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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허박사의 사주,풍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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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게시판 스크랩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眞虛 추천 0 조회 12 13.11.22 12: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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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양반도 맥 못 추는 ‘개평마을’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1>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

 

 

한국의 내로라는 양반들도 맥을 못 춘다는 경남 함양군의 ‘개평마을‘ 전경. 이종호 제공

 

 

남사마을에서 나와 한국의 내로라하는 양반들도 맥을 못 춘다는 경상도의 양반마을 ‘개평마을’로 향한다. 개평마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옥계(玉溪) 노진(盧?, 1518∼1578)을 배출한 곳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양반 씨족마을이다.

씨족마을이 조성되는 근본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데 있다. 인간은 자신만의 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사회적인 틀에 맞춰 살아간다. 사회 생활을 하기 가장 쉬운 접근법은 조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씨족마을은 그런 조직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문중의 씨족 구성원으로 동참하는 제도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가족과 친족 제도로 반영되는 문중의 범위와 성격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문중 중심의 친족 제도는 조선 후기에 생겨나

고려 시대는 불교의례와 비종법적인 친족체제가 기본이었는데, 조선 전기에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점차 성리학적인 예제(禮制)로 개혁되는 과도기로 들어간다. 17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가족과 친족 의식이 전면적으로 변화된다. 내외친이 망라되는 양계친족에서 적장자 중심의 부계친족으로 개편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기본적으로 제사와 재산 상속에서 장자를 우대하고, 족보에서 친족을 수록하는 범위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또 입양 제도가 까다로워졌고 동족 마을의 형성도 활발해졌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18세기 중엽 이후 향촌 단위의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족계나 문중 조직이 발달하고 ‘문중서원’이나 ‘체계적인 동족마을 형성’이라는 조선 후기의 특징도 전면으로 부각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성리학적 예제의 보급과 정착’으로 설명한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예제가 정착된 이유로 꼽히는 배경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같은 대격변이다. 이런 큰일을 겪어 보면서 족계나 문중 같은 조직을 더 강화시킬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소위 ‘피는 물보다 짙다’라는 말이 적용된 셈이다.

●외세 침략 겪으며 ‘혈연’ ‘지연’ 강조… 장자상속 문제점 생겨

실제로 격변을 겪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라는 게 선조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치료되자 마을을 지배하던 사족(문벌이 좋은 집안)들은 혈연적인 족계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문중의 결속력을 확보하거나 지연과 혈연(동성)으로 엮인 촌락을 중심으로 자기방어를 모색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마을에 양반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자신들의 씨족을 공고하게 만들어 줄 하층민 즉, 평민과의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 상하가 참여하는 동계(洞契)를 만들어 결속을 다지는 묘수도 발휘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가장 큰 변화는 장자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차등 상속 때문에 일어난다. 재산을 장자에게 몰아주고 그에게 제사를 전담하게 하는 장자상속은 장자의 경제력뿐 아니라 주도권을 강화시킨다.

장자의 위세가 높을수록 이성 친족이나 방계 친족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마을 조직에서 서서히 이탈한다. 이런 변화는 오히려 동족마을의 위상을 더 크게 만들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서 8km 거리에 있는 지곡면 개평리의 개평한옥마을이다.

 

 

 

600년 넘는 두 개의 ‘집성촌’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2>

 

개평마을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함양읍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이 마을이 있는 함양군은 백두대간의 종착점이며, 영남의 진산인 지리산의 동북쪽에 있고, 서부 경남의 접경지이다.

함양군은 대체적으로 남북이 긴 장방형이고, 사방이 고산령으로 포위돼 있으나 서부가 높아 동남으로 기울어진 지형이다. 함양군은 지리적 경계로 군사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라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주요 분쟁지역이기도 했다.

●대유학자 ‘정여창’ 등 역대 명사가 거쳐가

 

 

조선의 대유학자인 ‘정여창‘의 초상화.

경남 함양군 개평마을은 정여창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위키백과 제공

 

 

개평마을은 함양군내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반촌(班村·조선시대 양반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마을)’인 동시에 역사적인 인물과도 인연이 깊다.

우선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같은 대유학자를 배출한 고장이 바로 함양이며, 신라시대에는 ‘최치원’이 함양 태수를 지냈다. ‘김종직’과 ‘박지원’ 같은 유명한 학자들도 함양 지방관리를 거쳤다. 이처럼 한국 역대 명사들의 발자취가 많다 보니 영남 유림의 본산을 꼽을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지역을 좀더 좁혀보면 개평마을은 도숭산(道崇山)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만나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도숭산 뒤쪽 천황봉(天皇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주맥이 셋인데, 하나는 남쪽으로 뻗어 내려 함양읍의 토대를 마련하고, 또 하나는 북으로 뻗어 안음현의 토대를 마련한다.

