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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윤회 혹은 환생의 법칙]
* 유스티니아누스 교황 치하이던 기원 후 533년.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카톨릭교의 원로들은 경전에서 환생과 관련된 가르침을
빼버리기로 결정했다. 그 가르침들을 그냥 두고서는 지옥과 넘실거리는 불길,
두려운 신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교회 권력은 두려움이라는
자기 근거를 잃을 판이었다. 재탄생의 수레바퀴에 대한 이해는 벌이라는 개념과
심판하는 신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 물질성은 양극성, 즉 음과 양인 반면, 신은 합일이어서 이원화되고 분리된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신과의 합일은 오직 양극성이 합쳐질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양극성으로 이루어진 영역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영혼 속에 들어 있는
태고적 앎의 기억을 끌어내는 방식으로만 이 문제를 직감할 수 있다.
이처럼 배움이란 실제로는 단지 기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믿고 안 믿고에 상관없이 개개의 영혼 속에는 모든 지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배움이든 결국은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깨달음enlightment 역시 마찬가지다.
* ‘시작 중의 시작’이라는 주제에 관한 비유.
숫자 1을 상상해 보라. 1은 자신의 확장이자 반영인 숫자 2없이는 나눌 수 없는
존재인 1로서의 자기 능력을 도저히 알 수 없다.
1은 자신이 포함되며, 자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2속에 자신을 반영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1로서 이해한다.
이제 1은 2라는 자신의 반영물 속에서 자신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깨달음,
3이 된다.
절대자, 즉 신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존재전체이다.
모든 것을 망라하는 존재는 대립물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하나One다.
하나가 자신을 알려면 자신을 자신 속에 비춰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는 자신의 반영물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결정체 나 crystal SELP, 그리스도 나Christ SELP라는 확장물을 창조한다.
비추는 것은 먼저 자신이 비추려는 모습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 나,
즉 ‘아버지’의 모습으로 창조된 그리스도가 탄생된다.
이제 하나(1)의 두 측면이 존재하기에 그리스도는 2를 나타낸다.
1은 자신 속에 2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2는 1을 포함한다.
1없이는 2가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확장인 그리스도라는 반영물에서 하나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생겨나는 깨달음은
한 영성One Sprit, 완벽한 영성이라는 깨달음,
결국 3이 되는 성령Holy Sprit이다. 이것이 하나인 ‘신의 3중주’이다. /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신 나의 그리스도 나, 즉 하나인 신의 결정체 나이다.
숫자 2가 자신 속에 1을 지니듯이 그리스도 나도 자신 속에 신을 지닌다.
그런데 타락한 의식상태에 묶인 마음은 여기서 벌써 나눔을 만들어 내어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의 두 측면, 측 창조주와 창조물,
드러나지 않은 신과 드러난 신으로 보지 않고, 별개인 둘로 본다.
그러나 신의 아들 측면인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자신의 잠재력을 체험키 위해
자신의 창조물을 거치며 여행하는, 표현된 아버지에 다름 아니다.
* 영성Sprit은 가장 높은 진동수인 빛이기에 그것이 낮은 진동인 물질을 체험하려면
그런 진동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영성이 내면에서 물질을 ‘조망하려면’
신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의 운송수단이자 영성이 형상 영역과 관계를 맺는
몸이 창조되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일직선 시간으로 치면 억겁의 세월 동안
계속되어 온 하나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영성이 자신의 도래에 적합한 형상 영역을 준비하기 위해 물질의 진동수를
사랑으로 부드럽게 끌어올리는 과정이.
이 과정은 처음에는 옅은 몸체들에서 시작되어 서서히 밀도 높은 진동으로 접근해 갔다.
영성은 이 과정을 준비하고 촉진하기 위해 자기의식의 단편들, 잘디잔 조각들을
형상의 세계로 들여보냈다.
영성이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어 식물과 동물, 간단히 말해 생물을 존재케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그리스도 의식의 이 조각들이 형상 세계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 나름의 정체성identity을 꾸며낼 위험이 있었는데,
이런 위험은 실제로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의식이 자신의 근원에서 추락하여 참 나와의 연결을 잃고 만 것이다.
이 같은 타락은 의식의 원자들. 즉 조각들이 가장 고밀도의 창조물인
신체형상계 속으로 들어가기 훨씬 전에 일어났다.
우리는 자신을 나눠진 존재로 상상하는 조각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존재뿐이니,
이것은 머리 속에서 지어낸 정체성에 불과하다.
* 영혼soul은 그리스도 나가 자신의 창조물을 경험하는 발견 여행에서 사용하는
으뜸가는 속옷, 혹은 운송수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나가 결코 벗지 않을 한 벌의 ‘의복’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리스도 나는 생각을 ‘잡아둘’ 수 없다.
생각은 그리스도 나를 그냥 지나가 버릴 것이고 모아지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영성은 양극성의 영역을 체험하고, 몸을 발달시키며,
비교로 배우기 위해 물질의 옷을 입는 것이다.
