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섬으로 이 섬의 곡물 생산만으로도 완도군 전체가 자급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농경지가 발달된 섬이다. 섬의 서쪽은 246m의 지남선, 북쪽에는 215m의 봉황산, 남족에는 70m의 망덕산이 있기에 방어에 유리하며 주위에 다른 높은 산이 없어서 주변을 살피기에 좋다. 기후도 온난한 편으로 살기에도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순신이 고금도를 선택한 이유는 이러한 지형적 여건 외에도 고니시 유키나카가 주둔한 순천에 가까워서 적의 준동을 막을 수 있으며, 섬의 크기가 수군이 주둔하기에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금도 주변의 흥양과 광양은 예전부터 둔전을 경영하던 곳이기에 식량을 확보하기에도 유리했다.
고금도로 이동한 후에도 수군 정비는 계속됐다. 특히 명나라 수군이 합류할 것이 예정되면서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의 군량까지도 확보해야 했는데, 이순신은 예전처럼 둔전을 경영하고, 염전을 통하여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여 이를 확보하였다. 고금도로 모여든 백성들도 많았기에 인력 확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또한 해로통행첩 역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제 역할을 수행한 걸로 보인다.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어떻게 수군을 증강하였는지는 <난중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었을 것이나, 1598년 1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일기가 전하지 않기에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다만 이시기 수군 규모에 대한 기록은 <징비록>에서는 8천명이라 하고, 1598년 4월 선조가 명나라 장수 마귀에게 하는 말에는 2천명이라 하는데, 차이가 너무 크다. 선조의 말은 명량대첩 직후의 보고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재건된 수군의 규모가 <행록>에는 한산도 시절의 10배에 이른다고 기록된다. 10배라는 것은 과장될 수도 있지만, 칠천량해전으로 어이없이 사라진 조선 수군이 단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재건된 것은 분명 사실이다. 명량대첩 당시 13척에 불과하던 판옥선은 고금도로 진을 이동할 때는 약 40여척, 노량해전 당시에는 80여척 규모인 걸로 추정되니, 칠천량 해전 직전의 숫자에는 못 미치지만 아무 것도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수군을 정비한 것은 분명 뛰어난 업적이다. 전쟁은 물론 행정에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리더라야 가능한 일이다.그 모든게 가능했던이가 바로 이순신이다.
특히 이순신이 노량해전에 전사하여 남해군 관음포에 묻혔는데 다시이장해 이순신의 본영이 있었던 고금도에 묻힌 것은 그만큼 고금도가 각별했을 것이다
그후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이장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순신은 완도지역이 각별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본영이 있었던 충무사가 있지만 다른곳에 비해 어찌된건지 다른지역에 비해 유명세도 덜하고 허술하게 관리된다
고금도는 고인돌과 패총으 유적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이도로 불리던 고금도는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 본영이 자리함으로써 역사에 등장한다
若無湖南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다 )
이충무공이 호남수군과 호남의병의 헌신으로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음을 기리어 한말이다그 호남에서도
정유재란시 남해의 재해권의 본산이고 노량해전에 대비하여 전력을 충전하였던 고금도 일것 이다
묘당도 충무사는 이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묘당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길목(목진지)으로
좌로는 마량 우로는 약산도의 좁은 수로가 있는 지역으로
완도 강진 해남 진도지역을 방호하기 위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월송대는 충무사 맞은편의 조그마한 섬인데
지금은 연결된 야트막한 언덕이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충무공의 유해가 잠시 남해군 관음포에 안치되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80일 간을 모셨던 곳이다.
기이한 것은 이 무덤엔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풀 한포기 돋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장군이 '죽어서도 바다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풀숲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원치 않아 풀 한포기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충무사는 사적 114호로, 명나라 진린장군이 관운장을 제향하기 위해서 지었다
1791년 정조에 의해 탄보묘란 사액을 받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953년 재건하여 충무사라 하고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무사 입구의 덕동리 포구는 수군이 주둔하였던 포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