마지막 남은 주맥은 앞의 두 줄기의 가운데로 뻗어 내려 도숭산(道崇山)을 거쳐 개평마을의 기(氣)를 형성한다. 이 지형이 ‘介(낄 개)’자 모양이라 지금의 개평을 ‘개화대 마을’ 또는 ‘개우대 마을’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개평마을은 남으로 뻗은 도숭산의 능선이, 동남향의 사선 방향으로 흐르는 앞개울과 뒷개울이 만나는 곳에 부락 입구가 있다.

●하동정씨·풍천노씨 두 가문이 유명

개평마을을 이루는 대표적인 가문은 하동정씨와 풍천노씨다. 이들이 마을에 들어와 번성시킨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원래 경주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14세기에 일두(一?)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鄭之義)가 처갓집인 이곳 함양으로 들어와 근거지를 잡기 시작했다. 곧이어 풍천노씨도 이 마을로 들어왔는데, 풍천노씨 입향조(마을에 들어온 조상)인 노숙동(盧叔仝)이 함양에 자리 잡은 사연은 전설적이다.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앞 종바위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이 마을에 살던 김점(金點)이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길조가 있다는 것을 느낀 김점은 하인을 시켜 주변을 살폈고, 종바위 위에서 자는 노숙동을 찾았다. 김점은 노숙동을 불러와 융숭하게 대접했고 추후에 사위로 삼았다.

노숙동이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 풍천노씨와 하동정씨는 긴밀하게 연계됐다. 노숙동의 장인인 김점이 하동정씨인 정복주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정복주는 정여창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선 대표 유학자를 배출한 놀라운 마을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3>

 

개평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두 학자, 왼쪽부터 정여창과 노진의 흉상. 함양군청 제공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함양에 들어온 지는 오래됐지만, 이 마을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문효공 옥계(玉溪) ‘노진(盧?, 1518∼1578)’이 배출되면서부터다. 두 사람 모두 남명 조식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정여창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이면서 성리학자다. 그는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

물론 그는 사화에 연루돼 유배가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고난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성리학사에서 정여창은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노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년(154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박사·전적·예조 낭관을 거쳐 지례 현감으로 있었는데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의지가 굳은 사나이였다. 수찬·교리·지평·부응교·직제학·형조 참의를 거쳐 도승지·진주 목사·충청도 관찰사·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선조 8년(1575) 예조 판서에 올랐다.
사퇴한 후에도 대사헌·예조 판서·이조 판서 등에 임명됐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효로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남원의 창주서원, 함양의 당주서원에 제향 됐으며 저서로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있다.

●하동정씨VS풍천노씨, 누가 위?

양 가문이 당대를 풍미했으나 당시의 정치판도에서 보이는 성격은 조금 다르다. 하동정씨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일괄적인 흐름을 보이는 반면, 풍천노씨는 ‘남인’의 성격을 주로 가지면서 서인이 상당수 포함됐다.

다시 말해 하동정씨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단단히 만들었고, 풍천노씨는 학문적 실천과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결국 풍천노씨가 하동정씨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의미다. 이런 차이는 양 문중의 중앙 정계 진출은 물론 개평마을에서의 활동 영역에서도 은연 중 엿보인다.

우선 하동정씨 문중이 풍천노씨보다 건축 활동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하동정씨 문중의 대지 규모는 풍천노씨보다 월등히 넓다. 이는 하동정씨가 마을 내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풍천노씨는 이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주도 세력에게 밀린 결과다.

이는 두 문중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하동정씨 문중은 위엄이 있으며, 탄탄한 배경을 바탕으로 ‘종파·종손 중심적’이다. 반면 풍천노씨 문중은 상대적으로 ‘지파·지손중심적’이다. 풍천노씨 씨족들이 개평마을과 떨어진 곳에 많이 분가했다는 이야기다.

●부락제조차 따로 지낸 반상의 서열

개평마을이 남다른 전통마을이라는 것은 신분별·문중별 영역이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반가 주거지는 마을의 길이 방향으로 중앙부분에 기다란 영역을 이루면서 평민 공동영역과 명백하게 구분된다. 이와 동시에 두 문중의 공동장소도 서로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하동정씨 가문의 경우 도곡서원·대종가·만귀정 등이 이 문중 선산인 ‘숭안산’을 향하는 축을 형성하고, 풍천노씨는 대종가·동산정사 등이 주요선산인 ‘주곡선산’을 향해 축을 이룬다.

