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마지막 상봉장면에 흘러나오는 존레논의 "imagine"은 지금
들어도 콧등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명곡이다.
담백한 피아노 반주에 낮으면서 몽상적인 음색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존 레논의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의 양민학살을 영화한 <킬링필드>의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관객들에게 진정한 인류애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바로 1971년 발표된(이매진)이다.
존레논 -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상상해보세요 천국이 따로 없는 세상을
당신이 노력한다면 그건 쉬운 일입니다
그러면 지옥도 없을 것이고
우리 위에는 오직 하늘만 있을 뿐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국경이 없는 세상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굴 죽이거나 죽을 이유도 없겠지요
종교도 없어지겠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없다면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될텐데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그대는 나를 몽상가라 부를지 모르지만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겁니다.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다. 높은 음악적 완성도에 ‘사랑과 평화’라는 존 레논의 사상이 잘 표현된
불후의 명곡이다. 존 레논은 한참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1966년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우리는 전쟁을 혐오한다. 결코 동조할 수 없다"는 기자회견으로 첫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다.
비틀즈 해체의 기미가 보이던 196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평화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1980년 12월 8일 한 열성 팬의 흉탄에 쓰러지기까지 존 레논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고 실천한다
1969년 영국이 비아프라와 나이지리아 내전에 참전하자 국가최고훈장(MBE)을 반납하는 한편,
부인 오노 요코와 ‘Bed in’이라는 행위예술과 ‘War is Over’라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 때 만든 노래
(평화에게 기회를)는 1969년 12월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의 베트남전쟁 반대시위에서 25만 명의 군중들이 합창함으로써, 세계적인 ‘운동가요’로 떠올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까지 애창된 노래다.
1972년에는 북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군이 주민을 학살한 이른바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하자
라는 노래를 만들어 노래와 공연의 수익금을 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부하기도 하고, 43명의 재소자가 사망한 아티카교도소사건을 다룬 노래와 흑인여성운동가 안젤라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탄압을 비판한 노래 등을 만들어 인권탄압에 항의한다.
안젤라를 탄압한 인물은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존 레논은 전위예술가이며 열렬한 여성해방론자인 아내 오노 요코의 영향으로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여성해방운동을 다룬 <여성은 이 세상의 검둥이>를 만들었다. 오노 요코가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즐겨 부른 <자매들이여, 자매들이여>(Sisters, Oh Sisters!)와 <여인>(Woman) 등은 대표적 페미니즘 노래이다. 존 레논은 노래로서만이 아니라, 1975년 오노와의 재결합 이후 은퇴선언을 하고 아예 집에 들어앉아 전업주부로서 아들 숀의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는 등 행동으로 페니미즘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존 레논의 음악과 활동 때문에 존 레논은 죽을 때까지 미국 정부의 감시, 도청, 협박 등 집요한 탄압을 받는다.
1972년 비자 연장 신청이 기각 당하는 과정에서 극우보수정치인인 공화당 스트롬 더몬드 의원이 법무장관에게 보내는 비밀 문서가 ≪롤링스톤≫지에 폭로되었는데, 그 내용은 “평화운동단체와 존 레논이 계획한 대규모 록공연은 존 레논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하여 공화당 전당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며, 닉슨의 재선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비자가 만기되면 존 레논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의 죽음을 정치적 암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검찰과 살해범 채프먼이 주장하는 “유명해지기 위해 존 레논을 사살했다”는 석연치 않은 범행동기에 대해 ≪데일리메일≫지의 기자 펜튼 브레슬러는 8년 동안 존 레논의 죽음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CIA와 FBI의 공모로 채프먼을 마인드컨트롤로 훈련시켜 존 레논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존 레논은 지난 세기 인류의 평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대중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줄거리
