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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유 신도비(權尙遊神道碑) 이의현(李宜顯) 찬(撰)
권상유(1656~1724년)는 안동 권씨 증 영의정 격(格)의 아들로 한수재 권상하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형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윤휴와 박세당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왕명에 의해 반박하는 변설문을 지어 농암 김창협의 찬탄을 받았다. 수원부사로서 관리의 비행을 적발하였고 족징·인징과 양역, 궁장의 절수 등에 대한 폐단을 주장하였다. 정호가 윤증을 논핵한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복직되어 국경 확정을 위해 관서접반사가 되었고 해적의 진무를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었다. 1721년 신임사화때 소론에 의해 탄핵되고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특히 논어와 주역에 통달하였고 성리설에 해박하였다. 묘는 처음에 청풍에 썼다가 11년 뒤에 금산으로 이장하였다. 비문은 이의현이 짓고 유척기가 전액하여 1741년에 비석을 세웠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권상유신도비(權尙遊神道碑)
이조판서 증시정헌권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 의금부 춘추관사 동지 경연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정헌 권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도곡 이의현이 글을 짓고,
선략장군 전 행 세자익위사 세마 민우수가 글을 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 우의정 겸 영 경연사 감 춘추관사 유척기가 전액 한다.
숙종 갑술년(숙종 20, 1694년)에 왕이 중전을 복위하고 과거를 베풀어 경사를 축하하였는데 구계(癯溪) 권공이 병과로 급제하였다. 공이 처음에 중전이 뒤바뀌는 변을 당하여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자기수양을 하니 당시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내외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승문원에 선발되고 사국에 천거되어 들어갔다가 차례대로 자리를 옮겨 봉교에 이르러 시강원설서를 겸임하였다. 사간원정언에 승진하여 오도일(吳道一)의 언행이 거칠고 사리에 어긋나서 동궁의 빈객에 합당하지 않다고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정호(鄭澔)가 ‘윤증(尹拯)은 유현으로 대우할 수 없다.’고 말하자 왕이 엄한 비답을 내리니 이로 인하여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게 되어 세도의 깊은 근심거리가 되었다. 공이 심하게 비방하지 않고 정확하고 상세하게 지적하니 말하는 자들이 마침내 말이 막히니 선비들의 의논이 칭찬하였다.
옥당록(홍문관의 관리)에 참여하여 수찬, 교리가 되었고 중간에 병조와 이조의 낭관, 헌납, 지제교가 되었다. 북평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곧 왕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로 돌아왔다. 강관에 합당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니 부응교 겸 필선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유학자의 가문에 나고 자라서 경학이 매우 풍부하여 경연에서 왕의 마음을 열어 깨우침에 고금을 넘나들고 말하는 데에 반드시 근거하는 바가 있었다.
이때에 명사(明史)를 강론하면서 문장을 통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는데 ‘보고하는 것을 분명히 심사하라. 마지막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라, 바른 사람을 들어서 바르지 못한 사람의 위에 놓으라.’는 등의 글을 인용해서 반복하여 말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그릇된 논리를 펴는 것을 가장 미워하여 일찍이 “명나라 세종이 육학(남송 육상산의 이론)을 금지한 것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몸으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므로 실제의 효과가 더욱 요원하였습니다. 진헌장(陳獻章), 왕양명(王陽明)의 무리들이 서로 이어서 일어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고는 이어 주자와 육상산의 변론을 지극하게 아뢰었다.
윤휴(尹鑴)가 주자를 비방하고 능멸하자 그 유행이 널리 퍼져 박세당(朴世堂)이 사변록을 지어 주자를 배척하니 왕이 유신들의 상소에 따라 그 책을 모아 들여 태우라 명하고는 유신들에게 변론의 글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공이 조목마다 반박하고 구절마다 변론하였는데 의리가 명백하니 농암 김창협공이 그 학식에 깊이 탄복하였다.
