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황금 닭 오성이
정유년 닭띠 해 벽두를 지내면서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의 모습은 아직도 덜 여문 청년의 얼굴과 신체로 뿌옇게 투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엊그제 같지만 30여년이 지난 아득한 기억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적장애와 부자유한 신체로 성장이 멈춰 스물이 넘었어도 동네사람들이 ‘꼬마’로 부르던 애늙은이 소년이었다. 오성이…. 그 인물의 이름이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남들과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웅크린 자세와 가끔씩 내뱉는 어눌한 말투, 남루한 복장에 잘 씻지 않아 꺼칠한 오성이의 모습은 누구라도 살갑게 다가가지 않을 만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에 의하면 천애고아라고 하며 어느 노부부의 집에서 겨우 밥술이나 건사하며 지내는데, 나와 또래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귀띔도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 골목 안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점포 앞에는 기다란 목제 의자를 놓아 나의 친구들이 놀러와 늘 어울리곤 했다. 가게에 있는 술이라도 의자 위에 벌려놓으면, 동네친구들이 몰려와 왁자지껄한 주석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 술자리너머 골목 귀퉁이에 오성이의 모습이 눈에 띄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친구들이 모이면 늘 주변을 맴돌았다. 그 모습이 가엾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경멸스럽기도 해서 친구들 중에는 그의 행동을 흉내 내며 놀리고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낮술에 얼큰해진 한 친구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오성이를 쫓아내려고 하는 걸 만류하고는, 오성이를 가까이 불러 막걸리 한잔을 딸아 주었다. 그는 조심스레 술을 들이키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 후부터는 늘 골목 안 술자리 주변에 오성이가 있었어도 모두들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늘 시선을 피하는 그가 내게는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오성아! 밥 먹었어?” 물으면, 고개를 들며 “어어…. 무, 묵었어. 형…”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나이가 나보다 두세 살 위일 것이라는 동네사람들의 귀띔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의 형이란 호칭을 받아들였다. 어쩌다 떡이라도 먹게 되거나 주전부리라도 생겼을 때 그가 있으면 한쪽씩 나눠줬는데, 묘하게도 받아들며 쳐다보는 그의 깊은 눈빛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청빈(淸貧)한 눈길이 저럴까…. 아무튼 그의 눈빛은 비굴하지 않았다.
동네 비탈길 언덕 목련나무가 있는 조그만 집에 학처럼 고고한 노인이 계셨다. 아마도 동네에서는 최고령의 할아버지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인가 오성이를 보더니 탄식처럼 뇌까렸다. “허어, 이 아이에게 금계랍을 먹여주고 싶네. 그려…. 쯧쯧” . 궁금증이 일어 노인께 금계랍이 무엇인지 여쭤보았다. 노인의 짧은 설명과 오성이에 대한 노인의 소회는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날 이후 금계랍이란 단어는 기이하게도 ‘황금 닭과 오성이’의 형상 이미지로 머릿속에 각인되어졌다.
금계랍(金鷄蠟)은 동네 노인장이 말씀하시던 당시로부터도 150년 전인 1820년대에 독일에서 키니네(quinine)를 주원료로 개발된 말라리아 치료제였다. 말라리아는 모기로부터 감염되는데, 그 모기를 잘 잡아먹는 것이 닭이었다. 그래서 당시 무역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에서는 금빛 나는 닭을 상징물로 상표에 도안하여 금계랍을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며 판매했다. 아마도 노인께서는 소싯적 기억으로 특효약이었던 그 약을 떠올리며, 오성이의 장애를 치료해 주었으면 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노인장의 말씀 이후로 나는 오성이에게 “어이! 금계랍, 밥은 먹었나?” 하며 농담조로 부르곤 했는데, 그의 반응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꽤 재미있어하는 내색이었다. 어쩌면 소외되었던 그의 삶에 별로 악의가 배어있지 않은 별명을 얻으며 기꺼워 하는 듯도 했다. 어느 날인가 내가 입던 노란 셔츠가 있어 그에게 주었다. 옷을 입혀보니 작달막한 체구인 그의 무릎까지 셔츠가 내려와 허리춤에 갈무리해주며 폭소를 터뜨렸다. 진노랑 셔츠에 싸인 모습이 영락없는 금계랍이었다.
