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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증평군의 유교유적(儒敎遺蹟)의 사적고찰(史的考察) Ⅱ. 증평군의 유교유적현황 Ⅲ. 유교유적별(儒敎遺蹟別) 조사(調査) Ⅳ. 결 론 |
Ⅰ. 증평군의 유교유적(儒敎遺蹟)의 사적고찰(史的考察)
조선시대에는 유교정치의 구현이 국가적 정책목표로 지향했기 때문에 유교문화사회로 확고한 기반이 형성됐다. 그러므로 충(忠)ㆍ효(孝)의 가치 덕목을 중시하여 군신관계(君臣關係)가 절대 명분으로 고정화됐고, 효자(孝子)ㆍ효부(孝婦)에 대한 표창이 장려됐다. 여기에 제도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새로이 학교를 설립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한 가묘(家廟)의 설치, 서원(書院)과 사우(祠宇), 재실(齋室), 정려각(旌閭閣,) 신도비(神道碑 )등 다양한 유교적인 시설물이 전국 도처에 설치됐으며, 증평지역에도 이와 관련한 유적들이 전해오거나 현존하고 있다.1)
증평군의 유교유적은 서원(書院)․영당(影堂)․사당(祠堂)․효열각(孝烈閣)․효자각(孝子閣)․묘(墓)와 묘비(墓碑) 등이 각종 지리지나 관련 문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학계에서 조사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을 강학(講學)하기 위한 기관으로 지방의 주(州)ㆍ현(縣)이 관장하는 관학(官學)인 향교(鄕校)와 사학(私學)인 서원(書院)과 서당(書堂)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증평군 지역에는 서원과 서당이 건립되어 선비들의 마음의 수양처로서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와 후학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지금은 증평군 지역에 현존하는 향교는 없다. 이러한 이유는 조선시대 태종 5년(1405)에 도안현(道安縣)과 청당현(淸塘縣)을 청안현(淸安懸)으로 통합하여 청안향교(淸安鄕校)가 이 지역의 관학(官學)으로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며 현재재 청안향교는 괴산군지역에 있다.
사학(私學)인 서원은 기록상으로 광해군 5년(1613) 증평읍 남차리 산39번지에 구계서원(龜溪書院)이 창건됐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에 없어지고 현재는 주춧돌과 축대의 일부가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서원은 선현(先賢)을 봉축(奉祝)하는 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 재(齋)의 결합형식으로 사학(私學)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16세기 중엽 사림정치(士林政治)라는 사회사적인 동향과 관련하여 등장했으며, 지역의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에 목적을 두고 인격도야와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게 됐으며, 17세기 후반부터는 향촌사회에서 양반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것으로 변질됨에 따라 교육적 기능보다도 선현을 받들어 제사하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 기능에 큰 비중을 두기도 했다.
증평군의 사우(祠宇)로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경천숭조사상(敬天崇祖思想)을 길러 민족정기를 빛내기 위해 건립된 단군전 과 기성전 등의 영당(影堂)이 있다. 또한 정후사(靖厚祠)․청연사(淸然祠)․양무공사(襄武公祠) 등의 사묘(祠廟)를 비롯하여 효자나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설치한 정려각(旌閭閣)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서 이 지역이 충절(忠節)과 효행(孝行)을 중시하는 의향(義鄕)임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당(祠宇)나 정문(旌門)에 관련된 목조건축들은 대부분 근현대에 들어와 옛터 내지 새로운 자리에 복원되어진 것들이지만, 전통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근현대(近現代)에 들어와 충절인사나 효행․열녀 및 가문을 빛낸 인물들을 현창(顯彰)하기 위해 세운 석비 및 묘와 묘비 등이 다수 있으나, 아직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 및 연구는 미진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증평군의 유교유적에 대해서는 외적인 면에서의 문화재적 가치 파악뿐만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검증작업과 사회사적인 실체파악을 통하여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파악을 위하여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Ⅱ. 증평군의 유교유적현황
표 1. 증평군의 유교유적현황
구 분 | 위 치 | 시 기 | 비 고 | |
서 원 (書院) | 구암서원터 | 증평읍 남차리 산9 | 1613년 | ․ |
영 당 (影堂) | 단 군 전 | 증평읍대동 10003-61 | 1948년 | 증평군 향토유적 제1호 (2004. 4. 30 지정) |
기 성 전 | 도안면 노암리 159 | 1854년 | 증평군 향토유적 제2호 (2004. 4. 30 지정) | |
정 후 사 | 도안면 도당리 494 | 1789년 | 증평군 향토유적 제3호 (2004. 4. 30 지정) | |
사 묘 (祠廟) | 양무공사 | 증평읍 죽리 101 | 1595년 | 증평군 향토유적 제4호 (2004. 4. 30 지정) |
청 연 사 | 증평읍 남차리 | 1992년 | ․ | |
안동김씨사 | 증평읍 남하리 807 | 1805년 | ․ | |
효자각 (孝子閣) | 연종록부부정효각 | 도안면 화성리 91 | 1859년 | ․ |
곡산연문 쌍효각 | 도안면 화성리 174 | 1887년 | ․ | |
김창익 효자각 | 도안면 광덕리 301 | 1900년 | ․ | |
효열각 (孝烈閣) | 곡산연문 효열각 | 도안면 화성리 312 | 1976년 | ․ |
강릉유문 쌍열각 | 도안면 도당리 216 | 1884년 | ․ | |
열녀각 (烈女閣) | 곡산연씨 열녀각 | 증평읍 용강리 331 | 1892년 | ․ |
효비각 (孝碑閣) | 김환극부부효비각 | 증평읍 남하2리 | 1972년 | ․ |
장용기부부효비각 | 증평읍용강리547-1 | 1926년 | ․ | |
명 묘 (名墓)와 묘 비 (墓碑) | 배극렴 묘와 신도비 | 증평읍송산리산28 | 조선 | 충청북도기념물 제98호 (1994. 12. 30 지정) |
