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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까지
눅 15:11-32
유엔 산하기구인 KSDN(지속가능개발네트워크)에서 나무병원장인 우종영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중에 <그리움의 간격>이란 제목으로 이런 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 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꼭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 볼 수 있는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거리. "
모든 인간관계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이 간격을 얼마나 좁히느냐에 따라 어떤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간격에는 물리적인 간격도 있고 정신적인 간격도 있습니다.
이외수님 쓴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라는 뜻의 <아불류 시불류>에는 이런 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마주보고 있어도 천리나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가 생각하는 사람과 그대 사이의 간격은 어느 정도인가요."
부부가 한 이불을 덮고 잘 정도로 물리적인 간격이 가까운데 그렇다고 모든 부부의 정신적 간격이 가까울까요? 가깝기보다는 상당히 먼 간격을 두고 살아가는 부부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처럼 남녀의 본성적인 간격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죽하면 <금성에서 온 남자와 화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습니까? 본래 다르게 태어난 데다가, 환경이 다른 데서 자라왔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그 간격이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찰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고 서서히 간격을 좁혀나가면 금슬이 좋은 부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헤어지든가 한 이불을 덮고 자지만 백년 웬수가 됩니다. 그래서 간격을 좁히며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로마의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비스듬하게 뒤로 기대고 있고 하나님은 아담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셔서 손을 내밀고 있는데 아담의 손가락과 맞닿을 정도로 내밀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이 두 손가락 사이에 있는 간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손가락의 간격은 기독교에서 기막히게 설명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손을 내미시고 아담은 수동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담의 중심이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음이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손을 잡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 간격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곁에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유일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몸의 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키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대로, 제 방법대로 살아왔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하고 손을 내미는 것뿐입니다. 그럴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와락 껴안으시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손이 내밀어져 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주님의 손을 잡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서 가장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러나 아직까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누구나 아는 죄인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누구나 아는 죄인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이준석선장, 연쇄살인범으로 유명한 유영철, 강호순, 김길태씨 그리고 어린아이들만 성폭행했던 조두순같은 사람들은 세상이 다 아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던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탕자는 예수님께서 만든 비유의 주인공이 되면서 그 이후 20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죄인 중에 가장 유명한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을 향하여는 손가락질을 합니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 선장이 얼마 전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사형 구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그의 형량이 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욕을 합니다. 이것이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을 향한 세상의 시선입니다.
자식이 둘 있으면 대부분 장남은 보수적이고 순종적입니다. 부모의 기대에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둘째는 영악합니다. 형을 이기려고 하고 진취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둘째가 아버지께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눅 15:12, 현대어 성경)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제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지금 나누어 주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그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장남은 다른 아들의 두배를 유산으로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의 1/3은 작은 아들의 몫이었습니다. 둘째가 하도 조르니 아버지가 손을 들고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유산으로 받은 논과 밭을 처분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도시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준다고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 자식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여전히 거리를 멀리하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전답을 팔아서 뭉텅이 돈을 들고 간 아들은 겁없이 놀고 큰손처럼 투자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 모습은 성경은 이렇게 네 글자로 표현합니다.
(눅 15:13) 허랑방탕(虛浪放蕩)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합니다. 탕자라는 이 말의 탕 字가 바로 여기 본문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탕자라는 말은 ‘주색잡기로 재산을 쓸어 없앤다’는 뜻입니다. 탕자의 생활이 죄악의 한계선을 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탕자가 유산을 받자마자
(눅 15:13)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라는 말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자기의 뜻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 영글지 못한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삐뚫어질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가출’입니다. 부모를 떠나 가출하는 아이들이 잘 되는 일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허랑방탕하는 사람이 잘 될 리가 있을까요?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어도, 외로워도, 때로는 억울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어도 신앙의 상처가 생겨도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합니다. 허랑방탕하며 살던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니 돈을 보고 몰려왔던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성경은 탕자의 이 상태를 말하기를
(눅 15:14) 비로소 궁핍한지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궁핍한 집이라도 막내는 그 궁핍을 모르고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형보다 훨씬 더 호위호식하며 자랐기 때문에 궁핍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결국 돼지 농장의 머슴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 치는 일은 가장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너무나 배가 고파서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추락할 수 있는 한계점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결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탕자는 자기 부친을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으로 보았다.”(실물, 204)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하는 것이 어렵고 헌신하는 것을 어려워하게 되면 탕자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상속받은 재산을 쾌락과 죄악적 방종의 생애로 모두 탕진해 버린다. ”(청년, 408)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 재물, 시간, 젊음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면 탕자입니다 .