* 영혼이 자신의 근원과 다시 합친다고 해서 자신만의 진동수,
즉 개별성을 잃는 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별성을 그대로 지닌 채
나눠진 상태에서만 벗어난다. 영혼이 양극성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극성 자체로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영혼은 자신을 남성에너지와 여성에너지라는
양극성으로 나누어야 했다. 이 때문에 모든 영혼은 자신의 반대 극성을
‘짝영혼’soulmate으로 갖게 된다. 물론 모든 영혼은 하나인 신, 한 나의 표현이기에
결국은 모두가 모두의 짝영혼이긴 하지만 말이다.
* 몸이 신체로 수태될 때 이미 그 육신을 담당할 영혼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영혼이 실제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수태시기에서부터
1년 정도 늦춰질 수도 있다.
일차instant 영성인 그리스도 나는 신체가 태어나는 순간,
첫 들숨과 날숨으로 양극성 영역에 참여하는 순간, 양극성의 세상으로 들어와
자신의 근원과 목적을 잊는다. 반면에 자궁 속에 있는 동안은 여전히 알고 있어서,
어떤 언어로 말을 걸어도 영성은 이해한다.
* 일단 영혼이 양극성의 세계로 들어오고 나면 영혼은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뒤집힌 방식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진리, 곧 신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실체Reality와 정반대되게 인식한다.
눈의 망막이 사물들을 받아들일 때
그러하듯이, 새로 태어난 아기도 모든 이미지들을 뒤집어서 본다.
그것은 사진기의 렌즈가 필름위에 역상(逆像)을 비추는 것과 꼭 같은 과정이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뇌가 그 상을 제자리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 절대자인 그리스도 나의 이 개체표현은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다른’ 나 들의 무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들을 ‘다른 사람들’로 여긴다. 이제 몸으로 구획 지어진 그것은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보게 되니, 분리의 환상은 이렇게 해서 현실이 된다.
하지만 이 속에는 위대한 지혜가 있다. 몸은 분리를 위해 창조되었다.
실체를 실체로 인식할 수 있는 건 환상의 시야로 볼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체 안에서는, 실체가 우리이고 우리가 실체이어서 우리는 실체를 인식할 수 없다.
* 밀도 높은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영성의 여행은
영혼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시험이지만,
신의 아들이 시험을 거치면서
자신의 기원인 빛 속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낸다면,
그의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 된다.
그는 삼라만상의 가장 심오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 인간이 한 생애를 거치면서
신체 속에 머무는 동안 겪는 우여곡절의 모든 체험에는
감정이 동반된다. 그 혹은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가져갈 유일한 ‘소화물’,
즉 ‘자산’인 이 감정들은 그의 영혼 속에 기록된다.
사람의 영혼은 몸속에 실제로 자리 잡고 있다.
영혼은 태양신경총(위 뒤쪽의 신경마디 중심)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실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사건들이 불러온 감정의 정수들만을 기록한다.
* 만사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에 주저 않아서
우리의 운명은 어쨌든 ‘별들 속에 모두’ 들어 있다는 식의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이런 식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 삶이라는 책 속에
이런 운명론적인 태도를 가장 먼저 적어 넣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지금 그는 그것을 다시 밟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거기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원고 중에 이 부분을 써넣은 이유이다.
* 한 번에 조금씩 우리의 배움을 진전시키면서
한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이어지는 여행이 계속되는데,
그러다 보면 마침내 그 영혼이 축적된 체험으로 흠뻑 젖는 때가 찾아오게 된다.
이런 축적은 영혼에게 인식대상에 대한 철저한 권태를 가져다줄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 모든 곳에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혹은 슬픔이 쌓여서 풀려나려는 엄청난 압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제 억만겁의 시간 속에서 처음으로 가슴은 “틀림없이 뭔가 다른 길이 있을 거야”라고
울부짖으니, 그렇게 되면 생각은 눈앞 물질들로부터 보편 삶과 관련된 물질들과
그것들 전체의 의미로 초점을 옮길 것이다. 그러고 나면 배움은 성큼성큼 이루어진다.
이전에는 백번의 생애를 들이고서야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단 한 번의 삶으로도
깊이 이해된다. 이때 초점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한다.(하늘왕국은 내면에 있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깨달음으로 배움이 최고에 이르면 더 이상의 환생은 불필요하다.
그 영혼은 이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다.
* 우리는 자아여행을 통한 배움의 순환 속에 존재하는,
고정된 인식의 힘이라는 함정하나를 먼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체험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체험을 반복하는 데 따라 인식이 고정되고
믿음 또한 그런 인식으로 한정된다는 데 있다. 우리가 함정에 빠지는 건 우리의 신념체계와
어긋나는 성격의 체험을 할 때이다. 자신이 인식하는 것을 믿어야 하듯 믿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신념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을 걸러내는 일종의 필터로
작용하게 되고, 이것은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한 채 생애를 계속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삶의 고통과 투쟁과 증오와 불쾌함을 몇 번이고 다시 체험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그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건만, 우리는 계속 원을 따라 돈다.
달리 말해 ‘틀에 박히게’ 된다.
*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의 진짜 원인을 깨닫게 해줄
새로운 체험들에 문을 열 수 있다. 그전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그 위협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단계에서는 형태 너머의 내용을 살펴보고, 두려움의 원리를
확인하여 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일단 원인을 분명히 하고 나면 그 결과인 두려움은 더 이상 겪을 필요가 없다.
