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그리스도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행사를 못하므로
율법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말씀할 뿐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마5:18)고 말씀합니다.
다만 그 천지가 바뀐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비밀을 알기 때문에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얻어서
그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여 드디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경지에 이르면
다윗과 같이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항상 빤히 쳐다보고 앙망하게 됩니다(마22:41-46)
베드로는 이와 같은 신앙의 완성도를 파악하고 성령이 임하신 목적을 설명하고(행2:14-36)
바울은 바울대로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성경의 원형교회를 알고 그 교회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고 주의 이름을 간절히 호소하여
전천후의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한국교회라는 편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경의 원형교회에서 한참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Q. 율법이 있으므로 죄가 드러나니 율법이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 하였으리라”(롬7:7)
A. 잘못하면 그런 논리를 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죄가 있고
죄가 있기 때문에 죄의식이 생기므로 율법을 없애 버리자 할 수가 있겠지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되지 않으니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겠지요.
인간은 거울로 자신의 추한 얼굴을 보고는 추한 얼굴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거울을 던져 버리려고 하는 죄의 본성이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에게 탐심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탐심인 걸 모르고 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까지 갔든지 율법이
우리가 그 요구인 사랑을 완성 될 때까지는 따라와서 내 자신을 지적 해줍니다.
내 자신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율법이 아니면 누가 가르쳐 줍니까?
내 안에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가도 율법에 의해 깨닫고 ‘이건 아니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해‘ 하고 바꿉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하면 탐욕을 의욕으로 미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의욕을 아주 훌륭하게 보는 관점이 그만 우상숭배를 하게 합니다.
특히나 다다익선인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세속화된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 아니라 정욕과 탐심도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에겐 이 같은 법을 금지할 길이 없습니다(갈5:23)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탐심이 죽어 버리면 그만 시체가 되어 버립니다.
힘을 잃어버리고 갈팡질팡합니다. 이 공백 곧 중간 스캔들이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다음에는 바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일곱 귀신이 엄습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니라
내 마음을 끌고 가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늘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 이것도 우상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우상은 하급우상이요.
마음을 이끌고 가는 건 중급우상이며 자신의 자아는 최고의 우상이라고 하잖아요?
고난을 당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욕심은 얼른 놓게 되지만 자아는 참 오래갑니다.
율법이 없으면 이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발견하겠습니까?
율법에 의해 아차! 내가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율법이 있으니 이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X레이 같이 유익합니다.
교회가 잘못하면 의욕을 불태우는 것을 신앙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욕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말씀이 들어가면 멍청해지고 맙니다.
자연을 보세요. 자연 속에는 탐심이 없어요.
자연의 모든 만물은 기본적인 욕구에 따라 움직여요.
동물 세계는 탐심이 없기에 먹고 싶은 만큼만 먹습니다. 배부르면 잡니다.
사자들이 그렇게 으르렁거리지만 헬스클럽이 없잖아요. 사기 사건도 없고 횡령도 없습니다.
코인투자고 없고 보이스피싱도 없으며 교도소도 없습니다. 배만 부르면 오케이입니다.
오직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만이 갖는 탐심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없으면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율법이 유익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7:8)고 하십니다.
죄가 나를 충동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누가 간증을 하는데 어느 부흥회 갔더니 500만원
헌금하면 100배가 되어 5억이 된다고 하던데요 말합니다.
이것은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겁니다. 이런 부추김에 죄가 숨어 있다가
쇼크를 받아 나도 하고 들고 일어나는 겁니다. 술 먹지 말라고 하면 지금까지
잠자코 가만히 있던 사람이 술 먹으러 갑니다. 할아버지가 밖에 나가시면서
손자들에게 얘들아 저 선반 위에 있는 홍시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 그때부터
홍시를 먹고 싶은 마음에 침을 질질 흘리게 됩니다. 모르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육 같은 것 시키지 말아야죠. 그거 안 시켜도 저절로 압니다.
율법이 인간들 속에 끼어든 것은 완벽한 죄인을 만들려고 한 겁니다.
이걸 봐라 네가 이런 인간 아니냐? 희망 없는 것 아니냐? 바로 율법의 역할입니다.
손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따라 세례(침례)로 항복하라는
뜻일 뿐 탐심을 일으켜 세워서 그 율법 조항을 다 지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Q. 율법을 깨닫기 전과 후의 나의 상태는 어떠한가요?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A. 율법을 모를 때는 내가 살았습니다. 죄의 무서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므로 죄가 내 속에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속에 죄가 죽은 척하다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는 죽어 버리고 죄만 살아납니다.
이 말은 전에 내가 열심을 가지고 하던 일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율법이 가르쳐 준대로 한 것이더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열심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열심이 결국 거듭난 나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욕심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고 드러납니다. 그게 죄인 줄 몰랐는데 이젠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가게 해야 할 그 계명이 내게 사망으로 가게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사망으로 가는 내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들어오면 맨 처음 지각이 생깁니다.
눈빛이 달라져요. 낮과 밤이 달라져요. 그래서 지각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선과 악만 알던 내가 빛과 어둠과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내가 지킨다고 하면 탐심을 일으키고
욕심을 일으켜 결국 내가 사망으로 가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지각입니다.
율법이 선한 것이라고 받았는데 결국 그것이 나를 사망으로
보내는 걸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죄와 계명은 항상 삼각관계입니다.
내가 죄로 가면 계명이 나를 정죄하여 죽입니다.
내가 죄로 갈 때 율법이 달려들어 죄로 여기게 되고,
반대로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달려가면 내 속에서 죄가 충동질해서
나를 또 사망으로 가게 하더라는 겁니다. 반복해서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은 죄로 죽든지 율법으로 죽든지 어차피 죽어요.
육신은 무조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잘 하면 잘하는 대로 원수가 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육신이 죄로 갈 때는 율법이
가입해서 사망 아래 있는 자로 발견되어 내가 죽었구나 하고 만듭니다.
또 율법이 끼어들어 죄는 짓지 말고 율법대로 살아봐야겠다고 하는데 탐심이
나를 부추기고 일으켜 죽자 살자 열심히 일할 때 그만 내가 더 망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켰다고 까부는 부자 청년에게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좇아오라고 하니 그만 근심하며 떠나더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덤비는 꼴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의하여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육신은 죄 중에 있어도 안 되고 그 자리에서 율법을 받아 열심을 내도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율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