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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부(平壤府) 문묘(文廟)의 상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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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이제나 어느 통존(通尊)을 막론하고, 난리를 당한 시대에 하루라도 편안했던 날이 어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옛 사당 건물을 새 건물로 바꿔 더욱 길이 모시려고 시작한 공사가 마무리되기까지 어언 십 년의 세월을 또 기다려야만 하였다. 이제 무지개 같은 들보를 올리게 되매 환호성이 연하(燕廈)를 진동시키고 있다.
삼가 생각건대, 거룩하신 우리 부자(夫子)께서는 상천(上天)의 성(誠)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분이시다. 충서(忠恕)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신 것을 증삼(曾參)이 듣고서 계합(契合)했고, 요순(堯舜)보다도 훨씬 훌륭하시다는 것을 재아(宰我)가 보고서 깨달았었다. 그 당시에 드높은 지위에 오르시지는 못하였으나,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위로 만승 천자(萬乘天子) 자신이 무릎을 꿇고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가 하면, 구주(九州) 어느 곳이나 묘궁(廟宮)을 세워서 제향을 모시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외복(外服)에 속한 나라들도 모두 중화(中華)의 전범(典範)을 준행하게 되었는데, 인현(仁賢)께서 교화를 끼치신 우리나라를 능가하는 나라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우리 서경(西京)으로 말하면, 동쪽의 노(魯)나라 지역과 근접해 있어 아무런 막힘이 없이 그곳의 산해(山海)가 그대로 바라다 보이는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일찍이 거이하루(居夷何陋)의 말씀을 하신 일이 있고 보면 이 역시 석전필합(釋奠必合)의 행사를 펼치기에 합당한 곳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본부(本府)에서 문묘의 제향을 합당하게 거행하는 것을 본조(本朝)에서도 특히 중시하며 뜻 깊게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봄과 가을의 석전을 항상 이곳에서 거행하면서 바로 여기에서 재계(齋戒)를 하고 제향(祭饗)을 올렸는데, 임진년과 계사년의 병란으로 인하여 그 건물이 파괴되면서 약간만 남아 있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천하의 도가 어찌 사라져 없어질 수야 있겠는가. 이는 마치 땅속의 물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과 같다고도 하겠다. 그동안 시설이 잠시나마 갖추어지지 못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바치는 정성만큼은 앞으로 성대하게 거행할 때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승(李政丞)이 처음에 계획을 세우고 경영하면서 뒷사람에게 물려주었던바, 서 방백(徐方伯)이 이를 완성하려고 도모한 것이야말로 힘써야 할 일을 제대로 안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대동강(大同江) 상류에서 재목을 끌어모아, 을밀대(乙密臺)의 전경(前景)이 툭 터진 옛터에다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장인(匠人)들은 각자 빼어난 솜씨를 발휘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었고, 백성들은 공사장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도 피곤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백성의 힘을 빌릴 때에는 반드시 농한기를 이용하였으니[使必以時],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한 성인의 가르침을 혹시라도 어길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시인(詩人)은 하루도 못 되어 완성했다[不日成之]고 노래하였지만, 그 말을 어찌 그대로 다 믿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꿈속에 앉아 계셨다는 두 마룻대 사이와 흡사하게 되고, 몇 길 높이의 담장과 방불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인의 제자(弟子)들 역시 모두 차서(次序)에 따라 배종(配從)하게 되었으며, 유사(有司)들이 주선하며 오르내리는 길도 각각 통로를 달리하였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행하는 대로 따라서 부자(夫子)의 왕명(王名)을 바꿨으니, 이는 사도(師道)를 높여 숭상하기 위함이요, 기자(箕子)의 신전(神殿) 역시 이와 함께 계속 혈식(血食)을 받들게 하였으니, 이는 인풍(仁風)을 다시 고취시키기 위함이다.
통진(通津)의 이 현감(李縣監) 수준(壽俊) 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의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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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집안 마당에까지 쳐들어온 도적의 환란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이 도적이 그냥 지나가는 정도로만 그치지 않았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자(臣子)는 군부(君父)와 걱정을 함께해야 할 도리가 있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의리상 자신의 힘을 돌아볼 틈이 없이 나서야만 할 것이니, 어찌 의병(義兵)을 일으키는 일을 남보다 뒤늦게 하여 부끄러움을 자초해서야 되겠는가.
