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를 흠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정희를 주군으로 모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래(古來)의 역사요 작금의 현실입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혀를 차면서도 뭇 사람들을 죽인 영웅들을 흠모하는 것은 모순이지만, 그것이 역사이며 역사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혁명이든 쿠데타든 실패했다는 것이요, 그것은 단순히 실패가 아니라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처참하게 실패한 사람, 하나님에게 저주 받은 사람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래서 성령에 취한 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주님이라 부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공을 지향하는데, 예수를 따르는 것은 실패를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예수를 따르는 것은 저주를 감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한 손으로는 실패를 쥐고, 한 손으로는 저주를 잡고 사는 것입니다. 실패와 저주를 쥐어 잡고 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세상을 거꾸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패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며 세상을 거꾸로 사신 것은 ‘성령’때문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금언을 실행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성령에 힘입어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죄는 극악무도해도 로마 황제와 헤롯가의 왕 역시 미워할 수 없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니,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예수님도 사랑입니다.(요일4:8) 예수님은 누구보다 죄를 미워하셨지만, 누구보다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실패와 저주를 껴안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기 파멸 혹은 자기 학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도 아니요, 유대인의 율법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예수님은 권력자들의 불의에 고개 숙이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에 순종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지만 생명과 죽음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으셨습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사랑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은 관계 안에 있습니다.(눅17:21) 사랑하면 천국을 삽니다. 천국은 공간과 시간에 매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을 때, 그 때 그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시면서 동시에 사람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해골 골짜기도 천국입니다. 사랑으로 천국의 영토가 확장됩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천국이 임하여, 가인과 아벨이 서로 사랑할 때, 에덴이 수복되고 천국이 땅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사)은 사랑입니다.(고전12:31~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