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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사치와 검소 奢儉
옛날부터 민속의 사치 여부에 따라 세상의 윤리 기강이 오르내렸다. 바람이 불어 풀이 눕
는 것처럼 모든 일이 풍속을 진작시켜 흥기시키는 교화에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극히 사
치스러운 풍조가 있는 것은 마땅히 가르쳐서 이끌어야 한다.
천지가 생산한 재물은 유한한데, 사람들은 마구 그 재물을 쓴다. 옛 사람들은 집에 노인이
나 병자가 있으면 온돌에 두고 젊은이와 장년은 모두 윗목에서 지내게 하였으니, 사람들
은 모두 건강하였고 병이 적었다. 오늘날 각 방마다 온돌을 들여 사용하므로, 1년 동안 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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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숯에 드는 비용이 입고 먹는 데 드는 비용과 똑같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때를 정해 두고 음식을 먹었다. 오늘날은 한도가 없이 아침부터 밤까
지 배불리 먹고 마시는 데에만 골몰하니, 부잣집의 솥들이 한시도 식는 때가 없다. 옛날
사람들은 의복으로 귀천을 표시하였다. 선비들은 선비의 옷을 입으니, 소매를 넓게 하고
관을 높이 썼다. 반면에 천인들은 천인의 옷을 입으니, 전립氈笠을 쓰고 소매를 좁게 하였
다. 시정市井 잡배들은 둥근 관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서배들은 감히 모시를 입지 못했
는데, 오늘날은 모두 입으니 관과 옷의 원래 등급이 사라졌다.
노인과 소년이 각각 다른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경문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소년과 장년들도 모두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 노인만 비단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었는데, 오늘날 소년과 장년들도 모두 가는 명주옷을 입는다. 놋그릇과
동 그릇은 매우 귀한 그릇이었지만 오늘날 하인들, 천인들과 할머니들조차 이 그릇들을
사용한다.
혼례는 대례大禮인데 오늘날은 채 동자도 못 된 애가 부부의 예를 치른다. 많은 돈과 재물
을 허비하여 쓸모없는 의복을 짓지만 1년도 넘지 않아 몸이 자라고 옷이 짧아져서 공연히
버리게 된다. 신혼의 이른바 반상기盤床器는 점차 사치스럽고 분수가 넘치는 데 이르렀
다. 여항閭巷의 사족들과 서민들이 궁실을 본뜨고자 하여, 심지어 채소 그릇과 젓갈 접시
까지 다 갖추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하늘이 생산한 물건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다.
부자들이 이와 같으니 가난한 자들도 그들의 잘못을 본받는다.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
를 들일 때에 재산을 탕진하고, 농장을 팔아도 부문릉浮文綾226)과 같은 질 좋은 비단은 마
련하지 못한다. 거리에서 그 밖에 법외의 사치스러운 풍조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
도로 많다. 운혜雲鞋와 도복道服227)을 변별하는 이가 아무도 없고, 이예吏隷의 자식들이
유교帷轎228)를 타고 비단 발[수렴繡簾]을 내려 섞어 앉았고, 시정잡배의 처가 총모驄帽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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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부문릉浮文綾: 무늬를 도드라지게 짠 견직물, 또는 도드라지게 짠 직물의 무늬를 말한다.
227) 도복道服: 도복은 도사道士가 입는 옷으로, 원래는 천존노군天尊老君의 법복法服을 말한다.
228) 유교帷轎: 휘장을 두른 가마.
229) 총모驄帽: 총모자驄帽子를 말하며 무사武士들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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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쓰고 초선貂扇230)을 손에 들었으니, 어찌 요리사나 도살꾼 등 천한 사람의 분수에 맞는
일이겠는가.
복건幅巾231)과 방관方冠232)은 도리어 의원과 역관에게 돌아간다. 높은 집을 짓는 자는 그
집이 이웃집보다 높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준마를 탄 자는 자기 말이 다른 말보다 못
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서울이 이와 같으니, 촌구석에서조차 그 잘못을 본받아 하층민들
도 모두 농부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상민과 천민들의 자식들도 분수에 넘치게 유학幼
學을 모칭한다. 부인은 베를 조금도 짜지 않으면서 넓은 소매의 옷을 입고, 몸소 모를 조
금도 경작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소반에 가득 차린다. 이것은 모두 백성들과 나라가 모두
고갈되는 폐단이다. 염치는 날로 사라지고 탐욕이 날로 타올라서 이것을 말미암지 않음
이 없다. 지금 잘못을 바로잡는 정책은 오직 절약과 검소로 이끌고 가르치는 것뿐이다.