위의 예는 물론 인류가 배워야 할 궁극의 교훈을 설명한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인식을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인식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의 배움 곡선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이 아니라 나선형을 그리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인식을 고정하지 않고 인식하자면 인식 대상에 대한 판단을 그만 두어야 한다.
인식을 고정시키는 것이 판단이기 때문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라”는
예쉬와Yeshwa의 충고는 이런 시각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인식한 것을 판단할 때, 즉 평가할 때 그것은 언제나 그릇된 인식을 불러온다.
이런 견해를 논리적으로 마지막까지 따라갔을 때 나오는 결론은,
판단이 없으면 비난이 있을 수 없고, 비난이 없으면 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죄가 없으면 용서 역시 무의미하니,
용서할 필요가 없는 상태란 결국 순수존재인 순결함의 상태,
즉 깨달음의 상태일 수밖에 없다.
* 물질영역으로 들어가는 이 여행을 시작함으로써,
자아는 자신을 ‘낙원’에서 추방했고
자신의 기원, 자신의 근원을 잊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안전하게 집에 있으면서 꿈속을 여행하고 있을 뿐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환상이 가능하겠는가?
그 꿈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다.
* 우리를 꿈의 결박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환상에 대한 참된 인식이다.
참된 인식은 기적을 받아들여 치유하게 한다. 기적에는 어려움의 정도(程度)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문제가 어렵든 쉽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정도는 상관없다.
참된 인식은 우리가 많은 문제라고 여기는 지점에서 단 하나의 문제,
즉 ‘하나상태에서의 분리’라는 문제만을 알기 때문이다.
한 문제이기에 가져다주는 대답 역시 하나다.
물론 우리가 기적을 초대하여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사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방어벽을 넘어뜨리고 말려들 진리에 다름 아니다.
* 물방울이 바다와 하나이듯이
그리스도 나인 우리는 절대자 속에 거주하며
아버지와 하나이고 하나의 부분이다.
[2장. 사탄 혹은 거짓자기]
* 뭔가를 믿는다는 건 정도 차는 있겠지만 결국 숭배한다는 뜻이다.
*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다.
* 거짓자기는 모든 면에서 한 나ONE SELP와 대립하기 위해서,
한 나의 대립물이 되어야 했다. 하나는 어디에나 편재(偏在)하며 전지전능하니,
거짓자기는 반대로 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자신을 연약함과 무력함의 이미지로 비춰야 했다.
이것이 바로 분리된 자아들인 인류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 몸을 경영하는 것이 자신의 본래 과제였던 나의 이 부분,
자신의 나와 완전히 하나이던 이 부분은 이제 혼자가 되었고 영혼은 두 목소리,
즉 참된 나인 영성의 목소리와 모든 점에서 그에 반대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
그 후로 거짓자기가 정체성으로 삼은 것은 몸이었다.
사실 거짓자기는 이 자그만 먼지 조각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이 보잘 것 없는 울타리, 그것이 지도자로 군림하고
왕위에까지 오른 이 초라한 작은 왕국을 숭배하는 데 바쳐졌다.
* 그것은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힘들을 자기 ‘외부’에 있는 모든 것들에 내주었다.
이제 힘없고 무력해진 그것은 자신이 힘을 주었던 것들에게 도리어 종속되고 말았다.
예전에 한 나로서 그것이 가장 먼저 창조했던 바로 그것들에게 말이다.
그 자신 또한 여전히 한 나의 일부인데도 거짓자기는 한 나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제 그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보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보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처에 두려움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한 나가 자신의 창조물에 부여했던 의미는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 우리는 약간의 좋은 것을 보지만 그것을 나쁜 것과 균형 잡히게 만들고는
그렇게 하는 게 아주 당연한 듯이 여긴다.
* 삶은 당연히 우리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니, 결국 인식은 더 고정되고
우리는 손가락을 세워서 열심히 하늘을 가리키면서 삶이 왜 이토록 비참하냐며
신을 비난한다. 하지만 신은 우리를 벌하지도 포상하지도 않으니 더 이상 신을 비난하지 마라.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을 벌하는 것은 인간이다.
* 거짓자기라는 개념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 중에 ‘그 길에 있으면서’
온 힘을 다해 그 무거운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쉬지 않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는
또 다른 함정에 빠질 따름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깨어나기를 참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바라지만,
어떤 종류든 싸움은 저항이어서 대립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
이 때문에 모든 종류의 싸움은 대립물의 영역인 거짓자기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결국 환상이 환상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자기를 그것의 전쟁터에서 마주쳐서는 안 된다.
그 전쟁터에서 저항해봤자 단지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들뿐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싸운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니,
우리가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그것을 더 힘있게 만들고 만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이란 정도 차는 있지만,
결국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숭배하는 것과 싸운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모든 종류의 저항은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쪽 뺨을 내밀라”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 거짓자기란 바로 나 자신으로 여기고 사랑하고 소중히 품어오던
나의 잘못된 부분이다. 자기 존재의 일부와 싸울 때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더 심한 분열과 해체밖에 없다.
*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고, 싸움이 없으면 감수해야 할 투쟁도 없다.
어둠은 빛에게 길을 내어준다. 그냥 그 뿐이다. 그게 전부다.
우리의 거짓된 마음상태는 무저항(無抵抗)을 굳이 공격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것으로 해석하겠지만 이것 역시 뒤집힌 진리일 뿐이다.
