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 한 달이나 지나왔습니다. 짧지 않은 장마입니다. 더구나 내린 비의 양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여름 더는 비가 오지 않아도 될 텐데 행여 또 소나기 폭우라도 쏟아질까 염려됩니다. 하기야 이제부터 태풍의 방문 시기지요. 얼마나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대비라도 철저히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듣고 보니 우리나라만 당하는 재난이 아닌가 봅니다. 무시무시한 더위로 고생하거나 산불로 피해를 입고 있거나 갑작스런 홍수로 피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 푸른 별 지구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아무리 부르짖어도 당장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으니 나 몰라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장마도 끝나고 무더위를 맞으며 휴가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수해복구도 해야 하고 무더위도 이겨야 하고 모두가 힘든 때입니다. 그래봤자 한 달이니 잘 버텨내기를 바랍니다. 우리네 인생길 고난이 없는 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겨내며 계급장 하나씩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마의 주름살이 거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미래의 소망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힘들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모래밥을 씹어도 내일 쌀밥을 기대하기에 버티는 것입니다. 문제는 희망이 있는지, 그 희망을 가꿀 수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다면 낙심만 커지겠지요. 희망부터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가능한 것으로. ㅎㅎ
7월도 갑니다. 팔팔하게 뛰어볼 8월을 기대합니다. 건강하게 새 달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 2023년 7월 29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린도전서 11 : 11 - 12)
<바비>
‘바비’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생각해봅니다. 일단 ‘인형’부터 떠오릅니다. 나아가 ‘예쁜 인형’이고 남자가 아닌 여성입니다. 분홍색 치장에 날씬한 몸매, 그야말로 이상적인 여성을 그려낸 인형입니다. 뭇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애인으로 만들고 싶을 대상이고 뭇 여성들에게는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입니다. 알고 보니 이 인형이 만들어진 지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획일화된 모습으로부터 탈피하여 시대를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다고 합니다. 각양의 직업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녀평등에서 여성우월의 정신까지 담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기도 한 것이지요. ‘바비랜드’라는 나라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가 많습니다. 비단 사람 모양뿐만 아니라 동물의 모양으로도 많이 끼고 놉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마음 놓고 자신의 이야기 친구로 여기는 것이지요.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내놓기도 합니다. 옆에서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실제 친구보다도 어쩌면 부모보다도 더 애지중지 하면서 아끼고 사랑합니다. 유일한 말동무이기도 할 테니까요. 물론 나이가 들면서 차츰 실제 인간에게로 관심이 옮겨갑니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에 인형과의 훈련이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속내를 드러내며 말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인형을 어린아이가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아마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만들어주었으리라 짐작합니다. 혹 엄마가 자신의 아기를 위해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돌보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서 만들지 않았을까요? 아빠는 아들을 위해서 사냥할 때 보았던 동물이나 아니면 사냥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 건장한 남자를 만들어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남자와 여자의 이 역할은 인위적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잉태하여 10개월 가까이 함께 지내고 출산하여 젖을 먹이며 2, 3년을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아기와 가까운 사람은 엄마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이 대부분 아기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를 따라하는 놀이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러나 시대가 변하였습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가고 역할도 다양해집니다. 그에 따라 여태 남자들의 보조 역할만 하던 여성들이 오히려 남성보다 앞서가는 경우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분야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원도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21세기에 와서는 구태여 남녀를 구분 짓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그 반대로 오로지 여성의 역할로만 여기던 직업에 남성이 껴드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게다가 인권과 남녀평등의 문제까지 곁들여집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녀 구분이 의미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반영하여 이 영화가 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장면 서두에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아기 인형들이 내던져지고 밟히고 깨지고 아이들에게서 팽개쳐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태 유지되어 오던 관습이나 문화를 바꾸자는 의도가 보입니다. 있어온 현상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유지되어 온 문화이고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세기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만큼 의식도 바뀌었습니다. 그다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려니 생각할 뿐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만 유행하던 인형을 통하여 상기시킨 것 정도가 새롭다고나 할까요? 손에 가지고 놀던 것이 화면에 움직이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정도 말입니다. 현실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비랜드에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바비’는 어느 날 인생 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비와 죽음은 사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인형이 죽을 리는 없는 일이니까요.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세계는 어떠할까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보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켄’이라는 남자친구가 동행합니다. 바비랜드에서 켄은 그저 장식용에 불과했습니다. 바비와 켄의 현실세계 여행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지요. 