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중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암흑의 시대, 종교재판, 정체된 기독교 지배 등일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중세 역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갔던 활기찬 시대였으며 그리고 여기, 중세시대서 가장 훌륭한 여성이라 여겨졌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있다.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영국의 왕비였었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1122-1204)
리처드 사자심왕(Lionheart)과 존 실지왕(lackland)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12세기 유럽서 가장 강력한 여성으로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고 그녀의 궁정은 중세 문화와 '궁정풍 연애 시가'의 중심지였었다.
가장 아름답고 고귀했으며 총명하면서도 자유로운 여성이었던 엘레오노르는 중세 유럽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제일의 상속녀>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아키텐의 공작 기욤 9세의 손녀로 태어났다. 기욤 9세는 제 1차 십자군 원정에서 명성을 날렸었는데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최초의 트루바두르(음유시인)이었다는 것이다. 쾌활한 기욤 9세의 궁정은 문화의 중심지로 중세 유럽서 가장 화려하였고 음유시인, 이야기꾼, 악사들로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엘레오노르가 성장한 아키텐의 푸아티에는 오래된 교회와 수도원 등 중세적인 전통과 고풍스런 라틴 문화가 흠뻑 배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아름다운 루아르 강에서부터 피레네 산맥까지 이어져서 파리와 보르도, 가스코뉴 사이에 위치하였기에 프랑스 문화의 교차로이자 고대 로마와 프랑크 세계의 접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련되고 향락적인 귀족문화가 전개되어서, 파리에 있는 카페왕조의 거칠고도 엄격한 기풍과는 대조를 보여주었다.
이곳 따뜻한 남프랑스에서, 아키텐 공작이며 푸아티에의 백작인 기욤 10세의 딸 엘레오노르는 총명함, 쾌활함, 활동적인 성격, 의지력을 소유하였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숙녀로 성장한다. 또한 조부와 마찬가지로 역시 음유시인인 아버지로부터 노래를 배우며 '궁정식의 사랑'을 습득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의 그런 행복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죽음에 뒤이어 남동생, 그리고 1137년에 아버지마저 죽자 끝이 난다. 고아가 된 15세의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작령의 유일한 상속녀로서 막대한 부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아키텐 공작령은 프랑스 영토의 약 1/2를 차지하는 거대한 영토였었다. 거기다 대대로 아키텐의 공작은 보르도와 가스코뉴에 영지를 갖고 있으면서, 바다를 접하고 있는 땅과 공작 소유의 광활한 포도밭도 있었다. 그렇기에 풍요로운 농작지와 소금, 오늘날에도 유명한 보르도산 최고급 포도주로 막대한 부를 자랑하였었고, 이를 한 몸에 상속받은 어린 여공작은 유럽 제일의 신부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보호자로 자처한 프랑스의 루이 6세 비만왕은, 공작령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엘레오노르를 아들인 왕세자 루이(1121-1180)와 결혼시킨다.
<프랑스의 왕비>
1137년 7월의 결혼식 후, 병상에 있던 루이 6세는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고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16세였던 루이 7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에게 첫눈에 반했었다고 한다. 숭배하다시피하며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였지만...엘레오노르 측은 그렇지 않았다.
본래 차남이었던 루이 7세는 성직자의 길을 걷기 위해 수도원에서 키워진 인물이었다. (중세에서는 장남은 후계자. 차남은 성직자, 삼남은 군인으로 키워지죠.) 그러나 형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었는데 왕보다는 수도승에 가까운 성격으로 허약하고 둔하고 지루하며 진지한 사람이었다.
궁정식 사랑을 노래한 천재적인 음유시인이자 호걸이었던 조부와 부친 밑에서 자란 그녀와 성장배경이 달랐을 뿐더러 활발하고 예민한 엘레오노르는 루이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엘레오노르는 세련되며 햇빛 찬란한 푸아티에에 비해 어둡고 지저분한 파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남편의 고문관인 클레르보 수도사 베르나르두스의 지나친 참견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비록 훗날 샹파뉴 백작부인이 되는 딸 마리가 1145년 태어났고 루이 7세의 사랑은 여전하였지만 이들 부부사이는 1147년의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갈등이 표면화된다.
