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함이라"(약1:2-4)
여러분, 저는 내 스스로가 죄의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 이 분은 잘못된 습관을 버리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전히 바람을 피우는 일을 끊지 못하는 김모씨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쁜 여인에 대한 정욕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람 피우는 것을 끊지 못했습니다. 아내 의 눈을 볼 때마다 여전히 두려움과 수치감속에서 지냈습니다. 결국 그는 바람피우는 일이 정리되기 전에 바람피웠던 일이 발각이 되어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미워하고 헤어지고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또한 노력해볼 만큼 노력해보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이러한 반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순수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지."
그러나 그의 기도는 순수했고, 그는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기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만으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문제 해결의 동기가 지극히 이기적인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들의 나쁜 습관이 주는 악영향에 대해서는 염려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나쁜 습관들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삶의 태도에 관해서는 고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그 사람을 보겠습니다.
김모씨는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른 여자와의 간통 관계를 청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불안감으로 나날들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결혼 생활에 금이 가지 않고 또한 자신의 이미지도 손상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김씨의 자세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렇게 된다고 해서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사실 그가 간음을 하기 전부터 이미 금이 가 있었습니다. 결혼 초기부터 그의 성급한 성격은 연약한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자신만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의 강한 자존심은 두 자녀까지도 불안하게 만들어 가정 생활에 전혀 안정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점차 여가 시간에 가정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도박에 몰입하기도 하면서 밖으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쌓여지니까 결국은 가족들이 거추장스런 존재로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김씨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그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에만 있을까요? 물론 십계명 중 7계를 범하는 그것을 청산해야 되겠죠.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김씨에게, 자신의 독선을 깊이 뉘우치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 동안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거만한 자존심과 이기심들이 깨어져서,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인 그의 죄가 무너져서 올바른 가정의 가장으로서 서기를 원하셨지만, 김씨는 단지 겉으로 나타난 바람 피우는 것을 끊기만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죄인이라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모습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삶의 자세를 바꾸는 방법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기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5-8)
여러분, 누구든지 죄된 습관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걸림돌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죄의 뿌리를 밝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조그마한 것을 깨달은 것에서 만족하고 맙니다. 즉, 우리는 기껏 결혼생활이 행복하기를 바라다든가 죄를 짓고 그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다든가 하는 선에서 우리의 기도제목이 멈추어버립니다. 우리 사람들은 단지 죄의식에서 해방되기를 원할 뿐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단편적인 고통들을 해결해 주시드라도 또 다른 죄를 충분히 저지릅니다.
여러분, 참된 회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과 함께 죄의 본성 자체를 반드시 버리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동일한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어정쩡한 회개는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게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한 이후에는 절대로 죄의 그림자조차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약한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자신의 죄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러한 순종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도 자기 중심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당신이 얼마나 신앙새활이 이기적인 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경건하고 신실하고 나아가 매일 매일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형상에까지 자라가시를 원하십니다. 죄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시카고의 한 작은 교회에서 세 살 된 소녀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 앞에 나아가 아이의 모습을 대하며 작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때 한 사나이가 술 냄새를 풍기며 붉게 충혈된 눈에 누더기 같은 바지를 끌고 관 앞으로 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죽은 아이의 신발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식이 끝난 후 그는 그 신발을 35센트에 팔아 싸구려 술을 사 먹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1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십자가 앞에 엎어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와 눈물로 회개하며 돌아와 예전에 자신과 같았던 치유 불가능한 알콜 중독자들을 전도하고 갱생시키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복음 전도자 멜 트라더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회개하면 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누구나 회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물리칠 수 없는 유혹 속에서 두 부류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지금까지 노력해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 정도는 용납을 해야지. 인간이 내가 별수 있어?"
이렇게 되면 그는 계속 죄를 짓고 그 죄는 더 이상 치유 불가능한 암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한 부류는 죄의 유혹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청신호로 받아들입니다. 야고보는 시험당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함이라"(약1:2-4)
이러한 영적인 승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저 내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치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입은 사람은 절대 가치 없는 은혜 속에서 지내지 않습니다.
먼저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얻고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맡기면,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경건한 삶을 영위해갑니다. 그래서 영적인 자유를 단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의 삶입니다.