오히려 무저항은 양극성의 균형이다.
일단 그렇게 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는 참된 인식에 이를 수 있다.
[3장. 세상사고방식 - The Global Thoughtform]
* 만일 특정한 사고 양태를 고수하는 개인들의 수가 임계 수치에 도달한다면,
이 사고양태는 모두의 자산이 된다. 달리 말하면 한 집단의 사고 진동수가
인류를 에두르고 있는 공명체를 공명시킬 만큼 충분히 강해지는 것이다.
* 우리는 인식을 고정하는 ‘핑퐁’(탁구) 효과를 관찰할 수 있다.
개별정신은 가족 집단의 공명을 키워내고, 가족 집단은 다시 그 가족이 사는 지역에
맞는 특별한 공명을 키워낸다.
지역 집단의 사고방식은 나라의 공명에 반영되고,
다시 이것은 세상사고방식에 보태진다. 이렇게 형성된 세상사고방식은
이제 역순으로 하위 집단에 반영된다. 우리는 올가미에 완전히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지 의아해 한다.
* 사회의식은 우리가 유행하는 태도를 ‘따르도록’ 만든다.
이런 의식이 최면상태, 거짓자기의 주문에 걸린 마음상태이다.
여기에서는 실체인 존재상태가 ‘소유’상태로 뒤바뀐다.
물질과 물질 조건들에 대한 필요가
사랑받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필요를 대신하는 것이다.
이 주문이 어느 정도로 무자비한가는 사람들의 소위 영적 깨달음이란 게
실은 물질에 대한 욕구를 영적 힘과 영적 지위에 대한 욕구로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주문에 걸린 상태로 남아 있다.
즉 그 같은 마음은 여전히 ‘가지기를’ 바라면서도 순진하게도
자신은 완전히 변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물질 관점을 벗어던지고
진심으로 삶에 대한 영적이해로 깨달음을 확장시키려는
사람은 모든 욕구를 내던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여전히 사회의식 속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의 형제만큼이나 이기적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으니,
그가 원하는 건 삶의 단편들이 아니라 삶 전체다.
그는 빵부스러기 따위만으로,
다시 말해 물질 가치만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질렸다.
그는 더 큰 부, 나아가 모든 것인 근원자체를 요구한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요구하자면,
자신을 찾아내자면,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즉 자화상과 함께 이 상에 얽혀있는 가치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영적spiritual이란 용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삶에 대한 우리의 뒤집힌 인식을 반영한다.
보이지 않는 영역과 연관된 이 용어에는 일종의 모호함이 담겨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서 종교적인 암시를 느낀다. 하지만 어떤 문맥에서든 영성sprit은
사물의 본질을 가리키며 그 자체로 실체Reality를 뜻한다.
따라서 영적으로spiritually 열린다는 것은 실체에 눈뜬다는 뜻이다.
* 인간의 뇌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그냥 생각의 수신기일 뿐이다.
뇌는 생각을 만들어낼 수 없다. 생각을 널리 퍼트릴 수는 있지만 생각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두뇌는 컴퓨터가 입력된 자료를 처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받아들인 생각을 처리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생각은 우주의 생각창고, 존재 전체에서 나오는데,
생각은 진동이므로 우리는 우리 의식상태가 허용하는 진동만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진동수와 맞지 않는 생각들을 걸러낸다.
이 걸러내는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
공명과 친화력의 법칙the law of Resonance and Affinity이다.
생각은 신체외부의 차크라들을 거치면서 ‘깔대기 모양으로 모아져
우리 머리꼭지에 있는 뇌하수체로 들어온다.
이때 우리는 영혼의 각성 정도에 따라
특정 생각의 진동수를 받아들이거나 무시한다. /
생각은 빛, 아니 차라리 정보이다. 우리 신체 속에 있는 정보,
즉 빛의 운반체는 염색체 속의 이중 나선형 DNA이다.
각각의 차크라는 나선 하나에 대응하므로 12개의 차크라 전부가 활성화되면
우리는 완전히 복구된 12개의 나선형 DNA를 갖게 된다.
* 가장 낮은 진동수로 생각의 유입이 제한되는 것은 전적으로 두려움 때문이다.
따라서 두려움에 근거한 우리의 태도를 풀어놓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우리는 높은 진동수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잠자는 챠크라들은 활성화될 것이고,
다시 그 챠크라들은 DNA에 정보를 흘려보낼 것이다.
* 악순환을 끝내려면 먼저 두려움에 근거한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할 때,
즉각 이어지는 의문은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인가’이다.
대답은 간단히 말해 바램이다.
하지만 의식을 확장하려는 바램은,
이 확장을 가능한 현실로 여기지 않는 한 생기지 않으니,
그 다음으로 이어질 물음은
‘왜 우리는 더 위대한 현실이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정된 인식 때문이다.
가장 낮은 진동수인 두려움을 지탱하는 것이 고정된 인식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오직 ‘바늘을 홈 밖으로’ 밀어내는 것뿐이다.
사실 여러분이 사물의 참된 상태를 일단 인정하고 나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정체상태를 심화시키는 부차적인 요소
-힘만 있으면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거짓자기의 약속에 속아
그 먹잇감이 되고 만 동료 인간들- 때문에
이런 인정을 하기가 힘들다는 데 있다.
