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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야."(그게 다일까?)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가운데서
나홍진의 <추격자> 이후, 추격자와 도망자라는 묶음으로 둘을 같이 엮을 수 있는 코엔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다. 어느새 낯설지 않은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데서도 또한 비교가 된다. <추격자>가 영화 속 캐릭터들이 내는 소리들이 어설퍼 웃게 만든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들리지 않는 정적으로 뭔지 모를 것이 폐부를 관통하는 느낌이다. 두 작품 모두, 인간공동체를 위한 도덕성/윤리성이 상실된 인간이 보인다. 흔히 그런 이들을 사이코패스라 부르는데, 지영민(하정우)과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가 그들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본 영화들인지라, 그 둘을 간단히 비교해볼까 한다. 두 작품 모두 폭력에 대한 무력감이 드는 건 같은데, 전자에는 엉성한 상황에서 비롯된 조소가 있고 후자에는 과묵함에서 비롯된 냉소가 있다. 어떤 작품이 더 맘에 드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물론 엄격한 진지함이 느껴지는 후자다. 두 영화에서 인식시키는 사이코패스 지영민과 안톤 쉬거는 어떤이인가? 지영민은 보도방 여자들을 불러내 아무런 죄의식없이 살인을 자행하는 자이다. 안톤 쉬거는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의 맘에 안들어, 자신과의 어떤 약속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보이)는 자이다. 물론 두 영화는 그들을 누가 벌할 것인가를 묻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추격자>은 왜 살인을 하는가-성불능이 이유라고?, (사회적) 무관심이 이유라고?-에 대한 물음을 부분적으로 던진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그런 물음조차 애초에 입막음해버린다. 얼마전 본 <추격자>와 그 이후에 본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여서 둘을 비교해보면서 영화얘기를 시작하게 된다. 코엔 형제, 이름이 익숙하다. 그렇다고 코엔 형제의 영화에 대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의 영화를 본 게 벌써 오래전이다. 찾아보니 1996년작이다. 암튼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파고>를 통해서 보여지는 차가운 눈[雪]과 아이를 갖은 여경찰(프란시드 맥도먼드)과 바보같은 스티븐 부세미의 기이한 모습이었다. <파고>는 우스꽝스러운 내용과 함께 기이한 영화로 기억된다. 그 이후 어쩌다보니,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 코엔형제의 영화를 10년이 넘어서 다시 보게 됐는데, 보기 전부터 이미 극찬의 소리를 들은지라, 과연 얼마나 잘 찍었을까 하면서 보게 된다. 보고난 후, 정말로, 과연 잘 찍었다고 말하게 된다. 그토록 잔인한 내용을 담은 영화를 이토록 세련된 영상으로 보여주다니, 하면서 감탄하게 된다.
영화을 본 이후 남는 건 비극적인 현세이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비극적이지 않는 삶인 건 아니다. 하니 그 문제를 감독/작가에게 책임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1980년으로 돌아간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놀란 장면이 있었다. 오프닝 영상이 압권이다, 숨죽일 수밖에 없다. 푸르른 여명/미명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리고 또 빛과 그림자 영상이었다. 사실상 이 빛과 그림자 부분은 다수인데, 그 중 말하고싶은 장면들은 열려진 커튼 사이로 달이 들어간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열려진 커튼 사이 빛과 전원 켜지지 않는 TV 속 사람이 등장하는 신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보면서 깜짝 놀란 장면이 있었는데, 아마도 영화 본 사람들은 누구나 놀랐을 것 같다. 그건 바로 교통사고 장면이다. 우연이란 이름을 동전의 양면을 마치도 선택처럼 혹은 운명처럼 만들어버린 그에게,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온 우연이란 이름의 교통사고가 아닐까 싶다. 난데없이 닥치는, 별 수 없는 우연말이다.
영화는 보안관 (에디 톰) 벨의 독백으로 시작하는데, 그때 보여지는 여명의 배경이 장관이다. 듣는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자신은 25살부터 이곳에서 보안관 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할아버지도 보안관이었다고 한다.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둔 보안관은 갈수록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의 독백을 토로한다. 자신의 눈에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유령과도 같은 살인마를 만나게 된다.
얘기의 시작은 심지어 14살짜리 아이를 죽인 소년으로 시작하는데, 서류상으로는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말했지만 그놈이 자신에게 말할 땐 우발적인 아니라 아무나 죽이려고 계획적이었다고 말한다. 늙은 보안관 벨의 의문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오래 산 자의 눈에 보이는 길이란 없는가의 의문이라고 볼 수 있다.
노인, 흔히 노인은 현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많이 아는 자, 여러 가지를 경험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안다는 것의 끝/한계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답은 모른다를 준비하고 있다. 하여 조금은 묵시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엔딩으로 들려지는 벨의 꿈얘기는 묵시론적 미래를 말하는 것만은 아닐 듯하다.
