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
나는 체질적으로 눈물을 짜게 하는 최루영화에 불편한 심기를 지닌 사람이다. 더구나 내 개인적 영화감상으로 말할 때,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갖는 속성에는 가히 역겨움(감상적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죄송^^*)까지 느낀다. 그러나 마눌님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2주 전, 끌려가는(잠자면 되지 하면서) 심정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공지영의 원작을 내가 좋아하는 감독중 하나인 인간의 해석에 능한 송태성 감독 작품이라지만 문학적인 경향으로서의 공지영에 대해 비호감의 정서가 있는 터라(고백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도 공지영에 대한 나의 정서와 사실 비슷했었다. 각종 언론 매체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장시간 이름을 올리는 소위 베스트셀러에 대한 기피증 같은 것이었다고,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굳셀러는 아니라는 일종의 반사회적(?) 나의 성향에 기인했지만, 이는 하루키에 대해서는 그를 본격적으로 만나고 이내 자신의 편견임을 인식하고 거두었지만, 공지영은 딱히 그를 기피하는 원인으로 어딘지 이문열식의 냄새가 난다는 터무니없는 인식이 강해 쉬 거두어지지를 않았다) 내키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런 나와 같은 성향을 나는 소위 문학을 전공한다는 친구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은 우익의 냄새가 나는 이문열이나 이인화, 김진명같은 작가들에 대해서 아예 논외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가 흐르자 주위에서는 쿨럭쿨럭하는 눈물참는 소리가 들렸고, 돌아보니 나의 마눌님도 아예 퍼질러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이미지는 사형 제도를 다루었던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와 거기에 출연했던 숀펜(이 영화 이후 마돈나의 남편이라는 유명세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한 개성파 배우인 그에게 행운이 있기를..)과 수전 서덜랜드를 떠올려 보았다. 거기에 존재했던 많은 인간의 다양한 시선이 이 <우행시>에서는 결여되어 있었고 그래서 감상적으로 작위된 상황이 주는 눈물은 그리 오래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우행시>는 사형제도라는 무거운 주제를 상처 입은 남녀 간의 가슴 아픈 사랑으로만 이야기되어지기에 그리고 거기에는 감정적으로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만을 골라서 설정했기에 그 나머지 많은 경우에 있어 담론지어질 수 있는 것들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허구의 장르이긴 하지만 영화의 힘은 수많은 연결 가능성의 한 이야기의 서사가 얼마나 설득력있고 한쪽으로 도착되어지지 않느냐에 있는데 <우리들의 아름다운 행복한 시간>은 이야기의 방향을 한쪽으로만 몰리도록 인물들의 상황 설정을 해버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상황에 동정하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 상황에 대한 개선과 모색을 위한 노력을 잊어버리게 되고 종국에는 연인을 잃은 슬픈 베르테르의 눈물만 열심히 핥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것이 소설이나 영화의 한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일종의 구원가능성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상처입고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의 그들만의 구원과 위로 그들만의 집단은 아름다고 놀랍도록 그 가슴시린 슬픔에 동참하고 싶지만 그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위무하는 것은 밤하늘에 별똥별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 처럼 그 잡히지 않는 거리로 인해 가슴 아프다.
불행하기 짝이 없는 가정환경과 살인 혐의를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약간은 반항적이고 시니컬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냈던 강동원과 성폭행을 당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에 큰 상처를 입어서 모든 일에 의욕이 없고 부정적이며 가정에서 돌출된 행동을 하는 이나영의 상황은 지극히 희,비극적이다. 그들의 만남은 정말로 눈물겹게 아름답지만 그들의 헤어짐은 정말 눈물겹게 무기력한 비극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가까워지는 것이 그들의 서로 공유할 수 있었던 상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매개해 주는 따뜻한 마음 좋은 교도관 아저씨로 인해 더욱 더 그들의 사랑은 그들만의 리그로 되어 간다. 그리고 그들의 이별도 결국은 사형제도가 가져다주는 많은 폐해에 대한 진정한 성찰로 끝나지 않고 두 연인을 갈라놓는 다른 많은 원인들(질병과 교통사고 등등)이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으로 대치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이게 공감을 주고 눈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사형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대한 타인의 시선과 결부되어서는 어떤 진지한 성찰이나 사회적 문제제기도 없다는 점은 송태성감독의 작가 정신과 작품에 대한 도전정신의 회피라고 결론내려 버렸다.