생각건대, 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는 옛날부터 우리 변방의 관리들을 귀찮게 하여 왔다. 그러나 고려(高麗) 때에는 오백 척의 배를 띄워 놓고도 한강(漢江) 나루를 넘어오지 못하였고, 을묘년에 쳐들어와 두세 개의 성을 무너뜨렸을 때에도 피해를 본 지역이 신라(新羅)의 변경에 불과할 따름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저 왜적이 자기 경내(境內)의 힘을 모두 쏟아 부을 것처럼 전력(全力)을 다해 침입하였는데도, 우리는 마치 사람이 하나도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들어오게 그냥 놔두고 말았다. 생취(生聚)와 교훈(敎訓)에 관한 일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묘당(廟堂)에서는 다른 곳에 힘을 헛되이 낭비하였고, 그저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기만 하였을 뿐 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그저 아이들 장난 정도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장군(將軍)이 묵적(墨翟)처럼 제대로 수비하는 계책도 마련해 놓지 못하였고, 우리나라의 사마(司馬 병조(兵曹)의 별칭임)가 그저 한가하게 보였던 사안(謝安)의 겉모습에만 잔뜩 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성인(聖人)께서 빈(邠) 땅을 떠나는 인덕(仁德)을 발휘하시어, 촉(蜀) 땅으로 거둥해야 한다는 재상(宰相)의 의논을 우선 따르기에 이르렀다. 서쪽에서 수렵(狩獵)을 행하도록 하는 일이 꼭 신하로서 임금을 모시는 도리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이것은 대개 오묘(五廟)의 신위(神位)가 왜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부득이하게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원숭이가 갓을 쓴 것[猴冠]과 같다고 일컬어졌던 옛날의 이야기처럼 동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東歸]이 지금까지 십 순(旬)을 넘도록 지체하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옛날에 진(秦)나라는 주국(柱國)의 도읍(都邑)을 점거하고서 병탄(幷呑)을 하려는 속임수를 꾀하였었는데, 진(晉)나라의 경우는 길을 빌리겠다는 글을 날리긴 하였지만 하늘에 대고 활을 쏘려는 흉계를 꾸미지는 않았었다. 장강(長江)의 천참(天塹천연요새지)이라도 의지해 보려 하였더니 한강(漢江)도 임진(臨津)도 어찌할 수 없게 되어 패수(浿水 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임)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또 지령(地靈)으로 말하더라도 화성(華城 수원(水原)의 옛 이름임)이나 송경(松京 개성(開城)의 옛 이름임) 역시 믿을 수 없게 되어 유경(柳京 평양(平壤)의 옛 이름임)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어찌 병장기가 서로 번뜩이는 사이에서만 살육 행위가 이루어졌겠는가. 부녀자가 겁탈되는 등 오욕(汚辱)을 당한 것이 더욱 극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노(魯)나라는 공격할 수 없다[魯未可伐]고 한 옛날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현재 국내 사정이 비록 부끄럽기는 하다마는, 주(周)나라에 유민이 없게 되었다[周無遺民]고 말하게 될 정도까지 재앙을 당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그 뒤로 승첩(勝捷)의 보고가 두 번 세 번 행재소(行在所)에 올라오면서부터 우리의 승리를 반신반의하던 분위기도 차츰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황상(皇上)의 조정에서도 왜적들에게 진노(震怒)한 결과 구원하는 군사들을 계속 보내 주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우리 군사들도 남쪽에서 올라오면서 예전에 잃었던 것을 뒤에 수복(收復)을 하고 있으며, 의병의 기치(旗幟)를 내건 인사들도 함께 힘을 합쳐 이 일에 뛰어들고 있는 바이다.
제비가 위태한 곳에 둥지를 틀고 편안하게 여기고만 있다가 불길이 치솟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으나, 언제까지 오래도록 그렇게 잠자코 있기만 할 수 있겠는가. 쥐새끼들이 한밤중에 설쳐 대다가 환한 대낮에도 숨을 줄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 재앙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천둥치고 벼락치듯 우리가 공격을 퍼부어 대면, 몇 달이 가기 전에 아니 며칠도 지나기 전에 통쾌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다만 생각건대, 경기(京畿) 지방의 경우에는 충용(忠勇)한 인사들의 의거(義擧)가 아직도 현저히 부족한 형편이다. 그래서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에까지 맹수들이 제멋대로 횡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가슴이 아파 올 따름이다. 활과 칼을 손에 든 우리 경기 지방의 호걸들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기에 이렇게 조용하기만 하단 말인가.