평민 주거지는 북쪽으로 ‘덕암들’과 마을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마을초입부터 ‘옥계천’을 따르는 주변에 형성됐다. 또 마을초입의 ‘정자나무’와 동제 장소인 ‘신선대’, 마을 중간 부분에 위치한 ‘우물’도 평민용이다. 현재도 이들이 거주했던 집들이 개울 언저리에 허물어진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양반과 평민의 위계는 마을 부락제에서도 나타난다.

개평마을 부락제는 섣달 그믐날부터 마을 주민들이 농악과 풍물을 보이며 가가호호 방문해 쌀을 조금씩 추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정월 보름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선정된 제관 3명이 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나무와 신선대, 종암 우물 주위 등 세 곳에서 동시에 당산제를 올린다. 당산제 3일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궂은 것을 보지 않고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며 마음을 깨끗이 비웠다고 한다.

그런데 당산제에 참가한 사람은 평민뿐이다. 양반들은 마을 내부에 그들만의 공동장소 즉 문중의 ‘대종가’가 있으므로 굳이 부락제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대종가의 사랑대청에 남자들이 모여 공동 관심사를 협의했고, 여성들도 안채에서 상호교류를 했다. 물론 마을에 있는 ‘정사’와 ‘서원’도 양반들의 활동장소였다.

마을에서 함께 살지만 부락제조차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대의 양반과 평민의 위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수만 150명 배출한 ‘학자 마을’ 가봤나요?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4>

 

‘좌 안동 우 함양’이라 부를 정도로 대표적인 선비의 고장인 함양에도 현대화 물결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급격한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로 많은 마을 주민이 타지로 전출해 인구가 감소하고 옛 건물들은 퇴락하고 있다.

그래도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전통 환경을 이 정도로 보존하고 있는 마을은 거의 없다. 아직도 이 마을에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를 포함해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주민 수는 200여 명에 이르며 이 마을에서 배출한 대학 교수만 150명이라고 한다. 600년이나 과거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개평마을에 함께 가보자.
개평마을에 들어서면 좌우에 큰길이 있는데, 우측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중요민속자료 186호인 ‘하동정씨 대종가’가 보인다. 그 아래로 ‘풍천노씨 대종가’와 ‘오담고택’, ‘노참판댁고가’ 등 한옥들이 흙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옥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집들이 밀집돼 있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중요한 현장을 볼 수 있다는 게 이 마을의 장점이다.

●성리학 대가의 흔적을 찾아서

선비와 문인의 고장, 함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일두 정여창이다. ‘일두’란 한 마리의 좀벌레란 뜻이다. 그는 조선조 5현이며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 234개 향교, 9개의 서원에서 모시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다.

 

하동정씨 대종가인 ‘함양정병옥가옥‘의 입구 모습. 이 집은 일두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졌다. 이종호 제공

 

하동정씨 대종가는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뒤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됐다. 이 집은 ‘정여창고택’이나 ‘일두고택’이나 ‘정병옥가옥’ 등으로도 불리며,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정병옥가옥(咸陽鄭炳鎬家屋)’이다.

 

 

정여창 고택에는 솟을대문이 설치돼 가문의 위세를 드러낸다. 이종호 제공

 

 

풍수에서는 대문을 기(氣)의 출입구로 여겼으므로 건물에서 대문의 방위를 대단히 중시했다. 솟을대문 주위의 담장은 대문과 함께 풍수에서 말하는 사신사(四神砂) 역할 즉, 생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림집을 풍수로 풀 때 집의 주된 건물은 혈(穴), 마당은 명당(明堂)이 된다. 솟을대문 앞으로 하마비가 자리해 주인의 명망을 알린다.

솟을대문에는 다섯 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는 ‘충효절의’와 김정희 글씨라는 ‘백세청풍’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걸렸으나 고증은 안 된 상태다.

●동양의 신선사상 담은 정원 ‘석가산’

 

 

일두고택 사랑채의 모습. 이종호 제공

 

 

사랑채는 일두고택의 위세를 한껏 보여주며 이 앞에 조성된 ‘석가산(石假山)’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석가산은 자연석을 이용해 삼봉형의 주산을 높게 만들고 좌우에 주산보다 낮은 높이로 각각의 봉우리를 만든 후, 산봉 아래 깊은 석곡을 만들어 매화 등을 심은 조원이다. 중국 송나라 때 생겼으며, 한국에서는 백제·신라 때에 활발했고, 일본은 백제인에게 기술을 전수 받아 오늘날까지 일본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요소로 삼고 있다.