대개 법과 제도를 설정하는 것은 원래 절목에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이다. 법으로만 하면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금지하기만 하면 스스로 멈출 수가 없다. 먼저 조정에서 소박한 풍
속을 숭상하여, 인사를 결정할 때에 “아무개의 그릇은 그 자리에 부합되지만 검소함이 부
족하다. 아무개의 재주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지만 사치가 심하다”라고 반드시 지적하
여 사치 여부로서 인물을 뽑는다. 선비들이 성균관 입학과 초사직初仕職233)에 나가는 것
을, 그 사람이 순박한지, 혹은 가벼운지, 사치한지 검소한지를 일단 보고 결정한다면, 비
록 촌구석의 변변치 않은 옷을 입은 사람일지라도 서울에 와서 순박하고 두터운 말씨를
쓴다면 그를 존숭할 것이며, 그 사람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었더라도 그 행동거지가 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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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초선貂扇: 일명 ‘모선毛扇’·‘난선暖扇’·‘포선布扇’이라고도 하며, 두 막대기 사이에 삼베를 이은 것이다. 대체로 조선 말기까
지 주로 양반들이 얼굴을 가리거나 방한용으로도 사용하였다.
231) 복건幅巾: 도복道服에 갖추어서 머리에 쓰는 쓰개의 한 가지. 검은 헝겊으로 위는 둥글고 삐죽하며, 뒤는 넓은 자락을 길게 늘
여 그 양끝에 끈을 달아 뒤로 돌려 맨다. 흑건黑巾.
232) 방관方冠: 조선 시대 사인士人들이 편복便服에 쓰던 건이다. 사면이 편평하고 네모지다고 하여 방건方巾·사방관四方冠·사
방건四方巾 등으로 불렸다. 방건은 명나라 초기에 선비들이나 문인, 유자儒者들이 사용했던 두건으로, 이것은 이미 옛날 남조
南朝의 사대부들이 애호하여 사용했던 각건角巾의 제도에서 기인된 것이며, 사방평정건四方平定巾·사방각건四方角巾이
라고 불렀다. 조선에서 방관은 유학자들이나 선비들이 집안에 있을 때 맨상투 바람을 면하기 위해 편복과 함께 착용하였다. 형
태는 네모난 상자 모양으로 사각四角이 편평하며, 정수리 부분이 막힌 형태와 터진 형태로 나뉘는데 전자는 사방관, 후자는 방
건이라고 불리었다. 그 재료는 인모人毛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주와 통영 등지에서 생산되었
고, 말총으로 엉성하게 그물처럼 얽어 꿰맨 것은 충주 등지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는 사면이 각진 형태로서 위
가 막히고 상부와 하부가 큰 차이 없이 정입방체의 형태였으나, 17, 18세기로 갈수록 위가 막혀 있으면서 넓고, 아래가 좁은
상광하협上廣下狹의 형태로 변하였다. 19세기에는 위가 터진 방관을 많이 착용하였다.
