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세가(史記 世家), 월왕구천세가 중 토사구팽
*范蠡遂去, 自齊遺大夫種書曰, “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 越王爲人長頸鳥喙, 可與公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種見書, 稱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劍曰, “子敎寡人伐吳七術, 寡人用其三而敗吳, 其四在子, 子爲我從先王試之,” 種遂自殺(범리수거, 자제유대부종서왈, “비조진, 양궁장, 교토사, 주구팽, 월왕위인장경조훼, 가여공환난, 불가여공락, 자하불거?”, 종견서, 칭병불조, 인혹참종차작란, 월왕내사종검왈, “자교과인벌오칠술, 과인용기삼이패오, 기사재자, 자위아종선왕시지,” 종수자살).
범리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대부 문종에게 서신을 보냈다.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
월왕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족하니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소.
그대는 왜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이오?”
문종이 편지를 읽고 병을 핑계 삼아 궁궐에 들어가지 않으니 어떤 자가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언했다.
구천은 그에게 칼을 내리며 말했다.
“그대는 오나라를 칠 수 있는 계책 일곱 가지를 가쳐쳐주었소.
나는 그 가운데 세 가지만을 사용해 오나라를 물리쳤소.
나머지 네 가지는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선왕을 뒤쫓아 가 나를 위해 이를 시험해보기 바라오.”
문종은 이내 자진하고 말았다.
*위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 세가(史記 世家) 중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중 일부를 발췌해 본 것입니다.
*사기 세가(史記 世家)는 비록 제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열전에 나오는 인물들보다는 한 단계 높은 인물의 사적, 즉 제후들의 사적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성격상 본기와 열전의 중간에 속하고, 문체도 본기가 간결체의 정사 형식을 띄고 있는데 반해 열전은 만연체의 야사 형식을 띄고 있으며, 세가는 그 중간에 해당하며, 세가는 제왕의 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제왕의 참모 또는 왕사 노릇을 한 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본기를 일인자 리더십, 세가를 이인자 리더십에 관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월왕구천세가는 그 대부분의 내용이 구천의 패업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범리(范蠡, 대부분 범려도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중국어 발음 fàn lí의 표현에 의하면 범리가 맞다는 설이 유력함) 의 사적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월왕구천세가라기보다는 범리열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범리(范蠡, 대부분 범려도 표기)는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월나라 왕 구천을 섬기며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등 공신으로, 구천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 재상에 올랐습니다.
*문종(文種)도 범리(범려)와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신(책사)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는데, 월왕 구천은 오나라는 멸망시키고 패업을 이루자 문종을 가차 없이 제거함으로써 한고조 유방의 한신(韓信) 제거,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공신들 제거와 함께 중국 삼대 토사구팽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고, 춘추전국시대의 일로 한나라 초기 유명한 유방이 한신을 팽형에 처한 것보다 역사적으로 앞 선 일로 토사구팽의 시초를 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위 글은 이후 고난은 함께 해도 기쁨은 함께 할 수 없는 사악한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좋은 일화를 남겼는데,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빈천지교불가망 조강지처불하당,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친구 잊어서는 아니 되고, 고난을 함께 한 아내는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에 역행한 구천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마천(司馬遷, 자는 子長, 기원전 145년~86년, 한경제의 치세인 기원전 145년 전후에 사관으로 재직한 사마담의 아들)의 필생의 역작 사기(史記)(太史公記, 또는 太史公書로 불리기도 함)는 오제부터 한무제까지 제왕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 역대 제왕과 제후의 연표를 기록한 표(表), 고대 중국의 역법, 치수, 경제를 기록한 서(書), 역대 제후와 공신들의 연대기인 세가(世家), 정치가, 학자, 군인, 자객, 해학가 등 각종 인물의 흥망사를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사마천은 한무제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는 태사령이 된 후 49세 때 황제를 무고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부친의 유한과 사마천 개인의 통한을 승화시킨 작품인 사기를 작성하기 위해 당시 죽음만도 못한 것으로 여긴 굴욕적인 궁형(宮刑, 거세형)을 자청해 죽음을 면한 후 세기의 역작 사기를 저술하여 후대에 역사를 거울로 삼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치를 깨닫는 사감(史鑑)의 전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기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대의멸친(大義滅親)으로, 치국평천하의 대의를 위해 친인척으로 상징되는 소의(小義)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마천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극도로 싫어하는 호리오해(好利惡害)를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했고, 사기 중 열전은 사기 총 130편 중 70편에 달하는 것으로 사기의 꽃에 해당한다고 하고(열전을 읽지 않으면 사기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열전만 따로 번역한 책이 많이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