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535]이규보선생시 代人書寢屛四時詞(대인서침병사시사)
柳撚金絲颺曉風 류년금사양효풍
금실 꼰 듯한 버들은 새벽바람에 날리고
一雙閑燕語玲瓏 일쌍한연어령롱
한가로운 제비 한 쌍 소리가 영롱하구나
美人睡起心煩悶 미인수기심번민
자고 일어난 미인은 그 마음이 심란하여
皓腕擎花吸露紅 호완경화흡로홍
흰 팔로 붉은 꽃을 받들어 이슬을 마시네
銀蒜垂簾白日長 은산수렴백일장
긴긴 대낮에 은산으로 주렴을 드리우고
烏紗半岸洒風涼 오사반안쇄풍량
오사모를 반쯤 젖히니 바람이 시원하네
碧筒傳酒猶嫌熱 벽통전주유혐열
벽통에 술 권해도 오히려 더워 싫어서
敲破盤氷嚼玉漿 고파반빙작옥장
반위의 얼음을 두드려 깨서 옥장을 먹는다
※銀蒜(은산) : 은으로 마늘통 모양으로 만들어
주렴 밑에 매달아 발이 잘 늘어지게 만든 장식.
※烏紗(오사) : 烏紗帽(오사모). 고려 말기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벼슬아치가 쓰던, 검은 깁으로 만든 모자.
지금은 흔히 전통 혼례식에서 신랑이 쓰는 사모(紗帽)를 말한다.
※碧筒(벽통):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정각(鄭慤)이
삼복(三伏)에 피서(避暑)를 하면서 연잎(蓮葉)에다 술 석 되를 담아서
잠(簪)으로 연잎의 줄기를 찔러서 마시면 술 향기가 맑고
시원하다 하였는데, 그것을 벽통주(碧筒州)라 하였다.
※玉漿(옥장) : 선인(仙人)이 마시는 음료(飮料)를 뜻한다.
騎省初驚見二毛 기성초경견이모
기성이 흰머리 보고 처음으로 놀랐으나
西風一夜碧天高 서풍일야벽천고
서풍 하룻밤 부니 푸른 하늘 높아졌네
夢魂盡處山重疊 몽혼진처산중첩
꿈이 깨어난 곳에 산이 첩첩 쌓였는데
月苦霜寒斷雁呼 월고상한단안호
찬 서리에 달 괴롭고 기러기 소리도 끊겼네
※騎省初驚見二毛(기성초경견이모) : 騎省(기성)은 진(晉) 나라의
반악(潘岳)이 산기좌우상시(散騎左右常侍)를 지냈기에
추흥부서(秋興賦序)에서 나는 산기의 성에서 근무했다고 한 데서 온 말이고, 이모(二毛)는 검은 머리와 흰머리를 말하는데 삼십 이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역시 반악이 추흥부서(秋興賦序)에서
“나는 서른두 살부터 이모(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余春秋三十有二始見二毛]”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浙瀝風輕雪驟飄 절력풍경설취표
바람소리 가벼운데도 눈은 휘날리고
王孫不憚捻鸞簫 왕손불탄념란소
왕손은 난소 불기를 꺼려하지 않네
綺筵熏暖猶敎摺 기연훈난유교접
비단 자리 오히려 따뜻하게 접게 하니
不用剛添獸炭燒 불용강첨수탄소
억지로 수탄을 더 태울 필요가 없겠네
※獸炭(수탄) : 獸炭(수탄)은 탄(炭) 가루를 짐승 모양으로
뭉쳐놓은 것인데 도성(都城)의 호귀가(豪貴家)들이 이것으로
술을 데워 마셨다는 고사가 있다.
이규보李奎報
본관은 황려(黃驪). 초명은 이인저(李仁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晩年)에는 시 · 거문고 · 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文)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여름철에 절을 빌려 학습하는 일)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이때 이규보는 문한직(文翰職)에서 벼슬해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科擧之文) 등을 멸시하게 되었고
국자시(國子試)에 연속 낙방하는 요인이 되었다.
16세부터 4 · 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 이인로(李仁老) · 오세재(吳世才) · 임춘(林椿) · 조통(趙通)
· 황보항(皇甫抗) · 함순(咸淳) · 이담지(李湛之)의 모임으로
죽림칠현 · 죽림고회 · 해좌칠현이라 불림)과 기맥이 상통해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吳世才)를
가장 존경해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고 한다.
1189년(명종 19) 5월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국자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짓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남부지방에서 10여 년 동안 일어난 농민폭동 등은
이규보의 사회 · 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東明王篇)』 ·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등이었다.
그리고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평가와 의의
이규보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직자였으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다 떠오르는 바를 그대로 표출한 것이었다.
이규보는 본질적으로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렇게 된 근본이유는 가문을 일으키고,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최이에게 바쳐진 이규보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규보는 최씨정권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문=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 고율시(古律詩) 代人書寢屛四時詞
남을 대신하여 침병(寢屛)에 사시사(四時詞)를 쓰다
春日
柳撚金絲颺曉風。一雙閑燕語玲瓏。
美人睡起心煩悶。皓腕擎花吸露紅。
夏日
銀蒜垂簾白日長。烏紗半岸洒風凉。
碧筩傳酒猶嫌熱。敲破盤氷嚼玉漿。
秋日
騎省初驚見二毛。西風一夜碧天高。
夢魂盡處山重疊。月苦霜寒斷鴈號。
冬日
淅瀝風輕雪驟飄。王孫不憚捻鸞簫。
綺筵熏暖猶敎摺。不用剛添獸炭燒。
춘일(春日)
금실 같은 버들 새벽 바람에 나부끼고 / 柳撚金絲颺曉風
한 쌍의 제비 영롱하게 지저귄다 / 一雙閒燕語玲瓏
미인이 자고 나니 마음이 괴로와 / 美人睡起心煩悶
흰 팔로 꽃 받들고 붉은 이슬 마신다 / 皓脘擎花吸露紅
하일(夏日)
은산 드리운 발에 해는 길고 / 銀蒜垂簾白日長
오사모 젖혀 쓰고 서늘한 바람 쐰다 / 烏紗半岸洒風涼
벽통배로 술 건네도 오히려 더워 / 碧筩傳酒猶嫌熱
쟁반의 얼음 깨어 옥장을 씹는다 / 敲破盤氷嚼玉漿
추일(秋日)
기성에서 처음 흰머리 보고 놀라고 / 騎省初驚見二毛
서풍 하룻밤에 푸른 하늘 높아졌다 / 西風一夜碧天高
꿈이 다한 곳에 산은 겹겹이고 / 夢魂盡處山重疊
쓸쓸한 달 찬 서리에 기러기 울음 끊겼다 / 月苦霜寒斷雁號
동일(冬日)
바람 소리 가볍고 눈은 빨리 내리는데 / 淅瀝風輕雪驟飄
왕손은 꺼리지 않고 난소 만지네 / 王孫不憚捻鸞簫
비단 자리 따뜻하여 겹쳐 깔게 하니 / 綺筵熏暖猶敎摺
수탄을 더 피울 필요가 없다 / 不用剛添獸炭燒
[주-D001] 은산(銀蒜) : 은(銀)을 부어 마늘 모양을 만들어서
발[簾]에 다는 것.
[주-D002] 벽통배(碧筩杯) : 연엽(蓮葉)을 맞붙여 만든 술그릇이다.
《酉陽雜俎 酒食》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