233) 초사직初仕職: 과거에 급제한 뒤나, 혹은 천거薦擧되어 처음으로 하는 벼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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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면 비하할 것이니, 겸종傔從과 이예吏隷들까지도 옷차림의 사치 여부에 따라 호오를
분명히 한다면 민속의 교화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의복과 음식에도 마땅히 한계를 정해 절제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절도에 따라 복종할 것
이다. 사서인士庶人의 나이가 50살이 되지 않으면 명주옷을 못 입게 하고, 의관의 반열에
있지 않으면 한삼汗衫을 못 입게 한다. 유생儒生 이하는 운당혜雲唐鞋를 신지 못하게 하
고, 혼가婚家의 폐백에도 사서인은 채주綵紬를 사용하고 대부는 무문단無紋緞을 사용케
한다. 사가私家의 잔치 음식 수도 6그릇을 넘지 못하게 하고, 사성使星의 다담茶啖234)과
식찬食饌도 오로지 그 그릇 수를 정한다. 1품으로부터 관찰사, 암행어사, 강역을 나가는
사신使臣들까지 10그릇으로 정한다. 2품부터 당상까지 8그릇으로 정하고 당하로부터 9
품관까지 모두 6그릇으로 정한다. 이와 같이 제도를 정한다면 공사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품물 가운데에서 혹 사치한 것이 있어도 일일이 적발하여 율대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체加髢235)를 금지한 뒤이니, 호족들과 부자들이 비록 이른바 아가씨 상투에 돈을 많이
썼더라도, 가난한 집안의 한사寒士들이 가체가 없기 때문에 걱정거리로 삼지 않는다. 지
금 만일 이 제도를 단행한다면, 윗사람이 행해야 아랫사람이 본받아서 절검의 풍속이 자
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다담茶啖과 식찬食饌은 배불리 먹기 위한 것
이 아니라 왕인들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니, 반드시 후하게 내놓아야 하는데 어찌 그릇 수
를 제한하여 아무 것도 차린 것이 없는 것에 가까이 하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이것에 대
해 답한다면, “옛사람들의 잔치 예가 극히 풍성한 것은 8궤에 불과하며, 그 다음으로는 6
궤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10그릇에서 8그릇, 6그릇을 차려 놓고서 어째서 차린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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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다담茶啖: 원래 불가佛家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다과茶菓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려 시대는 숭불사상崇佛思
想이 철저하여 다담상茶啖床에 육류 대신 차와 병과류餠菓類가 주로 올랐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쇠퇴
하고, 술을 위주로 하는 교자상交子床차림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방 관아에서 관찰사 등 사신使臣을 대접하기 위하여 차려 내
는 교자상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상차림이라는 의미에서 다담상이라 하였다.
235) 가체加髢: 여자들이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딴 머리. 흔히 ‘다래’ 또는 ‘다레’라고 하나, 표준어는 ‘다리’이다. 한자
로는 ‘체髢’라 하고,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사치가 심해지자 영조 때는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용하게 하는 가체 금지령을
내려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예장할 때 꾸미는 머리 모양에 계속 가체가 사용되는 등 금체령이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다.
정조 때 다시 사대부의 처첩과 여염의 부녀는 가체는 물론 본머리에 다리를 보태는 것도 금지하고, 천한 신분의 여인은 머리를
얹는 것은 허용하되 다리를 드리거나 더 얹는 것을 금하는 내용의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루어지지 않다가 순조 때에 이르러 비
로소 사라지게 되었다. 다리는 머리 모양에 따라 다리를 머리에 붙이거나 위에 얹어 사용하였다. 조짐머리·얹은머리·새앙
머리·어여머리·대수·큰머리 등은 긴 다리로 모양을 만들어 머리에 얹었고, 첩지머리·쪽머리 등에는 제 머리와 다리를
같이 빗어내려 한데 땋아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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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는가.”라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상하의 복색을 구별하여 정해놓은 것은 조가가 정한 제도가 있
는데, 오늘날 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서 비록 거듭 금한다고 하지만 백성들
을 어지럽히는 폐단이 될 뿐이니, 어찌 다른 신기한 효과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 답한다면, “이것이 내가 말한, 법만으로는 절로 행할 수가 없고 금하는 것만으로는
절로 멈출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반드시 위에서 먼저 행한 뒤라야 아래에서 그것을 본받는
다. 조정에서 먼저 소박하고 검소한 풍속을 행하여 사치를 싫어하고 검소함을 좋아한다
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그것으로 사람을 뽑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금지될 것을 기약하
지 않아도 스스로 금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라. 고 한다.
어떤 사람이 또 묻기를, “사치와 검소는 말단의 예절이요 자질구레한 행동에 불과한 것이
다. 사람이 속이려 한다면 쉽게 속일 수 있는 것이니, 어찌 공손公孫의 베로써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할 것이며, 래공萊公236)의 화납花蠟이 무엇이 문제겠는가?”라고 한
다. 이에 대해서 “비록 래공과 같은 현자도 화납에 대한 비판이 있거늘, 하물며 공손이 거
짓되데다가 또한 베를 입고도 검소함이 없었으니 이것은 소인이어서 다만 거리낌이 없을
뿐이니 어찌 취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근래의 풍속은 의복의 사치, 그릇의 기교, 음식의 풍성함으로 번화한 기상이 있다고 여긴
다. 부잣집에서는 오로지 비교해서 이기는 것에만 힘쓰고, 가난하고 빈궁한 집안에서는
가산을 기울여 이런 잘못을 본받아서 빚을 내고 농장을 팔아 가산을 탕진한 뒤에 그친다.