2백 년 동안 신령스럽고 거룩하게 펼쳐진 생성의 은혜로 말하면 우리 경기 지방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먼저 성대하게 받았다고 할 것이요, 일천 리에 걸쳐 둘러싸고 있는 우리 경기 지방의 산하 역시 지리(地利)를 얻었다고 평소에 일컬어져 왔던 터이다. 그런데 이토록 적막하기만 하다니, 어찌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수준(壽俊)은 청포(靑袍)를 입은 고을 수령이요, 백면(白面)의 서생(書生)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부조(父祖)의 풍도(風度)를 이어받아 문무(文武)의 업을 조금은 닦을 줄 알게 되었다. 임금을 떠받들고 어버이를 섬겨야 하는 이날을 맞아 어찌 감히 서로 재주의 장단(長短)을 따질 수가 있겠는가. 팔 척(尺)이나 한 길 되는 성곽도 없었으니 우리 서로 패장(敗將)을 관대하게 포용해 주어야 할 것이요, 크고 작은 북소리가 전장(戰場)에서 처음에는 저지되곤 하였으니 도망쳤던 사람들을 혐의쩍은 눈으로만 바라볼 일도 아니라고 하겠다.
오직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의를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차마 우리 임금에게 두 번 다시 치욕을 안겨 드릴 수가 있겠는가. 운수 결초(隕首結草)할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니, 이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결코 함께 살 수가 없는 노릇이다. 현재 군량(軍糧)을 헤아려 보아도 그런대로 구비가 되었고, 흩어진 병졸들을 끌어모아 군세(軍勢)도 다시금 떨치게 되었다. 우리 고을이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삼호(三戶)보다는 많으니, 사방 이웃에서 동지들이 몰려드는 것이 어찌 서로 차이를 보여서야 되겠는가.
듣건대 우 사문(禹斯文)이 먼저 뜻을 같이하여 편지를 보내 약속을 하였는데, 심 고상(沈故相)이 멀리서 주도하는 의논을 받들어 배를 갖추고서 영접하기로 하였다 한다. 진작부터 텅 비게 되었던 창고도 이제는 금릉(金陵 김포(金浦)의 옛 이름임)에서 배로 실어 오는 곡식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고, 나루를 급히 차단하는 일 역시 월곶(月串)에서 예전에 시험해 보았던 대로 다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생(何生)의 진중(陣中)에는 수레를 뛰어서 올라타고[超乘] 용기를 파는 용사[賈勇]가 대부분이요, 윤자(尹子)의 부하(部下)는 모두가 배를 조종하는 데에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자들이다. 기선(機先)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지모(智謀)는 최 첨추(崔僉樞)가 책임을 질 것이요,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고도 남는 재질로는 윤 정록(尹正錄)이 건재하다.
우리의 동지들로 말하면 지금 이름을 기록한 이 정도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데, 비록 대장(大將)을 뽑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를 새겨 널리 알린다 해서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더러는 날리는 먼지를 뒤따라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던 진신(搢紳)들도 포함되어 있고, 더러는 넋이 다 달아날 정도의 전쟁터를 헤치고 돌아온 무사(武士)들도 섞여 있다.