{캄보디아, 많은 서구인들에겐 그것은 낙원이요, 또는 하나의 숨겨진 세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웃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이 이곳으로까지 번졌고,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는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1973년, 난 이 보수적인 싸움을 취재하기 위해 뉴욕 타임즈 특파원으로 이곳 캄보디아에 왔다. 그땐 이미 정부군과 공산 크메루즈 반군간의 치열한 격전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난 내 인생을 바꿔놓은 한 인물, 통역관 디스 프란을 만났다. 프란 덕분에 난 사랑과 동정심을 배웠다.}
1973년 8월 7일, 캄보디아(Cambodia). 캄보디아 주재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 쉔버그(Sydney Schanberg: 샘 워터스톤 분)는 1972년 캄보디아 사태에서 크메르군을 섬멸하기 위해 미국 공군이 니크루움에 잘못 폭격하여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크메르 루즈 정권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인 1973년 8월 현지 취재차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알려질까 봐 보도진을 따돌리려 하고 시드니는 뉴욕 타임스지 현지 채용 기자인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Dith Pran: 행 S. 노어 분)과 함께 어렵게 현지에 가서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나 상황은 시시각각 캄보디아 정부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시드니와 프란 일행은 미국 대사관의 도움을 얻어 가족을 탈출시키고 자신들은 남아서 마지막까지 취재를 한다. 그러다 크메르 루즈군에게 붙잡혀 처형되기 직전 프란의 간곡한 설득과 도움 덕분에 시드니와 다른 서구 기자들은 무사히 풀려난다. 결국 수도 프놈펜이 크메르 루즈군에게 함락되고 궁지에 몰린 시드니와 프란 일행은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나 프랑스 대사관 측은 프란이 캄보디아인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한다. 대사관 밖으로 쫓겨난 프란은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크메르루즈군에게 붙잡혀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죽지 못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
[스포일러]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간 시드니는 먼저 도착한 프란의 가족을 보살피는 한편 프란의 소재 파악 및 구출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허사다. 그 동안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온갖 고초를 겪던 프란은 그곳 수용소에 있는 지식인 출신 크메르 루즈군 장교 파트의 아들을 돌봐주는 일을 맡아 하다가 그 체제에 회의를 느낀 파트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수용소를 탈출하여 킬링 필즈, 즉 '죽음의 들판'을 지나 제3국인 타이의 난민촌에 도착한다. 1979년 10월 9일 마침내 디스프란과 시드니의 극적인 재회가 이뤄지고 바로 이때 평화를 갈구하는 존 레논의 "Imagie"이 은은히 흐른다.
{디스 프란과 시드니 쉔버그는 미국으로 가서 그리운 가족들을 만났다. 그리고 현재는 쉔버그가 칼럼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뉴욕 타임즈지에서 사진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학살(Cambodia's Torment)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태국 국경 근처 난민 수용소들은 킬링필드의 어린이들로 넘치고 있다.}

















영화해설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타임즈'지의 특파원 기자 시드니 쉴버그(Sydney Schanberg)와 공산화된 캄보디아에 홀로 남겨진 친구 디스 프란(Dith Pran)과의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국 감독 롤랑 조페의 역작. 1980년 1월 20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려 퓰리쳐상을 수상한 쉔버그 기자의 글 '디스프란의 생과 사 - 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그는 제도나 사상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제도의 야수성을 고발하고 폭로해 전세계의 자유인들에게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참히 보복되는 살육의 현장, 색출과 도피, 굶주림과 질병의 공포 속에 지옥같은 붉은 노역을 탈출, 끈질긴 생존 욕구와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이 펼쳐지며, 특히 존 레논의 "Imagine"이 흐르는 라스트는 쉽게 잊지 못할 감동의 긴 여운을 준다. 84년 아카데미 촬영, 편집, 남우조연상 등 3개 부문 수상.
킬링필드(Killing Field)란 '죽음의 들'이란 뜻의 캄보디아 쿠메르루즈 정권 때의 악명높은 대학살로 생긴 집단 무덤을 가르킨다. 곡괭이와 대나무 창, 그리고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켜 살해하는 방법 등으로 3년간 800만의 인구 중 약 200만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대학살 바로 그것이다.