풍수적인 비보(裨補)로 쌓는 조산(造山)과 달리 석가산은 규모가 훨씬 작고 관념적이다. 그러나 작은 규모에도 산과 바위와 물과 나무가 모두 들어 있어 ‘동양 전통의 신선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내고 있다. 일두고택은 석가산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대체로 한국의 민가는 조원을 후원에 두고 있는데, 이 집의 석가산은 사랑마당 담장 옆에 조성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 덕분에 이 고택에서는 사랑채 누마루에서 석가산을 잘 볼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남서향과 동남향으로 방향을 달리 하는데, 이는 바깥의 풍경을 석가산을 통해 빌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일두고택 사랑채 앞에 있는 ‘석가산‘도 유명한 볼거리다. 석가산은 자역석을 이용한 정원으로 오늘날 일본 정원의 모태가 됐다. 이종호 제공

 

참고로 한옥은 집 안에 큰 나무가 들어서는 것을 꺼렸다. 잘 자라는 나무를 마당에 심으면 뿌리에 돌을 박아 성장을 억제시켰을 정도다. 한국에서 마당은 그저 비워두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기본이었다. 이는 마당이 양기를 받아들이는 장소일 뿐 아니라 곡식을 거둬 보관하는 공간이자 작업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지’에서 마당 역할을 지적한 부분을 보자.

‘ㅁ’자형 집의 안은 안마당인데 마당이 협착한데다 지붕의 그늘이 서로 드리워진 까닭에 곡식이나 과실을 말리는데 모두 불편하다.’

 

 

 

 

8개의 독립공간 있는 대저택의 비밀은?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5>

 

 

일두고택 사랑채 온돌방 바깥벽 위에 써 있는 ‘충효절의‘라는 힘찬 글씨.

이 집의 가풍을 더욱 고조시키는 장면이다. 이종호 제공

 

 

일두고택 안채로 들어가는 공간은 사랑마당에서 중문을 거쳐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작은 문을 만든 이유는 내외 공간을 엄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채 누마루 천장에는 ‘탁청재’, 사랑대청에는 ‘백세청풍’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온돌방 바깥벽 위에는 힘찬 필체로 ‘충효절의’라고 씌어 있어 대문에서 느꼈던 이 집의 가풍을 더욱 고조시킨다.

일두고택은 공간 구성에 있어 독립적이고 위계적인 특성을 가지는 엄격한 질서를 갖고 있다. 그 덕분에 안채와 아래채, 사랑채, 곳간채 등 그 중심영역이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면서도 폐쇄된 ‘ㅁ’자형의 모습을 보인다. 놀랍게도 곳간채는 10칸이나 된다.

이 집에는 총 8개의 독립된 영역이 있다. 사랑마당과 안사랑마당,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의 이동용 공간, 안마당, 안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의 이동 공간, 바깥곳간채와 안곳간채의 작업 공간, 마지막으로 사당 영역이다. 이들 영역은 매우 독립적이며 채 또는 담장으로 분할돼 있다. 건축전문가들은 이 집이 조선 중기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제사 모시는 ‘사당’이 안채 뒤에

 

 

일두고택의 안채와 사당의 모습. 사당이 안채 뒤쪽에 있어 종가에서 지내는 수많은 제사 준비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이종호 제공

 

 

사당의 위치도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안채의 대청마루 뒤로 사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사당이 안채 뒤쪽에 있는 것이 이색적인데, 이는 일두고택이 하동정씨의 대종가이므로 수많은 제사를 원활하게 준비하기 위한 배치로 보인다.

물론 ‘주자가례’에서는 ‘집을 지을 때 다른 것보다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위치는 정침의 동쪽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조선 전체를 통틀어 명가 중의 하나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동정씨 대종가조차 사당을 안채 가까이 지어 효율성을 추구했다. 이런 변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실리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KBS대하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했고, MBC-TV의 ‘다모’에서 어린 채옥의 생가 등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조선 후기 건축과 가구의 전형

 

오담고택 사랑채의 모습. 오담고택은 오담 정환필 선생이 기거하던 집이다. 전면 툇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나머지에는 사각기둥을 썼다. 이종호 제공

 

 

일두고택에서 약간 올라가면 ‘오담고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407호)’이 보인다. 오담 정환필 선생이 기거한 집이다. 이 집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설했다. 정환필은 경로효친 사상을 제일 덕목으로 강조한 유림의 한 명이다. 조선후기 문장력이 특출한 학자로 유명하며, 정여창의 12세 후손이다.