오로지 예쁨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던 세계에서 남자들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곳의 여자들에게도 해방을 얹어주려고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여전히 생각 중인 것은 이 남녀의 의식입니다. 아무리 평등을 부르짖어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반적인 남자라면 예쁜 여자에게 눈길이 갑니다. 옆에 있던 여자가 공평하게 대해달라고 주장해도 그래야지요 하면서 의식을 깨울 때까지는 말입니다. 물론 일할 때는 공평하게 분배해줄 수도 있고 평등하게 기회를 나누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타나는 현상까지 뭐라 간섭하기는 어렵습니다. 좀 과격하게 비유하면 남자가 젖을 물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모유가 아니라면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모유가 우유보다 월등하게 좋다는 것은 인정할 것입니다. 함께 살지만 차이는 인정하고 가야지요. 영화 ‘바비’(Barbie)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천국은 누가 보나요?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뻔한 질문이지요? 구원과 영생 곧 천국입니다. 옛날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가 가나안이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육적인 약속의 땅입니다. 오늘날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영적인 가나안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지요. 율법시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은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됩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구약시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약속의 땅까지 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오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부터 깨닫고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구원파’라는 교단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있는 줄 압니다. 만나면 대뜸 질문합니다. 당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날짜를 대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생년월일을 말하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짜도 모르냐고 닦달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도 때로는 있지요. 우리 6.25동란 후 고아들이 그랬고 요즘도 혹간 생기는 버려진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확실한 날짜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태어난 날짜를 대랍니다. 그리고 모른다고 하면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고 핀잔을 줍니다.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 이 구원파 신자를 만나면 겁을 내는 이유입니다. 그 날짜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데 그런 신자에게서 ‘당신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괜히 찝찝하지요. 그래서 아예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단’이라고 치부하면서도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마음을 달랩니다. 나는 구원받았어,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의심이 들기도 하지요. 과연 구원받은 것일까?
우리는 흔히 교회 잘 다니며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하면 이미 거듭났고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르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 합니다.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 백성이 모이는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당연히 구원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듭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제 거듭남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요 3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어느 날 자기를 찾아온 유대인 관원인 니고데모에게 해준 말씀입니다. 아마도 당시 신분이나 나이로나 예수님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대단한 사건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 믿음이 있었기에 신분과 체면을 불사하고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대뜸 하시는 말씀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일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인가,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거듭남과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여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믿고 있었던 거듭남이란 세상 죄 가운데 죽을 인생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백성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영이 새로 태어난 것이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육으로 먼저 태어나듯이 이제 영으로 태어난 것일 뿐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이미 한번 태어난 사실이 있는 사람이 다시 날 때 하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이제 태어난 것이지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누구를 대상으로 거듭나라고 말씀하시는지 깨달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백성에게 거듭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거듭나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우리 흔히 말하는 대로 영이 죽은 자들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고(요 1 : 12)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우리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뜻대로 행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 다니며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합니다. 성도들이 그러죠. 믿음이 좋다고. 그러나 그것은 신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 믿음의 척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교통신호 잘 지켰다고 칭찬합니까? 그건 시민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런 수준에 불과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7 : 22 - 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이런 목자가 나타나면 뛰어난 부흥사라고 성도들이 줄을 지어 따라다닐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 곧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다니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추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의 태도를 보이십니다.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답니다. 오히려 불법을 행한다고 쫓아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게 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 것인데 말이지요.
