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沈熏, 본명 심대섭沈大燮)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는 조선일보와 문자보급운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소설은 문자보급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ㅇㅇ일보사’ 대강당에서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기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심훈이 이 운동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것은 그 자신이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자보급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심훈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고, 이 기간은 조선일보가 문자보급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던 때였다.
그는 기자를 그만둔 1932년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상록수>를 써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소설에 당선됐다.
동아일보는 그가 1924년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심훈은 소설, 시, 시나리오, 수필, 평론 등 거의 모든 분야의 글을 쓰는 전방위 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인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이기도 했다.
한때 영화감독도 했다. 다재다능하기로는 배우이자 화가이며 영화에도 손을 댄 조선일보 학예부장 안석주와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가 있었다.
심훈은 1927년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각색한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감독했다.
원래 제목은 <어둠에서 어둠으로>였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둠’이라는 말이 조선의 처지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당국의 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촬영기술도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 스토리가 더욱 문제이올시다.
(중략) 그 영화의 내용에 대하여서는 나는 이 땅에서 나고 또 살아온 사람인 고로 우리 조선의 현실을
조금아치라도 나타내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믿어 주십시오.”
― 조선일보 1927년 9월 3일
<먼동이 틀 때>에 대해 안석주는 “우리가 모든 조선 영화를 (불)살러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놓는 데에 과히 부끄럽지 않다”
(조선일보 1929년 1월 27일)고 극찬했다. 당시 영화평론가 서광제는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촬영과 카메라워크에 있어서도
조선에서 그 이상 갈 작품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훈의 영화를 극찬한 안석주는 다른 영화감독들로부터 항의를 받아 3일 후 “<먼동이 틀 때>에 대한 문구는 비록
인상기라 할지라도 다른 모든 영화에 대해 영향이 있을 것을 염려하야 이에 취소한다”
(조선일보 1929년 1월 30일)고 써야 했다.
3000원의 제작비를 들인 <먼동이 틀 때>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5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1926년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1200원의 제작비로 15만 명의 관객을 모은 것과 비교하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 <먼동이 틀 때>를 첫 작품으로 선택한 계림영화사는 이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파산했다.
영화에서 성공하지 못한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입사 후 영화감독과 배우의 경험을 살려 서구와
조선의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기사를 활발하게 썼다. 조선일보의 영화 담당 기자였던 셈이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막 설립되고 있는 영화제작사(프로덕션)에 대해 “프로덕션은 본시 그 의의가 한 개인이 책임을 지고 독립해서
작품을 제작하는 부분적 집단”이라면서 “(조선에서는) 흥행사의 조종을 받고 돈에 먼저 눈을 뜨는 경영자의 지배 하에서 (……)
과연 뛰어난 작품이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자못 의문이다”(조선일보 1928년 4월 18일)라고 썼다.
1929년 1월 심훈은 <조선영화 총관>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에 영화가 수입된 1897년부터 1928년까지의 영화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 조선일보 영화 담당 기자였던 심훈. 그는 문자보급운동에서 소재를 얻어 소설 <상록수>를 썼다.
그는 틈틈이 시와 소설을 지면에 발표하면서 <성숙의 가을과 조선의 영화계>, <소비에트 영화 ‘산송장’ 시사평>
, <조선 영화의 재건 방책> 등의 영화 기사를 쏟아냈다.
검은 테 로이드 안경을 쓴 잘생긴 얼굴로 엄숙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심훈은 장난이 매우 심했다.
그와 자취 생활을 함께 했던 윤석중이 기억하는 일화다.
어느 날 심훈은 동갑내기 동료인 안석주와 같이 길을 걸어가다 앞에 가는 일본 순경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일본 순경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으나 점잖은 양복 차림의 두 신사만 보일 뿐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가다가 또 그러고 또 그러고 했으나 어찌나 동작이 날쌘지 일본 순경은 끝내 그를 잡지 못했다.
심훈이 술에 취해 종로 네거리를 지나다 파출소 앞에 나와 있는 순경의 모자를 슬쩍 벗셔 들고서 줄행랑을 친 일도 있었다.
얼굴이 하얘진 순경은 “모자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뒤를 쫓았다.
심훈은 모자를 들고 여기저기 도망치다 결국 순경이 싹싹 빌자 돌려 주었다. 그는 이 일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윤석중은 “일본 사람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으니까 이런 짓으로 골탕을 먹이며 분통을 푸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료 기자들도 그의 장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은 키가 작았는데 하루는 심훈이 그의 뒤를 따라가다
모자를 훌렁 벗기고는 “모자만 걸어가는 줄 알았더니 그 밑에 사람이 있었구먼” 하면서 놀렸다.
조선일보의 여기자 윤성상도 그의 장난에 시달렸다.
기자를 그만둔 뒤 어느 날 심훈이 권투경기를 보러 갔다. 그는 로이드 안경을 쓰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입구로 점잖게 들어갔다.
검표원이 “표, 표” 하면서 손을 내밀자 심훈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배우이기도 했던 심훈은
‘네가 나를 못 알아보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검표원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어서 들어가라고 했다.
당시 기자들은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그는 기자를 그만둔 뒤에도 가장 ‘기자다운’ 행세를 한 것이다.
그가 공짜로 입장한 권투경기는 살인 복서 ‘보비’와 일본 선수의 경기였다. 보비는 일본 선수 한 사람을 죽인 전력이 있어
당시 관중들은 ‘살인’ 선수보다는 상대인 일본 선수를 응원했다. 하지만 심훈은 열렬히 보비를 응원했다.
윤석중은 “일본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기에 ‘살인’ 보비 편을 들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심훈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1930년 3월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는 또 조선일보 기자 때 《철필》에 시 <필경筆耕>을 발표, 기자의 사명을 되새겼다.
한 시간에도 몇 만 장이나 박혀돌리는 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주는 우리의 혈압血壓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야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 ― 《철필》 1930년 7월
심훈은 “1년에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체증 한 번 안 나는 매우 건강한 몸”(《신동아》
1934년 3월)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상록수>를 발표한 이듬해인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35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하던 해 태어난 아들 심재호는 동아일보(《신동아》) 기자를 지낸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출처] 조선일보 사람들 - 심훈 편|작성자 도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