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 4막 5장(혼돈)
나는 지금 내 인생이라는 연극 중 4막 5장 가까이에 서있다.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행하고 그 무엇을 남겼던가?
배움에 대한 것?
재물에 대한 것?
인격이나 명예에 대한 것?
가족과 자손에 대한 책무?
사람과의 관계?
연극에서 쓰이는 용어 중에 막과 장이 있다.
막은 플롯(구성)에 따라 일정한 통일된 목적을 가진 사건의 주요 구분으로 각 막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장은 등장인물들의 등 ․ 퇴장 사의의 간격을 말한다.
「내 인생 4막 5장」
인생을 때론 4막으로 구분해 보기도 한다.
그중 1막은 유년기, 2막은 청년기, 3막은 장년기, 4막은 노년기이다.
내 인생에서 4막 5장에 대한 이야기를 논함은 어쩌면 너무 이른 이해인지 모른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길어 우리나라의 남자의 경우 거의 80세 가까이 생존한다.
그러나 1,2,3,4막 중 가장 절정을 이루는 장은 3막의 장년기로서 이 시기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모든 결과가 나타나는 것으로서 4막인 노년기는 겉으로 내어 보이기에는 사실상 그 의미가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들어 가끔 어릴 적 어른들이 가끔 읊조리시던 ‘회심곡’이 생각나곤 했다. 그 당시 회심곡은 마음이 허전한 사람들에겐 애환과 마음을 달래주는 심심풀이 가락으로, 사람이 죽어 상여가 나갈 때는 상여꾼들의 선소리로도 불리었었다.
회심곡은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고, 지금처럼 라듸오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구전되는 구슬픈 소리로서 당시엔 철부지 어린애이던 나에게도 머릿속에 각인될 정도로 많이 불리었었다.
회심곡은 조선시대 휴정대사가 쓴 불교가사로서 당시 말세적인 풍속에 물들어 있는 충효신행과 애욕과 탐욕에 의한 골육상쟁을 지양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알라는 의미라고 전한다.
그 내용들은 모두 12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장 어화녀, ... 제9장 저승사자, 제10장 극락왕생,... 제12장 염불로 끝난다.
그 가사들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기사구제 하였느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선심 하였느냐?
마음 닦고 선심 하여 어진사람 되었느냐?
하고서는 다음 장에선 그러한 선행을 행하지 아니한 자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벌을 정하고 있는 구절이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릴 적 들었던 그 회심곡의 가사들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어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과연 무엇을 하고, 무엇을 남겼는가?’ 를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아울러 지금 이 시기 우리사회에서 그 회심곡이 꼭 불리어져야할 내용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영국의 유명한 영화배우 겸 영화감독 이었던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대하여 자주 논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라는 말도 있고, 흔히 하는 말로 ‘있을 때 잘해.’라는 말도 있다. 사람이 (지극히) 높아지면 어제와 오늘의 고도차로 마음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항상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참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가슴을 편 채로 내 인생의 혼돈스런 마음을 정리하려 생각에 잠겨 본다.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모험이다. 어제 건넌 그 돌다리도 연륜이 쌓여 어제와 같지 않음을 느낀다.
우리의 가슴은 촌음을 멀다하고 갖가지 생각을 품어내고 있다. 그 가슴으로 말하고 그 가슴을 답을 해야 한다. 때론 멀리, 때론 가까운 것부터 처음부터 정해진 답은 없는 법이다.
마음을 비우라는 것, 생각을 바꾸라는 것 자체가 풀어야할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정답은 없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와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심경으로 길을 제시했을 뿐이지 그것 모두가 정답임을 검증하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멀어져 갔다.
나의 머릿속은 혼돈으로부터 점차 희미한 희망의 빛을 느끼기 시작하고, 하찮거나 또는 귀함을 여김 받는 사물에게서 내가 연유되어 왔음을 인식하지 못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점차 하늘이 높아 감을 느끼고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알게 되었다. 지혜는 빛이 나고 그 빛의 쓰임새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 더 많은 생각을 갖게 된다. 머리를 어떻게 빗을 것인지? 아니면 이발이라도 해야 할 것인지? 또는 더 짙은 화장을 해야 할 것인지...
직장이란 것은 지나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만 그 기간이 제법 내 인생에서 길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은 나에게 있어서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다. 어쩌면 다른 선택에 의하여 빗겨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가볍게 지나쳐 버릴 일은 아니다. 필연이건 우연이건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한 단락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란 것도 두고 보면 사치다. 남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도 않는데 자신만 지레짐작을 하며 어두움 마음을 감추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영원한 종속관계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또 다른 다가옴을 모르는 긴 여행을 떠나야 하고 그 여행의 끝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부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은 죽음 당시의 나이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애로 다시 돌아간다고 믿기도 하였었다.
혼돈스럽고 머리가 띵 해짐을 느낀다. 내가 무엇을 해왔으며, 장차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수직적 사고에 의하여 맹목적인 종속관계의 흐름에 자만하는 삶을 살아오지는 않은 것인지?
공연한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삶이 연장됨으로서 내가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은 아무것에도 다다르지 않는다. 결국엔 아무런 개념도 없이 주먹만 쥐고 이곳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돌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생각이 오늘에 바뀐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일 뿐이다. 내 삶에 내장된 카타로그란 없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내 삶을 살면서 구태여 남을 의식하고 살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판단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여야겠다.
나중에라도 뒤를 돌아보고 나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거나, 남이 나를 후하게 폄해주기를 바라지 않아야한다. 그걸 의식하는 한 내 삶이 아니고 각본에 의하여 조각된 삶이기 때문이다.
의식주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조물주에게서 처음부터 부여 받지 아니한 사치스러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옷을 입는 것과, 남의 것을 잠시 보관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태어나 남의 것을 잠시 빌렸다가 죽을 땐 놓고 가는 ‘렌탈인생’ 이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통속적으로 그저 그렇게 살다 말 것인가? 에 대하여 내면에서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결국 이러한 삶도 다 나의 영역이고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들이다.
나 하나 없어져 버리면 그만이라는 종국적인 생각을 해 보지만, 그렇다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내게 속한 사람도 있고, 내가 빚진 사람, 나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 나의 삶에 다 관여하고 있다.
무슨 씨잘 데 없는 소리들이냐고? 그걸 단번에 무슨 내용인가를 알아채 버린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다. 나도 내 인생을 잘 이해하지 못함으로 뭐 하나 제대로 한 것 없고, 남에게 베푼 것 없이 살아 왔듯이 어차피 혼돈스럽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우주, 삼라만상이 태초에 혼돈으로 시작되어 왔으니 내 삶이 혼돈스러움은 내 인생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 런지?...
그래도 나는 물가에 다가서며 두 다리를 물에다 담그기로 했다. 물가에 다가 설수록 물속에 비치는 사물의 형태는 크고 더 뚜렷하여 진실되고, 다리를 담글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마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0. 12. 7)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