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41
5월30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부활 제7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991CzMCBeQ (방성수 야고보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오늘 복음 말미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는 말씀 - 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지난 세월 제 삶 안에서 나름대로 고통을 겪을 때마다, 좌절의 순간에 늘 떠올렸던 말씀이었고, 그때마다 다시금 살아갈 힘을 주시던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백소 안에서 제가 단골로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세파에 지쳐서 흐느끼는 분들,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해 힘겨워하는 사람들, 난데없이 다가온 이유 모를 십자가 앞에서 속울음을 우는 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제 18번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힘들게 하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고통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들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밥을 안 먹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마다 고통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 앞에 설 때마다 고통 그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좀 고쳐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풍요로움의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너무도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때로 한없이 인자하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그른 길로 빠지는 아이를 위해 싫지만 매를 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책벌도 하시고, 때로 시련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니다.
바닷가에 설 때마다 늘 와 닿는 한 생각이 있습니다. "바다는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떠오르는 일출을 배경으로 한 투명한 아침 바다의 얼굴,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새파란 파도가 역동적인 한낮의 얼굴, 찬란한 서글픔을 지닌 저녁 바다의 얼굴, 이윽고 어둠이 내리면 고운 밤별들을 배경으로 밤바다의 얼굴...
바다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의 선물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늘 살아있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바다 같은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수용하시고, 시시각각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끊임없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견딜 수 없는 십자가를 통해서, 때로 만사형통을 통한 기쁨을 통해서... 세상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 역시 비례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진정 주님으로부터의 위로를 한번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의 위로는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너무도 따뜻하고 감미로운 것이기에 죽음과도 같은 세상의 고통을 이겨낼 힘이 거기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병들고 지치고 힘들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도 기대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자리를 털고 일어서십시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전에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는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딸 때문에 고민이라는 엄마가 등장했습니다.
엄마는 “딸이 남자처럼 하고 다닙니다. 날 많이 챙겨주지만, 살도 빼고 다른 여자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민 주인공의 딸은 여자들과 싸우기 보다는 남자들과 싸웠고, 싸우고 나서 인대가 파열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에 등장한 딸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헤어스타일, 옷 스타일까지 귀여운 ‘남자’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자였습니다.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객석에 자리한 고민 주인공의 딸은“여자는 비실비실하고 남자는 듬직해 보인다.”라며 “남자처럼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해 20살이 넘으면 성전환수술을 하겠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머리를 자른 지는 6~7년이 됐고 옷도 붙는 거 안 입는다.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데 가슴 보면 티 나니까 압박 붕대로 감고 다닌다.”라고 말해 출연진을 놀라게 했습니다. 고민 주인공의 딸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이 왜 남자가 되려 했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어렸을 때 아빠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엄마를 때렸습니다. 여자는 무조건 남자에게 안 됩니다.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엄마는 자신 때문에 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처는 엄마가 담고 갈 테니 여자처럼 살았으면 좋겠다.살도 빼고 머리도 기르고”
딸은 엄마에게 효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엄마의 마음만 아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엄마가 원하는 것은 딸에게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역할을 해 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딸이 딸로 태어난 이상 어머니의 남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딸은 받아야 하고 엄마는 주어야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딸이 볼 때는 엄마가 외로워 보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지켜주어야 한다는 맏딸로서의 책임감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위해서라도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잘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함께 계셔주셔서 결코 혼자가 아니셨다는 것을 알면 그나마 죄책감이 감소는 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나에게 남은 것은 제자들밖에 없어서 너희들마저 나를 버리면 나에겐 정말 아무도 없다.”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외로운 사람들은 ‘당신이 전부’라는 식의 말들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부담이 되겠습니까? 당신이 전부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미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홀로 설 수 있는 어른들만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자녀를 사랑한다면“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주위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도 많으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너희 삶을 살아라”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자녀들은 부모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 마음을 편하게 해 준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외롭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외로운 사람은 남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더 외로워지고, 외롭지 않은 사람은 든든해 보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모입니다. 절대 외롭지 마시기 바랍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30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묻기도 전에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것을 믿습니다.”(30절)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제자들이 나약한 어린애라고 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으며,믿음마저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지금 믿는 것조차 버렸다. 제자들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그분을 떠나게 되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그분의 이름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때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백배한다. 그리고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분을 팔아넘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덕을 위해 이겨낸 모든 환난의 결과는 기쁨이며,모든 수고의 결과는 안식이며, 모든 치욕의 결과는 영광이다. 즉 덕을 위한 모든 고난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밀알 하나가>
<전주교구는 5월 30일 월요일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강론도 그 결정에 맞추어서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당신의 종교를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끝나버린 일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입니다. 그리고 땅에 묻힌 ‘밀알 하나’도, 즉 예수님 자신도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사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은 그 밀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한 ‘투자’ 같은 것입니다.)
