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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徑)은 삶을 만들고 길(路)은 자본을 만든다.
황구지 옛 마을에서 양감면 용소리로 큰 다리가 놓여진 것은 오래된 일이다. 황구지천으로 인해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시절에도 사람들은 내를 사이에 두고 섶다리나 돌다리를 건너 보리가 건너가고 쌀이 건너왔다. 황새냉이를 캐는 아낙들이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가끔은 피를 섞기도 했다. 이젠 다리를 건너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하지만 한쪽의 마을이 폐동이 된 채 적막하기만 하다.
황구지 다리위에서 바라본 화성정문리 방향
진위천 둑길을 따라 걷는다. 둑길은 불어드는 바람만큼이나 한산하고 거미나 잠자리가 길동무다. 그러나 바로 옆의 고속도로는 속도의 경주장이다. 자동차바퀴에서 나오는 귓속을 파고드는 파열음에 짜증이 날만도 하다. 섶다리나 돌다리 그리고 오솔길(徑)만으로도 세상을 만들어 온 것이 우리네다. 그렇게 살아도 인심이 건너오고 건너갔다. 그 길로 누군가는 청운의 꿈을 품고 떠나갔고 가여운 어린누이는 가기 싫은 시집을 가기도 했다. 그래서 못다한 꿈을 안고 돌아온 사람도 마을이 품어주었고 기어코 소박데기로 돌아온 가여운 누이를 달래주던 곳이 오솔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길(徑)은 세상을 만들고 길(路)은 속도와 경쟁에 의한 자본을 만들어 내기 바쁘다.
청북의 한 허름한 농가.
요금소를 향해 속도를 줄이며 달려오는 자동차들과, 그 만큼의 댓가를 지불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질서라고 할 때, 자본주의 질서라는게 철저하게 자본의 흐름과 어떻게 정밀하게 배를 맞춘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평택,화성간 민자도로여서 익히 알고 있는 매킨지자본의 지분은 얼마나 될 것인지, 우리는 저 자본의 이익을 위해 경쟁의 쳇바퀴를 내 의사와 상관없는 구조로 인해 뛰어 들게 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무너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율북리로 들어서면 또 다른 속도경쟁의 산물인 KTX 고속철로가 마치 자본의 모습이 그러기라도 한 듯 사람을 압도하며 곧게 서울과 부산을 잇는다. 서울서 부산을 두 시간에 이어놓는다는 것은 시공이 초월되진 않아도, 적어도 그만큼의 물리적 공간을 좁힌 것은 사실이다. 결국 자본의 이동속도를 향해 인간의 부단한 욕망이 인간 앞에 위압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마을과 마을을 이어내고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은 서로의 옷깃이 스치는 돌담길이나 오솔길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다. 밤뒤(율북)마을에도 그렇게 함초롬한 길들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다.
밤뒤마을에서 어연,한산산업단지를 뒤로하고 어소리 들판을 가로질러 설창마을로 들어선다. 들판을 앞에 두고 뒤편에 背山을 친 설창마을은 누구나 한번쯤 이런 곳이 고향마을 아닐까 생각해볼만한 자태를 간직 하고 있다. 마치 댕기머리를 한 소녀가 장에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문설주에 기대고 서있을 법한 그런 마을 말이다.
어소리에는 농업개방의 파고가 높아지던 90년 초 시설하우스집단지로 지정돼 화훼와 고등채소로 개방의 파고에 맞서고자 시범사업을 벌였던 곳이다. 김영삼정부가 집권하자 이 시범단지에 김영삼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농민회 회원들이 항의 집회를 계획했으나 경찰에 의해 온양모처로 격리 당했던 웃지 못 할 일이 기억난다. 김영삼이 누구인가. 쌀개방의 압력 앞에 모가지를 비틀어도 쌀개방 만큼은 막아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결국 지켜내지 못하자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던 그 장본인 아닌가. 오늘날 농업이 피폐와 남루의 지경이 돼버린 단초를 제공한 정권이었음이 분명하다.
설창마을 뒤편, 전설 이야기 한편이 남아있을 법한 고갯길을 넘으면 건의마을이다. 건의마을 앞으로는 평택,제천간 고속도로가 앞을 가로 막는다. 이 고속도로를 넘어가면 청북초등학교가 나오고 거기가 신포다.