지금 백성들은 험한 산길을 빠져나온 사슴처럼 헐떡거리며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 새처럼 불쌍한 백성들이 그늘을 찾아 쉬려고 한들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공연히 걱정만 하고 울분만 쏟아 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앞으로 덥고 서늘한 시간이 얼마 더 흘러간들 어떻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소리를 같이하고 기운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뭔가 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흉적을 제거하지 못하고 치욕을 씻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라를 위해 종군(從軍)하려는 마음이 있는 이들은 지금 따라올 것이니, 임금님에게 직접 명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실은 명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조치하고 시행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리지는 못하겠다. 모쪼록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서 감개(感慨)에 젖었던 유곤(劉琨)의 옛일을 저버리지 말 것이요, 강 한복판에서 노를 치며 다짐했던 조적(祖逖)의 맹세를 함께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권 원수(權元帥)의 행주비(幸州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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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권공 율(權公慄)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공의 막료(幕僚)였던 사람들이 ‘공이 전에 거두었던 행주(幸州)의 승첩(勝捷)이야말로 그 공이 워낙 컸던 만큼 그 당시 현장의 언덕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공의 사위인 현재의 영상(領相) 이공(李公)을 찾아가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하도록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다. 그러고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허점을 틈타서 잇따라 우리의 군진(軍陣)과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크게 경악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모(權某)의 재주를 한 번 시험해 볼만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이 전임(前任) 의주 목사(義州牧使)의 신분에서 바로 기용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신하들은 호남과 영남 지방을 사지(死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단기(單騎)로 치달려 갔다. 그러나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경성(京城)을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징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호위하려는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군사 4만 명을 징발한 다음,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영(嶺)을 사이에 두고 북상(北上)하면서, 공에게 방어군(防禦軍)의 중위장(中衛將)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는 서생(書生)을 무부(武夫) 취급하는 조치였으므로 혹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공은 의연히 “내가 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러 충청(忠淸) 군사와 합세, 수만의 군세(軍勢)를 이룬 뒤에 다시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에 있는 적의 진영을 먼저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기를 “왜적이 우리보다 먼저 험준한 지세를 점거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습격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못 된다. 그리고 지금 이것보다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경성(京城)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주공(主公)이 한 지방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오직 곧장 위로 올라가 조강(祖江)을 건넌 다음 임진(臨津)을 굳게 막아 적이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제압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전개될뿐더러, 행재소(行在所)에 품달하여 명령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니, 장차 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소규모의 적을 상대로 예봉(銳鋒)을 다투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렇게 하는 일은 또 만전을 기하는 일이 못 되는 만큼 우리의 성세(聲勢)와 위신을 손상시키는 결과만 빚게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선봉장(先鋒將) 백광언(白光彦)과 조전장(助戰將) 이지시(李之詩)가 각각 정예 군사 1천 명을 직접 이끌고 갈 때에도 그들이 경솔하게 진격하려는 뜻을 보이자, 공이 또 경계시키면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의 이 모든 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백광언 등이 모두 전사(戰死)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레 겁내며 놀라더니 아침에 적의 모습만 보고도 크게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제군(諸軍)이 모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 역시 부득이 광주(光州)로 되돌아오고 나서 잠을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은 채 다시금 주장(主將)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조용히 있기만 하자, 곧장 분연(奮然)히 일어나 말하기를 “지금은 신자(臣子)가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내(境內)의 자제 5백여 인을 끌어모으는 한편 이웃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또 1천여 인을 얻은 다음, 경상도와의 경계로 나아가 진을 쳤다.
이때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왜적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이를 진정시키고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찰사가 공의 보고를 접하고는 공에게 부절(符節)을 내주어 임시로 도절제(都節制)를 맡게 하면서, 열읍(列邑)의 관군(官軍)을 지휘 감독하여 영(嶺)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이치(梨峙)로 진군하여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 적을 기다렸다.
7월에 왜적의 공격을 받고 신속히 격퇴시켰으나, 군중(軍中)에서 용명(勇名)을 떨치던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적의 탄환에 맞아 퇴각하는 바람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면서,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왜적이 요새지 안으로 뛰어들어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서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전사(戰士)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심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왜적들이 사상자를 돌볼 틈도 없이 치중(輜重)을 낭자하게 내버려 둔 채 달아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광주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또 제수받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진중(陣中)에 도착하던 날, 공이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쏟자, 그 비통한 모습에 군사들 모두가 감동되었다. 공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全州)로 달려가 도내(道內)의 군사 1만여 명을 수습한 뒤, 9월에 근왕(勤王)의 계책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
당시에 여러 왜적들은 평양(平壤)과 황해(黃海)와 개성(開城)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으며, 경성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꽤나 큰 진영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군사들을 풀어 놓아 사방을 약탈하게 하는 바람에 서쪽 행재소로 가는 길이 끊어지자, 여러 근왕(勤王)의 부대들 역시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공은 상이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왜적이 아직은 평양 이북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우선 경성에 대한 공격을 도모함으로써 서쪽에 가 있는 적들로 하여금 동쪽을 돌보느라 틈이 없게끔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상에게 보고를 올리니, 상이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내려 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중에 군령(軍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였다.