(눅 15:13)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교회가 전폭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탕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입니다. 허랑방탕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고백하시기를
(사 53:6, 공동번역)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우리는 아직까지 누구나 아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구원의 문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계시는 데 그 품을 알지 못하고 배회하는 우리는 아직까지 죄인입니다. 우리도 탕자처럼 “이제 나는 죄인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영생하는 말씀이 있는 데 어서 돌아가자”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 집이기에, 내가 살아야 할 집이기에 흠결이 있으면 고쳐야 하고, 손님이 오면 대접해야 하고, 집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해야 하지만 이 집이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집입니다.
2.아직까지 죄인인지 모르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세리와 창기는 모두 다 아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왕따를 당해도 항의도 못하고,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있는 곳에는 감히 얼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안다는 증거입니다. 탕자도 처음에는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로 진정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하나 마음으로 인정 못하는 죄인,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눅 15: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탕자는 아버지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지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인륜을 저버리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선산을 팔았고, 아버지가 땀 흘려 가꾸어온 문전옥답을 술과 도박으로 탕진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하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쾌락의 습성을 버리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야단치면 야단 맞고 아버지의 테두리가 불편하면 감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난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고난이 반복되지만, 좌절이 반복되지만 아버지의 뜻을 읽지 못한다면 아직까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런 탕자, 둘째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장남입니다. 성실한 장남이 여느 날과 똑같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가 집에서 벌어진 잔치를 보았습니다. 둘째가 돌아와서 잔치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출세해서 왔더냐?” “말씀 드리기가 뭐하지만 거지같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 분노는 누구에 대한 분노일까요? 아버지에 대한 분노입니다. 돌아온 동생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왜요? 성경이 말합니다.
(눅 15:29-30)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아들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에게는 자기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둘째가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밤낮으로 울며 기도하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줄 모르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 1-2절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탕자로 비유하고 세리와 창기를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큰아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자기 의에 가득 차 있고, 돌아와야 할 탕자를 향하여 울부짖으며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며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위해 희생하시며 지금도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선교의 현장에 있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집안에 있는 탕자요, 자기가 죄인인 지 모르는 죄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신앙생활에 전념해서 종교성이 높고 신앙심이 깊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큰 아들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인도해 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큰 아들입니다. 심각한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그렇게 원하시는데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롬 3: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깨끗하고 성실했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의 은혜를 믿어야 구원받게 됩니다. 자기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세상에 있는 영혼들과 복음으로 하나가 되는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인 줄 모른 체로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3. 아직까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죄인이 있습니다.
큰아들과 아버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고 공로를 토대로 아버지에게 들이대는 큰아들은 율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둘째는 허랑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으니 고생은 마땅하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의 댓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도 안 된다고 해서 정죄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생명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 이 자체가 중요합니다. 먼 거리에서 아들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눅 15:20) 아직도 상거가 먼데
노인의 눈이지만 오직 아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아들이 반성의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것처럼, 올림픽에 금메달을 딴 선수를 맞이하는 것처럼 떡 벌어진 잔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대사회에서 아들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상징인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탕자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이 복음입니다. 다른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죄많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기뻐 받으시고 당신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고 우리가 최고인 것처럼 대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돌아온 탕자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처음에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면 아담은 뒤로 물러서는 자세이고 하나님은 앞으로 돌진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이 간격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로 발걸음을 옮겨 주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먼저 손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죄로 얼룩진 손을 하나님 앞에 내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기울이면 하나님이 잡아 주십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언제나 뒤로 한발을 빼고 살아갑니다. 다가오는 한 주일은 우리가 나서서 그들이 하나님의 손을 붙잡도록 돕는 한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행복전도축제기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관심사에 마음을 쓰는 자녀가 효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에 마음을 쓰는 성도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온 자들을 섬기고 돌보아 주며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효자입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마음이 여기까지 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있는 여러분들을 향해 달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달려오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형제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이번 행복전도축제주일에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신나는 한주일를 기대해 봅시다. 생명의 잔치를 즐기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한 주일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