군복무를 끝내고 귀가해보니 오성이는 동네에서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수소문한 결과, 그가 의탁하여 신세지던 노인부부가 타계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그의 처지를 안 지역출신 정치인의 배려로 인천 남동구의 어느 지역 정당(政黨) 사무실에서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하는 인부로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찌되었든 밥술은 건사하게 되었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어 그 후로는 오성이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빈둥대며 소일하던 나는 군제대후 1년 만에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 경기도 시흥군에 임용되었다. 초임 면서기 생활을 거쳐 이곳저곳으로 전보하여 근무하다가 1986년에 군포읍사무소에 근무할 때였다. 사무실 창문으로 보이는 복도에 작고 볼품없지만 나이는 들어 보이는 사람이 어슬렁거렸다. 무심히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반가운 마음에 주위를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여어! 황금 닭! 아니, 금계랍! 어떻게 여길 왔어?”
아직도 인천에서 살고 있다면 그로서는 먼 길을 왔을 터였다. 전철을 타고 구로역에서 수원행으로 환승하여 올 정도로 기민하지 못한 오성이로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는 희미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다. 원래 말이 없고 심한 말더듬으로 의사표현이 원활치 못한 그다. 더구나 굽은 어깨와 원숭이를 닮은 얼굴모습에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않으려했다. 나또한 그의 생각을 눈빛으로 읽고는 했다. 어떻게 그가 나를 수소문하여 찾아왔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더해, 왠지 모르게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아린 애수(哀愁)에 젖으며 역전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옷차림과 용모는 그런대로 멀끔한 것이 소문대로 어느 후원인의 보살핌이 있는 듯 했다. 자장면에 탕수육을 한 접시 시켜놓고 그간의 이런저런 의문을 물어보았으나, 그의 심한 말더듬과 언어기피 현상의 연속으로 질문을 그만 두었다. 그저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의 까만 눈망울이 기쁨에 일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오성아…. 혹시 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냐?” 물어보니, 세차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도하면서 그를 배웅하러 군포역 개찰구로 들어갔다. 인천까지 차표를 끊어주면서 덤으로 용돈을 주려 지갑을 여는데, 그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우, 우우…. 되…었어. 형” 하면서 고개를 번쩍 들고 바라보았는데,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강한 결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주춤거리는 순간, 그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전해 줬다.
손바닥에는 꼬깃꼬깃 접혀있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있었다. 사양하려고 하다가 그의 눈을 다시 보는 순간, 얼어붙듯이 잠시 서있었다.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갈망어린 눈빛이 나를 강하게 옥죄고 있었다. 다시 그의 손에 쥐어주려다가 흔쾌히 주머니에 넣으며 활짝 웃었다. 그의 곤궁한 처지를 떠올리기보다는, 지난 날 작은 온정으로나마 그를 이해해 주었던 나에 대한 그의 격려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마도 그때가 ‘황금 닭 오성이’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나의 본가가 있는 인천으로 전근하게 되면 또 상봉할 수 있으려니 했으나, 결국 소식이 서로 끊긴 채 망각의 세월만 흘러갔다. 훗날 인천에서 공직생활을 이어가며 그가 얼핏 떠오르면 찾으려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결국 그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정유년 닭띠 해를 지내면서 문득 떠오른 황금 닭으로 기억되어진, 오성이를 떠올리면서 깊은 감회에 젖어본다. 창밖을 내다보니 비둘기 한 쌍이 구구대며 날아간다. 이곳 인천은 정초부터 눈이 희귀한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 어서 눈이나 펄펄 날려라. 서설(瑞雪)이라도 한주먹 뭉쳐서 시린 창공에 던져보고 싶다. 저곳 허공에서 깊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금계랍 오성이의 가슴에 순백의 추억을 터뜨려주고 싶다.
[2017.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