이 집의 공식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 살던 사람 이름이 아니라 정환필의 호를 딴 ‘오담고택’으로 붙여졌다. 이는 현재 일두고택에 사는 정명균 선생이 자신의 선조인 오담을 고집해 승낙 받은 결과다.

오담고택의 사랑채는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은 어칸과 전후퇴칸으로 구성됐다. 후퇴칸은 전퇴칸에 비해 큰 규모로 비대칭의 단면구조를 보인다. 전면 툇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뒀고 나머지는 사각 기둥을 사용했다. 기둥에 약한 민흘림이 있으며 목재는 적송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대문에 들어가면 안채가 사랑채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오담고택 안채의 모습.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주거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이종호 제공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전후 툇집으로 3량가다. 자연석으로 3∼4단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각주이며 약한 민흘림을 뒀다. 부섭지붕이 박공면에 달렸는데 이는 19세기 말 봇물같이 밀려온 새로운 문물을 반영한 것이다.

이 집의 특징은 정지칸과 마루칸, 건넌방칸이 안방 칸에 비해 폭이 넓다는 점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모두 전후 툇간을 적용한 점은 이 시기 주거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커다란 부재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재료를 자연 그대로 사용한 가구도 조선 후기 전형적인 가구기법을 보여준다.

사랑채 앞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장독대가 있는데, 원래 안채 앞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이 집은 특히 사랑채 대청마루에 신주를 설치하는 등 대종가에서 분가한 양반계층의 주거형태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마당 너른 집’이 조선 상류 스타일~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6>

 

 

큰 길에서 약간 떨어진 ‘하동정씨고가‘의 모습. 조선시대에 보편적인 너른 안마당이 인상적이다. 이종호 제공

 

 

경남 문화재자료 361호인 ‘하동정씨고가’는 큰 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이런 곳에 문화재가 있다니 다소 놀랍지만 그런 풍경이 바로 우리 유산이 주는 특별한 맛이다.

이 집은 안채·사랑채·대문채로 구성됐다. 대문채를 지나자 눈앞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우리나라는 앞마당에 아무 치장이 없는 게 기본인데 그 규범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니다.

남도의 특징인 ‘ㅡ’자 개방형인 안채는 상량문 기록으로 볼 때 1644년에 건축됐으며,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퇴를 둔 맞배지붕으로 부섭지붕이 달렸다. 정면 2칸의 대청은 퇴를 합하면 4칸의 규모를 가지며 5량가이며, 후퇴칸에는 뒤주처럼 보이는 수장처(곡식을 저장하는 곳)를 두었다. 건물 배치에서 조선 후기 남부 지방 상류 주거의 전형을 보여준다.

●청백리 ‘노숙동’의 집, 풍천노씨 대종가

 

하동정씨고가를 측면에서 본 모습. 조선후기 남부지방 양식이 잘 드러난다.

 

 

풍천노씨대종가의 안채 모습. 이 마을에 풍천노씨가 자리 잡고 살게 한 조상인 노숙동이 살았던 곳에 지어졌다. 이종호 제공

 

 

개평마을에서 하동정씨의 대종가인 일두고택과 오담고택의 의미를 한껏 맛본 후 이와 경쟁 상대인 풍천노씨대종가(豊川盧氏大宗家, 경남문화재자료 제343호)를 찾아간다.

풍천노씨 대종가는 오담고택에서 좌회전 즉, 개평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입향조인 송재 노숙동(盧叔仝, 1403~1463) 선생이 경남창원에서 처가인 이곳에 이사 오면서 지은 집이다.

노숙동은 호조예서참판 등을 역임했고 ‘고려사’ 저술에도 참여했다. 너무나 청렴하여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세조 때 청백리, 상호군으로 보해졌으며, 1701년 숙종 때 도곡서원에 배향된 선비 중의 선비다.

현재 보이는 건물은 순조 24년(1824)에 건립됐으며 1940년대에 중수한 것이다. 건물 배치는 남부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이다. 각각 독립된 채들로 구성됐지만 사대부집답게 ‘ㅁ’자형으로 배치했다. 곳간은 초가집이었으나 기와집로 변경했다.

 

풍천노씨대종가 사랑채의 모습. 하동정씨에 비해 정계 진출 등이 적어 가문의 힘이 약했던 것이 집의 공간 구성에도 드러난다. 이종호 제공

 

 

안채는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퇴를 둔 5량가다. 기둥은 방주(네모진 기둥)을 사용했고 약한 민흘림이 있다. 대문간채는 양반가다운 솟을대문이며 삼문 형식이다.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1칸에 전퇴를 둔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근래에 신축했는데 기와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했고 큰 제사가 있을 때 남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이 집은 풍천노씨를 대표하는 종가지만 일두고택에 비하면 공간 구성이 약하다. 또 각 영역의 성격이 분명치 않은 것도 이 건물을 지을 당시 하동정씨에 비해 힘이 크게 밀리는 것을 보여준다.