이른바 부자의 재산이란 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다. 사대부는 관직에서 얻은 것이
고, 하물며 중인 이하는 관에서 잡출한 것인데, 하물며 막임幕任에랴. 근래 각양의 관직은
점차 조그마한 데까지 미쳐 진실로 부정한 명색 중에 손을 대지 않는 일이 없지만 실제로
뇌물을 받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가 관직이나 수령직에 있게 되면 전곡 문서를 모두 장악
한 상황이므로, 한편으로는 눈앞에서 입고 먹는 일에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다음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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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래공萊公: 송宋나라의 명상 구준寇準을 말한다. 내국공萊國公에 봉하여졌으므로 구 내공으로 불린다. 거란이 전연澶淵을 침
범하자 진종眞宗에게 친정親征을 권하여 마침내 거란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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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들의 혼사에까지 보태니 사사로운 꾀를 내어 불법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
찌 온 세상이 모두 탐관오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저도 모르게 불법의 구멍에 자신을 빠
뜨린 것이다.
사대부가 이미 이와 같다면 그 나머지 문서를 훔치려는 부류들에 대해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 의복과 음식에서 근검절약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재물이 산처럼 쌓이
고, 백성들과 나라가 부유하게 되고, 노소와 상하가 각각 품절을 얻고 화락하여 한 사람도
근심하고 고생스럽고 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없다면, 그 번화한 기상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삼대 이후 검소함은 한 문제의 시대가 가장 훌륭하다고 일컫는데, 내 생각
에 호화로운 것도 그때만 한 시대는 없었다. 천자가 조제皁綈를 입는가 하면, 장상이 소
수레를 타고 다니니, 이것이 가장 소박하다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라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부가 있었고, 백성들은 집과 담에 수를 놓을 정도의 풍요함이 있었으며, 노인
도 술 취하여 배부르고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논다. 소 탄 사람을 인도하여도 잔치를 베풀
어 함께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이런 일들이 역사책에 밝고 찬란하게 실려 있으니, 천고의 호화로움이 어찌 단지 어느 한
때 풍속에서 옷과 그릇을 사치스럽게 장식하는 일을 숭상한 일에 그치겠는가? 우리나라
의 갑기匣器237)는 그릇을 사치스럽게 한 것이니, 섬 오랑캐의 화기畫器보다 대단히 뛰어
나다. 연전에 진헌하는 물건 중에서 혁파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으니, 조가가 검소함을 숭
상하는 덕의를 우러러 본받을 수 있다. 그런데 여항의 사족과 서인들의 사치스러운 풍조
는 전일과 마찬가지이므로, 황희와 같은 현신이 오늘 다시 태어난다면 그 빛나는 치적을
찬양하는 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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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갑기匣器: 조선 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에서 갑匣에 넣어 번조한 고급 사기그릇을 말하며, 갑기甲器 또는 갑번기匣燔器라
고도 한다. 『승정원일기』 숙종 3년(1677) 11월 21일조에 보면, 갑기는 바로 어용의 그릇이므로 갑에 넣어 번조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17년(1793) 11월 27일조에는, 조신들뿐만 아니라 하천인까지 모두 갑기를 반상기명盤床器
皿으로 쓰고 있어, 조정에서는 사치풍조를 막기 위해 갑기의 생산을 여러 번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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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명분 名分
명분名分이 제대로 지켜져야 기강紀綱이 바로 서고, 기강이 바로 서야 상하 귀천에 구분
이 생겨 민속民俗이 교화된다. 우리 조선조는 400년 가운데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었고, 이들 병화를 겪은 뒤 200년 동안 태평을 누려왔다. 이것은 실제 은주殷周 이후 역
대歷代 역사에는 없던 일이다.
천지天地의 우로雨露가 초목을 기르듯이 열성조列聖朝의 은택은 백성들을 아름답게 양육
하여 요즘처럼 인구가 늘어난 적이 없었다. 평화와 풍요, 사치가 극에 달하자 놀러 다니고
게으르며, 분수를 넘는 문란한 풍조가 생겼다. 사족·중인·상민·천인 등의 구분은 금석
처럼 굳건한 법과 같았지만, 인심이 옛날 같지 않고 풍속이 점차 심하게 문란해졌다.
대대로 상민이었던 집안이 약간의 재산만 있으면 가계를 조작하여 불법적으로 양반에 붙
어서 유학幼學을 사칭한다. 그들은 자신의 육친六親238)을 저버리고, 다른 집안의 가계에
붙는다. 본향에 거주하기를 싫어하지만 행적을 감추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 무단으로
다른 읍으로 이주하여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있다. 이런 풍속은 모두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지 않으므로 오래 지속해서는 안 된다.
