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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21장 13절.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14-죽음을 넘어선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일제 시대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다가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평소에도 일사각오를 부르짖었습니다. 그 뜻은 ‘주님을 위해 한 번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교의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입니다.
짐 엘리엇선교사는 네 명의 친구 선교사와 함께 에콰도르의 미전도 종족인 아우카족, 와우라니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팀을 만들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전에 경비행기로 가서 식량도 떨어뜨리고 생필품도 전해주면서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게 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1월 8일, 짐 엘리엇이 네 명의 친구와 함께 경비행기로 이곳에 도착했는데 원주민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뛰쳐나와서 창으로 찔러 이 다섯 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엘리엇 선교사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환난시대를 사는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서머나교회는 환난 시대를 통과하는 교회입니다. 열 명의 황제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박해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면서 죽어갑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장 9-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오늘 여러분들이 읽으신 본문의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니까 교회들이 이제는 사도 바울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많은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극심한 박해를 받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먼저는 빌립집사의 딸이 넷인데 그 딸들이 모두가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8-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그녀들이 무슨 예언을 했는지는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빌립집사의 딸이 예언하는 자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집에서 얼마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천하에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했던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그곳으로 갔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흉년이 모든 나라들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이 경고를 받아 조금씩 모았다가 예루살렘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자 도움의 손길을 보냈습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아가보는 영적으로 권위가 있는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말합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그러자 가이사랴에 있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울면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진심으로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죽음을 각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영원한 나라를 만드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죽음이 두려운 영역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 안애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갖게 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주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일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죽음이나 죽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분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절을 보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하나님은 복음을 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나다. 쉼은 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쉼을 주는 안식의 약속이 있을 지라도 그 안식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애굽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도 조상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억압과 박해가 극심해지면서 그 기대감이 무너졌습니다. 그럴 때 나타난 것이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런 그에게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그가 행하는 표적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애굽에서 사는 것보다는 모세를 따라가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도자가 모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기에 몰릴 때마다 모세에게 달려가 원망하고 불평하며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로 인도하였으니 우리를 책임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40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있었으나 하나님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으니까 그들은 순종했고, 믿으니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시인했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라고 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어 그들의 산성이 크고 견고하며 그들이 아무리 힘이 센 거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한테 게임이 안돼 그들은 우리의 밥이야”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 편에 서있을까요?
이것은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믿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20세 이하의 어린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어른들은 다 광야에서 죽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히브리서 3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그러면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4장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을 전함을 받은 자라는 것은 애굽에서 모세를 따라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복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들은 복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들은 복음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를 쓸 당시의 초대교회나 오늘날을 사는 여러분들이 들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의로 말미암은 약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약속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의를 힘입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은 그냥 이론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또 자기를 위한 믿음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으로만 믿거나 말로만 믿습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흉내만 내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죽음을 넘어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그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죽음을 감수해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자신이 들은 복음과 결부시킨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에 쉼을 누립니다. 안식이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고난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침례교회를 개척한 펜윅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한국에 온 선교사인 메켄지선교사와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고민을 썼습니다. 메켄지 선교사는 펜윅에게 보내는 편지에 펜윅이 신학도 공부하지 않고 또 언어 역시 장벽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뒷 부분에 가서 이렇게 썼습니다. "가서 예수를 위해 죽을 마음이 없습니까? 그들이 배척하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면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앞에 떳떳할 것입니다"
그의 편지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금방 선교지인 한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을 성경을 공부하면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움직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마음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렇습니다. 이 땅에 미련이 남거나 아니면 육신의 목숨이 아까워서 주님을 버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잘되느냐 안되느냐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넘어선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죽고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과 예수님은 죽고 여러분들이 드러나는 것 가운데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날마다 교회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면서 살았기에 교회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의 몸을 전제(‘붓다’, ‘따르다’는 뜻인 ‘나사크’에서 유래한 말로서 포도주나 독주를 하나님의 제단에(제사 제물 위에) 부어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출 29:40-41; 민 15:5; 겔 20:28). 이 전제는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항상 다른 제사에 곁들여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상징합니다)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기뻐할 것이며 빌립보교회와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를 향한 사랑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땅의 것을 얻고자 자기 몸을 내어주고 있는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원이 너무 적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 보좌에 하나님과 그의 우편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고 그 앞에 24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앉아서 경배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제단 아래에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경배를 하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0절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그 많은 순교자들이 제단 앞에서 왜 아직도 우리의 피를 신원해주지 않으시느냐고 그들이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따랐을 뿐아지만 세상은 그들이 불의하다고 죽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죽어서도 하늘 보좌를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왜 아직도 저들의 악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피값을 왜 신원하여 주지 않으십니까?”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흰 두루미기를 주신 것은 예수님의 위로입니다.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고 잠깐 쉬라고 하십니다. 아직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순교자의 수는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으며 왜 그 수가 채워져야하는 지도 역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이 자기들의 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예수님은 아직도 다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금만 더 차면 된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아직도 얼마의 인원이 더 순교를 당해야 할지도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순교할 사람들은 많습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쓰고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공산주의 세계나 이슬람의 세계나 힌두교 세계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지키면서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역시 많은 순교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나라에 이 순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여
러분들은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순교는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순교가 가능합니다. 성령은 죽음을 이기고 믿음을 지킬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때때로 성령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순교를 당하는 영적인 강인함과 용기도 주십니다. 그래서 순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할 때 이 권능 속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할 권능도 포함되면서 한편으로는 고난과 순교를 이기는 능력도 부여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교회가 드리는 헌신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전정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주신 사랑으로 인해 가능해진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을 받은 자들 가운데 사랑의 꽃이 피어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대상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을 교회를 위한 산제물로 드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셔서 아버지의 나라 가운데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집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으면 그가 어떤 선한 행동을 했던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죽으심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를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보이시고 확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늘보좌로 앞서 보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남아서도 굳건한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이 죄악 세상을 이기면서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또한 자기도 어려운 가운데 남의 어려움을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안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12절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자기의 족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화목제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역시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 쏟아 붓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찾고 있던 온전한 사랑이 바로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로인해 교회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함께 교회에 나와 예수님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교회를 통해 받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온전해 가면서 자신 역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며 섬기는 산 제물이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으로 살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신앙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주님이 원하시는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길 구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한 알의 씨앗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셨고 또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와 이 세상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려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시겠습니까? 이 결단이 여러분들에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은혜와 복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산 제물로 받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자신을 드린 여러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고 죽을 지라도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영적인 결단이 여러분들 속에서 일어나길 축복합나다. 또한 이 복이 악한 세상을 온전하고 순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