●개평마을 최장수 건물, ‘함양개평리노참판댁고가’

‘함양개평리노참판댁고가(咸陽介坪里盧參判宅古家,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0호)’는 개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안채 앞마당 좌우로 광 1채, 억새로 만든 3칸 집, 대문밖에 하인들이 거처하는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만 남았다.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1칸으로 전퇴를 뒀다. 부식된 기둥뿌리를 교체하지 않고 단지 잘라내기만 해 건물이 앞쪽으로 조금 내려앉았다. 우진각 지붕에 일본식 기와를 사용했다.

작은 규모의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퇴를 뒀고 평면배치는 사랑채와 유사하다. 대청에는 4짝의 여닫이문이 달렸으며 정지간 앞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다. 안채 아랫방 옆을 돌아 뒤뜰로 나가면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퇴가 있는 사당이 나온다. 사당은 단청을 하지 않고, 전면에 퇴를 뒀다. 원형 기둥으로 만들었으며 마루를 두지 않았다.

 

개평마을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추정되는 ‘함양개평리노참판댁고가’의 모습. 이 집에는 명사들이 자주 기거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종호 제공

 

 

이 집은 함양의 대표적인 양반집이라 명사들이 자주 기거했다. 호조참판을 지낸 감모재 노광두(盧光斗, 1771?1859)는 이 집에서 청빈한 삶을 살며, 이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왕에게 조세를 감면해 달라고 상소하기도 했다.

왕은 노광두가 청백리임을 감안해 상소대로 세금을 감면해줬다. 마을 주민은 고마움의 뜻으로 노광두에게 재물을 갖다 줬지만 그가 받지 않자, 풍천노씨 대종가의 사랑채를 지어 줬다. 주민들이 대종가의 사랑채를 지어준 것은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미담으로 꼽힌다.

 

 

 

 

조선 바둑계 전설 ‘노근영’ 태어난 집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7>

 

함양개평리노참판댁고가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조선 말 우리나라 바둑계 일인자였던 사초 노근영(盧近泳, 1875?1944)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노근영은 일제강점기에 프로기사가 없던 조선 바둑계를 한 단계 올려놓은 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수’로 불린다. 그는 일본의 고수 기다니 8단, 혼다슈고 초단 등과 백을 들고 만방으로 이기기도 했다.

노근영은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나갔다가 바둑친구를 만나 약을 손에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갔다고 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조훈현이나 이창호 국수 등이 그를 이었다고 알려진다.

●종암 우물·종바위·개평리소나무 지나면 ‘개평마을 파노라마’ 펼쳐져

 

이 마을은 행주형 입지에서 보기 드물게 우물을 가지고 있다. 왼쪽은 ‘종암우물‘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풍천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이 누워잤다고 하는 ‘종바위‘다. 이종호 제공

 

 

노참판댁 고가 앞의 ‘일두선생 산책로’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개울을 넘으면 좌측으로 노씨의 전설이 담긴 종암(鍾巖) 우물이 있다.

풍수지리로 볼 때 개평마을은 행주형 입지다. 이런 지형은 ‘배에 구멍을 내면 가라앉는다’고 해 우물을 파지 않고 자연암반에서 솟아나오는 다섯 개의 우물만 사용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이 마을에서 우물을 파게 됐고, 이를 알게 된 청하현감을 지낸 ‘정덕재’가 종암(鍾巖)이란 글자를 새겨 어느 누구도 이 우물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종암 우물에 가면 노숙동이 잠을 잤다고 하는 종바위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노숙동이 종바위 위에서 잤다는데, 실제로 그랬다면 허리가 부러지거나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물론 종바위 옆에서 잤다면 문제될 일은 없어 보인다.

종바위에서 일두산책로를 따라 약간 올라가면 수령 약 500년 정도의 커다란 ‘함양개평리소나무’가 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약간 걸으면 사초 노근영의 무덤이 나온다. 여기서는 개평마을의 파노라마와 같은 전경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오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개평마을이 좋은 마을 터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개평마을의 정자, ‘만귀정’과 ‘동남정사’

 

하동정씨의 ‘만귀정‘ 모습. 이 정자는 일두 정여창을 추모해 지었고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액호가 써 있다. 이종호 제공

 

 

먼저 상개평으로 들어가는 마을 윗자락에는 하동정씨의 ‘만귀정’이다. 이 정자는 일두 정여창을 추모해 지었고, 액호는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돼 있다. 서산군수를 지낸 개은 정재기(1811?1879)가 1871년에 건설했는데, 주위 전체가 죽림이다. 방형의 연못 안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유교적 우주관을 나타냈다.

