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채 집이었네
추창호
판소리 한 대목을 꺾어 넘는 물소리
자진모리장단을 치듯 추임새 넣는 바람소리
벗 삼아 별장 한 채가 날아갈 듯 서 있네
하루를 쪼개어가며 비지땀 흘렸어도
잔고 없는 내 몸은 물 먹은 솜뭉치
언제쯤 저런 집 한 채 기쁨으로 앉혀볼까
오늘 같은 어제를 새삼 다시 꺼내들면
아아 나는 한 채 경건한 집이었네
천지간 내가 아니면 짓지 못할 집 한 채
△추창호: 밀양 출생. 1996년 '시조와 비평' 신인상.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 '풀꽃 마을' 울산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울산문학상 수상, 울산문인협회장, 울산시조시인협회장 역임.
'아아 나는 한 채 경건한 집이었네' 책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멈추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가다듬어도 숙연해지고 아려오는 무언가가 날 붙들고 있다. 무엇일까. '아아'라는 감탄사가 이끌어가는 가락일까, 아니면 집이다가 아닌 '집이었네'라는 과거형일까. 이런 분석이 뭐 대수랴. 이미 그 문장이 내 몸 속에서 노래로 흐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오늘도 '천지간 내가 아니면 짓지 못할 집 한 채'씩 짓고 있는 중이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는 그런. 오래 다독여서 아주 단단하지만 허허롭기 그지없는 집을 이 시각에도 한 채씩을 짓고 있다. 그 집으로 비가 다녀갈 때도 있으리, 삶이 자주 비에 젖듯이. 오래 축축하게 스며들어 있다가 천천히 마르곤 했을 것이다.
시조 첫 수에서 시인은 날아갈 듯 아름답게 서 있는 멋진 별장 한 채를 바라보고 있다. 그 별장은 물소리가 판소리 한 대목으로 꺾어 넘고 바람이 자진모리장단으로 불고 있다. 무릉도원이 떠올려지는 아름답고 흥겨운 별세계가 아닌가. 누구나 꿈꾸는 행복의 대명사로 그려진다. 하지만 둘째 수에서 보면 하루를 쪼개가며 비지땀 흘려도 솜뭉치가 된 몸일 뿐 '저런 집 한 채'를 기쁨으로 앉히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꿈같은 세상일 뿐이다.
셋째 수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이 바로 집 한 채였음을 깨닫는다. 오늘 같은 어제를 새삼 다시 꺼내들고 서 보니 스스로의 삶이 경건한 집 한 채 짓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은 '어제'를 다시 꺼내보고서야 오는 것, 그것도 '오늘 같은 어제'를. 지나간 삶을 반추해보는 일을 이리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다.
사방 천지를 둘러봐도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외롭고 쓸쓸한 집 한 채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 그래서 그 집은 시인의 맑은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 시(조)는 추창호 시인의 세 번째 시조집 '풀꽃 마을'에 실려 있다. 그는 표제 시 '풀꽃 마을'을 통해 한 번쯤 뿌리 내려서 살고 싶은 마을이 있다고 했다. 습하고 외진 터도 은총처럼 축복처럼 몸 낮춰 모여 사는 풀꽃들의 마을. 그 마을에 나도 '초대 받지 않아도 가'보고 싶어진다. 쇠비름 금강아지풀 애기똥풀 깽깽이풀, 앞을 다투어 피어날 풀꽃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저마다 켜든 꽃불 타올라서 절창이 되는' 그런 풀꽃 마을에 가서 경건한 집 한 채로 오래 머물고 싶다. 이 봄날. 김감우 시인
출처 : 울산신문(https://www.ulsanpress.net)