조대수(趙大壽) 등이 시험을 주관하는데 사사로움이 개입되어 있는 일이 드러나 옥에 갇혀 조사를 받는데 이익수(李益壽)가 옥관이 되어 구해낼 방도를 강구하니 공이 면전에서 배척하고 굽히지 않았다. 남구만과 유상운이 장휘재(장희빈의 오라버니)를 두둔하였는데 신사년의 변이 일어나니 공론이 모두 분개하였다. 합사해서 두 사람의 죄를 청하는 데 익수가 또 다른 의견을 내세우니 공이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공은 매번 나라를 편안하고 튼튼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일찍이 경연에서 이웃이나 집안사람에게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을 아뢰고 또 양역(良役 : 양민이 해야 할 국가에 대한 역무)과 군제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음을 힘써 말하고 또한 궁장의 절수(折受 : 각 궁이 임금에게서 땅이나 결세를 자기 몫으로 받는 것)가 왕의 덕에 누를 끼치는 것을 말하였다.
계미년에 의금부에 있다가 발탁되어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도착하자마자 귀신과도 같이 간악한 일을 적발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도적들은 모두 없어져 비상시의 북을 쳐서 경계할 일이 없고 일체가 잘 다스려지니 훌륭한 정사가 크게 퍼졌다. 처음에 공이 대궐의 직책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고을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였지만 곧 크게 성과가 있으니 이에 조정은 즉각 공의 공로로 돌렸다.
다음 해에 조정에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고 다시 동부승지, 이조 · 예조 · 공조의 참의가 되었다. 호남관찰사의 자리가 비자 여러 사람이 공을 첫머리로 추천하여 마침내 임명되었다. 남쪽 백성들은 이미 수원에서의 정사를 듣고 하나같이 귀화하니 힘들이지 않아도 일이 이루어졌다. 백성 중에 숙부와 밭을 가지고 소송하는 자가 있었는데 윤리와 의리로 깨우쳐 주니 서로 감동하여 울며 소장을 찢어 버렸다. 기축년에 개성유수에 승진 임명되었다.
공이 연달아 지방의 관직을 맡아 계획하고 시행한 것이 많았지만 요체는 모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고 더욱 청렴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니 모두 비석을 세워 사모의 뜻을 보였으며 임지에 머문 기간은 짧아도 칭송하는 노래가 길거리에 가득하였다.
옮겨서 평안감사에 임명되었는데 공론이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다시 대사성이 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정호(鄭澔)가 대사헌으로서 윤증(尹拯)을 논설한 것이 왕의 분노를 일으켰는데 홍문관의 관리 홍우서(洪禹瑞) 등이 글을 올려 간언하자 왕이 더욱 분노하여 정공을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공도 왕의 뜻을 거슬렀다고 하여 면직되었다. 후에 이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판과 한성좌윤,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청나라 사신이 국경을 정하는 일로 관서 땅에 오자 접반사가 되었다. 해적의 우환이 있어 변경백송을 다스리기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었다. 백성들의 상황을 살펴 남쪽지방에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펴고자 하였는데 공은 단심으로 지혜를 다하여 한결같이 오래 묵은 폐단을 깨끗이 고치고는 돌아와 보고를 하니 빗질한 것처럼 거의 정리가 되어 남쪽백성들이 고무되었다.
북쪽의 지방관이 ‘오랑캐가 우리 국경근처에 집을 지었으니 당연히 금지해야 한다.’고 보고하니 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공은 ‘율곡이 보를 설치한다고 중국에 올린 주문’ 을 인용하고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말이 뒤섞여 나와 모두 어렵게 여겼다. 왕이 마침내 공의 계책을 사용하니 청나라 황제가 과연 부숴 버릴 것을 허락하였다.
하루는 경연 중에 신법(新法)에 대해 언급이 있었는데 공이 ‘주나라에는 부포(인구에 따라 부과하는 포)가 있었고 한나라에서는 정전(중이 도첩을 받을 때 내는 군포의 대납금)을 시행했는데 이것이 가장 시의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선조께서 주돈이 · 정자 · 장재 · 주자를 십철과 같이 올려 문묘에 모시라고 명하셨는데 실행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빨리 거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을미년에 특별히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는데 왕의 지우에 감격하여 충심으로 공경하게 지극히 하니 당시에 형정이 깨끗하다고 하였다.