 

 

‘풍호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형 바위. 이종호 제공

 

 

이 정자는 풍호암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진 대형 바위가 있는 옥계천 건녀편 ‘송석정’과 마주보고 있다. 정자 우측 가장자리 한 칸을 마루로 처리하고 중간에 높은 턱을 뒀는데, 이 안에서 밖을 조망하면 투시적인 효과를 얻어 연못 외부 경관과 어울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풍호암이 있는 연못을 ‘옥호담’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개평마을 사람들이 목욕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면 전통마을에 이런 경관도 있다는 데 놀랄 것이다.

풍천노씨 문중의 ‘동남정사’는 노숙동과 노진 선생을 기리기 위해 강학하던 자리에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오돗골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4칸 중에 가장 우측 1칸 방, 마루, 좌측 방 2개로 구성됐는데, 전퇴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어 매우 경쾌한 모습을 보이는 민도리집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한편 이 마을은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된 마을에 걸맞게 효자도 많이 나왔다. 두 문중은 약속이나 한 듯 ‘효자정려비각’을 하나씩 갖고 있다.

 

 

 

지리산 소나무 보며 ‘솔잎주’ 마시는 풍류를…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8>

 

 

경남 기념물로 선정된 ‘함양개평리소나무군락지‘의 모습. 300~400년 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안쪽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또 다른 소나무가 있다. 이종호 제공

 

 

개평마을 입구 좌측에 있는 지곡초등학교까지 길게 뻗은 언덕 앞부분은 끝처리를 두툼하게 조성해 영락없는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멀리서 전체 풍경과 함께 보면 ‘거대한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개평마을을 품고 있는 모양새’다.

지곡초등학교 앞에 있는 ‘함양개평리소나무군락지(咸陽介坪里소나무群落地·경상남도기념물 제254호)’도 빠트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이 기념물은 마을 앞 야산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소나무(적송) 군락이다.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비보림’으로 조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있는 소나무 수령은 300?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큰 나무는 높이 15m, 가슴높이둘레 160?220cm에 이른다. 작은 나무도 높이 10m, 가슴높이둘레 80?150cm 정도이며 나무 각각의 위용이 대단하다. 현재 소나무 100여 주가 있는데 면적은 약 1만㎡다.

이 군락 안에 다시 경남기념물 제211호로 지정된 ‘함양개평리소나무’가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 소나무는 높이 16m, 가슴높이둘레 2.95m로 추정 수령은 약 500년이다. 100여 주의 소나무 중 단연 으뜸이라 천연기념물 군락지로 지정한 데 이어 또 다시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한 것이다.

 

 

함양개평소나무군락지 안에는 마을 주민들이 부락제를 지내던 자리가 있다. 이종호 제공

 

 

함양개평리소나무군락지 머리 부분에 제단이 있는데 이곳은 마을의 평민들이 부락제를 지낸 곳이다. 해방 이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당송 밑에서 마을 제사를 지낸 후 지신밟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개평마을은 500여 년 전통의 가양주(집에서 빚은 술)인 ‘지리산 솔송주’의 특산지로도 유명하다. 이 술은 하동정씨 문중에서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돼 판매 중이다.

●전통마을에 맞는 복원 노력 ‘활발’

전통마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자 전국 각지에서 개발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파괴됐던 전통마을을 살리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개평마을도 참모습을 찾는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진지하다.

우선 마을 외곽도로의 노면과 각 건물들의 진입로로 이용되는 마을 안길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대부분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돼 전통마을 경관을 크게 훼손하고 있으니 이들 도로를 친환경적인 재료로 바꿔야 한다는 주문이다.

새마을운동 등으로 크게 변형된 담도 주목사항이다. 일부 구간의 ‘토석담’과 ‘돌각담’은 대체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북측 외곽도로 쪽에는 ‘블록담’이 많이 보인다. 또 기존의 토석담과 돌각담에 시멘트 몰타르를 바르거나 담 위에 일식 평기와를 덮기도 했다. 마을의 경관을 더 해치는 것은 남측 옥계천을 따라 견치석과 시멘트 몰타르를 사용해 지은 제방이다.