제57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이 영화의 주연 배우 헹 S. 응고르(Dr. Haing S Ngor)는 직업 배우가 아닌 의사였다. 그는 실제로 부모와 약혼자, 8남매 중 다섯 형제를 모두 공산 크메르 루즈(Khmer Rouge)군에게 남기고 80년 9월 홀몸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외과의로 살고 있다. 친구의 결혼식 파티에 갔다가 우연히 로랑 조페 감독의 눈에 띄어 이 영화의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그는 쿠메르즈군의 살육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명연기로 아카데미상이라는 큰 영광을 차지하는 순간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간 손을 치겨들면서 이렇게 수상 소감을 말했다. "내 조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또 영화에서 묘사된 공산군의 잔혹상과 진실은 실제의 것보다는 덜 잔혹하고 덜 진실된 것이라면서 나의 연인은 끝내 굶어죽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슬픈 과거를 회상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하였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그가 이 영화에서 주연을 했음에도 조연상을 수여하여 인종차별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 해 여름 국내 개봉되었을 때 영화 홍보차 방한했던 그는 국내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기 수업을 전혀 받은 적이 없지만 공산 치하 4년의 쓰라린 체험이 연기 이상의 실습이 된 것 같다. 아카데미상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가족과 참상을 당한 400만 동포에게 주어진 진혼의 트로피이자 공산주의와 싸우는 모든 자유민들의 영광이다". 그는 이후 몇편의 월남전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안타깝게도 96년 2월 25일 LA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크메루 루즈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쿠메르루즈군은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자마자 즉시 남녀노조 할 것없이 도시 주민들을 모두 시골로 추방했다. 캄보디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때는, 우선 가족 제도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남편과 아내를 따로따로 떼어 각기 다른 수용소로 보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공산당 교관한테 사상 교육을 받기 위해 많은 시간을 받쳤다. 또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14살만 되면 군에 징집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공동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무도 당의 사전 승락없이는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었다. 남녀간의 속삭임이나 연애, 간통 행위는 들키기만 하면 모두 처형되었다. 캄보디아는 거대한 강제 수용소로 바뀌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당이 지급한 검정 셔츠로 똑같은 옷을 입고 집단 농장에서 쉬는 날 하루없이 매일 12시간 또는 14시간에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975년 4월에서 77년 1월 사이에 잇단 기근과 질병, 학살, 처형 등으로 적어도 200만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도 추정에 불과할 뿐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화에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디스 프란이 몰래 소의 생피를 마시던 장면과 수 천개의 해골로 뒤덮힌 끝없는 죽음의 늪지대 장면 등은 가히 소름이 끼친다.
1979년 베트남의 군사적 침략에 의해 크메르루즈 군이 축출되자, 그뒤에 성립된 프놈펜 정권은 크메르루즈 군에 의해 살해당한 시신들을 모아서 캄보디아 곳곳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크메르루즈군의 만행을 널리 알림으로서 프놈펜 정권은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라는 대내외적인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영화 <킬링 필드>에 나오는 해골밭은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6Km 지점에 있는 처형장이었는데, 이곳에 있는 백여 개의 구덩이에서 모두 만여 구의 시체를 발굴했다. 이곳에서 나온 만여 개의 해골로 십층짜리 위령탑을 세운 뒤 관광 코스의 하나로 선전하고 있다.
스팰딩 그레이(Spalding Gray)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겪었던 것을 1인극으로 각본을 썼고 그것은 조나단 드미(Janathan Demme)의 연출로
<킬링 필드의 독백(Swimming To Cambodia)>(87)란 영화로 만들어졌다.
1985년 여름, 국내에선 이 영화를 반공영화로 선정, 대규모 학교 단체 관람을 유도했다. <킬링 필드>는 서울에서만 관객 92만명이나 끌어모아 그해 개봉작 흥행 1위에 올랐다.
첫댓글 이 곡...학교 영어회화 시간에 원어민이 가르쳐 준 곡이었어요 ㅋ 여기서 들으니 더욱 감동적이네요. 감사합니다. *^^*
월남전쟁후 얼마지나 들려온 또다른 전쟁의 소식이 있었어요,,공산당에 대한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은뒤라 그저 피할수없는 공산당과의 투쟁이란 생각을 했었고,,그뒤에 영화가 나왔고 방콕에 홀로 앉아 영화를 보며 울었던 기억,,그리고 몇번인가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세월이 흘러 도올선생이 쓴 책을 통해 그리고 나름의 경험을 토대로 다시 보는 세상을 향해,,당시 흘렸던 눈물의 감동이 무슨의미였는지 되새겨 보게되는 추억의 영화인데 웬지 씁쓸해지네요..
노래는 좋아하지만 가수에겐 관심이 없는편인데 존레논이 맨하탄 센추럴 파크에서 피살되었을때는 맨하탄에 살고 있었죠,,전쟁반대에 앞장서 무슨 운동인지 존레논에 대해 많은 이슈가 들렸던 기억이 있는데 갑자기 팬이라는 사람에게 피살되었다지요..씁쓸한 세상,,
인생이 원래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