이돈(李墪)이 시험을 주관하는데 과거응시자와 서로 통하여 유배되어 병사했는데 그 손자가 신문고를 울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일이 형조판서에게 내려오자 원고피고 양쪽을 조사하니 말이 도리에 맞지 않아 형벌을 받게 되었다. 공은 특별히 용서하고 단지 판결문을 올려 왕의 재가에 일임하였는데 그 무리가 오히려 원망을 하였다. 병신년에 이르러 무뢰배를 꾀어 공을 무고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미 밝혀진 일을 반대로 날조하여 아뢰어 파면되었다. 글을 올려 소회를 밝히니 왕이 정중하게 답하고 후회하는 뜻을 보이셨다.
호조판서에 임명되는데 전에는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어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공은 굳게 지켜 새지 못하도록 하니 처음에는 자못 비방이 있었으나 오래되어 재정이 여유가 있고 크게 호응이 있게 되니 백성들이 알지 못하다가 곧 기뻐하며 근래에 가장 잘한다고 다 같이 칭송하였다.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공무를 받들고 요행을 배격하며 은거한 선비를 관직에 등용하여 오로지 격려하고 분발시키는 데에 힘썼다. 남에게 영합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바르지 못한 사람은 비록 친해도 배척하고 위태로운 길에 뜻을 둔 사람은 비록 먼 사이일지라도 반드시 장려하니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흔들어 약화시키려 하여 네 번 이조에 들어갔으나 오래 있지 못하였다. 뒤에 다시 호조의 장관이 되었고 한번 지방의 감사가 되고 판윤, 참찬 겸 경연빈객이 되었다.
경종이 대리 청정할 때에 입대하여 경(敬)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면려하고 경계함이 지극히 절실하니 경종이 감동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경청하였다. 명령을 받아 북관에 가서 시험을 주관하고 돌아와서 민간과 군병의 이해관계를 조목조목 나열하는데 그 말이 많이 법칙에 맞았다. 남한산성수어사를 겸직하여 군대를 신칙하고 좀먹는 것을 방지하며 더욱 양곡의 운반에 유의하였다. 3년을 그렇게 하니 창고가 쫙 차서 넘치고 쌓인 것이 많아 담으로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자년 국상(숙종 승하)이후 사람들이 굳은 뜻이 없이 모두 흩어져 떠나 갈 것을 생각하니 공이 탄식하며 “내가 선왕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아 위태로움을 보고 생명을 바쳐야 마땅하니 어찌 감히 떠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흉악한 무리들이 틈을 타서 드러나 충신과 어진 신하를 도륙하고 장차 위로 세자를 핍박할 계략을 꾸미니 공은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나 근심으로 슬퍼하고 감정이 복받쳐 병을 얻게 되었다. 숙종을 모시는 꿈을 꾸고 깨어난 뒤 시를 지어 기록하고는 마침내 별세하니 갑진년 4월 10일이요, 향년 69세이다.
공의 이름은 상유(尙游), 자는 계문(季文)이다. 다른 자는 유도(有道)이니 친구들이 자주 도가 있다고 칭하니 마침내 이것으로 행세하였다. 권씨는 안동에서 나왔는데 시조 행(幸)은 고려 태조를 도와 태사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보문각제학 극화(克和), 이조판서 양평공 감(瑊)은 부자가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4세를 전하여 오수찰방 증이조판서 주(霔)가 공의 증조부이고 조부는 선산부사 증 좌찬성 성원(聖源)이며, 부친은 사헌부집의 증영의정 격(格)이다. 모친은 증정경부인 함평 이씨이니 돈녕도정 초로(楚老)의 따님이다. 공은 처음에 청풍의 선영에 장사지냈다가 11년 후에 풍수가의 말을 따라 금산 두곡의 동남향 언덕에 개장하였고 부인 증정부인 원주원씨와 함께 모셨다. 원씨는 우윤 만춘(萬春)의 따님이니 공과 덕이 합치하였는데 먼저 별세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소(熽)는 젊어서 죽었고 차남은 전라도관찰사 혁(爀)이고, 삼남 위(煒)는 역시 요절하였으며 딸은 대사헌 이현록(李顯祿)에게 출가하였다. 서자 3인은 영, 훤, 강이고 서녀 3인은 이장발(李長潑), 김성휘(金聖彙), 김현좌(金鉉佐)에게 출가하였다. 소는 계자 이성(彛性)이 있고 혁은 4녀를 두었으니 사인 민백흥(閔百興), 이현철(李顯哲), 심관지(沈觀之)에게 출가하였으며 딸 하나는 어리다. 위는 계자 약성(若性)이 있고 2녀는 사인 민백첨(閔百瞻)과 김두형(金斗衡)에게 출가했다. 이현록의 아들은 판관 권중(權中)이고 딸은 진사 심유(沈鑐)에게 출가했으니 내외손자, 증손이 모두 20여명이다.