1) 세속 사람들은 ‘희생’을, ‘남을 위해서 나만 손해 보는 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희생이 가치 없는 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됩니다. 신앙인의 희생은 ‘남을 위해서 나만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나를 내줌으로써 남과 내가 동시에 영적인 이익을 얻는 일”입니다.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 자신에게는 공덕을 쌓는 일이 되고, 하느님의 보상을 받게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2) ‘희생’은 남에게 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될 뿐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이 말은,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을 짓밟는 것을 막으려면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한다는(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카야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예언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요한 11,51-52), 그것은 교회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살인죄를 정당화하는 말은 아닙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 쪽에서는 희생이지만, 예수님을 죽인 쪽은 살인죄를 지은 일입니다.)
3) 순교자들의 죽음은(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되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밀알 하나’로(희생 제물로) 바치는 ‘거룩한 희생’이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죽음만 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그 죽음이 수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순교는 결코 허무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순교자 자신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되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일이 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마련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그런 것들만 가지려고 욕심부리는 사람은, 그것들이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때, 그것들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이라는 말은, ‘허무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집착과 욕심을 뜻합니다. (순교자들은 허무한 것을 버려서 영원한 것을 얻은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6)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온 세상’은 ‘허무한 것들’을 뜻합니다. (표현만 보고서,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두 가지를 다 얻는 일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온 세상’을(허무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먼지만 잔뜩 가지고 있는 일이 될 뿐입니다. 세속의 권력도, 재물도, 명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이론으로만 그치면, 즉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정말로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마지막 목적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섬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묵시 22,3-4)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은 “누구든지 나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면”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마르 8,34) ‘내가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이고,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는 “나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이고,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고, 또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면”이고,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북미주 사제모임을 하면서 ‘미션’ 순례를 하였습니다. 미션은 선교사들이 세운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선교사들은 40km에 하나씩 미션을 세웠다고 합니다. 40km는 선교사들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걷다가 지친 선교사들은 미션에 세워진 종을 보았고, 미션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고 합니다. 2015년에 성인품에 오른 주니페로 세라 신부님은 9개의 미션을 세웠다고 합니다. 미션을 순례한 후에 바닷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보통 식사에는 포크와 나이프 혹은 수저와 젓가락이 나옵니다. 그날 주메뉴는 ‘게’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도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작은 망치였습니다. 망치는 게를 먹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딱딱한 게의 껍데기를 망치를 이용해서 쉽게 깔 수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북미주 사제모임의 성격을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북미주 사제모임은 ‘망치’와 같았습니다. 사제모임을 통해서 닫혔던 마음을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모임을 통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모임을 통해서 새로 온 사제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직책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루에 회의를 5번 정도 해야 하고, 회의를 마치면 하루가 지나간다고 합니다. 콘센트에 너무 많은 전자 제품을 연결하면 과부하가 걸려서 화재의 위험이 있듯이, 혼자서 너무 많은 일을 하게 되면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본인에게도 피로가 쌓이게 됩니다. 사도들은 공동체가 커질 때, 따로 음식을 나누고, 재정을 관리할 부제들을 선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예전에 듣고서 큰 위로를 받았던 성가가 있습니다. 제목은‘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입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외로워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함을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새로운 한 주간입니다. 나 혼자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짐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누군가 날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에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려고 왔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달리 최후의 만찬 뒤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긴 담화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 그분께서 남기신 유일한 계명, 성령에 대한 약속 등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16,18) 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제자들의 반응이 사뭇 다르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조차 결국에는 그분을 버리고 각자의 길로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결국 헛된 것임을, 그저 마음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와 나약함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위로의 말도 함께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맞설지 모르지만, 그 세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기신 분을 우리가 따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부족하지만, 그래서 너무도 자주 무너져 내리는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외치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믿음이 삶의 행복이나 성공으로 이어지면 좋을 텐데, 오늘 복음은 오히려 제자들이 흩어지고 고난을 겪게 된다는, 다소 불행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 가는 과정과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여정이 신앙생활일 텐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삶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의 유혹뿐만 아니라 어쨌든 살아 내야 할 현실의 무게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허황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힘겨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 포탄처럼 떨어져 터져 버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른바 ‘육화’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는 이들의 삶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서 시작합니다.