* 무엇이든 우리는 우리가 에너지를 주는 것을 권능 있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하면 우리는 사랑을 권능 있게 만들고, 두려워하면 두려움을 권능 있게 만든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권능 있게 만든 그것을 끌어당긴다.
만일 당신 자신이 참으로 누구지 안다면, 마침내 당신은 당신을 있게 한 영성이
당신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고 보살펴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것을 물이 축축하다는 걸 아는 만큼이나 명확하게 안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우주 전체에 어떤 두 존재도 없다는 것,
자신을 다수로 표현하는 오직 한 존재만이 있음을 안다면,
어떤 것도, 절대 어떤 무엇도 당신을 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 전체가 자신이거늘 당신이 누구를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굳이 두려워하자면 당신은 자신을 두려워해야 하리라.
* 잘라진 DNA의 복구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하나는 잠자는 챠크라들을 순수하게 기술적인 방법으로 활성화시키려는 시도는
어리석다는 점이다.
‘플러그’가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실패하거나 심하면 해를 입힐 수 있다. 게다가 일단 두려움이 없어지고 나면
어쨌든 기술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둘째로 자신의 DNA를 치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전자기 진동을 발산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생존의식이라는 낮은 진동으로 손상되고 부서진 DNA 회로를
오히려 강화하던 예전 진동과 달리, 이 진동은 동료 인간들의 치유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사람은 일종의 횃불이 되어 주위의 진동수를 바꾼다.
따라서 그의 과제는, 기술 용어로 말하면 주파수 변조(FM)이다.
남은 다섯 차크라를 활성화하여 다시 한 번 우리 운명의 주인, 진짜 주인이 되려면,
먼저 우리는 생존 사고방식인 사회의식을 어떻게 내려놓을지 알아야 한다.
두려움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두려움 없는 마음상태란 조건 없는 사랑,
자신이 창조주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영혼이다.
그것은 뛰어난superior 의식, 따라서 초월super의식이다.
이런 사람은 세속의 어떤 역경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하나임을 기억해 내자면 생존 사고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 과정은 층층히 쌓인 숨막히는 사고 양태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으로 완료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받아들인 가치들의 허구성을 명확히 깨달을 때,
오직 그럴 때만 우리는 그 가치를 바꿀 수 있다.
* 사회의식은 분리라는 질병이다.
여기서 고상한 미덕의 이상은 뒤집히고 우상들로 대체된다.
하나임에서 떨어져 나간 마음은 오직 그것의 단편들만을 인식한다.
존재하는 것은 나의 단편뿐이어서 나머지는 부정된다.
자신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 존재는 자신을 신 나가 아니라 자화상과 일치시킨다.
* 한 영혼을 빛으로, 슬픔과 부족이 없는 자연스런 존재상태인 순수한 기쁨으로 데려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대개의 경우, 어쨌든 영혼이 필요로 하는 건 고통, 더 많은 고통이다.
영혼은 나를 부정하는 놀이에 완전히 지치고 나서야,
그 끝없는 윤회로 모든 힘을 다 소모하고
나서야, 마침내 겸허해져서 외부가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제 영혼은 울부짖는다. “틀림없이 다른 길이 있을 거야.
신이 있다면 제발 절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지만 도움을 받고 나면
대개는 다시 그 놀이에 달려들어 신을 잊고 만다.
우리가 진짜로 바라는 건 신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꿈을 수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빛으로 돌아가는 데 고통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만든 드라마에서 깨어나려는 진지한 바램, 항상 이것뿐이었다.
이런 바램을 가지려면 우리는 먼저 이 드라마의 참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 뭔가를 포기하려면 먼저 그것이 자신에게 무가치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의 ‘정상적인’ 일상이 사실은 거짓된 의식상태임을 깨우치고 나면,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것의 무가치성을 입증할 수 있다.
이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다.
그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뭔가를 치유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책이 거짓자기를 치유할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먼저 거짓자기를 인식시키는 데 큰 무게를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떠받든다. 결국에 가서는 나무 상자에 넣어져 썩어 없어지고
말 그것을 위해서. 거짓자기의 엄청난 해악이 여실히 드러나는 지점이 여기다.
그것은 먼저 몸을 자신의 실체로 자리 잡게 하고는 지치지도 않고 몸의 시중을 들다가는,
마침내 삶은 비참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버린다.
이 사실을 가지고도 거짓자기가 정신병자임을 폭로할 수 없다면
다른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 (거짓자기는) 신체라는 운송수단을 보살피는 이 일이 절대 쉽게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을 쉽게 이룰 수 있다면 삶은 한바탕 즐거운 춤일 테니,
거짓자기로서는 이런 일을 용납할 수 없다.
실체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거짓자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정신착란적인 필요들에는 언제나 고통이나 고됨(대개는 둘 다)이
따라 붙는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미끼를 달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고 그것을 몸으로 바꿔버린 데 따른 대가는 돈으로 지불된다.
이제 이것은 일생의 과업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온갖 것이 다 값을 갖는다.
* 반면에 영성은 값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기에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창조주인 신 나와 하나인 사람은 세속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도
사실상 자신의 세속적 의무들을 다 해낼 수 있으며, 완벽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모든 부족은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부정할 때 오기 때문이다.