신포는 새로운 포구란 말이다. 새로운 포구는 수원에서 발안을 거쳐 안중으로 이르는 39번 국도를 끼고 이지역의 거점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남양만이 깊숙이 들어와 발안천으로 이어지고 한줄기가 신포쪽으로 올라오며 옹포에서 닻을 내린다. 옹포는 독개라고 하며 삼계리에 있는 마을이다. 옹포는 저포로도 불리웠다고 하며 이름 그대로 항아리를 실어 나르던 포구로 짐작 된다. 하지만 포구는 소금과 젓갈 등이 오갔을 것이다. 지금도 옹포마을 옆 삼계초등학교 옆에 소금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남아있다. 이는 고증을 거쳐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되어야할 일이다. 또 삼계리 지명은 무얼 말하는가. 삼국시대 당항성이 화성지역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삼계리는 당항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은 닭을 의미하며 항은 목을 의미한다. 당항은 닭목이다. 당목으로 변하고 당항으로 변했을 것으로 본다. 이후 당항을 계승하는 지명인 삼계리로 변했다고 본다. 일대가 닭목아지 형태의 곶(串)지형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야반농장 전경. 국사편찬위원회
일제는 1921년 이 지역의 간사지에 눈독을 들이고 야반농장(野坢農場)*을 설립했다. 간사지는 일시에 논이 되었고 이로 인해 옹포의 포구는 막히고 말았다. 배꾼들은 수로를 따라 새로운 포구로 이전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포다. 이후 남양만 방조제가 75년 가로 막히고 포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서부지역의 거점 경제활동지역의 면모를 이어나갔다. 신포에는 지금도 다방이 유일하게 남아있는데 한 때는 좁은 지역에 10여개이상의 다방이 몰려있기도 했다. 이는 8~90년 신포의 우시장이 제법 컷던 탓이다. 구릉이 발달한 이 지역에 유리한 낙농업의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80년 중반 필자도 낙농업을 시작 하면서 신포장에서 거간들로부터 젓송아지를 구입한 기억이 난다. 물론 거간꾼들에게 수표라도 건넬라치면을 의례 다방에서 달달한 양촌리커피를 마시며 수작을 떨기도 했다.
지나는 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방에 들러 최백호의 궂은비 내리는 날 어쩌고 하는 노래소리를 생각하며 달달한 양촌리커피를 마셔본다. 주변의 공단으로 인해 원룸촌이 만들어 지긴 했어도 어쩐지 옛날의 시끌벅적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신포주변 도로를 보면 39번국도와 302번지방도가 머리를 교차하고 이웃해서 평택,제천간고속도로와 톨게이트가 있고 조금 더 서쪽으로 고잔리엔 15번 서해안 고속도로와 평택,시흥간 고속도로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어디든 사통팔달로 자본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전통적 중심마을은 쇠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길이 자본을 이동시키는 구실 탓이다. 근처의 안중이나 청북신도시로 생활경제권이 옮겨간 것은 도로의 역할이 크다.
소금창고로 추정되는 건물
道路는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이나 차 등이 다닐 수 있도록 땅 위에 만들어 놓은 ‘길’이라고 한다. 한문적 의미로는 서로 구분해서 이르는데 道와 路에 차이가 있다. 이는 주례(周禮) 따르는 것으로 경(徑.오솔길), 진(畛.가마 한 대 폭의 길), 도(途.소로,약2.4m), 도(道.중로,약4.8m), 로(路.대로,약7.2m),로 구분하여 길의 등급이 다름을 나타냈다. 그중 道와路를 우리는 합쳐서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신포에서 신포천을 따라 후사리로 들어서면 바로 무성산성이 있던 무성산으로 올라붙는다. 무성산은 숲이 짙고 좋은 소나무들이 많았던 곳이다. 여기는 일찍부터 휴양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폐업한 것인지 사람들을 볼 수 없으나 ‘녹장원’이란 이름으로 오랬동안 영업을 해온 곳이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아츠밸리 유스호스텔’이라고 문패는 걸려있으나 잠잠한 새소리와 간혹 지나는 사람들에 놀란 누렁이 컹컹 대는 소리만 들린다. 무성산 둘레길을 따라 가면 오성산단과 청북신도시를 잊는 도로위에 무성산과 자미산을 잇는 생태다리 겸 공원이 신도시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대로로 인해 단절될 번 한 산길을 이렇게 이어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쳐 자미산성으로 오른다.