연사종 묘와 묘갈 | 도안면 화성리 | 조선 | ․ | |
연음 묘와 신도비 | 도안면화성리명암마을 | 조선 | ․ | |
양윤원 묘와 묘갈 | 증평읍 증천동 | 조선 | ․ | |
신경행 묘와 신도비 | 증평읍남차리숯고개 | 조선 | 충청북도기념물 제132호 (2004. 9. 17 지정) | |
연충수 묘와 묘갈 | 도안면 송산리 | 조선 | ․ | |
김치 묘와 묘갈 | 증평읍 율리 | 조선 | ․ | |
김득신 묘와 묘갈 | 증평읍 율리 | 조선 | 증평군 향토유적 제6호 (2004. 4. 30 지정) |
Ⅲ. 유교유적별(儒敎遺蹟別) 조사(調査)
1. 사학기관(私學機關)
1) 서원(書院)
가. 구계서원터(龜溪書院址)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증평읍 남차리 산9번지에 위치하였던 서원으로 광해군 5년(1613)에 현감 조인행(趙仁行)과 신경행(辛景行) 등이 인근의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청안현감과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서사원(徐思遠), 보령현감을 역임한 이득윤의 스승 박지화(朴枝華), 괴산현감을 지낸 이득윤(李得胤) 3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했다.
그 후 현종 7년(1666)에는 송시열의 문인 황처검(黃處儉) 등이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다시 이준경(李浚慶)과 헌릉참봉을 지낸 이당(李塘)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때 송시열에게 문의하여 위치를 정했는데, 이준경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서사원․박지화․이득윤․이당을 차례로 배향했다. 숙종 5년(1679)에는 현감 남한명(南漢明)이 상량문과 서원기 및 고적사실을 써서 걸었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亂)때 없어지고 말았다.1)
이인좌의 난은 당시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중심이 되어 영조(英祖)와 노론(老論)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모반사건이다. 이인좌는 경기도와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의 선비들과 난을 모의했으며, 이들은 상여를 가장하여 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수름재를 거쳐 청주로 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주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도안을 비롯한 청안 일대가 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때 곡산 연씨 가문의 연세홍(延世鴻) 연수창(延壽昌)은 의병을 모아 이인좌의 무리들로부터 고을을 방어하고 민(民)을 안정시켰으며, 연수창은 상당산성의 적을 물리쳐 1등 공신에 책록됐다.4)
당시 이 지역의 사족(士族)들은 소론계도 있었지만, 노론계의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전 및 지표조사 등을 통하여 실체를 규명하여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2) 서당(書堂)
증평군 지역의 서당의 터나 흔적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했다. 다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서당은 도안면 화성3리(상작마을), 석곡1리(산정마을) 애국지사 연병호선생 생가, 도당3리(은행정)과 증평읍 율리, 송산리, 남하리 등에 사당이 설치되어 지역 후학을 교육을 담당해 왔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 올뿐 지금까지 조사ㆍ발굴ㆍ연구가 되지 않아 향후 향토사학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2. 영당(影堂)
1) 단군전(檀君殿)
단군전은 증평읍 증평리 387에 위치하고 있으며 증평군 향토유적 제1호(2004. 4. 30 지정)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경천숭조사상(敬天崇祖思想)을 길러 민족정기를 빛내기 위해 건립했다.
현 단군전 터에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세워진 일본 신사(神祠)가 있었으나, 1945년 8월 16일 해방 이튿날 증평읍구국청년단원들이 불태워 버리고 3년 뒤인 1948년 5월 27일 김기석(金箕錫 : 1897~1978)씨 등 증평지역의 유지들이 그 자리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단군전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본전과 담장, 홍살문을 세워 건립됐으며, 2005년 뒷 담장 250m를 보수정화 했으며, 편액은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 1924~1984)이 썼다. 단군의 영정은 가로 0.42m․세로 0.82m의 크기로 평정건(平頂巾)에 흰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제향과 관리를 위하여 1953년에 단군전 봉찬회(奉讚會)를 설립하여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과 음력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 단군이 승천한 날)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단군기원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왕검(王儉)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한 연호(年號)이며, 현재 쓰고 있는 단기의 기원은 조선 성종15년(1484) 서거정 등에 의해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기록에 근거하여 중국의 요(堯)가 즉위한 25년 무진년(戊辰年 : B.C 2333년)에 10월 3일에 단군이 태백산(백두산)에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
2) 기성전(箕聖殿)과 하마비(下馬碑)
기성전은 도안면 노암1리(행갈) 15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증평군향토유적 제2호(2004. 4. 30 지정)로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며, 이는 기성사(箕聖祠) 또는 기자영당(箕子影堂)이라고도 하고 1914년에 건립 됐다.
