쟁할 것으로 믿는다.”
- 사회자 중간 발언 -
8월 14일은 기림의 날이다. 1991년 8월 14일은 고(故) 김학순(1922~1997)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위안부'의 문제를 세상에 최초로 알렸던 날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다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로 하여금 용기를 주어, 국내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2012년 12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는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했고, 이듬해부터 세계의 여성·인권단체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과 연대집회를 개최했다.
최근 연대집회가 많이 열린다. 연대는 노동자, 평화활동가, 시민단체,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세력이 함께 한다. 연대의 힘을 우리는 안다. 우리 사드도 연대투쟁을 함께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4. 율동맘과 율동천사의 문화공연
8월 12일 저녁 7시 대구 평화의소녀상 옆 도로(2.28공원 인근)에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대구경북본부와 대구 경북 시민단체 등이 공동으로 광복 77주년 기념 8.15. 자주평화통일 대구경북 시민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김천의 율동맘과 율동천사가 3개의 공연을 하였다. 이 중 하나를 집회 중간에 선보였다.
5. 통일선봉대 겨레하나 한성민(성주 출신) 발언
“방학을 맞이하여 대학생으로서 통일선봉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국 여러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부산 대공포미군기지, 부산 제8부두, 소성리, 일본 영사관, 서울의 평화 소녀상과 미대사관 등에서 투쟁을 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나라를 자신들의 전쟁기지화하고 있다. 부산에서 미국에 의한 대량 학살무기인 탄저균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 분노가 치밀었다. 또한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서도 분노가 느껴졌다. 강제노동 징용자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일본, 신자유주의를 통해 이익만 탐하는 제국주의 국가들. 여기에 고통받는 우리 민중. 이번 통일선봉대의 주제는 ‘민중의 눈물을 닦아주는 통일선봉대가 되자’이다. 통일선봉대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신자유주의체제에서 고통받은 노동자의 사망 소식이었다. 그리고 소성리에서 7년째 고통받는 사드관련 주민도 고통의 중심에 서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땅을 마음대로 함부로 쓰고 있고, 여기에 사는 주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가 생긴다. 우리 대학생들이 투쟁의 선봉에 서서 민중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닫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 청춘들이 앞장서서 싸우겠다.
통일선봉대에서 배운 ‘대학생이 앞장서서 조국통일 앞당기자 투쟁!’ 구호로서 마무리 하겠다.”
6. 소성리 지킴이 정진석
“오늘은 협찬을 받은 고구려 후예의 의상을 입고 나왔다. 소성리에서 7년간 투쟁을 하고 있기에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의상이다. 소성리에서 앞으로 사드 나갈때까지 계속 있을 것이다. 소성리는 제 자신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오늘은 3곡을 준비했다.”
이 중 하나는 “우리의 사드투쟁 이야기를 노래의 가사로 담았다”
먼저 아사히노동자를 기념하는 “세월”의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
두 번째는 “평화, 전쟁의 반대상 기지앞에서”
세 번째는 “진실의 빛”
가사를 음미해보니 우리의 이야기였고, 노래가사 내용에 진심이 느껴졌다.
7. 기록팀장 구자숙 강연
‘김천의 저항 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1) 8.15.해방이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
8월 14일은 위안부 기림의 날이다.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9월 1일은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방송에서 우연히 ‘벌거벗은 한국사’의 뒷부분에서 ‘8.15. 해방이후 한국인은 해방이 꼭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내용을 보았다. 8.15. 광복을 조선인들이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 부분에서 미국이 조선에 들어와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는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은 정말로 가슴 아프고, 섬득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을 몰아내준 미국이 한국에 온다고 하니까 한국 사람들이 부산에서 미군 해방군을 환영해주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당시 미군으로부터 총포가 발포되었다. 그리고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왜 발포했을까?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가?
당시 우리나라의 여운형 등 정치지도부는 미군은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친 해방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의 정책에 협조하고 동조해주었다. 그런데 미군은 친일 경찰을 재고용하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며 처단하기 시작했다. 이를 참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 1946년 대구에서의 10월 항쟁이었다. 이 항쟁은 일주일 후 경북 곳곳으로 퍼졌다. 이 열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 지역 김천은 당시 10월 항쟁시 너무도 조용했다고 한다.
(2) 조선시대 김천의 저항
김천지역은 원래 저항의 도시였다. 1862년 개령농민항쟁이 일어났다. 개령장터에 모인 저항자들은 개령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의 옷을 벗기고 때렸으며, 그 밑의 아전을 죽이기까지 했다. 3일동안 격렬하게 일어났던 농민항쟁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추풍령을 넘어선 김천에서의 항쟁은 대단했다고 한다. 김천의 성내동은 ‘김천초등학교 부근에서 김천역과 숙소, 역졸들이 있어 성을 쌓았던 곳으로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어서는 관문으로 나라의 소문과 정보들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동학은 김천에서 매우 큰 세력을 얻었다. 김천에 집강소 역할을 하는 곳이 설치되었다. 감천 내가에 흰옷 입은 농민들이 모여, 죽창들고 성주를 도와 성주읍내를 불태우기도 했고, 해평으로 달려가 해평의 일본군 진지를 급습하기도 하였다. 구성에 있는 조마, 김천 일대 어모까지 세력이 대단히 컸다.