팍팍한 삶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가 썩었고 악하다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용기를 내는 일이지, 팍팍한 삶 말고 편안한 삶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일이 아닙니다. 팍팍한 삶 한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셨지요. 삶이 팍팍할수록, 약할수록, 힘겨울수록,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오늘도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사목국장)]
우리는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굳건한 믿음을 끝까지 지닐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고‘나를 따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실망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미리 보셨습니다. 우리도 실망해서 믿음을 버리고 싶은 경우가 생깁니다. 하느님이 무심한 분이라고 여겨질 때,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성당에서 활동하다가 신자들에게 소외될 때, 한동안 하느님을 떠나 홀로 외롭게 지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경과 풍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절규하실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와 일치의 현존을 보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일치로 죄와 죽음을 굴복시키시고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흘러내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받은 사람은, 세상을 이겨 내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역경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자비는 승리하는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됩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우리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인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14장, 15장, 16장의 다락방에서의 유언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올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도 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의 저자인 루돌프 스테르텐브링크는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믿음의 약함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와 굳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니, 선물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요한 16,3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좋은 환경이나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 데서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당신 안에’ 마련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당신이 주시는 이 평화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주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그분이 주신 평화로,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아멘.
+++++++++++++++++++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네 사람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네 명은 모두 정상에 도착했지만, 그 과정은 모두 달랐습니다.
첫째 사람은 등산을 위해 값비싼 등산화를 마련해서 신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발에 맞지 않아서 등산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등산화 탓을 하며 투덜거리며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둘째 사람은 산 중턱에서 숲으로 둘러싸인 농장과 언덕 위의 집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할까? 이곳을 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등의 생각을 하면서 돈만 떠올리며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셋째 사람은 먹구름 떼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가 오는 것 아냐?’하며 불안한 마음만을 간직하며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산에 오르면서 나무, 풀, 바위, 계곡 등을 보며 감탄하고 자연에 감사하면서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네 사람 모두 똑같이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누가 산 정상에서 가장 행복했을까요? 당연히 마지막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세상 삶의 마지막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달해야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작은 것에도 감탄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삶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고별 말씀의 마지막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기에 두려움도 있을 수가 없고, 악을 이겨낸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당신이 먼저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세상에서 고난을 겪겠지만 주님과의 일치로 평화를 얻게 됩니다. 평화는 믿음과 일체에서 오고 이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용기를 냈을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생활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보다 감사와 기쁨을 간직하게 되고, 불안과 초조의 마음보다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온갖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어도 과연 하느님 나라가 맞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 것 같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의 일치만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을 이기는 한걸음>
요한 16,29-33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을 이기는 한걸음>
누가 봐도 패배의 길이다
아무도 걷고 싶지 않은 길이다
선뜻 따라 걸을 수 없는 길이다
함께 걷던 이마저 흐트러뜨리는 길이다
홀로라도 담대하게 그 길을 걷는다
아무도 꺼트릴 수 없는 사랑의 타오름으로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정의의 아우성으로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살림의 몸부림으로
패배의 끝을 향하여 한걸음 내딛는다
그 한걸음만으로도 이미 증오의 세상을 이겼다
그 한걸음만으로도 이미 불의의 세상을 이겼다
그 한걸음만으로도 이미 죽임의 세상을 이겼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용기를 내어라 >
사람의 약점 중 하나가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의지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줄서기를 잘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굶주릴 때는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자마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아셨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체포될 때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주더라도 손발에 머물러 증거까지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믿음은 아직도 더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이제 곧 모두가 다 각자의 유익한 곳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 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며 시련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용기를 내어라’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도 계십니다.”(성 도미니꼬)
세상이 주는 승리와 주님께서 보시는 승리는 다릅니다. 춥다고 버리지도 말고 배부르다고 떠나지도 마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과 소신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시련 속에서 빛납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속담의 의미를 헤아려봅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 나서는 일부터 해야 할 때입니다.”(박병규)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계시면서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시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당신처럼 세상을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와 공동체의 일원인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공동체의 모습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인가?