조선시대에는 평양과 함흥 등에서 기성전을 건립하고 기자를 제향 했는데, 조선 철종 5년(1854)께 이곳에 거주하던 한학자 한응각(韓應珏 : 1866~1929)은 청주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임을 믿고 매년 봄ㆍ가을로 평양과 함흥에 있는 기자묘(箕子廟)에 가서 참배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참배에 어려움이 많으므로 기자영정을 모사(模寫)하여 이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것이며,
당시 함흥 유림들이 향화(香火)를 끊지 말라며 기성전을 건립하면서 뒷동산에 기념식수로 향나무 다섯 그루를 희사했는데 지금도 그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향나무가 있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고, 솟을 대문에 담장을 둘렀다. 그 앞에는 홍살문(紅箭門)을 세웠으며 1922년과 1969년에 중수(增修)했다. 영정은 가로 0.415m․세로 0.935m의 설채지본(設彩紙本)으로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있다. 영정 오른쪽 아래에 ‘김이삼 봉증(金貳參 封贈)’이라는 묵서(墨書)가 있는 것으로 미뤄 김이삼이 모사(模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는 한종규씨가 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근처의 유생들과 함께 제향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향을 할 때, 시회(詩會)를 열어 학문을 논하면서 학문이 뛰어난 학자를 불러와서 기자의 교민(敎民) 8조(條)를 강의했다. 지금도 근처의 유림들이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입구에는 1991년 3월에 세운 안내 간판이 있다.8)
가. 하마비(下馬碑)
기성전(箕聖殿)과 관련한 하마비(下馬碑)가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진등마을로 나가는 동구 밖에 있었으나, 1971년 도안역으로 가는 행갈고개가 새마을 사업으로 인하여 확장되면서 행갈 어귀에 있다가 2003년 행갈마을회관을 지으면서 회관입구로 옮겨 놓았다.
하마비(下馬碑)는 마을을 찾아올 때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석으로 하마비의 높이는 76㎝․너비 40㎝로 전면에 ‘下馬碑’(하마비)라고 쓰여 있다.
3) 정후사(靖厚祠)
정후사(靖厚祠)는 도안면 도당1리 767-3에 위치하고 있으며 증평군향토문화유적 제3호(2004. 4. 30 지정)로 정후공(靖厚公) 연사종(延嗣宗 : 1366~1434)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서 1789년 조성됐다.
정후공은 여말선초의 무신으로 자(字)는 불비(不非)이고,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함흥출신으로 조선 초기 태조대(太祖代)에서 세종대(世宗代)까지 4대조의 공신을 역임한 큰 인물이다. 고려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한 공로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됐으며, 태조 2년(1399)에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됐다. 태종 1년(1401) 제2차 왕자의 난 때에 정안군파에 가담했고, 정안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많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됐다. 태종 10년(1410) 동북면 병마절도사(東北面 兵馬節度使)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했으며, 이해에 길주도 도안무찰리사(吉州道 道按撫察理使)가 되어 경원부와 경성에 입성․수복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간룡성싸움에서 패하여 탄핵을 받고 함주(咸州)에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1411년 12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퇴임했고, 이듬해에 동북면도순문사(道巡撫使)가 되어 함주군 일대에 있는 4조왕과 비의 릉(陵)을 조성하고 정비하는 일을 수행했다. 1413년 영흥부윤을 겸직했으며, 위의 공로로 인하여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노모의 병환을 간호하기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허가받지 못하다가 왕으로부터 시연(侍宴)을 받고 휴가를 받았다. 그는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흙베개를 베고 초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여 정려를 받았다. 태종 16년(1416)에 다시 등용되어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됐고, 태종 18년(1418)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 오면서 의서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했다. 세종 1년(1419)에 훈신에 대한 예우로서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使)에 오르고, 세종 4년(1422)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책봉됐다. 세종 8년(1426)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했다.