* 신체체험은 굉장한 모험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모험을 하는 건 신체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소위 삶이라는 체험이 영성과 균형 잡히지 않을 때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핵심문제는 균형 잡힌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실현된 신이 되는 것이다.
* 개인의 불안정성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온다.
신은 자기 자식들이 자진해서 놀림감이 되는 걸 굳이 즐기지 않건만,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만 하면 그것의 먼지라도 핥을 준비가 되어 있다.
* (병든 사회에) 자신의 모든 자산을 다 빼앗기고 난 이 자아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대세(大勢)에 그야말로 찰싹 달라붙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정체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참된 인식은 이 모든 상황을 분별력 있는 마음으로 깨닫지만,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건 결국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인식은 그것을 거대한 꿈의 일부로 보기에 그 꿈에 비켜서서
더 이상 그것에 묶이지 않는다.
참된 인식은 형제들의 행위 속에 든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가에 상관없이
그들이 그냥 실수하고 있다고 여긴다.
* 근원에서 분리된 우리는 삶을 기호로 인식하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삶의 곡조를 따라가는 사람,
즉 참된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삶의 교향악을 느낄 것이며,
하나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교향악이 ‘될’ 것이다.
* 웅장한 교향악을 듣자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귀 기울여 듣자면 먼저 우리 마음과 삶 속의 소음들을 가라앉혀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 성공하여 희미한 우주적 하모니가 처음으로 우리 영혼에 닿을 때,
우리는 최초의 열광에 끌린 나머지 ‘부화하는’건 뭐든지 연약해서 깨지기 쉽다는
사실을 잊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어 이 정교한 소리를 흩뿌리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부드럽게 가만가만 삶 속으로 들어서야 한다.
우리 존재가 웅장한 교향악의 진동에 흔들림 없이 반응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오케스트라에 안전하게 가담할 수 있다.
그 때가 되면 거짓자기 역시 이것을 막을 수 없다.
* 사회적인 의미에서 적절한 행동이란 인정받으려는 절절한 갈망과 사랑 받으려는
가슴의 비명을 숨긴 채, 주위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방식을 펼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진리는 드러나게 마련이니,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그만큼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 ‘적절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예를 들어 어떤 전공분야를 배워서 평생 동안 그 일만 하겠다는 발상은
그 일에서 계속해서 기쁨을 얻는 한 멋진 생각이다.
하지만 그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이때 우리는 영혼이 이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혜를 뽑아냈다는 사실과 이제 옮아갈 시간임을 깨닫지만,
그건 ‘사람들이 말하는 적절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왜 굳이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어차피 그들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또 그들 나름의 삶이 있다.
* 먼저 우리는
‘우주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히 길을 잃는 일은 없다’는
근본진리를 충분히 마음에 새겨두도록 하자. 생각 역시 그러하니,
단 한순간도 우리 생각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하나인 보편 나의 진리 속에 있기에 자신의 생각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다.
* 분리에서 하나됨으로 이륙하려면
엄청난 중력-우리를 다시 끌어내리려고 애쓰는
거짓자기-를 이겨내야 한다.
난생 처음으로 진짜 희망을 갖게 된 우리는
아마도 새로이 찾아낸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서
세상을 만나보려고 걸어 나갈 것이다.
사실 이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에 맞닥뜨리는 건
두려움과 부족의 관념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우리 자신은 바뀌거나 바뀌는 과정 속에 있지만,
우리환경은 여전히 이전 관성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을 바꾸려 하지는 마라.
참된 인식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상황을 바꾸지는 않는다.
우리는 뒤에 가서 상황이란 인식의 거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가 깨어난다고 해서 가슴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것들과
우리 영혼이 갈망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전혀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깨어남으로써 그것들을 받는다!
꿈에서 깬다는 게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꿈에서 깬다는 건
모든 것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드러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삶은 통일된 전체, 하나임으로 여겨진다.
하나임은 오직 하나만을 안다. 하나임 속에서 퍼즐은 완전히 맞춰지고,
좋거나 나쁜 것, 낫거나 못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뭐라 부르든, 그것은 절대 성취이고 완성이며 희열이다.
그것은 모든 희망이 이루어졌기에 희망을 넘어선 존재상태다.
이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어설프게나마 표현해 보려는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것은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 문제는 우리가 초대받을 때, 그들이 우리의 대화를 환영할 때만
그렇게(우리 형제를 교육시키는 것)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저항을 받을 것이고,
그런데도 계속한다면 우리는 도로 대립물간의 전쟁 한복판에 놓이는 꼴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자기 세계, 내면의 마음을 바꿀 때 뿐임을
절대 잊지 마라.
* 우리의 행동이 거짓자기로 인한 것인지 아닌지 잴 수 있는 척도가 하나 있다.
특히 거짓자기에 근거한 인식에서 내면의 영성에 인도되는 시각으로
우리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는 초기에는 그것을 가능한 자주 사용해야 한다.
그 척도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동기가 두려움에 근거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다. 만일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면,
명백히 환상의 목소리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그 세상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 자신에게 일깨운 뒤,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흘려버리면서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면 된다.
두려움은 무지여서, 두려워한다는 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모른다는 뜻이다.
어떤 종류의 염려든 염려하는 건 자신을 거짓자기의 유일한 실체인
개성-육신자아-과 동일시할 때다.
