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보문학 2018년 4월에는 이유식 수필가의 '정자나무에 얽힌 풍속과 그 사연들'이란 수필이 올랐다.
정자나무란 단어 하나로도 정말로 많은 민속적인 감성을 자아내게 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다가 무창포나들목으로 빠져나오면 곧 지방도로 606과 연결되며, 좌측으로 틀면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조금 올라가면 큰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 정자나무이다.
내가 사는 충남 보령지방의 산골마을, 지방도로 606번이 지나가는 도로 꼭대기에는 주막집 세 채가 있었다.
구룡리, 죽청리, 관당리, 황교리, 남포면 월전리 등 여러 개의 里로 흩어지고 모아지는 도로의 정상 위에 있기에 옛길로서는 요지였다. 더군다나 면소지, 장터, 철로 역전으로 걸어가는 길목이기에 더욱 그랬다.
몇백 년이 된 느티나무 곁에는 오둑막살이 집이 있었다. 초가삼칸도 안 되는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오래된 사철나무 밑에는 잔 돌맹이들이 한 길이 넘도록 잔뜩 쌓여 있는 곳에 쓰러질 듯한 주막집이 있었다. 정자나무를 경계로 두 개의 리(구룡리, 죽청리)가 갈라지고, 해변가의 서 너 개 里에서 갯꾼과 장꾼들이 넘나들었다. 동서로 갈라지는 도로 말랭이에 있기에 그 정자나무 아래 주막집에는 남정네가 진드기처럼 꼬였다. 세 채의 작은 초가. 두 곳은 주막집이었고, 한 곳은 과자 부스러기를 파는 잡상이었다. 정말로 작은 초가들이었다.
젊은날 나는 서낭당(서낭댕이라고 함)의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받아다가 논일, 밭일하는 동네 일꾼형님이나 아주머니한테 잔 부어주었으며, 밤에는 동네 형님과도 어울러서 주막집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듯이 '한국 국보문학' 책에 오른 정자나무에도 구구한 내용들이 많이 실렸다.
장승 이야기가 나오고, '장승배기' 단어도 나온다.
내 고향 우리 집 논 몇 마지기 다랭이 논이 있는 곳을 '장승배기'이라고 불렀다.
야화같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예순여섯 살 폐암 걸려서 서울대병원 1인특실에서 숨을 헐떡거리면서 장승배기 정자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희미하게 웃던 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1917년생인 아버지가 10대이었을 때의 일이란다. 장승배기의 고목 속에 장난으로 불을 질러서 사흘간 나뭇속을 태워서.. 결국은 죽였고 크게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1930년대 초에의 일이다. 그 장승배기가 있었다던 곳에는 다랑이 논이 길게 늘어섰으며, 1995년 경 농지경지로 이 일대가 완전히 변했고, 옛 지명만을 마을 노인네들이나 지리학 교사들이나 몇몇 기억하고 있다.
지방도로 606에는 석장승 내외가 세워져 있다. 20여 년 전에 돌을 깎아서 세웠기에 나한테는 별 감흥이 떠오르지 않는다. 보호수 느티나무는 큰 줄기 등이 꺾이고 부러진 고목이라서 겨우 형태를 유지지탱한다. 그래도 이따금 띠가 빙 둘러쳐 있고, 옴팍 들어간 곳(음부를 상징하는 구석)에는 불에 그을린 초와 술병, 술잔, 사탕봉지, 명태포 같은 제물도 놓여 있다. 누군가가 토속적인 제를 올린다는 뜻이다.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느티나무 한 그루는 내 소유의 밭 가생이에 있다. 두 그루 느티나무가 지척을 두고 서 있고, 주위에는 지금도 낡은 폐가 한 채가 있다. 도로 확장하면서 옛 초가를 뜯어내고 새로 스레이트로 지어서 산지기한테 내어주었건만 그들은 오래 전에 떠났다. 지금은 풍우에 폐가가 되었고 그 마당 가생이에 작은 느티나무와 그 보호수인 정자나무가 가까이 서 있다.