정후사(靖厚祠)는 본래 정조 13년(1789)에 이곳의 선비들이 산수헌 권진응(山水軒 權震應)과 관생와 민이현(觀生窩 閔彛顯)에게 찾아가 정후공(靖厚公) 연사종(延嗣宗)과 후손인 안음현감(安陰縣監) 연충수(延忠秀), 의민공(毅愍公) 연최적(延最績), 동중추(同中樞) 연세홍(延世鴻) 등 4선생을 배향할 사우(祠宇) 건립의 필요성을 아뢰고 협조를 얻어, 당시 청안현 북쪽 10리쯤에 창건한 것이다. 처음에는 “금당사현사(金塘四賢祠)”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순조 13년(1813)에는 다른 서원의 예처럼 예조(禮曹)에 법식을 갖추어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때 이 사우는 3칸의 규모였고, 선비들이 공부하면서 생활하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동․서재와 강의실에 해당하는 강당을 모두 갖추어 비로소 서원의 면모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액(堂額)은 권진응의 의견에 따라 “양양재(羊羊齋)”라고 했다. 그 후 순조 30년(1830)에 연주운(延周運 : 1769~1830)이 이를 중수했고, 서울 노원에 있던 연사종의 묘막(墓幕)을 수리했으며, 원주에 있던 연사종의 사우가 허물어져 있던 것을 이곳 금당서원 옆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때 정후공의 사우를 별도로 웅담리(熊潭里)에 건립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웅담리의 위치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이 정후공 사우는 고종 6년(1869)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철폐됐는데, 1915년 후손들이 다시 사묘와 강당 및 동․서재를 세웠고, 이때 동․서재의 이름은 송달수(宋澾洙)가 맹자와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행인(行仁)과 상의(尙義)라고 했다고 한다. 현재에는 “정후사”라고 하여 연사종의 위패와 영정만을 모신 사당만이 남아 있고, 마당에는 그전에 사용했던 주춧돌들이 그대로 있으며, 매년 음력 2월28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연사종의 영정은 부원군(府院君)의 조복(朝服)을 입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가로 60㎝․세로 113㎝로서, 무오년 가을 와우산인(臥牛山人) 서봉(壻奉)이 그렸다고 한다. 이 사당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며, 솟을 대문이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사당 안에 봉안된 영정은 부원군(府院君)으로 추정되는 조복(朝服)의 입상(立像)으로서 가로 0.6m․세로 1.13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며, 화가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고 덧칠을 해 원형이 훼손됐다. 그리고 사당 안에는 헌종 4년(1838) 민태용(閔泰鏞)이 지은 정후공영당기(靖厚公影堂記)와 1915년 송달수가 지은 금당서원기(金塘書阮記)가 걸려 있다.12)
3. 사묘(祠廟)
1) 양무공사(襄武公祠)
양무공사는 증평읍 죽2리(원평) 101번지에 있으며 증평군향토문화유적 제4호(2004. 4. 30 지정)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진 양무공(襄武公) 황희석(黃希碩 : ? ~1394)을 모신 불천지위(不遷之位)사당으로 선조 28년(1595) 건립됐다.
이 사당은 영조 5년(1729)․1952년․1972년에 중수했고,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이다. 사당 앞에는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동재(東齋)와 정면 2칸․측면 1칸 맞배지붕 구조의 서재(西齋)가 있다. 그리고 사당 앞에는 1978년에 세운 ‘평해군묘정비(平海君廟庭碑)’가 있다. 건물 둘레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러쓰며, 밖에서 보면 좌측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황희석은 고려말~조선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해이다. 고려 우왕 7년(1381)에 왜구가 침임해 전라도 지역이 소란해지자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돼 진압했다. 1388년 요동 원정군이 발진하자 청주상만호(淸州上萬戶)로서 예하 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회군(回軍)을 단행해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공양왕 1년(1389)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정몽주가 격살 당하자 사태 수습책으로 정몽주일파를 탄핵하여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하므로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건국의 명분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조선 태조 1년(1392) 8월에 조선개국공신 44인과 원종공신(原從功臣) 28인이 책봉될 때 포함됐다가 한 달 뒤에 태조의 특지로 개국공신 2등에 추가 책록되어 1394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내다가 1394년 죽고, 사후 우의정에 추증됐다.19)
2) 청연사(淸然祠)
청연사(淸然祠)는 증평읍 남차1리(숯고개) 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2년 영산(靈山) 신씨(辛氏) 후손들이 조은(釣隱) 신경행(辛景行 : 1547~1623)을 봉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사묘(祠廟)의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둘레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7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청연사 옆에는 신경행의 묘(墓)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21)
3) 안동김씨사(安東金氏祠)
안동김씨사는 증평읍 남차리(양지말) 80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순조 5년(1805)에 김성무(金聲武)․김굉(金宏)․김희석(金羲錫)․김여귀(金汝龜)․김의로(金義路) 등 다섯 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된 재실(齋室)이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1805년에 건립됐다.
지금은 위로부터 4위(位)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있다.22)
4. 효자각(孝子閣)
1) 연종록 부부 정효각(延種祿 夫婦 旌孝閣)
연종록부부 정효각은 도안면 화성리(성도리) 91번지 도안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종록과 그의 부인 순흥 안씨 부부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1934년도에 연종록의 6대손인 연병택(延秉澤)이 주선하여 마을사람들이 세웠다.
지금의 정효각 건물은 1985년에 보수한 건물로서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안에는 “孝子贈朝奉人大夫童蒙敎官谷山延公種祿配孝婦贈令人與安氏之閭 上之十年 己夫 九月 日 命旌”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연종록은 본관이 곡산(谷山)이며, 자는 성복(聖福), 호는 모증재(慕曾齋)이며 연사종(延嗣宗)의 후손이다. 그는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고, 그는 노모에게 병이 생기자 똥을 직접 맛보면서 탕약을 올리었고, 목욕을 하고 자신이 노모 대신에 아플 것을 항상 하늘에 기원했다고 한다. 그는 노모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그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목숨을 연명시킨 효자였다. 그의 부인 순흥안씨는 연종록과 함께 부모를 극진히 공양했고, 상을 당하여서는 애절하게 통곡을 했으며, 매일 묘소 앞에서 통곡을 하여 무릎이 물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철종 10년(1859) 이러한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하사했다.23)
2) 곡산연문 쌍효각(谷山延門 雙孝閣)
곡산연문 쌍효각은 도안면 화성3리(상작) 17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 연주운(延周運)과 그의 손자인 효자 연면회(延冕會)의 정려를 합설한 것이다.