우리 존재의 참된 성격을 깨닫기 위해서는 개성 자아를 넘어서야지,
그것에 매달려서는 넘어설 수 없다.
“놔 두어라, 하늘이 알아서 하도록”이라는
친숙한 표현은 이러한 이해를 담고 있다.
놔두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고, 선택은 결정이다.
그릇된 정체성을 놓아 버리겠다는 우리의 의식적인 결정이
오히려 참된 정체성을 향한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길을 가로막던 모든 것이 길을 열어주겠지만,
그에 앞서 무엇보다 의식적인 결정이 필요하다.
* 참된 인식과 더불어 나오는 지식을 실제로 적용할 때,
우리는 세상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자신의 거짓자기까지도 치유한다.
반복되는 실천으로 참된 인식이 고정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실천이 긴장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긴장은 오히려 목적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바심은 시간만을 인정하기에 압박감을 불러들인다.
반면에 참된 인식은 시간을 영원한 현재인 지금으로 인식한다.
이것이 바로 인내다.
참된 인식은 내일 역시 또 다른 지금이란 걸 안다. 어제의 지금은 가버렸고
내일의 지금은 자신을 다듬고 있다. 해가 떠서 지는 동안인 오늘의 지금 속에서
참된 인식이 자신에게 할당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모두 지금 순간이다.
시간이 모자란다는 생각 같은 건 참된 인식에게는
거짓자기가 생각해 낸 또 다른 부족에 지나지 않는다.
* 나(신)는 너 속의 나다. 우리는 하나다.
모든 것에 충만한 오직 한 영성만이 존재하니 그것이 나다.
나는 기쁨이요, 사랑이요, 평화다.
나의 계속되는 있음 속에서 나는 창조주이고,
내 창조물-영원한 존재인 영원의 바다 속 모든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은 삶의 춤이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희를 통해 나 자신을 경험하는 창조물은 나의 나다.
나는 너다. 우리는 하나다.
* 우리 속의 나에게 문제를 넘겨준다는 발상,
즉 자신이 참된 인식에서 빠져나온다고 느낄 때,
상황을 조작하길 그만둔다는 발상으로 되돌아가 보자.
조작은 그릇된 인식으로 되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일 수 있으니,
그냥 이렇게 말하라. “나는 전지전능한 내 존재로부터 명확성을 불러낸다.
나는 옆으로 비켜 있을 것이니 네가 길을 이끌어라!”
그러고 나서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 말 그대로 하라.
이 말 속에는 심오한 결정이 들어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있게 한 영성에 대한 복종과 감사와
무한한 믿음의 자세를 말해준다.
마침내 우리는 영성이 우리 존재중의 바로 나라는 사실과,
그것이 바로 존재이며
그렇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 나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있으니
필요한 배움은 완벽하게 지금을 믿는 것뿐이다.
여기에 존재가 있다. 아무도 내일일 수 없다. 오직 지금일 수만 있다.
존재에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이것은 원하지 않음이다.
원하지 않는다는 건 완벽하다는 것, 즉 ‘있다’는 뜻이다.
이렇거나 저런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다. 있기 위한 유일한 장소가 여기이고,
있기 위한 유일한 시간이 지금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미래의 지금을 위해 계획하지 않는다.
잘 살고 있는 지금이 미래의 지금을
그것의 과거만큼이나 가치 있게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를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존재상태를 그때 그곳으로 비춘 것이니,
더 이상 여기와 지금에 있지 않게 된다.
지금 여기에 산다면 우리는 ‘존재’상태로 들어간 것이고,
생존상태에게는 작별을 고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에,
미래는 그냥 또 다른 지금으로 여겨진다.
준비하고 계획해야 하는 지금이 아니라,
지금 있고 항상 있는 내 존재를
그 속에 지니는 지금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확실하고 분명하게 세상사고방식을 넘어서게 해줄 공식은
“꾸며진 구름으로서의 세상사고방식의 존재를 깨달아
참된 인식의 원리를 고수하라”이다.
참된 인식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상황을 바꾸지는 않는다.
* 참된 치유는 오직 영적 차원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한 사람이 전체에 미치는 치유효과와 관련해서,
개인의 힘만으로는 무력하다고 믿는 건 완전히 잘못 된 생각이다.
우리가 참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헌신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자신을 치유하는 것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니,
모든 질병의 원인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한 개인의 노력은
아무리 과대평가되어도 절대 지나치지 않다.
아마도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지닌 치유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게
뭔지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두려움에서 사랑 쪽으로,
광기에서 온전한 정신 쪽으로 자신의 길을 바꾸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선택이 그 자취 속에 더불어 가져올 뿌듯한 목적의식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1990년부터 2010년경까지 우리는 두려움에 뿌리를 둔,
온갖 제도와 기업과 정부의 몰락과 해체를 목격할 것이다.
지금 개개의 영혼에게는 전쟁과 평화, 경쟁과 협력, 치유와 공격,
두려움과 사랑 중에서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우리가 협력과 사랑을 선택할 때마다 세상사고방식이라는 집단진동은
더 빠른 속도로 고동치면서 보편의도에 자신을 맞추어 간다.