백성들이 이주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인친姻親이 서로 모여 살거나,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주해야 할 경우에 이것을 완전히 금지할 수 없다. 따라서 과
조科條를 엄히 세워 무단으로 이주하는 것만 금지해야 한다. 만일 다른 경내로 옮겨 살아
야 한다면, 그 사유를 갖추어 거주할 읍의 수령에게 소장을 먼저 올려 공문을 받되, 소장
에서 그 지체와 문벌을 열거해야 한다. 만일 사족이라면 “사인士人 아무개가 아무 일로 이
주하여 살겠습니다.”는 내용으로 올린다. 이때 이주자가 한산인閑散人239)이면 한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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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육친六親: 부모父母, 형제兄弟, 처자妻子를 통틀어 이르는 말임.
239) 한산인(閑散人): 품계만을 가지고 직무 없이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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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적고, 양인良人이면 양인良人이라고 적으며, 역명役名이 있으면 역명役名을 적어서
옮겨 살려는 읍에 이송하여 장부에 등록한다.
사족인 경우에는 지체와 문벌을 밝혀서, 고을을 떠날 때 지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사
족이 아니라면 그 분수에 따라 새로 이주하여 살 곳에서는 역을 수행해야 한다. 【사유를
갖추어 관에 올릴 때 해당 읍의 삼향三鄕이 보증을 한 뒤에, 비로소 이문移文을 허락하였
다.】 이렇게 하여 명분을 문란하게 하거나 군역을 피해 떠돌아다니거나 행동거지가 수상
한 부류들에게는 마땅히 그 간악함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옮겨간 고을에서는 만일 공문
이 없다면 그곳에 사는 일을 절대로 허락하지 마라.】 이렇게 법을 세우는 것이 번쇄한 듯
하지만, 사람들은 반드시 백성들이 수족을 놓을 곳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간악한 백성들
이 종적을 감추려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분수를 편히 여기고 바름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방편이 되는 정사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명분이란 것은 곧 상하 귀천을 말했지만, 우리나라는 상하의 사이에 또 상하가 있
고 귀천의 사이에 또 귀천이 있다. 그리고 사족이 있는 것 외에 일명一名과 중인中人이란
것이 또 있다. 상천常賤 계급은 갖가지로 문란함이 더욱 심하다. 이른바 중인中人이란 계
급은 사족과 상천 사이에 있다. 공사천公私賤이 오늘 속량되면, 내일 중인中人으로 자칭
한다. 역을 차정하여 세상으로 내보낼 때에 다른 사람들도 이들을 중인中人으로 대우하
니 혼동混同되어 구별되지 않는다. 중인이 한 세대를 지나고 또 그 다음 세대가 되면, 자
기 근본을 숨기고 양반의 파벌에 가탁하여 마침내 사족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도
그가 사람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그 간악한 계책을 기르고 그 분수를
넘어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상민과 천민, 사족 간의 차이를 돌이켜볼 때, 그것은 엄
연한 계급이며, 그 간격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제나라 사람이 한 번 변하여 노나라 사람
이 되듯이, 지난 행적을 감추고 자신의 계보를 거짓되게 꾸미니 이것은 질서를 심하게 문
란케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명一名이란 사족士族의 서얼庶孼이다. 서얼에는 공사公私 천첩賤妾의
소생도 있고 중인中人과 양첩良妾의 소생도 있다. 그들이 비록 중인과 상민, 천인의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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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아버지는 모두 이름난 가문의 출신이다. 그들에게는 청요직淸要
職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중인과 같다. 이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도리어 중인
中人과 상민, 천인이 자신의 조상을 속이고 자신의 자취를 감추는 부류만도 못하니 이것
은 대단히 문란한 것이다.
만일 법전의 사리로써 말한다면, 계보를 바꿔 종적을 감춘 부류들은 죄를 주어야지 장려
해서는 안 되고, 올곧게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권면해야지 물리쳐서는 안 된다. 계보를 바
꾸고 종적을 감추면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룬 것으로 보아 사족과 비견하고 괴이하게 여
기지 않는다. 올바른 도로써 분수를 지킨다면 그들은 비천하고 미미한 부류로 되돌아가
야 한다. 털을 호호 불어 흠집을 찾아내어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저와 같
이 천한 것이 귀한 것으로 되는 것이 인정상 당연하고 풍속에서 그것을 숭상한다. 저것을
부양하고 이것을 억눌러서 이와 같이 도치한다면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간계함을 기르
고 거짓을 수식하는 일이 된다.
