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찰스 스튜어트(James Charles Stuart) 는 1566년 6월 19일 스코틀랜드의 에딘버그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단리 경卿은 어린 제임스가 한 살도 채 되기 전인 1567년 초에 살해당했다. 그의 어머니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얼마 안 있어 그 살인사건에 연관이 있다는 혐의로 스코틀랜드의 왕좌에서 퇴위를 강요받는다. 어린 제임스는 13개월의 나이에 제임스 6세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제임스의 어머니인 메리는 그녀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투옥당하고 19년 뒤인 1587년 2월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려한 로마 카톨릭의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그 당시의 많은 군주들처럼, 제임스 왕은 아버지나 어머니에 의해 양육 받지 않았다. (비록 그가 어머니와 지속적인 편지왕래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한 번도 그를 자신의 종교로 개종시키려 한 적이 없었다고 왕은 말했다.) 그는 4명의 개인교사를 두었는데 그 중 가장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지 뷰캐넌 (George Buchanan)이었을 것이다. 그는 확고한 칼빈주의자였다. 제임스 왕이 이제껏 왕좌에 앉았던 어느 왕보다도 가장 학식 있고 지적으로 호기심이 왕성하게 된 것은 뷰캐넌의 엄한 교수방식 때문이었다. 뷰캐넌이 그 어린 왕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64세 일 때였다.
아침 식사 전 그는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 후 라틴어와 역사, 작문, 산수, 지구 우주학, 지방어(dialectics), 수사학과 물론 신학도 공부했다. 제임스왕은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그리고 스코틀랜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이탈리어와 스페인어도 수학했다. 왕은 자신이 그의 모국어인 스코틀랜드어를 말하기 전에 이미 라틴어를 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언어능력 덕분에 제임스왕은 다른 나라의 수반들과 국사를 행할 때 통역관이 필요 없었다.
조지 뷰캐넌의 엄격한 지적 식단을 그 어린 소년은 잘 받아들였고 강력한 지력을 지닌 강력한 왕으로 자라게 되었다. 캠브리지 대학은 제임스 왕의 저작들을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영국의 저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616년 그의 저술집에 보면 제임스왕은 그가 12살 때 그의 본토인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1589년 그는 덴마크의 앤 공주를 그의 왕비로 맞아들인다. 제임스왕은 그의 아내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시들을 썼다. 그들은 9명의 자녀들을 낳는다. 한 번은 왕과 왕비가 사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앤 왕비가 실수로 왕이 아끼던 사냥개인 Jewell을 죽이게 된다. 왕비는 이일에 대해 매우 속상해 한다 그러자 제임스왕은 왕비가 그 일을 맘에 담아두지 않도록 그녀에게 선물을 사준다.
제임스왕은 왕권신수설(the Divine Right of Kings)과 하나님의 법과 공공의 선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군주의 의무라고 믿었다. 제임스왕의 왕권신수설에 대한 옹호가 지금에서는 종종 경멸당하지만 그의 저술들을 조사해보면 그의 왕권신수설에 대한 옹호는 왕국들에 대한 교황의 간섭과 로마 카톨릭에 대한 거부와 왕들의 살해에 대한 명백하고도 강력한 항거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