아니면 믿지 않는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친목공동체의 모습'인가?
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세상을 이긴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을 뒤따르는 모습! 그렇게 하려고 늘 깨어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 자비로우신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는 모습! 그래서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부활하는 모습!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물질만능주의' 등과 같은 '세상 가치'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이런 신앙공동체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더 버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또 그렇게 살아보자고 외치는 이의 목소리가 무의미하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세상을 이겨내신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분명한 진리, 곧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진리 앞에서 용기를 내어 세상을 이겨내는, 이겨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봅시다!
"주님,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본기도)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여정>
-하루하루가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 축일이다-
오늘은 저희 요셉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생일을 맞이했을 때의 기분처럼 어제부터 수도원 성전 "생일"이라 생각하니 웬지 모를 기쁨이 샘솟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생각하면 감개무량한 우리 요셉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참 자랑스러운 것이 개원이후 35년 동안 늘 활짝 열려 있는 수도원에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수도원은, 성전은 세상에서 찾아 보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에는 참으로 “신의 한 수”같은 무수한 기적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6년전 2006년 5월30일 이날! 지금은 고인이 된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이 집전한 성전 봉헌 축일 미사때는 수도원 역사상 300명 이상이 참석했으니 이렇게 많이 신자들이 참석하기는 수도원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참 많은 분들로부터 넘치도록 사랑을 받아왔던 수도원에 성전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중에 성전 봉헌 축일 전 해인 2005년 8월부터 불야불야 시작된 전광석화電光石火, 전화위복轉禍爲福같은 성전공사에 성전본관의 신축이 그야말로, “아, 죽다 살아났구나!” 하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느낌이었으니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수도원 본관의 명칭도 '자비의 집'입니다.
1987년 3월19일 수도원 개원이후 처음에는 1.온돌방 성전을 사용하다, 2.응접실로 옮겼고, 이어 3.온돌방과 응접실을 하나로 터 성전으로 사용하다가, 마침내 이 옛 별장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4번째 성전을 새로 신축하여 봉헌 축일 미사를 지낸 날이 바로 16년전 오늘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하면 16살 한참 젊은 청춘입니다.
새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의 감사와 감동, 감격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 밥상이 커서 좋다!” 제대를 대했을 때 첫 순간의 느낌이었습니다. 참으로 획기적 변화가 많았던 성전 전례였습니다. 처음으로 앉은뱅이 낮은 제대에서 앉아 미사를 봉헌하다가 서서 미사를 봉헌했고, 독서대에서 독서가 시작됐으며, 처음으로 미사 때 복사도 함께 하는 미사다운 미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참으로 본래의 순수를 되찾아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를 갖게 하는 성전 봉헌 축일의 유래요 오늘 본기도가 새삼 마음에 새롭게 와 닿습니다.
“하느님, 해마다 이 성전이 봉헌된 날을 기념하게 하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이 성전에서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하소서.”
참 단순하고 아름다운 기도문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2014년 3월19일 자립 수도원이 되면서 성전 봉헌 축일은 명실공히 자리잡혀진 기분이라 참 마음이 기쁩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그리고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전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듯 우리 삶의 가시적, 눈에 보이는 중심이 바로 이 성전입니다.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참으로 깊이 깨닫고 보면 하루하루가 봉헌의 여정이요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마디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말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봉헌의 축복, 봉헌의 기쁨, 봉헌의 신비, 봉헌의 아름다움 등 끝이없습니다. 봉헌이야 말로 우리의 신원이요 삶의 존재이유이자 의미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도 날마다 새롭게 하느님께 봉헌함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루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 역시 얼마나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하셨는지, 또 얼마나 성전의 속화에 분노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성전이 세상을 닮아 세상에 동화同化, 속화俗化된다면 말그대로 절망적 상황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제자들은 즉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연상했다니 예수님의 불같은 열정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달됐음이 분명합니다.
열정熱情과 순수純粹야 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 수도자들의 기본적 자질이자 성소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열정에서 순수요,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이니 둘은 함께 갑니다. 이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에서 성전은 한층 심화된 모습으로 뚜렷이 부각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요?”
당시 사람들은 몰랐지만 우리는 압니다. 바로 성전은 사흘만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몸인 성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매일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의 몸으로 성장, 성숙하는 공동체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매일이 주님 성전 봉헌 축일인 것입니다.