이들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해치는 것들을 제거하고 전통마을다운 원형으로 복원하자는 계획은 모두 예산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마을의 역사적 경관을 정비하고 보전하는 것은 이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도 겪고 있는 당대의 현안이다. 마을 주민들이 여러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조만간 새로운 형태의 전통마을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 최초 인공 숲 어딘지 아시나요?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9-9>

 

 

함양상림의 입구 모습. 1100년 전에 사람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이다. 또 한국 천연기념물 중 유일하게 낙엽활엽수 군락지기도 하다. 이종호 제공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의 ‘함양상림(咸陽上林, 천연기념물 154호)’을 지나치면 개평마을을 다 봤다고 할 수 없다. ‘상림’은 함양 읍내를 가로지르는 둑을 따라 13㏊(헥타르)에 이르는 깊은 숲으로, 120여 종 2만여 그루의 식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 숲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적으로 생긴 원시림이 아니라 1100년 전 사람의 힘으로 만든 대단위의 숲이라는 점이다. 바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인공림’이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장소 중 유일하게 낙엽활엽수 군락지로 알려진 상림은 신라 말 해동공자로 알려진 최치원(崔致遠, 857~?)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양을 흐르는 하천 범람과 수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물길을 돌려 나무를 심은 것이다. 원래는 상림과 하림으로 나눠 조성했는데 현재는 상림만 남아있다.

상림 초입에는 약수터가 있고 ‘함화루(咸化樓)’라는 건축물이 있다. 이 숲의 운치를 더하는 함화루는 원래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望嶽樓)’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다. 남문에서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1932년 고적보존회의 대표였던 송계 노덕영(盧悳泳)이 사재를 들여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함화루로 이름을 바꿨다.

●뱀, 해충도 감동시킨 ‘해동공자의 효성’

 

겨울에 본 ‘함양상림‘의 모습. 최치원의 효성에 감동해 각종 해충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종호 제공

 

 

상림 숲에는 뱀 같은 해로운 동물이 전혀 없어 숲 속 어디에나 마음 놓고 앉아서 쉴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 토양이나 숲을 형성한 나무가 다른 곳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도 해충 등이 없는 까닭은 고운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란다.

최치원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외출할 때 반드시 허락 받아 나갔으며 돌아와서도 반드시 알렸다. 어머니가 근심하시지 않도록 늘 배려한 그를 사람들은 ‘하늘이 낸 효자’라고 불렀다.

어느 날 어머니가 혼자 바람을 쐴 겸 상림 숲에 산책을 나가서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자 최치원은 상림 숲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숲을 향해 “상림 숲에 있는 뱀이나 개미 같은 모든 해로운 동물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가 지극한 효성으로 주문을 외운 후 숲의 모든 해충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최치원의 효성이 하늘과 땅, 심지어 하찮은 미물까지 감동시켰다는 전설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연리지’에 소원빌고 ‘금 호미’ 찾자

상림은 2001년 산림청과 ‘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본부’가 공동 개최한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할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해 그 명성을 드높였다.

숲 한 쪽에는 함양을 빛낸 11명의 흉상이 배치된 ‘인물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11명의 인물은 고운 최치원, 덕곡 조승숙, 점필재 김종직, 일로 당양관, 뇌계 유호인, 일두 정여창, 옥계 노진, 개암 강직, 연암 박지원, 진암 이병헌, 의재 문태서 등이다. 최근에는 약 2만 평의 면적에 300여 종의 연꽃으로 조성한 ‘연꽃단지’를 조성해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사랑의 나무로 알려진 ‘연리지‘의 모습. 개어서나무와 느티나무가 몸통을 합치고 있다. 이종호 제공

 

 

상림 입구에는 사랑나무로 알려진 ‘연리목(연리지)’도 있다. 연리지는 일반적으로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합쳐진 모습이다. 이 나무는 부부금슬과 남녀간 깊은 애정을 비유하며, 예로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졌다.

이곳 연리목은 다른 나무들과 달리 서로 다른 종의 두 나무, ‘개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몸통을 합친 모양이다. 이 앞에서 서로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더욱 두터워지고 남녀간의 사랑이 이뤄진다고 전한다.

산책길 중간에 있는 작은 정자 ‘사운정(思雲亭)’ 옆에는 최치원 선생의 공적비가 있다. 최치원이 숲 조성 당시에 ‘금으로 된 호미’를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 호미는 마음씨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이를 봤다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참고문헌:
『함양지곡면 개평리 문화마을 지표조사보고서』, 함양군, 2002
「문중조직을 통해서 본 동족마을권의 공간구성과 건축특성」, 김철중,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
「우리나라최초 인공 숲 -상림」, 강쥐, 우리가사는세상, 2011.11.17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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