연주운(延周運)은 본관이 곡산, 호는 퇴수정(退修亭), 자는 성구(性久)이다. 그는 부친의 병이 위독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를 베어 피를 먹여 목숨을 연명시킨 인물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섬기면서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10 리나 떨어진 부친의 묘소를 매일 돌아봤다고 한다. 아버지의 제삿날에는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스러운 것을 멀리했으며, 고기가 없이 반찬을 먹고 슬퍼하는 것이 상을 당했을 때와 같게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고종 24년(1887) 연주은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고종 29년(1892) 그의 손자인 효자 연면회(延冕會)의 정려가 다시 내려져 이때 두 사람의 정려를 함께 설치하여 쌍효각이 됐다. 이 쌍효각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며 현판에는 효자문이라고 되어 있다. 효자각 안에는 위에 “孝子 成圴生員 延周運之閭 上之十三年 丁亥 四月 日 命旌”, 그 아래에 “孝子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延冕會之閭 上之十八年 壬辰 五月 日 命旌”이라는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시강원 좌빈객 민영상(閔泳商)이 쓴 곡산연씨 효자정려기(孝子旌閭記)가 걸려 있다.24)
3) 김창익 효자각(金昌翼 孝子閣)
김창익(金昌翼) 효자각은 도안면 광덕리 310번지 느티나무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창익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효자 김창익은 “어머니의 머리에 종기가 생겨 위급하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입으로 어머니가 호흡할 수 있도록 돕고 간호하여 병환을 낫게 했다. 그러나 또 다시 병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 산토끼의 회를 먹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다른 형제들과 여러 곳으로 이것을 구하러 다녔으나 구하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 이때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했는지 장독대 근처에 산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서 도망을 가지 않고 있기에, 이를 잡아 어머니에게 드리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김창익의 집안과 이 일대의 선비들은 이러한 그의 효성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철종 8년(1857) 김국주 등이 충청감사에게 김창익의 효행에 대한 글을 올렸고, 철종 13년(1862)에는 청안 현감에게 그의 효행사실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편액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고종 19년(1882)에 정려가 내려졌고, 그 후 대한제국 4년(1900)에 효자비와 효자각을 세웠다.
효자각의 건물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며, 효자가 안에는 “孝子慶州金公昌翼之閭”라는 편액이 걸려있으며, 정각 앞에는 “孝子 金公昌翼之閭 壬午七月日”이라 비를 세워놓았다.24)
5. 효열각(孝烈閣)
1) 곡산연문 효열각(谷山延門 孝烈閣)
곡산연문 효열각은 도안면 화성리 5구 명암마을(우루배)당초 효자 정후공(靖厚公) 연사종(延嗣宗 : 1366~1434)의 6대손인 부호군(副護軍) 연진행(延震行)의 부인 순흥안씨와 그의 13대손인 연대관(延戴寬)의 처 청송 심씨(沈氏)의 정려이었으나, 1910년 봄에 서울시 노원구에 있던 연사종의 효자문을 이곳으로 이건하여 정려문과 효자문을 함께 세운 후 “효열정려각”이라고 했다. 1984년에 순흥안씨의 정려를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로 옮겨 세워, 현재에는 연사종과 청송심씨의 정려만이 남게 됐다.
순흥안씨는 부호군(副護軍) 연진행(延震行)의 부인으로 병자호란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갔다가 다음 해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아왔는데, 이때 청군이 침입하자 남편을 위해 적의 칼을 막다가 함께 죽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정조 20년(1796)에 세워졌다.
청송심씨는 정조 16년(1792)에 남편이 죽자 같이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고 남편의 시신을 염습을 마친 후 6일 후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정조 20년(1796)에 정려가 내려져 그 다음해(1797)에 그녀의 정려문을 건립됐다.
이 효열각은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서 편액에는 “효열문”이라고 되어 있다. 효열문 안의 앞쪽에는 “孝子推忠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贊成谷山府院君贈領議政諡靖厚公延嗣宗之閭”, 뒤쪽에는 “烈女學生延戴寬妻靑松沈氏之閭 上之二十年 丙辰 十二月 日 命閭”이라는 편액이 있다. 그 옆에는 1910년 후손 연명회(延命會)가 지은 “정후공정려이건기(靖厚公旌閭移建記)”가 걸려 있다.25)
2) 강릉유문 쌍열각(江陵劉門 雙烈閣)
강릉유문 쌍열각(江陵劉門 雙烈閣)은 도안면 도당1리(좌실) 21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종 31년(1894)에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세귀(劉世貴)의 부인 밀양박씨와 유세현(劉世賢)의 부인 경주김씨의 정렬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 지역에 살던 유세귀(劉世貴)의 형제가 일시에 죽게 되자 그들의 처인 밀양(密陽) 박씨(朴氏)와 경주(慶州) 김씨(金氏)가 서로 의지하며 매일 묘를 보살펴 나라에 천거되어 정려가 내려지고, 고종 21년(1884)에 박씨와 김씨를 기리는 열녀각이 세워졌다.