혁(爀)이 이미 묘를 받들어 옮겨 봉하고 여러 의전이 구비되었으나 오직 비석을 세우지 못했는데 내가 공을 가장 깊이 안다고 하여 집안에 전해오는 글을 보내어 행적을 기록하게 하여 비문을 새기려 하였다. 다만 이렇게 늙고 병들어 정신이 흐리고 기력이 없는데 어찌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 밝힐 수 있겠는가? 삼가 공의 경력과 가족의 계통을 대략 서술하고 한두 가지를 붙여 서술한다.
의정공은 맑은 이름과 곧은 절개로 후손에게 모범을 세우고 큰형 수암공은 도학이 당시의 사표가 되었으니 공은 항상 부사로서 섬겼다. 또 우암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가르침을 받고 영향을 받아서 능히 이룬 바가 있으니 그 대대로 쌓은 덕과 사제 간의 아름다움, 이와 같은 것을 지녔다.
의정공이 돌아가시자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 거의 죽게 되었고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항상 마음 아프게 사모하는 정을 품어서 외가에 대해 더욱 후하게 대접하였다. 큰형님의 음식이나 의복은 때마다 계속하여 받들어서 제절의 법도에 하나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매양 집이 멀어 계속 만날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중년에는 옆에 집을 짓고 관청에서 물러나오면 곧 돌아와 옆에서 모셨다. 조카나 손자들을 대하는 데 내 자식과 차이가 없으니 가난하여 집안을 다스릴 수 없으면 밭을 주어 일을 하도록 하였다. 선조를 받드는데 더욱 힘써 제학공과 양평공으로부터 외가 쪽의 선조명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같이 묘소를 높여 세웠으니 그 마음과 행실이 독실하고 진지한 것, 이와 같은 것을 지녔다.
어려서부터 날마다 옛 책을 많이 읽었다. 성리설에 더욱 전일하고 정미하였으며 논어와 주역을 가장 좋아하였고 『소학』·『근사록』·『심경』 등의 책에 대해 넓게 알아서 평상시의 행동이 경서에 근거함이 있었다. 일찍이 태극에 대해 읊기를 “청컨대 밝은 달의 둥글고 둥근 그림자를 보아서 앞의 냇물과 뒤의 냇물에 나누어 도장을 찍고자 하노라.”라고 하였으니 그 평소에 습득한 바를 알 수 있다. 만년에 자질들에게 ‘매일 세 번 반성하는 계’를 만들어서 한번 생각하고 한번 일을 함에 모두 이것으로 반성하고 살펴서 마음에 새겨 고쳐야 한다고 명하였다. 또 경계하기를 “겸손은 학자가 죽을 때까지 지녀야할 부적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라.”라고 하였다. 그 학문하는 데에 부지런 한 것이 늙어서도 더욱 게으르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을 지녔다.
세상이 혼탁하면 들에서 농사짓고 세월이 깨끗하면 조정에 나아가니 나가고 들어옴이 올바르고 옛 의리에 능히 부합하였다. 몸가짐을 삼가하고 지조를 굳게 지켜 구차하지 않았다. 숙종 말년에 동료들 중 식견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설을 만들다 곧 공공연히 배척하였다. 네 재상이 피해본 소식을 듣고는 식사를 물리치고 여러 자식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그 춘추의 대의에 대하여는 지키는 것이 더욱 엄격하였다. 갑신년에 왕이 제단을 설치하여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지내라고 명령하자 조정의 의논이 외방의 번국에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공이 제후국에서 왕을 제사지내는 일을 인용하여 의심을 꺾어 버렸다. 이보다 앞서 우암이 만동묘를 창건하여 두 황제를 제사지냈는데 뒤에 임금에게 보고가 되었다. 혹자는 이일은 당연히 사림에게 맡겨야 하며 조정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공은 다시 이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그 명분을 세우고 의리를 숭상하는 것, 이와 같은 것을 지녔다.