아무리 교회를 잘 다니고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잘해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곰곰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면 아버지 계신 하나님 나라가 보여야 하겠지요. 자식이 되어 자기 아버지 집도 모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 자녀인데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보여요, 안 보여요? 그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요 3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곧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예수 믿었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었다고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는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면 초림 때 하나님 믿는 자들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이고, 재림 때 역시 예수 믿는 자들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육체로는 부모의 씨를 받아 태어납니다. 이것이 겉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씨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씨는 말씀이니(눅 8 : 11) 말씀으로 영이 태어납니다. 이것이 속사람이지요. 비로소 속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지요. 요 3 :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런데 이것을 거듭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영이 처음 태어났을 뿐이지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 말씀으로 태어나지요. 예수님 오시기 전 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마 5 :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여태 먹어 온 율법 곧 묵은 포도주를 치우고 예수님에게 와서 새 포도주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지요. 그것으로 영생의 길을 찾았습니다.(요 5 : 39) 그 속의 약속 곧 예언은 봉함되어 있었습니다.(사 29 : 11) 그래도 그것밖에 없으니 그것을 먹어야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것을 열었습니다. 이제 율법 외에 복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태 껍데기를 먹다가 이제 비로소 알맹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껍데기만 먹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복음이 선포되고 있으니 여태 먹고 살았던 율법은 묵은 포도주가 된 셈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이 새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으로 났던 사람들이 이제는 복음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묵은 것이 좋다고 새 것을 거부합니다. 눅 5 :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자기 것을 가르치면서 자기가 예수님에게 가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가는 것조차 방해하고 막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당시 백성의 목자라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랬지요.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들은 소경입니다.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까막눈이면서도 안다고 우깁니다. 백성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가르치는 목자도 소경이요 그 가르침을 받는 백성도 소경입니다. 그 결과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입니다.(마 12 : 24)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결국 죽입니다.
구약 예언의 말씀은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봉해져 있습니다. 읽고 외워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 예언의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드디어 그 실체(실상)가 나타나서 자기를 증거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구약 예언의 말씀이지요.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약속(예언)은 곧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이 당신을 증거합니다. 바로 그 씨, 그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태 먹었던 묵은 포도주는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닙니다. 이제 실체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새 포도주요 이것을 먹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있는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요 14 :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다면 다 본 것입니다. 8절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 거듭나라 하신 이 말씀은 저 이방인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당시 유대인들 곧 하나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율법으로 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의 복음으로 난 사람들이지요. 그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거듭나야 했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까? 당시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실상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 전하여 하나님 백성을 생산해냈습니다. 눅 24 : 44 - 48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 십자가 복음으로 오늘날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듭나야 합니다.
언제 거듭나야 합니까?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 때 신약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져 다시 실체(실상)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태 먹었던 십자가 복음은 다시 묵은 포도주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새 포도주를 먹어야 할 때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 씨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약속, 곧 예언의 말씀을 자기가 안다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끝 곧 주 재림 때의 일을 본 적도 없으면서 아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세상에는 전쟁과 기근이 일어나고 해 달 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지고(마 24 : 7, 29)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는 재앙이 생긴답니다.(벧후 3 : 12) 어마어마한 재앙이 이 지구촌을 휩쓸고 나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고 말씀합니다.(살전 4 : 16) 그런 재앙을 이겨내고 지구가 남아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불에 탈 수 있는지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런 거짓말로 성도들을 겁주어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목자나 그것을 믿고 따르는 성도나 소경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망하는 것이지요.(마 15 : 14)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며 주의를 주신 것이 있습니다. 마 24 : 4 -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다시 말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며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단도 많고 신학교도 많고 목자들도 많습니다. 사실 신자들로서는 헷갈립니다. 옛날에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정도, 더 있어봤자 열심당원, 엣세네파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나라 안에만도 교단의 수가 수백 개는 될 것입니다.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가짜입니까? 때로는 자기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신자들만 불쌍하지요. 하나님 보시면서 혀를 차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증거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눅 24 : 44 - 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 한 마디로 구약성경을 가지고 당신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때는 신약성경으로 증거하실 것입니다. 성경으로 말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나름 연구해서 엉뚱한 자기 생각이나 상상으로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잠간 보았듯이 전쟁 기근 이야기 나오니까 세상 전쟁이나 기근 이야기나 하고 해 달 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진다 하니까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라는 뚱딴지같은 설교나 하는 목자가 참 목자일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듣고 아멘, 아멘 하며 따라가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우리는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며 하늘을 이야기하시는데 그것을 인생들이 육으로 알고 세상일로 말하고, 땅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 그래온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다시 살펴야 합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 때 그 마지막 때의 일을 보고 들은 자가 있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 22 :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택하여 교회들을 위해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자를 찾아 만나 듣고 배워야 합니다.
이제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이었던 유대인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거듭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씨인 말씀으로 태어났고 역시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단지 때에 따른 말씀(양식, 씨, 포도주)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림 때 그러했듯이 재림 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만 앉아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그 누구도 내 입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찾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의 일을 다니엘 선지자도 말씀하였습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부지런히 찾아다녀야 합니다. 찾는 자가 찾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7 :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멘! 그 때 우리 모두 천국을 보리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