경성에 있는 왜적들로서는 공이 군사상의 요해지(要害地)에 버티고 있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병력 수만 명을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눈 뒤 오산(烏山) 등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는 수시로 왕래하면서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이따금씩 기병(奇兵)을 내보내 예봉을 꺾어 놓곤 하였으므로, 왜적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밤에 영채(營寨)를 불사르고 떠나갔다.
계사년 2월에 공이 휘하의 정병(精兵) 약 4천 명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 하나는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주(衿州)의 산에 진을 치고서 성원(聲援)을 하게 하는 한편, 하나는 공이 직접 이끌고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는데, 이때의 병력이 실로 2300인에 불과하였다.
이때 중국의 대장인 이공 여송(李公如松)이 구원병을 총지휘하여 동쪽으로 내려와서는 벌써 평양을 탈환하는 등 그 위명(威名)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왜적 중에 평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 황해 지방을 버리고 온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풍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들었으므로, 경성에 있는 왜적들은 오히려 그 형세가 더욱 치성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서 경성과 근접한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왜적은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달 12일 여명(黎明)에 척후(斥候)하던 관리가 왜적의 출현을 보고하자, 공이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고 경계시킨 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성으로부터 5리(里) 떨어진 지점에 벌써 왜적이 벌판을 까맣게 뒤덮으며 밀려오고 있었다. 왜적은 먼저 1백여 기(騎)를 내보내 우리를 압박하더니, 이윽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성곽을 타고 올라왔는데, 계속 증가되는 숫자가 다시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아군(我軍)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화살과 바윗돌을 비 오듯 아래로 쏟아 붓자, 왜적이 병력을 셋으로 나눈 뒤에 계속 교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공격을 가해 왔다.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격전에서 왜적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이제는 갈대 단을 묶어 바람결에 불을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이 목책(木柵)에까지 번져 오자 성안에서 물을 길어 와 끄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만 서북쪽의 자성(子城 성안에 설치한 또 다른 작은 성)을 지키던 승병(僧兵)의 기세가 약간 꺾인 틈을 타서 왜적이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오자 군사들 모두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에 공이 칼을 빼들고 장수들을 질타하자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예봉(銳鋒)을 막아 서며 육박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왜적이 대패(大敗)한 나머지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두고 불을 지른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는데, 우리 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왜적들을 붙잡아 목을 벤 것만도 130여 급(級)이나 되었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개갑(鎧甲)과 도창(刀槍) 등을 노획한 것 역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 제독(李提督)이 개성(開城)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선봉(先鋒)인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다음 날 편비(褊裨)를 보내 전쟁터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또 며칠 지난 뒤에는 공과의 면회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군진(軍陣)을 정돈하고서 그를 맞았는데, 그가 와서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외국에도 이런 진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얼마 지난 뒤에 공이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왜적이 행주에서의 패배를 기필코 보복하려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다가, 공이 성벽 위에 서서 행주에서보다 더 엄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그곳을 공격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며 그냥 돌아간 것이 무려 세 차례나 되었다.
4월에 이 제독(李提督)이 심유경(沈惟敬)의 계책을 들어 줌에 따라, 여러 왜적들이 강화(講和)의 약속을 얻어 냈다고 일컬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치달려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왜적이 한강(漢江)을 건넌 뒤였다.