조가朝家에서는 선파璿派240)의 후예와 큰 현자 및 정공신의 후예에게 특별히 역을 면제
하라는 교시를 내렸으니, 이것은 참으로 성대한 덕이고 진실한 뜻이다. 근래 간악한 백성
들은 관향과 호적을 거짓으로 고치고, 파계派系에 가탁하여 군보를 면제받으려 한다. 군
액이 날로 줄어들고 그 해악이 분수를 지키는 양민들에게 미치니 이러한 습속은 진실로
해괴하다.
오늘날의 폐단을 고치려면 10여 식式241)의 장적帳籍을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여, 거짓으
로 고친 자들을 모두 조사하여 군액을 채워야 한다. 각 해당 아문들에게 과조科條를 엄격
히 세우게 하여 선파璿派, 선현, 훈예를 막론하고 면역하라는 관문關文을 보낸다. 만일 계
파의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면, 간악한 청탁을 허락하여 베푼 해당 당상과 낭청을
논죄하고 해당 아전을 율령대로 처벌할 수 있을 것이다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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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선파璿派: 왕실의 후예를 말한다.
241) 식式: 호적을 정기적으로 작성하는 기간으로, 3년이다.
242) 【두주: 오늘날 사람들이 매번 잘못을 바로잡고 폐단을 고치자는 논의를 하지만, 비록 이와 같이 잘못을 고치더라도 어찌 다른
폐단이 없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근래에 온갖 법도가 날로 해이해지면서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들이 생긴 근
원이다. 폐단에 따라 고치는 것이 병든 나라를 고치는 좋은 방책이니, 세상에 어찌 온갖 이익만 있고 해가 없는 일이 있겠는가.
오직 가부可否를 헤아리기만 할 것인가. 이익과 해로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절충하여 시행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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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朝家가 공신의 적장자嫡長子에게 넉넉한 휼전恤典을 특별히 내리고, 충의위忠義
衛243)에 귀속시켜서 관직을 좇는 길을 허락하게 한다면, 중인과 서얼 중에서 해당 아전들
에게 뇌물을 주고 거짓으로 계보를 꾸며 가탁하는 무리들이 연이어 일어나서 조적朝籍에
들어가 수령이 되는 데 이를 것이다. 계보를 거짓으로 꾸며 가탁하는 까닭은 군보를 면제
받기 위함이다. 이것은 진실로 간악한 악습이니, 하물며 임금을 섬기고 백성들을 대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와 같이 간악함을 꾸미는 부류를 용납하겠는가? 교화를 일으키
고 풍속을 돈독히 하는 자리에 나라의 기강을 범한 자를 일임하는 것은 결코 부당하니, 이
것은 마땅히 과조를 엄히 세워 폐단을 개혁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10.4. 거지 流丏
조가朝家에서 길거리의 거지들을 진휼軫恤하는 덕의가 참으로 도타워서 추위가 오면 막
사를 지어 그들을 보호하거나, 진휼청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옷감을 주도록 하였지만 지
금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휼전恤典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하늘이 이 백성들을 낳았으
니 마땅히 버려진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가르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서, 게으름이 천성이 되어 마침내 거지가 된 것이다. 거지들은 길거
리에 모여 하루 종일 배 채우기에만 골몰하고 하는 일은 없다. 이들은 진정 하늘이 버렸고
나라가 버린 백성이다.