아! 공은 깨끗하고 솔직하며 질박하고 후덕한 자질과 청렴결백하고 검약한 절개를 지니고 또 학술로 능히 왕을 보좌하였다. 명성과 품행을 갈고 다듬어 세상의 구차하고 비천한 언론 보기를 비루하게 여겨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으니 어찌 사우중의 진정한 군자요, 조정의 어진 대부가 아니겠는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더욱 비루하게 되어가고 이익을 탐하는 마음은 하늘까지 가득하여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러우니 다시 할 말이 없거니와 생각하니 공을 구원에서 일으켜 세상을 가르쳐 격려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구나. 헛된 글이지만 전하여 후세에게 고하여 밝히고 우리 무리 중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일일 것이다. 마침내 명하노라
한사람 훌륭한 분 있으니 뜻과 기상이 세속에서 뛰어나더라.
집안에서 교훈을 물려받아 학문과 도덕의 진리에 심취하였네.
험하고 어려운 때를 만나면 가슴속의 보물을 스스로 소중히 하고
세상의 도가 바로 잡히면 구부린 몸을 곧 펴서 나왔네.
영예로운 길에서 머뭇거리니 오직 의리만 따름이라네.
남도의 백성 어루만지니 교화가 행해짐이 따뜻한 봄과 같네.
여러 차례 발탁되니 명망이 많은 벼슬아치들을 내려다보았네.
호조를 맡아 빈민을 구제하고 재정을 다스림이 공평하였고
이조에서 인사를 맡으니 정성스럽게 인재를 선발하였네.
자기 몸을 잊고 마음과 힘을 다하니 나라의 충성스러운 신하일세.
공은 최고로 곧고 순수하여 척추에 단단히 붙어있는 것과 같아
부정을 배척하고 인을 부호하며 끝내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고 갈아도 얇아지지 않았네.
송나라 미치광이가 입을 놀림에 주자가 꺾어 버리더니 가까운 곳에서 혼란은 한손으로 막아버렸네.
황제의 제사를 힘써 도와 오나라 부차가 섶에서 잤던 의리를 힘써 쫓았네.
세상이 어지러워 진 기사년(황파=기사년: 송시열이 유배됨)부터 정축, 무인년까지
의리는 가을하늘처럼 늠름하였으나 근심으로 고통스러웠네.
비록 영원히 묻혀 닫혔지만 그 정신은 가려지지 않네.
아! 지금에 이르러 세상은 더욱 가라앉고
이욕과 유혹으로 가득 차 여러 사람이 모두 눈을 찌푸리는구나.
공도 세월을 돌려 본다면 또한 응당 눈살을 찡그릴 것이다.
내가 글에 거듭 말하며 아울러 어리석게도 풍자하여
비석에 새기니 영원토록 끝이 없이 볼지어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신유년(영조 17, 1741년)에 세움.
바름으로 사람을 감복시키는 것을 ‘정’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질로 이치를 지닌 것을 ‘헌’이라 한다.
