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신동엽 시인 서울 문학 기행 (3) :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정착한 서울 성북구 개울가 집 터
서울시 성북구 보문로 168번지인 이곳 개울가 집터는 신동엽 시인이 1959년(30세) 석림(石林)이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작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입선한 뒤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정착한 곳입니다.
신동엽 시인은 인병선 여사와 1956년 결혼한 뒤 맏딸(정섭)을 얻었고, 1958년 충남 보령군에 있는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인병선 여사는 어려운 살림살이를 헤쳐나가려고 부여터미널 맞은편(현재 백마약국 자리)에 ‘이화양장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사하면서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근무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신동엽 시인은 각혈을 하면서 몸이 아팠습니다. 그리하여 폐결핵이라고 생각하고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폐결핵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인병선 여사는 딸을 데리고 서울 돈암동 친정집으로 올라갔습니다. 신좌섭 아드님은 2019년 『푸른사상」』(봄호)에서 신동엽 시인이 1951년 국민방위군 대구 수용소에서 빠져나와 귀향할 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민물 가재를 잡아먹은 적이 있는데, 그것으로 보아 폐결핵이 아니라 폐디스토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신동엽 시인은 가족과 떨어진 채 아픈 몸을 치료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1959년 1월 28일까지 인병선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지없이 애절합니다.
신동엽 시인이 이곳에서 거주한 기간은 1959년 2월 이후부터 1962년 성북구 동선동 5가 45번지에 집을 장만해 이사할 때까지이므로 3년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원네’라고 불리는 집에서 셋방살이를 한 것인데, 손님이 오면 인병선 여사는 작은 아이(좌섭)를 업고 큰 아이의(정섭) 손을 잡고 집밖으로 나가 땅바닥에 강아지를 그리며 놀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집이 좁았던 것이지요. 신동엽 시인은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1960년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했고, 1961년부터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했습니다. 4 ·19혁명의 의지를 담은 시작품 「아사녀(阿斯女)」도 발표했습니다. 따라서 신동엽 시인의 생애에서 이곳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 다음 장소인 신동엽 시인이 타계할 때까지 살던 집터로 옮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