거지들은 나이가 들수록 욕망이 커져서, 점차 간악한 도둑의 무리가 되어 서울의 각 상점
에서 날마다 시끄럽게 굴면서 동냥질한다. 만일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포청의 교졸들
과 짜고 몰래 사주하여 장사치들을 함정에 빠뜨린다. 대개 포교와 포졸들은 이들을 창귀
倀鬼로 여긴다. 포교와 포졸들이 도적을 체포할 때에 진짜 도적을 체포하지 못하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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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충의위忠義衛: 오위의 하나인 충좌위忠佐衛의 소속 군대로, 공신의 적장자嫡長子와 숭중한 첩자妾子들이 이에 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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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서 수를 채워 책임을 면한다. 더욱이 그들을 사주하여 거짓으로 공초供招244)하게 만
든다. 평소에도 동냥이 넉넉지 않은 거지들에게 끝없는 재액을 멋대로 더하여 자신이 함
정에 빠지는 데까지 이르니, 장사치들은 거지들을 호랑이만큼이나 무서워한다. 그리고
거지 중에서 일단 포도청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고
여기니, 제멋대로 사는 추악한 사람들조차도 그들과 말다툼하려 하지 않고 동냥질을 하
면 오직 주는 것이 넉넉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주에 서로 모
여 약탈과 도둑질을 멋대로 일삼고, 술 취하고 배불리 먹지만, 이들도 역시 조가朝家가 보
호하여야 할 갓난아기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교화를 입지 못하여 끝내 교화의 밖으로 나아가니, 그 습속을 돌아보면 대단히 밉
지만 그 실정을 보면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다. 지금 조가에서 오부五部245)에 신칙하여 각
동과 거리의 거지들을 모두 조사하여 서울의 부호富戶들에게 일일이 분속케 하여 입히고
먹이게 해야 한다. 그들을 입히고 먹인 뒤에 노복으로 삼는데, 만일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작게는 사적으로 종아리를 쳐서 다스리고, 크게는 해당 부와 법사에 보고한다. 해
당 부와 해당 관사에서 엄히 다스린 뒤에 그들을 주인집으로 환속시킨다.
그들은 본래 놀러 다니며 일을 싫어하는 무리들이니, 그들의 게으름은 습관이 성질과 함
께 이루어진 것이라서 닭과 오리를 길들이기 어려운 것과 같지만, 마땅히 즐겨 좇는 이치
는 없다. 과조科條를 엄히 세운 것은 혹시 복무하는 것을 기피하여 그 주인집을 배신하고
다시 거리로 돌아가 이전의 습속대로 구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경우에는 당부
에서 미루어 다스린 뒤에 주가에 환속시키고, 이것을 정해진 제도로 삼아 그들의 근골로
점차 수고롭게 하여 습관을 이루게 하면 교화되어 양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늙고 병든 무리들이 와서 고을에 머물면, 그들이 온 곳과 거주하는 고을, 관향을 물어 해
당 읍과 해당 동에 압송押送한다2.46) 그 동중으로 하여금 막사를 짓고 그들을 비호하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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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陳述하는 일이나 말을 가리킨다. 공사供辭, 초사招辭라고도 하였다.
245) 오부五部: 조선 시대에 한성漢城을 중부中部·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의 다섯 구역으로 나눈 행정 단위.
또는 각 구역안의 소송訴訟·도로道路·금화禁火·택지宅地 등을 관장하던 관아官衙를 말한다. 태조 3년에 설치하여 고종
31년에 폐하였다.
246) 【두주: 길거리에서 빌어먹는 모든 사람들을 해당 부에서 붙잡아 데려와서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상세히 묻는다. 만일 다른
곳에서 왔다면 본래의 거주지로 압송하고, 일찍이 분속된 사람이라면 전 주인에게 환속하고 또 주인을 배신한 죄를 엄히 다스
려 다시는 빌어먹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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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거둬들여 연명케 한다. 서울은 해당 동중洞中에게 그렇게 하도록 한다. 외읍의 거지
는 지방관에게 각 동리의 거지를 찾아내어 그 거주하는 읍리를 물어서 공문을 작성하여
압송하고, 해당 읍에 그들이 거주하는 방리를 묻고 그 동리의 친족에게 맡겨서, 그들로 하
여금 입히고 먹이고 사역시킨다. 이렇게 하면 한겨울 거리에 쌓인 눈 더미 속에서 쓰러지
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될 것이고, 또한 『주관周官』에서 ‘죽어 이전하기까지는 고을에서 나
가지 않는다.’는 뜻과도 부합된다. 그리고 성조聖朝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교화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만일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입
히고 먹이고 사역시키면, 양인을 눌러 천인이 되게 하는 폐단이 생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자기 한 대에 한정하여 고노雇奴가 되더라도, 오히려 비럭질하다가 도둑의 소굴
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 또 기자의 8조에서는 도둑질하는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
다고 하였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거지나 도둑이 되니, 양인을 천인으로 삼는다 한들
어찌 긍휼히 여길 것인가.