吏曹判書贈諡正獻權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春秋館事同知 經筵成均館事 世子右賓客五衛都揔府都揔管贈諡正獻權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李宜顯撰」
宣略將軍前行 世子翊衛司洗馬閔遇洙書」
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兪拓基篆」
肅宗甲戌。上復中宮位。設科稱慶。癯溪權公實登丙科。公始當黃裏之變。廢擧自修。時望已蔚然。至是朝野相賀得人。選槐院。薦入史局。序遷至奉敎。兼春坊說書。陞拜司諫院正言。首劾吳道一言行麁悖。不合宮賓。鄭公澔言尹拯不可待以儒賢。上下嚴批。因此是非不明。深爲世道憂。公不主激訐。指陳詳的 窾。言者遂詘。士論多之。參玉堂錄。爲修撰,校理。間爲兵吏曹郞,獻納,知製敎。除北評事未赴。輒還邇列。以講官難其人也。陞副應敎兼弼善。公生長儒門。雅富經學。法筵啓沃。出入古今。言必有稽。時講明史。因文陳戒。引敷納明試愼終于始擧直錯枉等語。反復爲上言之。最惡背經訓逞異說者。嘗進言曰。皇明世宗禁絶陸學。非不善。以其無身敎。實效愈邈。陳,王之徒相繼而起。寧不慨然。仍極陳朱,陸之辨。
自賊鑴詆侮朱子。流波浩漫。有朴世堂者著思辨錄。以斥朱子。上因儒疏。命取入其書火之。令儒臣作爲辨說。 公條駁句析。義理明白。農巖金公深歎其學識。趙大壽等掌試用私事露囚覈。李益壽以獄官營救。公面斥不饒。南九萬,柳尙運扶護希載。辛巳蠱變起。公議齊奮。合辭請兩人罪。益壽又立異。公劾罷之。公每以安固邦本爲要。嘗於經席。陳侵徵隣族之弊。又力言良役軍制不可不變通。又言宮庄折受有累聖德。癸未。自禁直擢拜水原府使。始至。發奸如神。吏人讋伏。盜賊散落。桴鼓弗警。一切治理。政聲大播。初公由經幄出。人疑不閑吏事。乃沛然有裕。於是朝廷駸駸以事功歸之矣。明年。入爲大司諫。轉同副承旨,吏禮 工三曹參議。湖南伯缺。羣議擧公爲首。遂拜之。南民已聞水原政。翕然歸化。不勞而事集。民有與叔父爭田者。牖以倫義。相與感涕裂券。己丑。陞拜開城留守。公連任藩府。多所設施。要在便民。尤以淸白自厲。俱立碑見思。居留又日淺。而謳謠載路。移拜平安監司。公議惜其出。轉大司成。拜都承旨。鄭公澔以都憲論尹拯事。激上怒。玉堂官洪禹瑞等上箚規諫。上益怒。並鄭公竄逐遐裔。公輒繳還忤旨免。後歷吏禮兵刑工五曹參判,漢城左尹,副提學,大司憲。淸差以定界事至關西。爲接伴使。有海憂飭邊。爲湖南廵撫 使。兼察民隱。以遺愛在南也。公單心竭智。一意蠲革宿瘼如洗。歸又覆奏。爬櫛殆盡。南民爲之鼓舞。北路藩臣啓言虜人作舍近吾界。宜禁。上問諸臣。公引栗谷論設堡奏聞事。以爲當遵。羣言錯出多難之。上卒用公策。虜主果許撤毁。一日筵中語及新法。公言周有夫布。漢行丁錢。此最合時措。以副价赴燕還。言先朝有命周,程,張,朱躋十哲列而未行。宜亟擧從之。乙未。特陞刑曹判書。感激知遇。盡其哀敬。時稱刑淸。李墪主試。與擧子通坐。謫病死。其孫擊鼓訟寃。事下司寇。兩造究問。語屈當刑。公特寬之。只上備聽 裁。其倘猶怨。至丙申。誘亡賴子誣公傅致獄。旣事白。反捏奏命削職。已叙辭。上優答示悔意。拜戶曹判書。前多施私惠以沽譽。公輒堅守勿洩。始頗騰謗。久而財用裕。有大策應。民弗知。乃讙然齊頌以爲輓近最。及判吏部。奉公抑倖。登進遺逸。專務激揚。弗徇人持己。不靖者雖親亦斥。立脚危途者雖疎必奬。以此多欲撼撓。四入俱不暖席。