그런데 이 제독이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보내 공의 동정(動靜)을 일일이 보고하게 하다가, 한강 나루에 있는 배들을 모두 거두어 추격하는 군대가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므로, 공이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군대를 해산시키고 본도(本道)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체로 살펴보건대, 공은 처음부터 경성을 수복(收復)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만 전임 순찰사(巡察使)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었다. 그리하여 양호(兩湖)의 6만 병력이 집결했던 것을 계기로, 임진(臨津)으로 달려가서 기필코 지켜 낼 수 있는 그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채, 급기야는 수원(水原)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맛보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치(梨峙)에서의 승리 같은 것은 불행을 당하고 나서 조금밖에 분풀이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이나 봉시 장사(封豕長蛇)가 다시는 호남 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결과, 호남의 그 풍성한 곡물을 거두어 동쪽과 서쪽에 수송해서 충분히 공급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모두 누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러다가 순찰사의 직책을 대신 맡게 된 뒤로부터는 일도(一道)의 군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 그 병력을 진작부터 쓰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니, 가령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이 병력을 먼저 장악하고서 근왕(勤王)하는 대군(大軍)이라고 일컫다가 강화(江華)에서 기세가 꺾여 버린 경우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곳곳마다 의병이나 관군(官軍) 등 여러 부대들이 혹은 싸우고 혹은 지키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래서 공이 겨우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서 북상(北上)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정도의 군세(軍勢)로는 곧장 승냥이와 범의 소굴을 두들겨 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성(禿城)에서 그들의 목을 잠시 누르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좌충우돌하는 적의 위세를 꺾어 놓음으로써 양호(兩湖)와 기우(畿右)의 길이 막힘없이 뚫리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행주(幸州)에 이르게 되어서는, 주인이 객을 맞는 유리한 위치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엄청난 수의 왜적을 무찌르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중국 장수가 평양을 탈환한 그 위세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이 행주의 대첩 역시 흉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왜적을 겁나게 하는 이런 승리가 있지 않았더라면, 심유경(沈惟敬) 같은 자가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왜적이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는 공이 당초에 경성을 수복하려고 했던 그 뜻이 어느 정도나마 풀어지게 되었다고도 할 것이다.
6월에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의 제군(諸軍)까지 모두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도원수의 직책을 내놓기도 하고 다시 임명되기도 하다가, 정유년 겨울에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蔚山)의 전역(戰役)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무술년 가을에는 제독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전역(戰役)에 참여하였는데, 제독의 지휘를 받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건의를 올려도 채택이 되지 않고, 성곽을 먼저 타고 올라가는 용맹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공만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뿐만이 아니라 뜻있는 인사들 모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왜적이 또다시 엿보면서 깊이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마 뒤에는 또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경성을 수복하고 우리 힘으로 지켜 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이쯤 되어서는 공이 원래 품은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만약에 중흥을 이룬 공적을 세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있다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첫째로 꼽아야 하겠는가.
기해년에 공이 병으로 면직을 청하고 돌아간 뒤 도성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나 다시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7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애도하며 정사(政事)를 보지 않고 조문(弔問)과 제례(祭禮)와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게 하였다.
아, 공의 공적에 대해서 본조(本朝)에서는 얼마나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던가. 병신년에 공이 재차 도원수의 직책을 사직하자 윤허하지 않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며 교서(敎書)를 내렸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술을 하사하는 동시에 또 내구마와 말 안장을 주면서 교서를 내렸고, 다시 무술년에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특별히 장려하며 유시(諭示)를 내렸었다. 그리고 공이 세상을 하직하자 관직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는 한편 대신(大臣)에게 자문을 하며 시호(諡號)를 의논토록 하였다.
아, 공의 명성이 중국 조정에는 얼마나 성대하게 전파되었던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상(賞)을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주문(奏文)을 올려 공의 공적을 아뢰었고, 천자의 명을 받든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은 본국에 칙지(勅旨)를 선유(宣諭)하였다.
그리고 전진(戰陣)에 임했을 당시에는 제독 마귀(麻貴)가 호령을 제대로 행한다고 칭찬하였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공의 장병이 역전(力戰)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도 중국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서도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모두 가늠해 알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왜적의 여러 수령들조차도 권 원수(權元帥)의 기거가 어떠한지 꼭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이러한 종류에 대해서는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역사에 모두 기록해 놓을 것인데, 비문에 구체적으로 써넣을 성격의 것도 아닌 만큼 이쯤 해서 생략하기로 한다.