10.5. 잡기 雜技
근래 습속이 날로 투박해지고 농사를 게을리 하며, 백성들의 상업이 더욱 어렵게 된 것은
잡기雜技 때문이다. 장기, 바둑, 노름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근래 이른바 팔목八目247)이란
것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조사朝士, 사족士族으로부터 여항閭巷의 소민
小民들과 촌구석의 나무꾼, 목동에 이르기까지 팔목을 하는 것이 습속이 되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빠져드니 어느새 마음은 병들고 집안의 재산은 탕진되기에 이른다.
놀고먹는 잡된 무뢰배들이 많으므로 이치에 어긋난 말과 해괴한 행동이 점차 퍼져 습속이
된다. 양반과 상민들이 섞여 무릎을 맞대고 앉아, 너니 뭐니 하며 서로 막 대한다. 심지어 조
정의 사대부와 관예들조차 서로 뒤섞여 구분도 없이 대하면서, 저도 모르게 점차 익숙해진
다. 근래 사대부 자손들의 말투가 천박하고 행동이 거칠어진 것은 오직 이것 때문이다. 더구
나 한번 패를 던지는 사이에1 0냥이나 100냥을 잃고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것에 있어서랴.
수중의 돈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을 유인하며, 가산을 탕진하여 다른 사람에게 빚 독촉을
받으면 마침내 도둑이 되어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동생이 자기 형을 속여서 인륜
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시골의 농민들도 모두 그런 잘못에 물들어서 농우와 농량, 옷
을 팔며 솥을 팔다가, 부잣집의 하인이 되기에 이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하고 앉아
서 절제를 잃고 농업을 폐기하며, 마침내 신포와 관곡도 감당할 수 없어서 혹독하게 고문
을 당한다. 그 뒤로 양심이 점차 일그러져 결국 도적이 된다. 그 놀이를 살펴보면 별것 아
닌 듯하지만, 풍속이 점차 투박해지고 폐단이 매우 심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노는 것에 팔목을 설치하여 사람과 가축, 금수를 형상하였는데, 이것들은 서로 겸병하여
집어삼켜 씹으니, 이것은 이미 길상吉象이 아니다.
팔목은 실로 이전에 없던 것인데, 중년 이래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다. 대개 사람의 심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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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팔목八目: 사람, 물고기, 새, 꿩, 노루, 별, 말, 토끼의 여덟을 각각 10장씩 그린 80장의 투전패. 또는 이 패로 하는 투전 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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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러뜨리는 여러 가지 잡기가 있지만, 이처럼 심한 것은 없었다. 대소 민인들이 모두 탐
닉하는 일이 이에 비할 것이 없다. 만일 이것을 엄히 금하여 혁파하지 않으면, 풍속과 농
정의 끝없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마
땅히 과조를 엄격히 세우는 것이다. 팔목을 하는 조사朝士는 영원히 요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양반 자손인 경우는 충군充軍하는 율령을 시행해야 한다. 여항閭巷의 아전과
장교 이하부터는 모두 도둑을 다스리는 율령을 적용시킨다. 이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
시는 이런 노름을 못하도록 하고, 후생들도 다시는 어떤 잡기도 알지 못하게 하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법에는 으레 이런 노름에 대한 금령이 있었지만, 거리와 시전에서 팔목을 만들어 파는 사
람들은 금지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내는 속전贖錢248)을 이익의 일부로 치름으로써 일부
러 판을 벌리게 한 다음, 침탈하는 방도를 열게 한 것이다. 만일 법을 설치하여 통렬히 금
지한다면, 어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만 금지하겠는가? 이것 이외에 또 여러 가지 잡기雜
技가 있으니, 시골에서 더욱 심하여 농사를 해치고 공업에 방해된다.
농가에서 농업을 하는 데에는 하루의 여가를 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낮에는 띠풀을 엮
고 밤에는 새끼를 꼰다. 이것은 『시경』의 「7월」을 증거로 댈 수 있다. 주周에서 기岐 지방
을 다스릴 때에 백성들이 어찌 이런 잡기를 하였겠는가? 모든 방백과 수령들은 잡기를 철
저히 엄금하고 백성에게 감히 태만하고 놀러 다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 근래 외읍의 수
령은 조가에서 행하고 있는 법령인데도 이 법령을 엄히 하여 효과를 거두려는 뜻이 전혀
없다. 만일 특별히 입법하지 않으면, 경외의 각 해당 읍들이 스스로 시행하여 그 효과가
있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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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말한다.
우하영의 천일록 -- 풍속 교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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