* 참된 인식을 가진 사람의 의식은 여전히 환상 속에 있는 마음보다
엄청나게 강력하다. 힘을 소유하고 펼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인간은 절대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만,
참된 인식은 힘 자체여서 굳이 힘을 쓰지 않는다.
힘을 써야 한다면 참된 인식이 아닐 것이다.
* 우리에게는 21세기의 첫 10년이 끝날 무렵
사회의식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초월의식의 시대로 접어들리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
설사 다가올 변화들을 알고 있다 해도 두려움에 토대를 둔
분리의 현실을 사랑과 근원과의 합일로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우주 전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내려야 할 선택이다.
다가올 새로운 시대는
다 익은 영혼들을 거둬들이는 농부에 비유될 수 있다.
익지 않은 것은 거둘 수 없다.
새로이 시작하게끔 도로 땅에 뿌려질 수밖에 없다.
우리 태양계가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중심태양(알키오네)의 둘레를
1회전 하는데는 25,860년이 걸린다.
이 괘도에는 무지와 어둠이 지배와 연관되는 가장 멀리 떨어지는
지점과 자각과 깨달음과 연관되는 가까이 다가가는 지점이 있다.
1961년 과학자들은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둘러싸고 있는 광자띠를 발견했다.
태양계는 대략 12500년마다 한번씩 광자띠의 중간지점에 이르고,
이 광자띠를 통과하는데 약 2000년이 걸린다.
이 순환은 2억600만년에 달하는 대순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순환과 함께
같은 전환점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것이 소위 조화로운 수렴이다.
1962년 우리는 이 광자띠의 영향 범위안으로 들어섰고,
실제로 광자띠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략 2011년경이다.
이것은 우주가 최고 팽창점에 이르는 때와 관련된다.
초월의식으로의 전환,
그리스도의 재림은 광자띠의 빛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팽창과 수축 사이의 정지점에서 일어난다.
광자띠의 에너지는 물질적이 아니라 에테르적이고 영적인 성격을 갖지만,
물질과 상호 작용하여 성숙한 영혼들을 성령의 빛 속으로 모아들이고,
막 성숙해가는 영혼들에게는 안정된 유예기간을 주어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육화 기간동안 성스러운 사랑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
자신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심판의 날이다.
우리는 종말에 가까이 가고 있으며,
신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다.
지진을 일으키는 것은 지구가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쪽은 두려움에 마비된 인류다.
빛의 가족은 인류가 깨어나도록 돕고 영성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많은 무리를 이루어 지구에 왔다.
사랑의 가족은 아직 어린애로 있지만,
특이한 방식으로 사건들에 영향을 준다.
인류는 영성의 빛으로 끌려갈 것이며,
두려움의 계율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마야력은 대략 2012년에 끝나고 있다.
종말은 시간상으로는 끝이지만,
삶에서는 끝이 아니다.
성경은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을 환희의 날로 표현한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리라는 태고의 약속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똑바로 서겠지만,
양극과 음극은 서로 뒤바뀔 것이다.
마나직 방사는 모든 원자들이
자신의 오라영역이 보이게 방사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지구 전체의 생체영역이 빛을 낼 것이고
인간의 신체도 자기 오라의 광휘로 빛날 것이다.
더 이상 밤과 낮의 이원성도 없을 것이고,
분리가 끝날 것이다.
빛과 어둠, 천국과 지상의 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3차원에서 4차원으로, 물질에서 에테르 영역으로 옮아가면,
우리 몸체는 더 가벼운 저밀도로 될 것이다.
자신의 형체를 바꿀 수 있게 되고,
공간이동이 손쉽게 해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자각이 더 뛰어난 초월의식-창조주와
하나 되는 희열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황금시대, 신의 시대이다.
10,500년의 환생주기(어두움의 주기) 동안에
이미 그리스도 의식으로 바뀐 인간 영혼
- 아바타라 불리는 이들의 수는 대략 14만4천명 정도 된다.
외계존재들의 방문은 전환 이전부터 이미 시작될 것이다.
광자띠에 진입할 때,
빛의 날들과 어둠의 날들을 경험하는 순서가 달라질 수 있다.
이 어둠의 날들의 경험은 사람들의 가슴을 바꾸어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하려는 일종의 협박용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 과정에 참여를 선택하지 않을 영혼들은
또 다른 기회를 위한 긴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과거 아틀란티스 같은 문명들이 전혀 자취를 남기지 않은 것은,
10,500년의 어두움의 주기가 끝나고 시작될 때마다
전지구 차원에서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는 정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지구는 높은 지적 이해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런 지구물리학적 변화들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미적거리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뿐이다.
21세기로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
10년 동안 전례 없이, 빛의 세력들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1987년에 우주의 백색형제단은 이 행성의 둘레에,
감정을 증폭하고 가속화시키는 특별한 에너지띠를 둘렀다.
인류가 그리스도 의식으로 태어나는
이 사건의 아름다움은 모든 말을 잊게 만들 것이다.
만일 인류 전체가 지금 당장
판단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3일안에 그리스도 의식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 하나의 재난도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지구의 창조를 빼고는
지구를 축복하는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이제 지구는 여신으로,
사랑을 내뿜는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
출처: - 우리는 신이다 -
윤회 또는 환생의 법칙 [페테르 에르베]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네 공유됨이 좋은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