제 2차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 왕국을 투르크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동원된 것이었는데 마침 루이의 수도승 같은 생활에 지루해하던 그녀는 십자군 원정에 무척이나 열광하였다. 그녀는 아키텐으로부터 군대를 모으고 군사들을 치료해준다는 명목으로, 300명의 귀부인들을 이끌고 남편과 동행을 하게 된다.
십자군 원정에 왕비가 동행한 일은 이전에도 여럿 있었지만 엘레오노르처럼 아름답고 젊은 시녀들을 대동하고서 가는 곳마다 염문을 뿌리는 왕비는 처음이었다.
이 화려한 행렬은 그녀의 숙부인 레몽이 군주로 있는 안티오크에 도착해 그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된다.
레몽은 엘레오노르보다 겨우 서너 살 연상으로 루이보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금발의 기사였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한 엘레오노르와 레몽은 무척이나 가깝게 되고 둘을 둘러싼 염문은 루이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거기다가 전투 작전에 있어서 레몽은 북쪽의 투르크를 먼저 격퇴시키는 것이 예루살렘을 가장 안전하게 만들 것이라는 의견을 내세웠고 엘레오노르도 그의 편에 섰지만... 루이는 그 계획에 반대를 하고서, 예루살렘을 곧장 진격하기로 하고 왕비가 예루살렘까지 따라가야 한다고 요구하였었다.
이에 화가 난 엘레오노르는 그들의 결혼이 무효라고 발표하는데, 그녀의 발언에 감정이 상한 루이는 엘레오노르를 안티오크에서 강제로 출발시킨다.
결국은 이 2차 십자군 원정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엘레오노르와 루이는 각각 다른 배를 타고 프랑스로 귀국한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이혼을 탄원하기 위해 교황을 방문하였다. 이혼 대신에 교황은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했고 다시 같은 침대에서 잠자도록 설득하였었다.
교황의 중재 덕에 프랑스로 돌아온 후 이들의 화해는 잠시 이루어지는 듯 했고 엘레오노르는 둘째 딸을 낳지만...그들의 결혼 생활은 전보다 더 악화된다.
거기다 원정의 실패를 왕비의 탓으로 돌리는 비난과 그녀에 대한 추문이 그치지 않았으며, 교황에게 이혼을 처음 요구한 사람이 왕이 아닌 그녀라는 사실은 또 한 차례의 파란이었다.
결국 1152년. 이제 이혼을 원하는 사람은 엘레오노르 뿐이 아니었다. 루이 역시 성격 차이와 그녀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하게 된다.
둘은 자기들이 7촌내의 친척이라는 혈연관계를 이유로 들어 교황에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물론 왕실 내에서 가까운 혈연관계의 결혼은 흔했지만..귀족들은 이혼을 원할 때는 결혼 후에야 뒤늦게 교회의 근친간의 금혼 법을 알게 되었다며 결혼을 무효화시키곤 했었었다.
1152년 3월 결혼은 무효로 돌아갔고, 관습에 따라 엘레오노르의 상속 영토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 모두들 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상속녀의 귀추를 주목하였다. 수많은 청혼자들이 그녀와 재산을 차지하고자 하였고 파리에서 푸아티에로 가는 길에 그녀는 유괴 미수자들을 따돌리면서 도망을 쳐야만 했다.
그리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엘레오노르는 깜짝 놀랄 선택을 하게 된다. 이혼한지 불과 8주 만에 앙주 백작 헨리 플랜태저넷(1133-1189)과의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엘레오노르는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19세의 헨리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있었고 나이 차는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둘은 아주 잘 어울리는 부부가 되었다.
거기다 영국 왕 헨리 1세의 손자였던 그는 앙주 백작, 노르망디 공작이었었는데, 결혼으로 아키텐 공작령까지 합해져서 프랑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헨리는 유럽 제일의 봉건 영주가 되었고 엘레오노르가 떠난 루이 7세는 왕권에 중대한 위기를 가져오고 프랑스 내 광대한 영토를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후, 둘 사이는 무척이나 나빠졌으며 프랑스-영국의 100년 전쟁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1154년 엘레오노르의 막대한 재원과 지지에 힘입어 헨리 플랜태저넷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 즉위를 한다.
<영국의 왕비>
엘레오노르는 1154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왕비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후 14년 간은 왕비로서의 전성기였다.