자미산성에 오르면 사방이 탁트인다. 숲길을 걸어온 뒤 맛보는 해방감같은 느낌이 가슴을 더욱 시원하게 한다. 동서남북이 모두 조망되어 전략적 요충이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자미산성에는 지금도 수습하지 않고 버려둔 토기와 기왓장들이 널려있다. 삼국시대부터 전략 요충지라고 하는데 산꼭대기에서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가 훤히 보이니 가히 그럴만하다고 느껴진다.
자미산성을 비롯해 비파산성, 무성산성, 용성리산성 등에는 임경업장군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자미산성의 수축과 관련한 설화가 있다. 내용은 다들 잘 아는 내용인데 임장군의 누이도 임장군 못잖은 힘과 지략을 가졌는데 한집안에 둘이나 역발산기개세가 있으면 둘 다 성공하지 못하니 한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누이는 성을 쌓고 임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는데 누가 먼저 하는지 내기를 했다. 물론 지는 사람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누이가 성을 다 쌓아가는데 임장군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가 고민 끝에 임장군을 살리기로 마음먹고 뜨거운 죽을 끓여 딸에게 가서 먹도록 권했다는 것. 딸은 문루에 올릴 널찍한 돌 하나만 얹으면 끝이 나는데 어머니 성화에 그만 죽을 불어가며 먹었다. 그동안 임장군이 들이닥쳐 누이가 목숨을 버렸다는 전설이다. 이 형태의 전설은 전국에 수도 없이 깔려있는 이야기다.
임경업장군의 주활동지인 의주 백마산성. 자료사진
임경업장군 사후 민중들의 섬김의 대상이 되었기에 이 같은 전설이 만들어 진 것이라 본다. 또 장군이 낙안부사로 재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서울로 진격했는데 이동 과정에서 주둔하는 곳마다 성을 쌓고 전의를 다졌으리라 본다. 이 지역의 산성들도 그런 이유로 존재하며 사람들 기억속에 남아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또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여 청군과 큰 전투는 없었으나 돌아가는 청군을 공격해서 잡혀가는 백성들 100여명 구해냈는데 이것이 과장돼서 임경업 장군이 말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식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민중들은 그를 신처럼 받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임경업은 충주사람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시호는 충민(忠愍)으로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벼슬에 나갔다. 그의 친명반청은 오랑캐에게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당시 민중들의 염원이 투영돼 실제행위보다 부풀려 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성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원두막이 있어 잠시 다리쉼을 할 수 있다. 물 한잔을 마시며 흩어진 와편들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옛 사람들의 회한이 내게로 밀려온다. 그렇게 저마다 치열한 사연들을 간직 하고 살다가 갔겠지...
산성을 내려오면 길마재라고 하는데 서낭당고개다. 좌측은 용성리 설창이고 오른쪽이 덕우리 수촌마을로 가는 길이다. 덕우리는 일부 청북신도시로 들어가고 나머지 마을만 옛 그림자를 드리우고 큰길가에 느티나무 정자목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나그네의 땀을 사위어준다.
서해농장의 팬션
큰길을 건너 신도시를 뒤로하고 남양호가 만들어낸 간사지들을 건너면 홍원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 홍원리 마장마을은 이름 그대로 말목장과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엔 부곡이 있어 말 기르기를 담당했고 조선시대 ‘홍원장’이라는 국영목장이 있어 말을 방목해 길렀다고 한다. 이곳의 범구지는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남양만의 물길을 따라 말들을 싣고 드나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원리의 넓은 들은 남양만 방조제 덕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청호 수몰민들로 홍원6,7리를 이루며 살고 있다. 마을을 돌아 홍원리와 화성장안면을 잊는 다리를 통과하면 서해농장이 나온다. 우스운 말로 평택에 유일하게 팬션이 있다는 테마체험농장이다. 전망대에 올라 남양호의 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다.
남양호의 한가함
남양호 둑길을 따라 걷는다. 여기저기 올벼를 거두느라 기계들이 왕왕거린다. 필자가 75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이라고 간곳이 설계사무소였는데 내게 주어진 일이 남양호 방조제 기계장치를 도면에 옮기는 일이었다. 90년 농민회에서 선전차 원정리에 들러 남양호에서 올라온 빙어를 맛본 것은 잊지 못할 일이다. 남양호의 빙어를 그때는 생으로 초고추장도 바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녹조 때문에 저기서 고기를 낚아 무엇할꼬?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염이 심각하다. 歸廬齋
*우리에게 쌀은 무엇이었나.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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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지리산 다녀왔슴. 하루는 평사리길 걷고 하루는 청학동 들어갔다가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