後又再長度支。一爲宗伯。爲判尹,參贊。兼經筵賓客。景廟代理。入對敷演敬字。勉戒切至。景廟動容傾聽。承命試士北關還。條列兵民利害。語多中窾。兼南漢守禦使。飭戎旅防耗 蠧。尤留意餽餫。爲之三年。府庫充溢。至於露積不垣。庚子大喪後。人無固志。皆思散去。公歎曰。吾受先王厚恩。當見危授命。何敢去。亡何。羣兇闖逞。屠戮忠賢。計將上浸貳極。公罷歸鄕里。憂傷慷慨。疾病。夢侍肅廟。覺而以詩記之。遂卒。甲辰四月十日也。春秋六十九。公諱尙游。字季文。一字有道。朋友多稱有道。遂以此行。權氏出安東。鼻祖幸。佐麗祖爲太師。入我朝。寶文閣提學克和。吏曹判書襄平公瑊。仍父子有名于世。四世而諱霔。獒樹察訪。贈吏曹判書。寔公曾祖。而祖諱聖源。善山府使。贈左贊成。考諱格。司 憲府執義。贈領議政。妣贈貞敬夫人咸平李氏。敦寧都正楚老女。公始葬淸風先兆。後十一年。用形家言。改葬錦山杜谷戌坐之原。以配贈貞夫人原州元氏祔。元氏右尹萬春女。與公合德。先卒。有子三人女一人。長子熽蚤夭。次爀弘文校理。次煒亦夭。女適大司憲李顯祿。庶子三人。爀旣奉遷封塋。諸典具備。唯牲石未有樹。謂不佞知公最深。委以家傳。俾紀蹟以刻。顧此老病昏眊。何能闡發德懿。謹略叙踐歷族系。附述其一二。議政公以淸名直節。標揭後昆。而伯兄遂菴公道學爲世宗儒。公常事以父師。又嘗出入尤菴 先生門。薰襲浸灌。克有成立。其世德師資之美。有如此者。遭議政公喪。哀毁幾滅性。幼失恃。恒懷痛慕。待外氏加厚。伯氏膳服。隨續奉助。歲月之制。一無所缺。每恨家遠。不得源源。中歲。築其側。解官輒歸侍。待姪孫無間己出。貧不能家。田以業之。尤力於奉先。自提學襄平。以至外先名賢幽宅。一皆崇植。其內行篤摯。有如此者。少日多讀古書。尤專精性理說。最嗜論語周易。淹貫小學近思錄心經等書。日用云爲。動有經據。嘗詠太極曰。請看皓月團團影。分印前川與後川。平日所得。此可見焉。晩歲。命子姪爲日三省契。一念 一事。皆有以省察而剋改之。又戒之曰。謙是學者終身符。爾曹識之。其勤於爲學。老益不懈。有如此者。世溷而耕野。時淸而揚廷。出處之正。克合古義。持身飭操。介然不苟。肅廟末年。儕流之無識者。刱爲利害說。輒顯斥之。聞四相被禍。却食戒諸子勿赴擧。其於春秋大義。秉執尤峻。甲申。上命設壇祀神,毅二皇。朝議疑非外藩所宜。公引侯國祀王者事以折之。先是尤菴創萬東祠祀二皇。後聞于上。或有言當付之士林。朝家不當與議。公又言其非。其立名崇義。確有所守。有如此者。噫。公有白直質厚之資。廉靖 儉約之節。又能輔以學術。鏃礪名行。視世苟賤汙下之論。鄙之若凂。豈非所謂士友中眞君子。朝著間賢大夫耶。至于今玆。世趨益卑。利慾滔天。泯泯棼棼。無復可言。思欲起公九原以風勵之。而不可得焉。則垂之空文。以明告後世。俾知吾黨乃有如許人。亦一事也。遂爲之銘曰。
有美一人。志氣超塵。襲訓天倫。酣飫道眞。値時艱屯。蘊寶自珍。世道鼎新。蠖屈乃伸。榮路逡廵。惟義是循。曁撫南民。化行如春。登擢斯頻。望臨簪紳。度支振貧。理賦惟均。天官秉匀。聿精鑑掄。盡瘁忘身。爲國藎臣。 最公貞純。硬着脊夤。斥邪扶仁。終莫緇磷。樓狂鼓唇。折之於閩。尼波渾淪。隻手以陻。力贊皇禋。勉追吳薪。黃巴之忞。以及丑寅。義凜秋旻。憂用添呻。縱閉厚窀。不昧其神。噫玆之臻。世益沉湮。利誘津津。羣目齊瞤。公返星辰。亦應深顰。我詞于申。兼以風嚚。刻之堅珉。永眡無垠。
崇禎紀元再辛酉立」
以正服人曰 正 智贊有理曰 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