2. 유혹을 딛고 일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험과 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혹이 찾아왔을 때 그것에 넘어가면 죄가 되지만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시험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죄된 생각이 마음속으로 파고들더라도 그것을 환영하지 않고 배척해낸다면, 그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당신에게 결정적인 시험이 닥쳤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은 그것에 탐닉하여 자신을 내맡겨 둘 겁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죄에 대해서 승리를 하면 다시는 유혹을 받을 일이 없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켜서 죄된 욕망 자체를 무감각하게 하셨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옳지 않습니다. 유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주위에 늘 머물러 있습니다. 언제라도 약한 틈만 보이면 달려들 기세로 대기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지난날에 육신의 정욕으로 씨름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정욕에서 영원히 구원해주실 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본성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켜서 시험이 오더라도 정욕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변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 자체를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시험자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빨리 죽게 해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시험을 당했을 때, 먼저 그 시험이 가져다 줄 유익들을 기대하면서 감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간 시험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것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시험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통을 오히려 감사로 승화시켜나가면, 후에는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당신의 삶은 더욱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다가오는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서 당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둘째, 부족한 부분들을 기록해가면서 당신의 삶을 이끌어 가십시오.
시험을 당하면 틈을 내서라도 나의 습성들을 관찰해보십시오. 실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 누군가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는 않나요? 당신은 약속들을 자주 번복하지는 않습니까?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없습니까? 지금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당신은 부모님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습니까? 또는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못한다고 해서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나요?
셋째,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자신의 유익으로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깨달으십시오. 시험은 잠시 고통이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나에게 유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요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를 따라 감당할 만한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넷째, 최종적인 목표는 당신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나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지으셨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 안에 온전히 있을 때만이 참 평안을 누리나이다."
죄를 극복했다고 해서 궁극적인 평안을 보장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좇을 때만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운동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천문학자입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부로 설명되면서 다른 모든 행성 운동이 쉽게 파악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학설로 인해서 비로서 행성 운동의 복잡했던 방정식이 단순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코페르니쿠스식의 신앙 방정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인생을 온전하게 인도해주시기 위해 당신의 주변에서 중심부로 옮겨가시기 원합니다. 이는 당신이 창조주이시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아름다운 단순성을 허락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온 마음을 다해 섬긴다면, 당신은 점차 참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당신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상당히 이론적이고 신비스러운 일로만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으며 우리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당신은 점차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가 그분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도록 지음받은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것을 누리기 위해 더 많은 노력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고 모든 닥쳐오는 일을 낙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시험도 선한 것으로 보답해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떠한 시험을 당하더라도 파멸되지 않고 더욱 굳건히 설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일시적인 상처를 당신에게 허락하신다면, 그것은 당신 삶 속에 깊이 괴어 있는 고름을 거두어내시지 위함입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죄된 습관을 끊고자 한다면 당장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당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말 중에 하나는 "그렇게 됐어야 하는 건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푸념은 사람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종종 불행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회 내지는 절망을 하게 됩니다. 이런 막연한 후회나 절망은 종종 우리를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자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회개보다는 종종 죄책감과 후회를 곧잘 합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잘 분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당신을 괴롭게 하는 상황은 어제의 당신의 생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늘 과거에 대한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엮어가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인간을 파탄시킬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는 일곱가지 덫이 있습니다.
1) 누구나 하는 것인데 내가 했다고 죄가 될까?
2) 아직 젊으니까 신앙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갖자.
3) 아주 미미한 것은 양심에 큰 가책이 없다.
4) 이번이 딱 한번이니까 괜찮겠지.
5) 그 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이 정도는 보상 측면에서 괜찮겠지.
6)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아닐까?
7)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문제없겠지.
그 외에도 사탄은 무슨 일을 합니까? 사탄은 당신의 삶을 파괴시키기 위해 당신의 과거를 최대한 이용합니다. 사탄은 당신의 마음속의 후회나 죄책감을 자꾸만 들추어내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당신을 붙잡아 둘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절망의 늪에서 헤매다가 죄악의 구렁텅이에 당신의 몸 전체를 던져버릴 것입니다. 사탄이 일으키는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또 더 큰 죄악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죄는 연쇄적인 반응을 몰고 옵니다. 당신이 저지르는 한 가지 죄악은 다른 나머지 모든 죄악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러주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사슬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에 얽매여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신의 미래까지 포기하곤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도무지 믿지 않는 냉소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러한 반응을 너무나도 즐기고 있습니다. .