날마다 성전에서의 미사은총이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로 성전미사 은총이 우리는 물론 세상을 끊임없이 살리면서 정화하고 성화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근거한 성수 축성때 마다 부르는 성가 67장이 은혜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알렐루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 알렐루야.”
세상을 살리는 은총의 강, 생명의 강같은 미사전례은총입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독서시 베드로 사도의 말씀(1베드 2,1-17)도 참 좋았습니다. 오늘 성전 봉헌 축일에 주님께서 당신의 살아 있는 성전인 우리 공동체 형제들에게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처럼 들립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있는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주님의 몸이자 주님의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미사경문중 감사송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그대로 우리의 하늘나라 꿈을 현실화 시켜주는 성전미사은총임을 실감케 합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마음 깊이 새기고 싶어 그대로 인용함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이 집을 짓게 하시어,
주님께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시며,
주님과 신비로운 결합을, 이곳에서 오묘히 드러내시고 굳게 하시나이다.
또한 여기에서 저희를 주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시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천상 도읍 예루살렘에서 평화의 나라로 완성하시나이다.”
교회와 미사전례를 통한 하느님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능력과 위업을 참 잘 드러낸 감사송입니다. 새삼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순례 여정중에 있는 우리 한 몸 교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새롭게 이끌어 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습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Gd3Cf7_TCg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5.30.월."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예수님에게서
얻게 되는
참된 용기이며
참된 희망이다.
참평화를
얻게 되는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용기이다.
우리의 삶이란
끝까지 가봐야
아는 삶의
고갯길이다.
삶은
용기(勇氣)의
또 다른 표현이다.
어리석은
용기가 아닌
세상을 이긴
주님의
굳센 약속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용기이다.
꽃 피고
열매 맺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여정이다.
평화를 체험하게
만드는 용기이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의
시작 또한
용기이다.
사랑도 용기가
필요한 나눔이다.
용기는 절망을
치유하는
치료제이며
희망을 만드는
참된 실천이다.
용기를 내어
다시 이 길을
걸어간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함께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간다.
용기 없는 믿음과
믿음 없는 용기는
있을 수 없다.
믿음은 용기이며
믿음은 욕망의
세상을 이긴
맑은 십자가의
승리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용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되는
용기의 순간이며
용기의 선택이다.
용기를 선택하는
용기의 삶이다.
=====================
*** 5월29일 주님 승천 대축일 강론
[부산교구 김종남 스테파노 신부님]
<겸손과 자기비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예수님의 승천은 언제 어디서나 살아계시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 체험은 모자라고 부족한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사랑의 계명을 우리가 온전히 살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승천 사건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의 겸손과 자기 비움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던 인간을 다시금 연결해주셨다.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신다. 그리고서는 당신은 뒤로 물러나신다.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려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역할로 만족하시고 더 욕심내지 않으시고 그냥 떠나신다.
대신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성령께 그 자리를 내어드린다. 이같은 주님의 한없는 겸손과 자기 비움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사랑의 결실이 바로 성령인 것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신의 자리를 이처럼 선뜻 내어줄 수 있겠는가? 권력의 최상위를 차지하려고 누군가를 짓이겨야 하고, 한 번 쥐어진 권력을 절대 내려놓지 않으려고 아귀다툼하는 처절한 세상이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발악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 미련을 두지 않으시고 빈자리를 내어놓으신다. 일생을 사랑과 겸손의 한결같은 삶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희생과 자기 비움’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해야 한다. 내 것만을 꽉 움켜쥔 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는 없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가 자신의 것들을 비워낼 때 가능한 것이다. 서로의 약점을 참고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가 살 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을 위해 나 자신의 묵은 껍질을 벗는 아픔을 때로는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비우고, 그 빈 곳을 사랑의 열매인 성령으로 채워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임을 기억하자. 그것이 그리스도 당신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계심을 세상에 전하는 길임을 기억하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
*** 5월29일 주님 승천 대축일 강론
[의정부교구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이신 말씀을 지켜 사랑에 빠진 사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 함은 ‘그분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제한적 의미보다 좀 더 포괄적이고 역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역동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지키는 것도 역동적입니다. 주님 말씀을 지킬수록 주님 사랑은 성장합니다.
