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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깊다.
일반적으로 의존하며 공영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갖는 복잡한 감정이 슬픔이다. 지금 나의 감정은 그러한 감정을 넘어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어금니를 깨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도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 간혹 생각을 키우며 살았지만 막상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캄캄하기만 하다.
13시 55분 부음이 왔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으면 일절 다른 말을 섞지 않고 삶을 종료한 시간만 보내온 것이다. 민망하다는 생각에서 되물을 수 없었다. 앉은자리에서 그냥 부고란을 찾아보았다. 연합통신의 부고란을 맨 처음 열어 보았다. 떴다. 분명 형님의 존함이셨다. 믿고 싶지 않아 다음, 네이버, 포털 사이트를 열어 확인해 보았다. 마찬가지 글이 떠 있었다. 그래도 믿고 싶지 않아 네이버로 들어 가 일간지를 뒤적거렸다. 동아, 조선, 중앙, 경향 등등에도 떠 있었다. 고 안동인 안현우 부친상 알려 온 시간과 일치하였다. 이화여대 서울 병원 장례식장 8호실. 장지 송추.... 양친이 계신 곳이다. 그래도 믿고 싶지 않었다. 양친을 잃은 후 부모님 같은 형님이셨다. 칠 형제, 우리 모두의 형제 숫자다. 동찬, 동인, 동호, 동훈, 동환, 동우, 동진, 딸은 없었다.
동찬이 형은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차가 상당하게 차이가 있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호적에서 확인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통해 익혔을 뿐이다. 다음은 동인형, 동찬이 형이 세상을 떠난 후 맏이가 되었다. 형님과도 12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가 있어 생각이나 생활의 기준이 엄청 간격이 컸었다. 부모님 같은 형님이셨다. 눈물을 주르륵 훌리며 주마등처럼 흐르는 형님과의 기억들을 되새김하고 있었다. 형님은 맏이 역할로 부모님께 효자였다. 아버님이 한전에서 근무하실 때 어머님 싸주시는 도시락을 매일 들고 가 아버님께 드린 착한 아들이었다. 아주 오래전 서울에서도 물을 길어다 주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물을 사 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머니가 물 때문에 고생하신다고 정원 주목나무 아래에 직접 곡괭이와 삽을 들고 우물을 파서 펌프를 설치해 드려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린 아들이었다.
많은 동생들의 학용품 값이라도 보태겠다고 정원 라일락 나무 근처에다 앙고라토끼를 키우기도 한 형님이셨다. 특히 9살 먹은 세 째 인 내가 동내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넓적다리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한전에서 운영하는 한일병원에 수술 후 기브스를 10개월 이상하고 있어 운신이 불가능하여 학업을 할 수 없었다. 어려운 위기를 형님은 당신 친구 고대 법대생 친구에게 나를 과외공부를 시켜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해 준 좋은 형님이셨다. 병역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형님은 징집되어 논산 훈련소로 떠나셨다. 당시 어머님은 많이 우시는 것을 보고 따라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체국 아저씨가 어느 날 양회 봉지 쌓인 커다란 짐을 갖다 주고 가신 후 풀어 보시다 어머니는 또 한 참 우셨었다. 형님이 입대하시면 입고 가셨던 사복이 집으로 보내온 것인데 진흙 투성의 옷을 보고 우셨던 것이다.
소정의 교육을 마치시고 그러나 형님은 용산 미 8군 안에 있던 유엔사에 근무하시게 되어 집에도 자주 오셨고 동생들을 영내로 초대하여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도록 한 형님이셨다. 쉽게 우리 곁을 떠날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않었는데 부음을 받고 보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특히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코로나 영향으로 마음대로 면회가 되지 않아 뵙을 수가 없었던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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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차가 막히는지 중간에 전화벨이 자주 울렸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출발하였는데 ~~ 그래도 정확한 시간에 맞춰 형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입관예절에 참여하였다. 고작 내가 형님에게 들려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형님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백세시대에 고작 팔순 넘어 가시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며 따지듯 울고만 있었다. 형수님은 우시 다가 가 속삭이듯 여러 가지 말을 하시고 다시 우시는 형수님이 안쓰러웠다. 형제들끼리 노래방으로 몰려 가 노래를 부를 적에 형님이 선택하시는 노래는 갈대의 순정과 하숙생이셨었다. 흥과 열정도 많으셨던 형님, 피부 트러블과 심장질환으로 말년 고생하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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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묻혀 있는 형님의 Dead Mask, 혈기가 사라진 파리한 모습이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은 극단의 표현 같아 너무 속상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안절부절못했지만 형님께서는 벌써 저만치 가고 계시고 있다는 사실에 슬픔만 배가되었다. 참 아프다, 너무 아프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며 은빛 못으로 나의 심연의 깊은 곳을 누군가 아프게 박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한 아픔 속에서도 속삭이듯 형님에게만 들려 드리는 나의 이야기가 마음에서 울려 나왔다. 형님! 장형님! 무슨 급한 일이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이리도 급한 발걸음으로 이승의 모든 삶의 행장을 지우고 떠나십니까?
기여코 가셔야만 하시는 길이시라면 홀가분하게 다 내려놓으시고 삶의 경계를 넘으시기 소원해 봅니다. 잡다하게 쌓여 형님의 마음을 어지럽힌 모든 것은 빛과 바람에 널어놓으시고 그냥 홀가분하게 곱게 내린 달빛 그늘을 하숙생을 부르시며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그러나 저에 마음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이 형님과의 삶의 추억은 정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형님에게 쉬운 말을 그렇게도 쉽고 편안한 말인 형님 사랑합니다. 말을 이제야 마음에서 꺼내서 드리는 못나고 어리석은 아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영면하시옵소서. 형님! 사실 형님을 많이 사랑했었답니다. 형님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아니 형~~~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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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에 애도와 함께 격려해 주신 친인척 그리고 문상에 참여해 주신수많은 각계의 문상 제위분께 허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인형의 세 째 동생 드림.-
첫댓글 천국으로 가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천국낙원 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도드리며~*
사랑하는 형님을떠나 보내고 마음아파 하시는 리더님께도 위로의 마음 전합니다~*
꾸벅, 꾸벅~기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롭고 애닮은 마음 시간이 안아주겠지요. 조금씩 조금씩 시간 속으로 흘러가겠지요. 다시 위로주신 마음 고맙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천상 낙원의 복락 누리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리더님의 허전한 마음과
아픈마음~~
하루빨리 씻어 시기를요.^^**
기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꾸벅~~ 혈연의 가치는 존재성이 아니겠습니까. 원래 그대로만 있어주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세에선 불멸을 허락하지 않는 창조성, 그 질서의 끝은 소멸이라 애닮은 것 같습니다. 범부이기에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시간이 이 슬픔도 다 안아주리라 믿습니다. 잘 추수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