또한 사탄은 다양한 죄의 문제들을 야기시키곤 합니다. 우리의 몸에 관한 일입니다.
첫째,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압박에서 시달리다가 여러 가지 병을 얻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Gary Collins)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죄의식은 육체를 옭아매는 쇠사슬과 같다. 쇠사슬이 몸을 망가뜨리듯이 죄의식은 그 사람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둘째, 죄의식은 절망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자기의 죄가 치유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감은 무기력과 패배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과거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설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 죄의식은 대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킵니다.
저는 죄의식 역시 죄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불결하며 죄투성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죄의식은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게 합니다.
일례로, 탈선한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탈선이 자신의 죄값에 대한 보응이라는 생각에 젖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까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것이 심화되어서 신경성 질병까지 얻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러한 죄의식은 사태만 악화시킬 뿐입니다.
다섯째, 죄의식은 종종 선한 행위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아침 출근 길에 아내에게 버럭 화를 낸 남편이 퇴근 길에 아름다운 장미꽃을 사들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탕감받을 욕심으로 평소와는 달리 지나치게 많은 헌금을 한다거나, 상처를 준 친구에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푼다거나, 자신의 지난날의 방탕을 씻어볼 생각으로 빈민가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선한 행위로는 결코 죄악을 씻을 수 없습니다. 잠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죄성을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는 엉뚱한 착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 만족에 그치는 희생은 결코 죄를 탕감해 줄 수 없습니다. 죄를 직접적으로 말살시킬 수 있는 처방을 가하기전까지는 그 죄악은 여전히 잠복해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직접적인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4. 하나님은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도덕적이거나 감정적인 죄의 요소들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적인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무게로 인해 실망해서 돌아서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도 불안하고 불결한 우리의 내면에 참자유를 주십니다. 다음의 세 단계를 통해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먼저 죄의식의 원인을 파악해보십시오.
당신의 인간관계에 비도덕적인 요소는 없는가, 세금을 속인 경우는 없는가, 부모를 욕되게 한 경우는 없는가 등등 이러한 세부적인 면까지 면밀히 검토해 보십시오. 쉽게 당신의 현 주소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파악된 사항을 깨끗한 종이에 기록하여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부착해두십시오. 가볍게 저지른 실수가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죄의식의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세 살된 아이가 구부러진 길목에서 건널목을 건너려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이제 건너도 될까?" 그러자 그 엄마는, "그래 빨리 건너!"라고 했습니다. 말이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엄마는 아이가 질주하는 트럭에 치여 즉사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 비극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후회와 자책감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신의 경솔한 한마디로 인해 그 아이가 죽었다는 자괴감이 자기학대로 까지 나타났습니다.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영혼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를 가지고 심판의 근거로 삼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용서하시는데, 그녀가 자신을 용서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가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은밀한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는가?" 를 생각해보십시오.
둘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감정과 절망, 그리고 실패 등의 모든 것들을 예견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사함받는 영원한 속죄 제사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당신이 지을 죄에 대한 죄값도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는 2000년전에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 죄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골2:13).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우리 인간들의 감정처럼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번 용서하셨는데 또 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마음이 달라지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값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 자유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일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평생 선한 삶을 살았는데도 그리스도를 거부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야 하는 건가요?"
이 질문에는 자세히 보면 엄청난 속임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어떤 죄인도 용서하신다는 복음의 성격과,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구원의 도리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식의 질문은 복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을 뿐 아니라, 복음을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어쨌건 간에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히틀러보다 더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남김없이 용서해주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히틀러의 죄까지도 능히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선한 행위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 어원은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인데, 이것은 사업 거래상 '지불이 완료되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에 대해서 또다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당신의 죄값은 완전히 지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때는 당신이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말갛게 씻어주십니다. 그분은 또다시 그 죄에 대해서 문책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일 지금 당장 죄를 회개한다면, 이 시간 이후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은혜의 사실은 당신이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는 한 가능한 것입니다.