그래서 영화는 가슴을 울리긴 하지만 왠지 지상으로부터 유리된 듯한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보는데 그쳐버렸던 것이다. 항상 자신을 바라보는 엄밀한 잣대가 있어서 자신을 가끔 냉정한 시선으로 뜨거운 감정의 질주를 자기 연민적인 비극에 빠지지 않게 제어해야 하는데 영화는 급작스런 화해와 급작스런 이별과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많은 감성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난 한동안 로미오의 상실을 바라보는 줄리엣의 심정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항상 모든 영화가 계몽적이거나 문제 제기 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끓어오르는 환열로 인해서 의식이 흐려지고 자기도취적인 환상에서 현대판 나르시스의 현현이 되어서는 조금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곳에서의 그것의 도래야말로 지금 당장 바라는 바이고 누구나가 마음 깊은 곳에 그러길 바라는 바이지만, 사형제도 같은 민감하고 무거운 사항이 자기연민적인 비극과 그들만의 아픔에 대해서 아무런 도덕적 비판이 제멸된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 것은 약간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 대하여 심정적으로 백프로 공감은 할 수 있었지만 이백프로 공감은 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내가 시네마 키드시절에는 그런 최루적인 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비련의 주인공이 생을 마감하고 죽음 뒤에 홀로 누군가가 남겨지거나 아름다운 주인공이 무자비하게 버려지고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볼 때 그것에 매우 가슴 아파하고 슬퍼했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니나>라는 영화를 보았다. 브릿지 폰다 주연의 오래전 영화인데 십 오년 전 그 영화를 보았을 때 여주인공의 쓸쓸하고 가혹한 운명과 그를 사랑하지만 놓아줄 수밖에 없는 정보원의 처지에 쓸쓸한 저릿함을 느꼈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나서 다시 보게 된 이 영화는 더 이상 내게 별다른 호소를 하지 못한 그렇고 그런 킬러 영화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마지막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된 브릿지 폰다의 브로마이드가 기묘하게 어색했던 느낌이었다.
십년 전에 <천일간의 앤>이라고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볼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 거의 창백에 가까운 화이트를 자랑하던 앤볼린 역의 여배우의 얼굴만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녀는 영국국교회를 창립하고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으로 캐서린과 이혼을 하면서까지 그녀와 결혼을 했던 헨리 8세는 결국은 왕위 계승권 문제로 인해 그녀를 단두대에 올린다. 검은 옷을 입고 망나니의 칼에 의해 앤 볼린의 목이 떨어지고 영화는 그녀의 피를 클로즈업하면서 끝난다. 그때 그 영화의 쓸쓸한 막막한 저릿함이란....
그리고 시네마 키드시절 눈물짜며 보았던 최루적인 영화는 다시 볼 기회가 있더라도 보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런 영화가 싫어졌다기 보다는 이제는 그런 영화가 또는 그런 이야기가 주는 한계가 저릿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제기했던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이상적인 남성과의 불륜이나 연애가 될 수는 없듯이....-
내게 있어서 삶은 새벽 4시에 술을 먹다가 서로 싸우다가 몇 군데 찢어져서 오는 환자를 보는 당직의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다가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입가의 흘러내린 침을 닦아내고 전화를 받고 슬리퍼를 끌면서 라텍스 장갑을 끼고 상처를 소독하고 술 취한 사람의 횡설수설을 들으면서 상처를 봉합한다. 물론 삶이 그렇게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진 않지만 대부분이 일정한 톤의 목소리와 일정한 태도를 견지해야 되는 상황이 분명하고 그러기에 거기에는 아릿한 동경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상처를 벌리고 자신의 것을 보아달라고 소리 지르고 한없이 같은 주제에 천착해서 그것을 확장하고 삶을 방기하는 일은 왠지 내겐 사치처럼 느껴지고 실제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여과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을 만큼 삶은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자문해 보기도 한다.
그래도 가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같은 영화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내 유년의 기억들을 그리워하듯이....
첫댓글 내가 이 <우행시>에서 시비를 걸고자하는 것은 '사형제도'라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발적으로(아무리 우발적이라도 살인이란 결코 있어서는 않되겠지만..) 발생하는 충동적 살인(미셀 푸코가 적시하였듯이 광인이 선천적으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회와 환경에 의해서도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으며, 우리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 광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재판부의 판시에 의해 그의 운명을 결정 당한다는 인권으로서의 사형수를 말함이다. 이러한 사회적 담론은 어리론가 실종되어 버리고ㅡ 이 영화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내 운명적이고도 감상적인 사랑영화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주제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감독의 독특한 시선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관객들은 주인공들의 처지와 깊어지는 사랑에 십분 공감하여 영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엔딩 자막이 흐르고 영화관을 나올 즈음에는 '사형제도'라는 거대 담론은 실종되고 "아, 가슴아픈 사랑이여"라는 사랑타령만이 가슴에 남게 된다는 점이다. 아, 물론, 이런 문제제기는 이 영화에 대한 나만의 주관적인 감상이라고 첨언하여야 겠다.
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후기에도 그런 부분을 적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소설과는 다른 영화가 되었다는 표현을 했구요. 그러나 일단 소설로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사형제도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점이 제일 아쉬었습니다. 몇 몇 평론가들도 그런 부분을 지적하더군요. 대신 서로간의 '화해와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화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