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내면의 역설적인 본능은 무엇이 제어하는가 - 라캉과 허스트
썩은 소의 머리에 눈길이 가는 이유
영국의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의 작품 〈천 년〉은 몸체에서 분리된 소머리가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유리 상자 안에 놓여 있는 끔찍한 작품이다. 구멍으로 연결된 옆 유리 상자에는 몇 마리의 파리를 넣어두었는데 이 파리들은 곧 피비린내와 부패한 시신의 냄새를 맡고 소의 머리통으로 날아든다. 이 고얀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찬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미술작품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통념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과거 예술작품 중에도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작품도 있지만 다소 예외적으로만 발견될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이미 웬만큼 해괴한 작품에 대해서 내성을 지닌 현대인에게도 이 작품은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1920년대 중반에도 오스트리아 빈에서 결성된 행동주의 화가들이 격렬한 작품과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벽에 걸린 천에 붉은 물감을 찍어 바르는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 1938~)의 퍼포먼스와 작품 〈4, 행위〉(4, action, 1963)는 그야말로 살육과 도살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것이었다. 허스트의 작품은 이 모든 도살 행위를 영구적으로 보관이라도 하듯이 박제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허스트, 〈천 년〉 A thousand years, 1990〈천 년〉은 아름답다기보다 역겹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작품에 다시 눈길을 준다. 인간의 깊숙한 곳에는 현실에서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역설적인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 라캉은 이러한 본능을 이성과 자아가 통제한다는 생각을 허물어뜨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허스트의 이 아름답지 못한 작품이 예술로 간주되어야 하느냐 하는 케케묵은 질문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역겨움을 느끼든 혹은 충격을 느끼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이 해괴한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또 그 작품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장면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정신이상자나 이상한 취향의 소유자는 아니다.
멜로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허스트의 이 끔찍한 작품은 인간 내부에 있는 본성을 자극한다. 다만 그것이 평소에 외면하고 싶은 모습일 뿐이다. 자신이 배설한 변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깊숙한 곳에는 현실에서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역설적인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 이성과 자아의 통제능력이라는 생각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 아름다움이나 절제력, 통제된 자아와 이성적 사고와 같은 것은 인간이 갖추고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덕목으로 간주된다. 라캉은 이러한 이상적인 덕목이 오히려 인간의 본연적 삶을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머리나 소의 대가리는 다른 신체기관과 분리된다면 역겨운 고기덩어리에 불과하며, 이는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진실(the real, 실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역겨운 진실을 보고자 하는 다소 거북한 충동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라캉은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들과 다른 방향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프로이트 순혈주의자임을 자처하였다. 그는 통제력이 강한 자아의 힘에 바탕을 둔 이성적 주체가 아닌 근본적으로 충동적인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썩은 소의 머리에 눈길이 가는 이유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