공의 자(字)는 언신(彦愼)이요, 관향은 안동(安東)으로서 고려(高麗)의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리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찬성(贊成) 권근(權近)의 6대손이요,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니, 그러고 보면 공이 세운 공업(功業) 역시 본디 그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공은 사람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성심(誠心)과 화기(和氣)로 대하였을 뿐 결코 엄의(嚴毅)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간에 감복을 하여 사력(死力)을 다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공은 46세 되던 해인 임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낭관(郞官)을 거쳐 당상(堂上)에 뛰어올랐고, 급기야는 유장(儒將)으로서 현달하게 되었다. 공은 관직을 역임한 것도 그다지 많지 않고 조정의 반열에 서 있었던 적도 드물기만 하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만나 그 능력을 다 발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날 공의 대장 깃발 아래에 있었던 인사들이 공의 덕의(德誼)를 사모하면서도 이를 선양(宣揚)할 길이 없자, 다투어 출자(出資)하여 힘을 모은 다음에 공의 형인 상호군공(上護軍公)에게 이를 알리고서 이 비석 건립에 서로들 힘을 쏟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가상하다 하겠는가.
상호군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권순(權恂)이요, 영상(領相) 이공(李公)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성 서쪽 홍복산(洪福山)에 있다.
징영당(澄映堂) 십영(十詠)에 대한 서문(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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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이른바 신선(神仙)이라고 하는 자를 본 사람이 누가 있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신선이 사는 곳이야말로 그지없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의 정경을 극구 묘사하곤 하는데, 가령 안개와 노을에 잠겨 아스라이 떠 있는 바다 속의 삼신산(三神山)이라든가 궁실이 영롱(玲瓏)하게 솟아 있는 땅 위의 각종 동천(洞天 신선이 사는 곳)에 대한 기록을 접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일 수도 있으나, 가령 신선이 없다고 한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고 한다면 이런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것이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사람이 이 세상의 진애(塵埃)와 동떨어진 기이하고 수려한 산수(山水)의 어떤 구역을 만나면 그곳을 일컬어 선경(仙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멋진 곳을 차지하고서 혼자 살 만한 그윽한 집을 짓고 종신토록 소요(逍遙)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일컬어 지선(地仙)이라고 한다. 진짜 선경이 어떠한 곳인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선경과 비슷한 곳인지 어떻게 알 것이며, 천선(天仙)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그가 지선(地仙)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마는, 가령 신선이 없다고 한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고 한다면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점만은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난점(難點)이 있다. 일천 바위 일만 골짜기 속에 수목(樹木)이 울창하고 샘물이 뿜어 나오는 곳을 은자(隱者)가 얻었다 할지라도, 겨우 머리 하나 덮을 만한 띳집을 짓고 산다면 누대(樓臺)에서 거처할 때와 같은 툭 터진 경지를 어떻게 맛볼 수가 있을 것이며, 문과 창마다 안개와 구름이 서리는 곳에 허공 속으로 우뚝 솟아 수면(水面) 위로 그림자를 던지는 누대를 현달(顯達)한 귀인(貴人)이 세웠다 하더라도, 종신토록 여기에 와서 거처하지 않는다면 멀리 세상을 피해 사는 높은 흥치(興致)를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두 가지 난점을 모두 극복하고서 두 가지 흥치를 모두 갖춘 분이 실제로 계시니, 징영당(澄映堂) 선생이 바로 그분이시다. 선생의 저택은 도성(都城)의 안에 있으면서도 바로 남산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은 바윗돌이 모두 고색창연(古色蒼然)하고 땅 역시 비옥하기만 하다. 그리고 조금 둥그렇게 솟아오른 언덕에는 온통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밀집해 있는데, 벌목(伐木)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산보다도 울창하게 우거져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도성 안의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그저 멀리서 그 반쪽의 경치만을 바라보면서 서로들 최고라고 으스대고 있지만, 선생이야말로 최고의 요지(要地)를 점령하고서 진경(眞境)을 직접 대하고 있다 할 것이다.
산에는 또 샘물 줄기가 솟아 나오는 곳이 많다. 그래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계곡물이 흐르거나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어 여기에 거처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좋은 풍치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고지대(高地帶)에서 흘러 나와 결코 마르지 않는 것으로는 아계(丫溪)를 따를 만한 곳이 없다. 두 개의 물줄기가 마치 다투기라도 하듯 골짜기로 달려와 한데 합쳐서는 바윗돌에 부딪쳐 폭포로 매어 달리며 아래에 소리를 전해 주고 있는데, 선생은 바로 이곳을 취하여 자신의 전유물로 삼으신 것이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푸른 숲 북쪽으로는 또 널찍한 반석(盤石)이 많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위에는 오래된 이끼들이 조밀(稠密)하게 퍼져 있어 알록달록한 비단 무늬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매어 달린 폭포수 서쪽으로는 기암 괴석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데, 이따금씩 맑은 이슬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운데 붉고 푸른 물감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은 모습을 완연히 갖추고 있다.