루이 7세와의 15년 결혼생활에는 두 딸만 태어났지만, 헨리와의 부부 사이는 좋아서 8명의 자식들이 차례로 태어났다.
속도위반으로 태어난(엘레오노르는 결혼할 때 임신 6개월이었다.) 윌리엄을 비롯해 다섯 아들이 태어났고 (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과 세 딸(마틸다, 엘리너, 조앤)이 있었다.
아들 헨리는 아버지의 생전에 '젊은 왕'으로 대관식을 하였었고 그녀가 가장 사랑하였으며 아키텐 공작위를 물려주고자 한 리처드는 그 유명한 사자심왕. 딸 마틸다는 작센과 바이에른 공작과 결혼하였고 조앤은 시칠리아의 왕과 엘리너는 카스티야의 왕과 결혼하였다. 그렇기에 손자 대에 와서는 엘레오노르는 실로 '전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가 된 것이다.
헨리 2세는 프랑스의 대부분과 스코틀랜드까지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사법제도의 개혁을 단행하는 등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역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공동으로 국정을 처리하던 엘레오노르도 연이은 임신 기간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였고 특히 자신의 상속령인 아키텐과 푸아티에 공작령을 단독으로 다스린다.
거기다 이들 부부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유명했었다. 강력한 권력과 함께 부유한 그들의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귀족적이면서 예술이 넘치는 곳으로, 특히 엘레오노르가 자주 머문 푸아티에의 궁전은 중세 세계서의 유행의 중심지였고 그 세련됨과 교양, 사치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로빈 훗 이야기에서 마리안이 모시던 왕비로, 로빈 일당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이다.)
당시 아키텐 궁정은 당대 유명한 음유시인들이 모였으며 재기발랄한 귀족들과 시인들, 학자 , 음악가, 예술가들이 환영받던 곳이었다.
그와 함께 엘레오노르는 남프랑스의 문학전통과 귀부인 숭배, 기사도를 영국 궁정에 도입시켰고, 음유시인이 낭만적인 노래로 읊은 궁정 연애시와 켈트족의 전설 등을 노래한 시들을 열렬히 후원하였었다.
음유시인들은 현악기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귀부인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었다. 그리고 엘레오노르는 그들의 보호자이기도 했고 연모의 상대이기도 했다.
거기다 그녀는 기사도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도 하였는데, 왕비를 위시한 궁정 귀부인들은 높은 단에 앉아서 자신들에게 경의를 바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읽어주는 시를 품평하기도 하였었다.
훗날 트리스탄 이야기의 발전에 이바지하는《부류이야기》등이 아름다운 왕비 엘레오노르를 위해 헌정된 것이었다.
이런 '궁정풍 연애 시가'에서부터 로맨스 문학이 태동하게 되는데, 엘레오노르의 궁정에서 특히 유명한 시인은 마리 드 프랑스였다. 그녀는 기사와 요정의 사랑 등 신비적인 켈트세계를 주제로 하는 감각적인 시를 쓰며 페미니스트적인 삶을 산 여류시인이었다.
또한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궁정 생활을 하나의 예절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서양 에티켓의 원조인 것이다. 오늘날 서양 상류사회의 격식은 바로 엘레오노르의 궁정에서 마련된 틀이라 할 수 있다
<반란>
이런 문화 활동 속에서 부부사이는 오랫동안 화목했었고 그녀가 44세일 때 막내아들 존을 낳았지만, 헨리가 공공연하게 정부와 사생아들을 두기 시작하면서 사이는 점점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헨리의 애인들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젊은 미녀 로자문드 클리포드였었다.
1169년 헨리는 엘레오노르를 아키텐으로 보내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푸아티에의 공령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애인들과 자유롭게 즐기기 위해서였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일단 참던 그녀는 푸아티에 궁정에서 여전히 중세 문화를 이끄는데, 그곳서 루이 7세 사이에서 난 딸 마리와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12세기 기사도의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시인들은 그녀를 위해 란슬로트와 기네비어 왕비의 로맨스를 짓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엘레오노르는 자식들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한다.