불안한 꿈을 꾸고, 신이 뭔가 계시를 해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경험많은 보안관 벨은 의문한다. 도대체 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고. 그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고민하는 중 “토버트는 진실과 정의에 대한 정의를 뭐라고 했지?”라는 질문을 비서에게 던진다. 그에 대해 비서는 답한다. “매일 새롭게 전념해야 한다고 했던가요?” 라고. 매일 새롭게 전념하는 게 진실이고 정의라는 말이다. 더욱 전념해야하고, 더욱더 진정성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물어보자, 그렇다면 과연 안톤 쉬거는 더욱 새롭게 전념하지 않았을까?
현자이고 싶은 노인 벨은 세상에 대한 구원의 빛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 총에 맞아 다리를 잃은 노인 엘리스와의 대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부인에게 전하는 두개의 불안한 꿈 얘기가 있다.
어느날 사건 해결에 대한 길이 보이지 않은 때, 벨은 누군가를 찾아간다. 그 집은 고양이들이 주인인 것처럼, 고양이들 천국이다. 벨은 묻는다. 고양이를 몇마리나 키우세요 하고. 그 말에, 그 고양이를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노인은 말한다. 일부는 길잃는 고양이이고, 일부는 들고양이라고 했던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후 벨과 노인은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그건 벨의 기대하는 고백이고, 노인의 관조하는 통찰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벨은 말한다/묻는다.
“내가 나이가 들면 신이 어떻게든 찾아들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안그래요. 그렇다고 뭐라 그러는 건 아니고요...내가 신이라도 나한데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자 노인은 “신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무도 모른단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인은 오래전 이유도 모른채 인디언 총에 맞아 죽은 삼촌에 대해서 얘기한다. 폐를 관통해서 밤사이 죽은 삼촌을 숙모나 아침을 묻었다는 얘기를 통해 공허함를 말한다. 삼촌의 죽음에 대해서, "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그게 다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니가 겪은 것도 새로운 것이 아니야. 이 나라는 사람들을 늘 힘들게 해. 세월을 막을 수는 없어. 너를 기다려주지도 않을거고, 그게 바로 허무야"라고 말한다.
어쩌면 영화가 끝나가는 때 아내에게 들려지는 벨의 꿈 얘기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 타당해보일지도 모르겠다. 들려지는 그 중 하나의 꿈이다. 아버지보다 스무살이나 더 먹어버린 지금의 벨의 나이다.
“시내에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가 나한테 돈을 주셨어, 그런데 그걸 잃어버린 것 같아...”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음이다.
들려지는 다른 하나의 꿈이다.
"꿈속에서 어느때인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눈오는 날 말을 타고 무덤가를 지나게 되었어.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 과거로 갔어. 담요를 둘러싸고 고개를 숙이고 계셨지. 아버지가 나를 지나쳐 가실 때 봤어. 옛사람들이 하던 방식대로 뿔피리를 가지고 있었어. 그 안에 있는 불빛을 보고 알았어, 달같은 색깔이었어. 꿈속에서도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앞서 가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어둡고 추은 저쪽에 불을 피우려고 하신다는 것을 말야. 내가 거기 갈 때 마다 아버지가 거기 계셨어."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불을 피우는 아버지(먼저 산 자)의 존재는 여기가 아닌 거기에만 있다는 것이, 노인을 위한 나라를 없다와 상통할까? 아니 거기에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주의깊게 생각해봐야할까?
이렇게 사건 이후 사건의 내력을 알게 하는 보안관의 나레이터가 있다면,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사건 줄거리는 바로 목숨과 바꾸게도 되는 우연의 돈이다. 어느날 드넓은 황야에서 영양 사냥을 하던 모스는 우연하게 핏자국을 따라가게 된다. 핏자국을 따라가다보니 돈이 있었다. 눈먼 이백만불의 돈이 눈이 멀어 모스에게로 온 것이다. 눈먼 돈인데, 내가 그 돈을 갖지 못할 건 없지않느냐는 생각에서, 바로 그때부터 모스는 돈에 끌려/딸려 다니게 된다. 그 우연의 길을 따라 걷는 모스의 생각은 '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되돌릴 수는 없다'는 마음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끝은 어떻게 될까? 누구나 생각 가능한 결말이다. 누구도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안톤 쉬거는 이유없이 상대를 죽이려는 때, 자신의 선택을 마치도 죽는 자의 선택인 것처럼 만드는 동전을 이용한다. 동전의 한 면을 선택하라고 한다. 어느날에도 평소와 같이 죽이려는 자에게 한쪽을 부르라고 하자, 한 사람이 말한다. 동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잖아요. 선택은 바로 당신이 하잖아요, 라고. 이때 안톤 쉬거 말한다. 글쎄, 나도 그 동전하고 똑같은 식으로 여기 온거야, 라고. 자신이 동전이다? 인간이 동전이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던져보면서, 매일 새롭게 전념하는 삶을 살던가를, 아마도 안톤 쉬거에게 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럼 이제 도대체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를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그 말이 '젊은이를 위한 나라는 있다'는 말로 되물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이건 아마도 이렇게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은, 세상은 허무/공허함(vanity)로 어느 누구도 세월을 막을 수 없기에, 세상을 경험하고 안다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현/지)자는 없다는 말로.