선생은 이곳에 두 채의 가옥(家屋)을 소유하고 있다. 큰 가옥의 위치는 북쪽에서 조금 동쪽 방향으로, 동쪽 언덕이 북쪽으로 한껏 달린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굽은 난간 위에 이름한 현판을 보면 적취당(滴翠堂)이라고 되어 있다. 작은 가옥의 위치는 서쪽에서 조금 북쪽 방향으로, 북쪽 골짜기를 서쪽에서 엿볼 수 있는 툭 터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빈 머름 위에 걸어 놓은 현판을 보면 횡취각(橫翠閣)이라고 되어 있다. 이 언덕 위에 못을 파 놓았는데 그 주위에는 일산(日傘)을 받쳐 든 듯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뚝 서 있고, 골짜기 안에 오솔길을 열어 놓았는데 그 안으로는 붉은 노을이 찬란하게 스며 들어오고 있다.
못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그 가옥을 떠나 풍우성(風雨聲)을 뚫고 골짜기로 내려오다 보면 길이 없어진 듯 아득해지기만 하는데, 이때 갑자기 눈앞에 툭 튀어 나오는 건물 한 채가 있으니, 여기가 바로 징영당(澄映堂)이다. 이 건물로 말하면, 크고 높은 규모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요소를 그 안에 다 함께 갖추고 있으며, 따스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각각 다르게 제공해 주고 있는데, 날아갈 듯 멈춰 선 그 자세라든가 숨길 듯 보여 주는 그 자태야말로 심상(尋常)한 건물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서리 내린 뒤엔 어떤 경치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물들인 듯한 붉은 단풍잎이라고 대답할 것이요, 눈 속에선 어떤 풍치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눈의 무게를 못 이긴 채 구부러져 있는 소나무 가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매화 꽃 그림자가 물속에 잠길 때쯤이면 복사꽃 피기 전에도 이미 봄이 왔다는 것을 알 것이요, 난간 앞의 대나무 숲이 연꽃과 어우러질 때쯤이면 의당 여름이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몇 가지만 살펴본다 하더라도, 어쩌면 조물(造物)이 갖가지 솜씨를 한번 부려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 혹시라도 사람의 힘으로 윤색(潤色)할 수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이 징영당에 앉아 있으면 사계절의 빼어난 풍광을 그대로 감상할 수가 있으니, 저 울창한 푸르름과 매어 달린 폭포와 비단 무늬 같은 바윗돌과 병풍 같은 기암 괴석들 모두가 여기에 세워질 징영당을 위하여 원래 하늘이 마련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바로 이런 빼어난 풍광들을 선생이 모두 아울러 정리해서 제공(諸公)이 사부(詞賦)를 읊을 때 편리하도록 제목으로 제시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징영당 십경(十景)이라고 하겠다.
아, 선생은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조정에서 맑게 봉직(奉職)하였으니 현달(顯達)한 귀인(貴人)이라는 이름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밖으로 반 걸음도 나가지 않아서 그지없이 아름다운 땅을 얻어 은자(隱者)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툭 터진 누대(樓臺)의 전망(展望)을 함께 감상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꼭 멀리 세상을 피한 뒤에야 높은 흥취를 느끼게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선생과 같은 분이야말로 세상에서 말하는 지선(地仙)과 같은 분이요, 또 세상에서 말하는 선경(仙境)을 만난 분이 어찌 아니라고 하겠는가. 신선(神仙)의 즐거움을 나는 다행히도 여기에서 보았다고 하겠다.
인용 고전종합디비
첫댓글 고맙습니다
평양이 제일 어렵군요. 단재선생도 평양은 세개가 있다고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고조선의 평양과 고구려의 평양 그리고 조선의 평양이 각각 위치가 달랐을 것이니. 이의 고증이 제일 어려운 일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