한편 영국에 있던 헨리는 갈수록 가혹한 전제정치를 펴나가면서 캔터베리 대주교 베켓과 반목하게 되고 결국은 베켓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1172년에 헨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영국으로 부르는데, 다음해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영지는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되 실제 권력은 자신이 계속 보유하겠다는 헨리의 정책이 분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170년 그는 맏아들 헨리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었다. 그러나 '젊은 왕'이라 불린 헨리는 사실상 아무 권력도 갖지 못한 자신의 신세에 분개하고 있었다. 거기다 헨리 2세는 사랑하는 막내아들 존에게 넷째 아들 제프리의 영지를 주고자했지만, 다른 아들들은 거기에 반대를 하였고 그와 함께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헨리 2세에 대항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오랫동안 남편의 부정에 분개하고 있었던 엘레오노르는 반란을 부추기고 아들들에게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힘이 있던 헨리는 빠르게 대처를 하고 3주 뒤에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다. 곧이어 헨리의 군사들은 아키텐으로 들어갔고 결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아들들은 사면을 받았지만..그 배후에 있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에서 피난처를 찾던 중 붙잡혀 윈체스터 솔즈베리 성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엘레오노르는 이 오랜 유폐생활을 의연하게 견디는데, 운은 다시 그녀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1181년에 아키텐을 다스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제 2차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1184년 리처드는 아키텐 공령을 동생 존에게 주려는 아버지에게 반발하여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은 다음 1189년 부왕을 체포해서 왕위계승을 인정받게 된다.
패배한 헨리 2세는 아들 리처드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 끝까지 사랑했던 막내 존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소식은 그의 죽음을 재촉하였다.
<왕의 어머니>
가장 사랑하는 리처드의 즉위와 함께 유폐에서 풀린 엘레오노르는 이미 67세인 노령이었음에도 여전히 불굴의 의지를 가졌었고 아들의 신뢰받는 조언자로서 이전보다 더욱 깊이 정치에 관여를 한다.
왕위에 오른 리처드의 유일한 야망은 십자군 원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통치 기간 대부분 그가 원정에 간 동안, 엘레오노르는 광대한 왕국을 다스리면서 왕위를 노리는 아들 존과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음모를 좌절시킨다.
베렝가리아 공주와 리처드의 결혼을 위해 나바라 왕국과 직접 협상을 한 사람도 그녀였고, 70세의 고령에 직접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까지 가서 공주를 데리고 온 다음 시칠리아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치룬 사람도 엘레오노르였다.
1194년, 리처드가 십자군에서 돌아올 때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포로가 되자 엘레오노르는 수많은 제후들을 향해 열렬한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15만 마르크라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모아서 리처드를 풀어주었었다.
그리고 몸소 아들을 호위해 데려와서는 존의 음모를 꺾고 다시 왕이 되도록 한다.
1199년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존이 왕위에 오른다. 엘레오노르는 이전과는 달리 영국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활동적이었고 군대와 영토를 관리하는 데 힘을 쓰고 무능한 아들 존을 대신해 왕국을 지키는데 열성적이었다.
-> 퐁트브로 수도원에 있는 엘레오노르의 무덤상
그리고 엘레오노르는 1200년에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쉬를 프랑스 왕태자와 결혼시키기 위해 80세에 가까운 나이로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블랑쉬의 결혼으로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결혼은 대단히 성공적이면서도 뛰어난 외교 정책으로, 거기다 카스티야의 블랑쉬는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강인함과 유능한 정치 능력을 보여준다.
프랑스 왕가의 유일한 성인인 성왕(聖王) 루이 9세의 어머니로 아들의 인품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루이 9세 역시 십자군에 정신이 팔리자 대신 프랑스를 매우 훌륭하게 다스린 것이다. 성인으로 추대 받는 루이 9세 치하의 일들은 바로 어머니인 블랑쉬가 한 일이었었다.
손녀를 결혼시킨 같은 해 엘레오노르는 손자인 아르튀르로부터 프랑스 내의 존의 영토를 지켜내는데 뒤늦게 도착한 존이 1202년 8월에 미르보 전투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지원 덕이었다.
이 미르보 전투 후, 엘레오노르는 자신이 후원한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은퇴해 머물다가 1204년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강인함, 정치적 지혜, 정력, 예술의 후원 등은 동시대와 후세의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당당했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전설적인 불멸의 여왕으로 각인시켰고, 그녀가 영원한 안식을 취한 퐁트브로 수도원의 수녀들은 그녀의 묘비에 이렇게 새긴다.
'여기, 세상의 어느 여왕보다도 뛰어난 여왕이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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