오스트로 왕국의 왕 가운데 데오도링이란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삼십 여 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즉 여러 가지로 좋은 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혈기를 못이겨서 무죄한 신하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보에디스오스이고, 또 한 사람은 디메 커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비참하게 목을 메달아 죽였습니다. 그런 지 얼마 후에 왕은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고 항상 후회하였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늘 후회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궁중요리인이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것은 생선으로 만든 좋은 요리였습니다. 왕이 생선을 볼 때 빨간 눈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서 자기가 죽인 신하의 눈알이 보였습니다. 생선의 입안의 날카로운 이빨을 볼 때 마치 자기가 죽인 그 두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 나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이 데오도링왕은 너무나 무서워서 "나는 오늘 몸이 불편해서 저녁을 먹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자기 침상에 돌아가서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는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삼일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죄를 지으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마음의 평강을 되찾는 길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마음속의 불안은 자신이 저질러 놓은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갑니다. 잡는 사람이 없어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회개를 하십시오. 죄를 고백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은 당신의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방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치 못한 마음을 품게 하여 반복해서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늘 당신 곁에서 "너는 아직 불결해"라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점차 사탄의 놀음에 침몰되어 자신의 불결함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랑과 희락, 화평 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당신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당신은 마음속에 죄의식이 사라지지 않을 때조차도 당신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죄의식의 찌꺼기를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해보십시오. 시편 32편과 103편을 암송하시고, 죄의식이 슬며시 찾아들 때 이것을 크게 소리내어 노래해보십시오. 이러한 훈련이 쌓여서 점차 당신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갈 것입니다. 이제는 빛 바랜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확고한 믿음과 더불어 행진하는 당신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의 감정은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사탄의 참소에도 요동치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깨끗케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9절을 읽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죄사함은 하나님의 법적인 판결이며, 또한 깨끗케 하심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사역입니다.
북한의 개가 남한으로 넘어왔다. 남한의 개가, 너는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으로 넘어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는 집이 없니?"
"아니, 좋은 집이 있어"
"그럼 먹을 것이 없니?"
"아니 충분해"
"그럼 왜 넘어왔니?"
"마음대로 짖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유란 소중한 것입니다. 육신이 구속된, 해방된 북한 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 역시 죄사함 받고 깨끗케 되어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당신을 괴롭히던 과거를 청산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사함만이 자유를 위한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십시오. 혹시 이웃의 친구 사이에 상처가 있습니까? 만남이나 전화 통화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상대방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접근한다면 곧 관계는 회복되어 이전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죄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은 날부터 갑자기 성격이 매우 난폭해졌습니다.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붓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를 가끔 만나던 어린 꼬마가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왔습니다. 식구들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번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만나 보렴” 하며 그 꼬마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20-30분 동안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온 뒤에 할아버지가 변했습니다.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고, 이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해서 소년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 할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니?”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아무 이야기도 안했어요.”“그러면 도대체 할아버지랑 20-30분 동안이나 뭘 했니?”그랬더니 어린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함께 우는 순간,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을 통해 할아버지의 아픔이 치유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아픔을 함께 느낄 때 치유의 능력이 솟아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우리의 오해받음, 우리의 배신, 우리의 미움, 우리의 눈물, 우리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십니다. 그렇게 내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쏟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위로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없애주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거를 잊으시는데 왜 당신은 거기에 집착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은혜의 바다로 던져버리시고, "낚시금지"라는 푯말을 바닷가에 세워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새 출발을 허락하셨다면, 더 이상 당신의 죄된 과거가 당신을 붙잡아둘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이제 가서 더 이상 이 같은 죄를 짓지 말아라"는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당신의 과거가 용서받았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자유인입니다. 당신은 이제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또다시 질퍽한 죄의 구렁텅이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땅위에 당신의 발을 굳게 딛고 그분의 틀 안에서 굳건히 자라가든지... 그것입니다.
기도
주님, 이때까지 당신의 권위에 굴복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무지한 죄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러한 죄인까지도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이제야 믿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은혜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에서 안락 가운데 지내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내게 감당할 만한 시험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질 인생이 얼마나 기대되는지요. 이제서야 당신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련을 통해서 내가 당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사람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늘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