건물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쌍열각의 안에는 좌측에“烈女 贈通訓大夫軍資監正 劉世 貴妻 淑人密陽朴氏之閭 上之三十一年 甲午 三月 日 命旌”, 우측에 “烈女 學生公 劉世賢 妻 孺人慶州金氏之閭 上之三十一年 甲午 三月日 命旌” 이라는 편액이 나란하게 걸려 있다.26) 이 열녀각 왼쪽에는 강릉유씨 가문의 묘소가 몇 기 있으나, 현재 후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여 이곳에는 살고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27)
6. 열녀각(烈女閣)
1) 곡산연씨 열녀각(谷山延氏 烈女閣)
곡산연씨 열녀각(谷山延氏 烈女閣)은 증평읍 용강3리(용문리) 33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에 거주하던 장환일(張煥一 : 옥구 장씨)의 처 곡산(谷山) 연씨(延氏)의 정려이다.
부인 연씨는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5일간이나 연명시켰으나 끝내 세상을 뜨자 약을 먹고 남편을 따라 숨을 거뒀다. 고종 29년(1892)에 영부인에 증직되고, 정려가 명하여 졌다.
건물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열녀각의 안에는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張煥一妻 令人谷山延氏 烈女之門”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28)
7. 효비각(孝碑閣)
1) 김환극 부부 효비각(金煥極 夫婦 孝碑閣)
김환극 부부 효비각(金煥極夫婦 孝碑閣)는 증평읍 남하2리(솔모루)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심이 지극한 김환극(안동 김씨)과 그의 처 광산 김씨(金氏)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비각으로서 1972년에 세워졌다.
효비각의 구조는 정면 1칸․측면 1칸 맞배지붕구조의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李吉遠)이 썼다.29)
2) 장용기 부부 정효각(張龍基 夫婦 旌孝閣)
장용기 부부 정효각(張龍基 夫婦 旌孝閣)은 증평읍 용강3리(용문리)547-1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 장용기와 그의 처 능성(陵城) 구씨(具氏)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 부부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와 같은 효행을 기리고자 1926년에 유림과 문중에서 정효각을 세웠다.
사당의 건물구조는 정면 1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당 안에는 “孝子孝婦 學生張公龍基氏 妻 孺人綾城具氏 旌孝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30)
8. 명묘(名墓)와 묘비(墓碑)
조선시대의 여러 읍지(邑誌)에는 지금의 증평군에 소재하는 명묘(名墓) 가운데 참의(參議) 김치(金緻)의 묘․영성군(靈城君) 신경행(辛景行)의 묘․장령(掌令) 김득신(金得臣)묘 만이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이 보다 많은 명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부터 왕릉이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명묘(名墓) 앞에는 죽은 사람의 사적(事蹟)을 새겨 묘소(墓所) 앞에 세우는 묘비(墓碑)가 있으며, 묘비는 품계에 따라 신도비(神道碑)와 묘갈(墓碣)로 구분되어진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소에만 세울 수 있게 하고, 다만 공신(功臣)이나 석유(碩儒)이면 3품 이하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도 왕명이 있으면 묘소에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는데, 조선시대 후기로 오면서는 왕명이 없어도 문중에서 가문을 빛내기 위하여 3품 이하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는 일이 많아졌다. 신도비는 비석에 가로로 비제를 전서(篆書)로 쓰고 비표(碑表)에서부터 세로로 비문을 쓰는 것이 기본형이며 묘소(墓所)의 동남쪽에 남향으로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묘갈(墓碣)은 묘비(墓碑)의 일종으로 신도비(神道碑)보다 작은 규모의 비석을 말하며, 3품 이하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소(墓所)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묘소에도 신도비가 없으면 묘갈을 세웠다. 그런데 묘갈(墓碣)은 비표(碑表)에는 비제(碑題)만 쓰고 비음(碑陰)에 비문을 쓰는 것이 기본형이며 묘소(墓所)의 왼쪽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증평지역의 명묘 및 묘비 가운데, 증직(贈職)을 제외한 행직(行職)으로 계셨던 분들의 묘소 및 공신(功臣)이나 군호(君號)가 있는 분들 가운데 것을 중심으로 하여 오랜 시기부터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배극렴 묘소(裵克廉 墓所) 및 신도비(神道碑)
배극렴 묘소(裵克廉 墓所) 및 신도비(神道碑)는 증평읍 송산리 산28 두타산 대야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1994. 12. 30)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朝鮮)의 개국공신인 배극렴(裵克廉 : 1325~1392) 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에서 경상도 도순무사(都巡撫使)를 거쳐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됐으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성산백(星山伯)이 되고 문하좌시중을 지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묘소는 장방형(長方形)으로 가로 3.47m․세로 4.37m․높이 1.70m이고, 상석은 가로 1.20m․세로 0.84m․높이 0.195m이다. 묘소에는 호석(護石)이 둘러 있고, 앞에는 장명등(長明燈)과 문관석(文官石), 양석(羊石), 향록석(香熝石)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묘소 20여m 아래에는 고종 25년(1888)에 대사헌 박성양(朴性陽)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으며, 묘소 앞 100m쯤에는 배극렴의 사당인 경절재(景節齋)가 있다.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은 위위(衛尉 : 의장(儀裝)을 맡은 관아) 소윤(小尹 : 종4품) 배현보(裵賢輔)와 성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진주․윤주 (晋州ㆍ尹州 牧使 : 정3품), 계림ㆍ화령부윤(鷄林․和寧 府尹 : 종2품), 합포진 첨사(合浦津 僉使 : 종3품) 등을 역임했고, 우왕 2년(1376)과 우왕 4년(1378) 왜구 격파에 공을 세웠다. 이성계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우왕 14년(1388)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 회군(回軍)을 결행했다. 고려 말년 백성들 가운데 “비의군자(非衣君子)의 지혜로 삼한(三韓)을 바로 잡는다”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이는 「비(非)」와 「의」(衣)를 합치면 「배(裵)」자인바 이는 배극렴을 가리키었다고 하니 고려 말 고려 국운이 기우는 민심과 당시 그의 덕망과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이후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후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책봉을 의논할 때에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이후에 이방원이 임금이 된 후 귀양지를 세 번이나 방문했다고 해서 이곳을 삼방리(三訪里), 주변 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부르게 됐다. 서기 1392년 9월 8일 67세에 세상을 떴는데 그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잣나무를 관아 북쪽에 심어 놓고 왕에게 청렴과 검소로 백성을 돌볼 것을 약속했다한다. 그 후 중앙관서의 시중(侍中)이 되자 진주사람들이 그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명명했다.
