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빛 화로-
우리는 사계절의 변화 속에 살면서, 특히 추운 겨울을 지낸다. 최근 냉온방 장치가 된
집들이 많아 더위와 추위를 그런대로 넘기지만 옛날의 여름에는 부채와 나무그늘 아래서, 겨울엔 뜨끈한 온돌로 견뎌 내었다. 그런대 온돌은 불을 때워 돌을 덥혀야 했기에 불을 땔 연료가 필요했는데 주로 연탄과 장작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이 태워지면서 불을 벌겋게 지폈고 불길은 화구를 따라 들어 가 온돌을 대폈지만 문풍지로 들어오는 차가운 외풍은 녹여주지 못했다.
방바닥은 뜨거웠지만 방안에 냉기가 심해 방안에 훈기를 일구어야 했고 화로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 내었다.
내 어릴 적 추운 겨울,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큰 방에는 항상 불씨가 담긴 5각형 모양의 쇠화로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담긴 불씨로 할아버지는 긴 담뱃대에 불을 부쳐 담배를 뻐끔뻐끔 피시면서 화로재를 잘 다독거리셨고 혹 화로전에 재라도 묻으면 잘 닦고 문지르며 관리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런 보살핌은 화로가 불을 간직하고 화롯불이 방을 데우기도 했지만, 생명력의 근원이자 복을 일구는 상징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은 이처럼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지만 잘못 다루면 재앙이 온다는 두려움도 가져 온다는 양면성 때문에 조상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을 다스리기 어렵다 생각해서 신앙화하는 데까지 발전시켜 집안의 수호신이 되었다.
집안의 수호신인 불씨를 잘 지키려면
화로 속에 담긴 불씨를 오래 살려야 했고, 그러려면 적당한 공기가 필요했다. 숯불만 믾으면 그 사이로 공기가 많이 들어 가 불씨가 단명하고 재가 많으면 불기운이 약해지므로 재와 숯불을 적절히 혼합시키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 방법으로 먼저 솔잎과 볏짚을 태운 재를 화로 밑바닥에 깐 후 그 위에다 잔불 덩어리를 담고 그 위에 다시 재를 붕긋하게 감싸서 불씨를 덮어 보관하면 되었다. 그러니 화로는 불씨를 담는 그릇이자 불씨에서 불을, 다시 불에서 불씨를 모으는 순환체계의 중심이었다.
우리의 기억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골동품 취급 가게에서나 볼 수있는 화로이지만 불씨를 이어가는 저장고와 집안 문화창조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방마다 훈훈한 이야기와 인정의 샘물을 길러 올렸던 원천이었다. 기나 긴 겨울 밤, 화로에서 익어가는 고구마와 가래떡과 함께 연줄처럼 풀려 나오던 할머니의 옛이야기, 화로 위에 다리쇠를 걸쳐 놓고 끓이는 된장국 뚝배기 냄새, 화롯 불로 담뱃불을 붙여 피우시던 할아버지 모습, 화롯불이 사위어갈 때 인두를 달구어 섶을 다리고 도련을 후려 꺾던 어머니의 고운 솜씨에 추운 겨울 밤은 깊어 갔고 추위는 녹아 들었었다.
그렇게 겨울밤은 화로 속에서 익어 갔다.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아픔들과 미움을 모두 쓸어 담아 태울 화로와 같은 그릇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가? 유독 오늘처럼 찬 공기가 매서운 겨울 밤, 호박빛 따사로움이 담겼던 화로가 유달리 생각나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