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신영복씨(48). 그는 지난 1988년 8월 15일, 20년 만에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민족분단은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일단 굳게 닫힌 옥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 어느 사회에서보다 한국사회에서의 형량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이고 있다. 20대의 청년은 40대가 되어서 비로소 특사라는 형식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숙대 강사를 거쳐 육사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어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긴 세월 감옥을 살게된 신영복씨의 경우는 이 분단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 당하는 수난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밖으로 내보낸 편지들을 밖의 가족과 친지들이 책으로 엮은「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는 89년 1학기부터 성공회신학대학에 출강, 한국사상가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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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생께서는 이른바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잡혀가 수사를 받을 때, 당시 자신이 얼마쯤 감옥살이를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까? |
우리가 그때 갖고 있던 보안법에 대한 지식은 아주 빈약했더랬지요. 간첩에게나 적용되는 법률이라고 알았지요. 취조하는 사람들이 수사기술상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한 3년 살면 나갈 거라고 그러더군요. |
―취조기술상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수사관도 실제로 그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르지요. 형벌의 정도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권력은 스스로를 위해 필요하다면 피의자를 형벌로 옭아넣기도 하고 풀어놓기도 합니다. 형벌이란 또 상대적이라, 같은 행위라도 여기서는 형벌로 다스려지고 저기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지 않습니까. 또 시대에 따라서도 가변적이고요. |
우리가 당시 조심스럽게 읽어 문제가 되었던 책들이 지금은 합법적으로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것도 시대적 상황,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우리는 한 세대 이전의 사상이랄까 의식구조에 구금된 것이라고 할까요. |
―문제가 된 책들이 어떤 것들이었나요? |
공소장에 나와 있는 책들을 보면 고리키의「어머니」라든지 마르크스의「독일이데올로기」레닌의 몇몇 저작들과 모택동의「신민주주의론」들이었습니다. 이런책들을 우리는 노트에 번역해서 후배들로 하여금 두서너 벌씩 베껴 돌려가며 읽혔습니다. 이 내용들을 강의는 하지 않았지만 서클활동할 때 관심있는 학생들에게도 읽게 했지요. |
―그런 책들을 읽게 되고, 역사현실에 눈뜨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었나요? |
우리에게 4월혁명은 엄청난 것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초에 우리는 4·19가 노독재자의 실정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소박하게 생각했지만 4·19이후 5·16까지의 시기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구조적으로 인식해갔고, 따라서 이 같은 사회는 원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이론적으로 규명해야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구요, 휴전 이후 초토화된 대학에서 저 개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4·19를 통해 위대한 각성을 하게 됩니다. |
―통일혁명당사건이란 도대체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무엇을 했길래 20년 이상이나 감옥살이를 했나요? |
통일혁명당사건을 나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감옥을 살았던 것은 내가 했던 일보다도 남북의 정치적 상황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연구 모임을 하면서 학생서클들을 조직해 지도했고 나아가 일부 학생시위를 조직했는데, 요즘의 학생운동 수준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