제사는 현재 해마다 송오리에서 4월 5일 한식제사를 지내고, 출생지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동 사당에서는 음력 9월 7일 제사를 지낸다.31)
2) 연사종(延嗣宗) 묘(墓)및 신도비(神道碑)
본래 정후공(靖厚公) 연사종(延嗣宗 : 1366~1434)의 묘는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평원일대의 곡산연씨 묘역에 있었으나, 1990년 9월 17일에 도안면 화성리 명암마을 뒤쪽에 있는 주실산의 상봉 아래 곡산연씨 묘역에 이장(移葬)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정후공 연사종은 고려말~조선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불비(不非)이며, 상장군 단서(丹瑞)의 후손으로 곡산 연씨(谷山 延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1440년 황희(黃喜)가 찬(撰)한 비문을 1959년에 후손인 종혁(鍾赫)․명일(明一)․규영(圭瑛)의 노력으로 다시 세웠으며, 묘를 이장하면서 신도비도 함께 옮겨 온 것이다.32)
3) 연음(延廕) 묘(墓)및 신도비(神道碑)
묘(墓)및 신도비(神道碑) 도안면 화성6리(명암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회양부사(淮陽府使) 연음(延陰 : 1418~1452)의 신도비는 당초 경기도 양주의 노원에 있던 그의 묘소를 현재의 위치(명암마을 주실산 선영)로 이장(移葬)하고, 1973년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다. 비문은 후손인 연규복(延圭復)이 짓고 썼다.33)
4) 양윤원(楊潤遠)의 묘(墓)와 묘갈(墓碣)
양윤원(楊潤遠)의 묘(墓)와 묘갈(墓碣)는 증평읍 증천동 산 3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양윤원(楊潤遠 : 1445~1506)의 묘갈(墓碣)은 中宗 3년(1508)에 그의 묘소 앞에 세웠으며 비문은 중 충제(盅齊) 최숙생(催淑生)이 짓고 글씨는 박세영(朴世榮)이 썼다.34)
5) 신경행(辛景行) 묘(墓)및 신도비(神道碑)
신경행(辛景行 : 1547~1623)의 묘(墓)와 신도비(神道碑)는 증평읍 남차1리 숯고개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신경행의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조선 선조 6년(157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선조 10년(1577) 별시(別試)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이 공으로 선조 26년(1593) 한산군수(韓山郡守)가 됐다.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學)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珹君)에 봉해졌다. 공주목사(公州牧使)ㆍ서흥부사(瑞興府使)ㆍ장흥부사(長興府使)ㆍ병조참의(兵曹參議)ㆍ동부승지(同副承旨 : 승정원의 정3품)ㆍ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선조 41년(1608)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종2품 무관)에 이르렀다. 이후 청안에 낙향해 조은정(釣隱亭)과 운수정(雲水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다가 77세로 숨졌다. 예조판서(禮曹判書 : 정2품)에 추증(追贈)됐다.35)
묘의 옆으로는 1992년 영산(靈山) 신씨(辛氏) 후손들이 청연사(淸然祠)를 지어 봉향하고 있다.36)
6) 연충수(延忠秀) 묘(墓)및 묘갈(墓碣)
안음공(安陰公) 연충수(延忠秀 : 1557~1621)의 묘(墓)와 묘갈(墓碣)은 도안면 송정2리(통미)에서 오른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0.7㎞ 올라가면 왼쪽으로 법곡(法谷)이라 불리는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연충수의 묘(墓)와 바로 아래 있는 묘갈(墓碣)은 비각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묘갈(墓碣)은 영조 31년(1755)에 대사헌(大司憲) 겸 세자 찬선(贊善)을 지낸 민우수(閔遇洙 : 1694~1756)가 짓고, 정산현감(定山縣監) 채복휴(蔡復休)가 쓴 것을 순조 34년(1834)에 세운 것이다.