(3) 독립운동 김천 1세대 저항(일제강점기)
이후 전개된 운동이 1919년 3.1운동이었다. 김천에서는 6번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중 4번이 개령에서 일어났다. 개령에 사는 머슴들이 주축이었다. 요동산이라고 하는 이야기 갑문국 나라 근처 산이 근거지였다. 개령 지역 요동산 부근에 독립운동을 기리는 푯말 한개도 왜 못세우는지 현실이 안타깝다.
김천의 제1세대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사람이 바로 개령의 김단야(金丹冶, 1899년 1월 16일 ~ 1938년 2월 13일)였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두만강 건너편 용정촌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이 응어리져 있는 곳이라서인지 노랫말에서의 님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사라진 독립투사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박헌영이 가석방이 된 후 두만강을 건너 탈출할 때 피골이 말이 아님을 보면서 친지가 지은 시가 노래 가사로 전해져 잘 알려져 있다.
김단야는 박헌영과 상하이 망명하면서 거기서 박헌영과 임원근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삼인당(三人黨)이라 불리면서 같이 활동하게 된다. '화요파 트로이카', '화요 3인조'로 불리던 박헌영, 임원근과는 고려공산청년회와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동지 사이였다.<출처 : 위키백과>
(4) 독립운동 김천 2세대 저항(일제강점기)
https://news.v.daum.net/v/20220718093901849
72년 만의 만남.. 그러나 1200명 목숨 거둔 숲은 말이 없다
[장호철 기자] ▲ 희생자 추모제는 김천지역에서 역사를 공부하다 임종업과 그가 감당해야 했던 이 땅의 아픈 현대사를 만난 시민들이 마련했다. ⓒ 장호철 지난 14일 오전 11시,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폐교된 지례중학교 구성분교장 맞은편 산어귀, 돌고개에서 추모제가 조촐하게 베풀어졌다. 1950년 7월 14일, 이 숲 부근에서 학살된
김단야가 기획했던 것이 6.10.만세 운동이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임종업 등 김천의 독립운동가들이 제2세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당시 학생신분 시절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만든 것이 청년회였다. 김천YMCA를 만들기도 했다. 6번째로 큰 단체였다. 당시 이름을 ‘금릉청년회’로 조직했다. (당시 존재하던 ‘김천청년회’는 친일세력이 조직한 단체) 청년회관을 문화센터 맞은편에 지었다. 그곳에서 야학을 하고,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였다. 특히 1920년대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병일, 나종운, 이병운, 임종업, 황태성, 임재화(여성)의 대표적인 독립활동 인물들이 있었다. 임재화의 기록은 백과사전에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를 않는다.
임종업은 황태성, 박상희(박정희 형)과 함께 경북의 3인방이었다. 황태성은 상주 청리사람이었고 숙박업을 하였다. 숙박업 운영시 정보교류가 많았다. 임종업은 신문지국을 운영하였다. 당시 신문지국 운영자라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시대정신을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독립운동인 농민운동, 노동운동, 형평운동 등 활동을 하면서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쌓는다. 황태성은 1935년 즈음 소비소학 이사장이 된다. 지금의 농협협동조합 중앙회 이사 정도가 된다. 세력이 대단했다. 이것을 보고 일본군들이 김천에서 검거작전을 펼친다. 1935년에 김천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300명이 검거되고 투옥된다. 이 규모는 서울보다 많은 규모였다. 당시 김천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해방이후 김천지역 인근에는 미군 1개 중대가 상주하고 감시를 계속했다고 한다. 김천의 독립운동 사회주의 계열사람들이 많이 투옥되고 지속적인 탄압이 계속되었다. 김천에서는 1935년 전후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에의 열기가 전달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임종업의 아내이자 황태성의 누이동생도 주목할만 하다, 1920년대 한국의 좌파와 우파가 합쳐서 만든 신간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신간회에 여성단체인 근우회가 존재했다. 이 분은 근우회의 회장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한다. 모두 구속이 된다. 임종업은 보도연맹에 강제가입되었고 김천 인근에서 처형된다.”
(5) 사드반대 저항정신 기원
우리 김천의 저항정신은 오랜 세월 뿌리를 두고 있다. 사드를 통해 이 저항정신이 김천 지역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처음에 이곳 김천역 평화광장에 1,000여명의 촛불시민이 모였을 때 믿기지 않았다. 일부는 김천 사람일 리가 없다고까지 했다. 우리도 깜짝 놀랐다. 이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김천지역 선조의 저항 정신은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 전수되었다고 생각된다.
가는 길이 멀기는 하지만 ‘역사는 비틀거리면서도 올바른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힘내면서 투쟁하자.
8. 율동맘과 율동천사 “가자 통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