감자칩이나 먹으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걸 보기는 싫다라고 말하는 벨에게 다른 보안관이 말한다. 이런 전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돈과 마약때문이라고. " 돈이 도대체 뭐요? 돈 때문에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거요?"라는 말을 한다. 그럼 보안관은 물어야할 것이다. 돈이 도대체 뭐냐고? 도대체 무엇이건데, 이런 전쟁과도 같은 총질이 있는 거냐고. 알 수 있을까? 아니 이 질문과 길은 답을 찾지 않아도 될 것에 목숨을 바쳐버리는 형국이 아닌가 싶다.
노인 엘리스를 찾아온 벨이 강적을 만난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옛날을 잡으려고 애쓰는 그 시간에 말야 더 많은 것들이 저 문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라고. 잠시 뒤면 문에다가 붕대라고 감아야할거야. "
그러면서 니 할아버지는 나에게 부관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한다. 앞서 태어난 자는 뒤에 태어난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부관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통해서 세상을 위해 뭔지 모를 불을 밝히고 있다. 이는 현세란 경험한 자를 위한 세상은 아니지만, 경험한 자는 그 다음 세대를 위해서 뭔가를 하게 되더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비록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뭔가를 하게 되더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현재적 삶의 철학이란, 경험을 통해 배운 지식은 다만 과거의 유산일뿐이지 않던가를 말하면서, 매일 매일 새롭게 산 자를 위해서만 존재는/무엇은 존재한다를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플리쳐상 수상작가인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제목은 예이츠의 싯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직은 소설을 읽지 않았다. 소설과 영화 그 사이가 있을테지만, 왠지 손이 가려하지 않았다. 영화가 뇌리에 남았으니, 아마도 머지않아 읽게 될테지만.
첫댓글 어디에 글을 올려야 하나, 고민 끝에 찾은 곳이 이곳, 꼬리말입니다. 마침-하필?!- 폭주님의 글이군요! (--;;;) 거두절미하고, '펑크'의 당사자로서 고원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요즘 정신이 좀 없(었)고, 또 나름대로 글을 써둔 상황이었는데, 결국 일이 벌어진 것에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립니다. 혹여라도, 양해가 된다면 다음 주에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자비님 말씀처럼 꼭 제게 전한 말은 아니지만, 그 사이 일이 걱정됐었기에, 얼른 꼬리말답니다. 바빠 지나칠 수도 있고, 심신이 불편해 지나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차마 말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생각하고요. 아자비님의 경우, 바쁠거라고 미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상황으로 보이는 일 잘 진행시키시고, 바쁜 와중 건강 유의하시길 바란다는 말을 전합니다. 꼬리말을 소조님이 보시고, 다음달 화요논평 순서 조정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 해주시면 저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리 디스크입니다;그게 다야(그게 다일까-,.-)폭주기관차님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어이쿠 어째요, 치료/관리 잘 하셔요. 그나마 봄봄님의 미소를 보게 됨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프면 아픈 부위만 보게 되는데, 만성병이라면, 멀리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아픈 건, 몸의 일부가 아프다는 걸 생각해보면 다른 길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지닌 몸이라는 전체 중 한 부분이 아픈거지요. 그렇다고 불편함이 없다는 건 아니고요. 그런 생각을 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
혹 통증때문에 병원을 찾게 됐다면, 존 사노의 <통증혁명>도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TMS(긴장성 근육통 증후군Tension Myositis Syndrome)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거든요. 심인성질환에 대해 중점을 둔 듯한 책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아는 것이 도움이 되는 하나의 경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물론 그에 앞서 정확한 진찰이 필요하고, 흔히 알려진 디스크 관련 건강수칙이 필요합니다만. // 몸이 어디론가 가고싶어 근질근질 거리는 봄이 되었는데, 봄봄님 몸관리 잘 하셔요. 또 종종 보고요. 더불어 읽어주심에 감사드리고요.
조언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증혁명도 한번 읽어보지요. 언젠가 꽃놀이 가서 뵐 수 있기를^^
보고싶군요..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