연충수의 자는 성백(誠伯)이고 곡산인(谷山人)이다. 연정원(延定遠)의 장자로 태어나 자라서는 중부(仲父) 연정우(延定宇)의 계후(繼后)로 나아가니 성효(誠孝)가 두텁고 지극하였다. 한강(寒崗) 정구(鄭逑) 선생의 문하에 드나들며 경전을 강습하고 과거보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니 한 때 사우(士友)가 모두 공경했다. 그의 나이 36세인 1592년 「壬辰」에 왜적이 교향인 청안을 침범하니 대의(大義)를 떨치어 고향인 청안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찔렀다. 그 이듬해인 1593년 예빈사(禮賓寺)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내첨사(內瞻寺) 주부(主簿)를 거쳐 중림도(重林道) 찰방(察訪)에 제수 되었다. 1603년(47세) 안음현감이 되어 선정을 폈고, 얼마 아니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두문(杜門) 강학(講學)하다가 광해군 13년(1621)에 65세로 생을 마감하니 사림과 향인(鄕人)들이 모두 탄식하였다고 한다.37)
7) 김치(金緻)의 묘(墓)와 묘갈(墓碣)
김치(金緻)의 묘(墓)와 묘갈(墓碣)는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8-1에 위치하고 있다.
안흥군(安興君) 남봉(南峰) 김치(金緻 : 1577~1625)의 묘갈은 현종 15년(1674) 증평읍 율리(曾坪邑 栗里)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아들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사위인 최선(崔渲)이 썼다.
김치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峯), 심곡(深谷),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대사간,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파직됐다. 인조반정 후에 대북(大北)으로 몰려 귀양을 갔다가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묘소는 증평읍 율리에 있다.38)
8) 김득신(金得臣)의 묘(墓)와 묘갈(墓碣)
김득신(金得臣)의 묘(墓)와 묘갈(墓碣)는 증평읍 율리 산8-1에 부친 김치의 묘소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증평군 햔토문화유적 제6호(2004. 4. 30)로 지정됐다.
안풍군(安豊君)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 1604~168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김치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을 지내고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에 습봉(襲封)됐고,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그의 묘갈(墓碣)은 숙종(肅宗) 14년(1688) 증평읍 율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이 짓고 글씨는 9촌 조카인 김봉지(金鳳至)가 썼다.39)
Ⅳ. 결 론
우리 증평군의 면적은 81.83㎢로 아주 적은 지역이지만 자랑 할만한 문화유적들이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에서부터 성행했던 유교문화유적들도 현재 조사, 발굴된 것만 하여도 서원, 영당(3), 시묘(3), 효자각(3), 효열각(2), 열녀각(1), 효비각(2), 명묘 와 묘비(8)들이 있으며 아직 미처 조사, 발굴해야 할 유적들도 몇 곳이 더 있다.
그러나 문화유적에 대한 주민적 정서 향상이 요구되며, 행정가들의 문화적 마인드가 부족으로 옛 조상들의 남겨 논 문화유산을 보존관리를 통한 자기 고장을 자랑하고 지역민의 자긍심을 고양함으로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작금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누구나 묘지문화의 과장으로 명묘와 묘비에 대한 문화적 가치가 퇴색되어짐이 아쉽다.
* 증평향토문화연구회장
1) 忠淸道龜巖書院, 列邑院宇事蹟
2)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22~124쪽.
3)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37~138쪽.
4)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10~111쪽.
5)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22쪽.
6)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77쪽.
7)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38~139쪽.
8)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21~922쪽.
9)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76쪽.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25쪽.
11)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38~139쪽.
12) 谷山延氏世譜 金塘書院記․靖厚公影堂記.
13) 淸安郡邑誌 院齋.
14)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20~921쪽.
15)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75~76쪽.
16)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21~122쪽.
17)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0~141쪽.
18)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槐山郡誌에는 순조 13년(1813)으로 오기되어 있으며, 이 시기는 예조(禮曹)에 보고한 시기 이다.
19)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13~914쪽.
2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68~69쪽.
21)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1쪽.
22)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51쪽.
23)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32~933쪽.
10) 谷山延氏世譜 敎官公行狀.
10)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33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89쪽.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212~213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7쪽.
10) 谷山延氏世譜 敎官公行狀.
24) 三綱錄
10)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34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0쪽.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29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8쪽.
25) 輿地圖書 忠淸道 淸安懸 人物.
10) 谷山延氏世譜 孝烈旌閭記.
10)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37~938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2~93쪽.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28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9쪽.
26)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42~943쪽.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6~97쪽.
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30쪽.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50쪽.
27)『三綱錄』/ 괴산군, 1990, 괴산군지』934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0쪽.
10) 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29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8쪽.
28)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36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7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50쪽.
29)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36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7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50쪽.
30) 괴산군, 1990, 槐山郡誌, 35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91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8쪽.
31)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69~970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113쪽.
10) 증평문화원, 2003, 曾坪文化院 十年史, 289~290쪽.
10)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24~126쪽.
32) 谷山延氏世譜靖厚公行狀. 靖厚公表陰記墓.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33쪽, 158쪽, 214쪽.
33)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75~976쪽.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214쪽.
34)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83쪽.
35)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70~971쪽.
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槐山郡文化遺蹟, 114쪽.
36) 증평향토문화연구회, 2003, 증평문화연구회십년사, 141~142쪽.
37) 谷山延氏世譜 安陰公 墓碣銘.
10) 충북학연구소․도안면지발간위원회, 2001, 道安面誌, 134쪽, 160쪽.
38)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85~986쪽.
39) 괴산군, 1990, 槐山郡誌, 987~9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