1990년대 초, 지방도로를 에둘러 확장하면서 당산나무, 당산돌덜미들은 다 사라졌고 흔 오로지 당나무만 남았다.
그 일대가 작게나마 빈 터로 남았기에 서낭당 느티나무는 아직껏 당산목의 위치를 지닌다.
세 주막집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 두 집은 흔적없이 떠났고, 한 채의 자손은 지금도 산다. 커다란 석재공장을 운영하면서. 내가 기억하는 초가의 모습은 다 사라졌다. 이제는 기억조차도 희미해지고, 한 번 떠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방도로를 확장하면서 보상받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지어서 산지기네한테 빌려 준 집은 지금은 허물어져 간다. 서낭당(서낭댕이)이는 내 밭과 산이 붙어 있기에 나만이 기억하는 곳이 되었다.
몇 해 전, 아흔일곱 살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낼 때에도 상여가 느티나무 곁에서 잠깐 머물러서 문상객을 맞이했다가 바로 곁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나하고는 뗄내야 뗄 수 없는 서낭당 정자나무와 장승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보문학에 오른 '정자나무에 얽힌 풍속과 그 사연들'의 수필을 찬찬히 거듭 읽으면서 토속적인 단어들을 더듬었다. 아름다운 우리 말이 무척이나 많이 들어 있다.
'그늘막, 마을 어귀, 샘, 우물가, 메뚜기, 오뉴월, 한철, 장기판, 훈수꾼, 입싸움, 구석, 땅따먹기, 공깃돌 놀이, 새양쥐, 먹자판, 술판, 쉼터, 남정네, 아낙네, 샘가, 우물가, 시골, 디딜방앗간, 두레길쌈, 두레 놋그릇, 두렛일, 빨래터, 샘가, 발걸음, 방맹이 질, 노름판, 논밭, 술집, 색시, 늦바람, 도령, 뒷동산, 소두래, 헛소문, 고자질, 말질, 입심, 눈덩이, 흉, 한바탕, 곳곳, 어깨, 그늘막, 장승배기, 땔감, 변강쇠, 고개마루, 소나기, 개울, 내, 느티나무, 은행나무, 포구나무, 팽나무, 후박나무, 소나무, 낮잠, 홀랑, 짝자궁, 말조심, 나들이, 땔감, 이야기 샘' 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옛정이 듬푹 나는 말들이다.
'소두래'라는 단어는 낯설다. '헛소문'이나 '고자질'이나 '말질'에 해당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대부분의 단어와 내용들은 1970년대 초 내가 잠깐 머물렀던 시골생활을 재연한 듯 싶다.1950년대, 60대년대, 70년대 초의 말과 풍습이고, 우리의 혼이 깃든 토속적인 말이기에 토속어를 아끼고 보존하고 싶다. 한자어로는 감히 흉내를 내기 어려운 여운을 남긴다.
나중에 크게 보완해야겠다.
나는 위 수필로도 정말로 좋은 글감을 얻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고, 당산나무 주변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도 반추할 수 있기에...
첫댓글 충청도 우리 고향집 위에도 몇 백 년은 묵었을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몇 년 전인가 고향을 방문하여 그 옛날을 더듬는데
그 고목이던 정자나무는 베어지고 없어서 서운했죠.
서해안 저희 마을에는 1 ~4개반이 있는데 3반 끝편에 서낭댕이가 있지요. 제 집에서 한 700메타 쯤?ㅁ 도로편에 치우쳐 있으니 앞으로도 오래 보존될 겁니다. 작은 느티나무는 수령이 한 70년쯤 되고요.
정자나무가 있으면 마음이 넉넉해질 터인데...
박 선생님네 고향에는 고목이 사라졌다고 해고 다른 무엇이 대신하겠지요.
고향이라도 늘 변화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