우선 ‘말씀을 지킨다’ 함은 그 “말씀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문다.”(야고 1,25)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듣고서 잊어버리지 않아”(야고 1,25) 말씀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씀 안에 머물면 그 말씀을 자연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 들여다봄, 즉 묵상을 지속하면 우리 내면에서 영적 작용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요한 6,63)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씀의 영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필리 2,13) 하십니다. 이렇듯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그 끝에 실천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이 그러하듯.
말씀과 사랑에 빠진 이는 아가서의 직설 표현을 낯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노래합니다.
“그이의 그늘에 앉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 그이의 열매는 내 입에 달콤하답니다.”(아가 2,3)
이토록 달콤하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말씀을 우선시합니다.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아가 2,7)
그는 또한 사랑하는 말씀의 힘이 자신에게 강렬하게 달려옴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교부 토리노의 막시무스가 말한 것도 이것입니다.
“복음은 매우 빠르게 달려 나갑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들만 그 움직임을 압니다.”(토리노의 막시무스 『설교집』 20,4)
말씀의 빠르고 강렬한 다가섬은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한 말을 그의 현실이 되게 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말씀을 사랑하여 그 영적 힘을 느낀 이는 말씀을 지켜내어 그의 놀랍고도 압도적 힘이 교회에 전해지도록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 내 어머니의 집으로, 나를 잉태하신 분의 방으로 인도할 때까지”(아가 3,4)
이제 말씀을 사랑하여 지킨 이 사람은 자신만이 말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를 원하는 존재가 됩니다. “나는 내 연인의 것, 그이는 나를 원한답니다.”(아가 7,11)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말씀이 원하기에 항상 말씀 안에 머무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ㄴ)
=====================
*** 5월29일 주님 승천 대축일 강론
[춘천교구 원훈 갈리스도 신부님]
<늘 그 자리에서 행복을 가져다 준 5월의 봄을 보내며>
교구청 앞마당이 푸르름으로 가득해졌습니다. 낮과 밤, 평일과 주일에도 늘 푸르름으로 가득한 이 정원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주변 이웃들의 산책 코스이며, 새벽녘에 환경 지킴이를 하시는 어르신들의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반려견들의 놀이터이며, 추억을 간직하고자 셀카를 찍는 이의 손가락이 분주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온갖 새들의 지저귐과 만발한 영산홍 군락 등이 잘 어우러져 행복의 기운을 뿜어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반가운 이들은 성지 순례객입니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이들은 십중팔구 순례객입니다. 반갑게 맞이하며 어디서 오셨고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 춘천은 어디 어디 다녀오셨는지 여쭤보게 됩니다. 낯선 이의 질문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서로 눈빛으로 알아채고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다정한 말투로 대화가 오가게 됩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저는 사무실로 들어와 또다시 책상에 앉아 일합니다.
뭐랄까. 너무나 완벽한 환경입니다. 세상 걱정 하나 없을 것만 같은 풍경입니다. 만족스러운 삶이며 부족한 것 없는 광경입니다.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하며 저절로 탄성을 지게 만드는 순간이 교구청 사무실 바로 앞 정원에서 펼쳐집니다.
이상한 것은 작년에도 같은 환경과 모습이었을 텐데 저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작은 행복을 찾지 못하고 세상 것에 행복과 여유를 찾으려 했던 시간이 저를 눈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매 순간 힘들고 지칠 때마다 교구청 정원을 바라보며 힘내라고 늘 마련해 주셨는데 제가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사물을 바라본다 해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말처럼 주어진 환경에 늘 불만인 경우도 있었고, 고뇌의 쓴맛 뒤에 달콤한 솜사탕을 기다리며 보상 아닌 보상을 받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3)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입니다. 그 마음속 불안함과 걱정은 알 길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루카 24,49)라고 하신 약속의 한 마디는 제자로서의 사명과 강인한 인내를 배우고 지니도록 이끌어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말씀의 의미와 나눔의 행복과 사랑의 참뜻을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너무 걱정하며 살아가지 맙시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잘 들여다보며 의미를 찾아봅시다.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상황을 달리 이해하듯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시는 약속된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시다. 그것이 바로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살아가는 방법이며 양식입니다.
오늘도 복된 하루를 살아가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저를, 저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고 판단하며 이기심과 미움으로 처신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승천의 기쁨으로 성전에서 찬미하며 약속된 성령을 기다렸던 제자들의 순수하고 강인한 용기를 본받게 하소서. 아멘.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